북유럽의 역사 | |||
북대서양 | 발트 3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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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역사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북부 | 남부 | 사레마 | |
고대 | 추디에스티인 | |||
중세 | 에스토니아 공국 |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 외젤비엑 주교령 | |
테라 마리아나 | ||||
근세 | 스웨덴 제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 |
스웨덴 제국 | ||||
근대 | 러시아 제국 | |||
현대 |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 |||
소련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 ||||
나치 독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 ||||
소련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 ||||
에스토니아 제2공화국 |
1. 개요
ESTONIAN WAR AND OCCUPATION HISTORY / EESTI SOJA JA OKUPATSIOONI AJALUGU pt 1 (Eestikeeles) |
1939년 수도 탈린의 모습 |
에스토니아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고대
에스토니아는 상고 적부터 우랄어족 핀우그르어파(Finno-Ugric)에 속한 원시 에스토니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추디에스티인들의 땅이었다. '추디'는 루스인들이 북서부에 살던 우랄계 민족들을 불렀던 통칭이며, 에스티인은 중세 에스토니아인을 일컫는 말이다. 늪지대로 고립된 지역에 살던 특성상 서기 1세기 무렵에야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은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작은 부족 국가들이 호박을 수출하며 번영을 누렸다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게르만족 전사들에게 나무 몽둥이만 들고 싸우다가 패배 후 정복당했다는 짤막한 기록을 남겼다. 덴마크 바이킹들이 이 지역을 주기적으로 약탈하면서 종종 잠시 지배한 적도 있었다.1217년 9월 21일까지 고대의 에스토니아
3. 중세
중세 에스토니아는 오늘날의 탈린을 중심으로 한 북부 해안지대와 오늘날의 타르투를 중심으로 한 남부의 역사가 다르게 돌아갔다. 오늘날 에스토니아의 남부는 리보니아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Fratres militiae Christi Livoniae)와 1227년 정복되어, 토속 신앙을 믿고 있던 추디-에스티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에스티인들은 농노가 되었으며, 십자군의 통치지역 아니랄까봐 투르코폴 비슷하게 리보니아 기사단의 화살받이로(...) 징집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영향권 안에 있던 유리예프가 붕괴된 후 추디-에스티인들의 상당수가 동쪽의 프스코프로 이주하였다. 16세기까지 토속 신앙을 믿던 이들은 루스 차르국 차르 이반 4세의 이교 척결 정책으로 인해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이후 러시아인과 동화되었다.추디-에스티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라틴어나 교회 슬라브어는커녕 독일어나 러시아어도 제대로 읽고 쓸 수 없었고 중세에는 에스토니아어로 번역된 성경도 없었다. 중세 에스토니아인들은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기독교도로의 변화는 표면적인 것에 그쳤으며 그동안 보전해왔던 토속신앙에서 비롯된 의식이나 관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219년 덴마크군을 이끌고 에스토니아 북부를 침공한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는 탈린을 중심으로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을 세웠다.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의 역사는 에스토니아 원주민들의 저항은 물론 종종 같은 기독교인이라면서 친한 척 하던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종종 배신을 때리고 쳐들어오는 통에 바람 잔잔할 날이 별로 없었다. 1346년 발데마르 4세가 재정난을 타파[1]하고자 튜튼 기사단한테 돈 받고 팔면서 한동안은 에스토니아 전역이 북방 십자군의 영토였던 적도 있었다.
4. 근세
1573년~1598년, 리보니아 연맹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과 리가 주교령과 쿠를란트 주교령은 이른바 리보니아 연맹으로 묶여있었으나,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발트 독일인이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뉘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되면서 연맹의 상황이 콩가루 집안마냥 난잡해졌다. 어떨 때는 이반 4세에 붙었다 어떤 때는 덴마크에 도시를 바쳤다가 어떤 때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충성했다가 하는 상황에서, 발트해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이반 4세의 루스 차르국의 공격으로 모래성 같던 리보니아 연맹은 무너졌고 그 자리에는 루스 차르국의 괴뢰국인 리보니아 왕국이 들어섰다. 하지만 루스 차르국의 발트해 제패 야욕에 반발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덴마크와 스웨덴이 리보니아의 상황에 개입하면서 리보니아 전쟁이 터졌다. 1561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는 스웨덴계 핀란드인 제독 클라스 크리스터손 호른(Klas Kristersson Horn 1517~1566)을 탈린으로 파견하여 기존 발트 독일인들의 관습을 존중하는 대가로 항복을 받아냈고, 파이데(Paide), 라크베레(Rakvere)를 위시한 에스토니아 북부가 스웨덴 지배를 받게 되었다. 1583년 루스 차르국은 리보니아를 최종적으로 포기하였고, 지금의 에스토니아 영토는 3국에게 분할되어 북부는 스웨덴, 남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사레마 섬은 덴마크 영토가 되었다.
16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한 리보니아 공국
에스토니아 주변의 강대국들은 추디-에스트인 농노에게는 흥미가 없었고, 이들이 탐내는 것은 타르투와 탈린 같은 부유한 무역 도시들이었다.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는 나라들이 매번 바뀌었지만, “독일인 지주 - 독일인 상공업자 - 에스토니아인 농노”라는 사회 구조는 쉽게 개혁되지 못했다.
1600년부터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터파를 믿는 스웨덴이 칼 9세와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왕위 계승 분쟁의 연장선상에서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전쟁 초에는 폴란드의 명장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가 이끄는 윙드 후사르 3천명에게 스웨덴군이 계속 패배하며 오히려 먼저 쳐들어간 스웨덴이 에스토니아 영토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여러차례 패전의 원인은 스웨덴 보병의 훈련도와 규율 문제였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를 경험삼아 오늘날과 비슷한 효율적인 부사관 제도를 확립하여 보병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오스만 제국과 총력전을 벌이는 사이 결국 스웨덴이 승리하여 에스토니아 남부도 1629년부터 약 100년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마무리짓고 그 다음 해에 실전 경험과 강화된 보병 전력을 바탕으로 30년 전쟁에 뛰어들어 신흥 군사 강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고 덴마크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스웨덴이 1645년 사레마 섬을 획득하면서 에스토니아 전체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95년에서 1697년에는 에스토니아에서 대기근이 발생, 전체 에스토니아인의 20%가 아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대략 8만에서 10만이 목숨을 잃었다.
5. 근대
대북방전쟁으로 1721년 러시아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러시아 치하에서 발트 3현[2]이라 일컬어진 이 지방에서는 독일인 지주들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농노의 권리가 조금씩 신장되었으며 도르파트 대학(현재의 타르투 대학)이 흥성하여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모두 같은 발트-핀 어족에다가, 스웨덴의 지배 이후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두 민족에게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핀인들은 스웨덴인 농부들과 교류하며 평등한 관계[3]였던데 반해 에스토니아인들은 한 마디로 발트 독일인의 노예나 다름 없었다.[4]
19세기 후반에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해로 통하는 러시아의 문호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이었기 때문에 많은 개발이 이루어지고, 러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1860년대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에스토니아인들도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 도시로 이동하며, 에스토니아 민족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6. 현대
1차 대전을 맞게 되고 1917년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대신 독일군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당초에는 동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이 차지할 계획이었다. 발트해 지역은 예로부터 독일계가 많은 지역이기도 했으므로 독일의 영토에 편입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독일은 라트비아와 묶어 발트 연합 공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그러나 독일이 곧바로 서부 전선에서 털려 패전국이 되고(…)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독립을 얻게 되었다.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이라는 에스토니아 역사상 최초의 민족 독립 국가가 수립되었다. 소련은 물론 붉은 군대를 통해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모두 얻으려 했으나 1차 세계대전의 혼란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로, 독립을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이 순간을 그토록 염원하던 민족 독립의 순간이자 천 년에 걸쳐 이뤄진 발트 독일인들의 경제적 지배를 종식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독립 전쟁 과정에서 많은 발트 독일인들이 추방당했다.이후 1934년에 초대 총리였던 콘스탄틴 패츠(Konstantin Päts)가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 정권이 들어섰다가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나치 독일이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묵인했고, 이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6월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침공했다. 동년 7월 소련의 통제 아래에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선거가 치러져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어 그해 8월 소련에 합병된다.
곧 나치 독일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1년 후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독소전쟁 중 1941년 ~ 1944년까지 에스토니아는 독일이 지배했다가 다시 소련에 재점령되었고, 이후에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영토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 소련 내에서는 15개 공화국 중에 영토는 13위, 인구는 15위. 원래 에스토니아 민족 자체가 100만이 안 된다.[5]
1991년까지는 소련의 치하에 있었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 에스토니아에 살던 독일계들이 추방당하고 러시아인들이 들어왔다. 현재도 주민의 28%은 러시아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과 독일 양측에 점령하에 있던 적이 있다보니 양측 군대에 각기 징병되어 같은 에스토니아인인데도 한쪽은 독일의 무장친위대였고 한쪽은 소련의 붉은 군단으로서 서로 전선에서 부딪혀 싸우는 비극적인 상황도 있었다. 이를 잘 드러낸 영화로 에스토니아에서 만들어진 2015년작 전쟁 영화 1944가 있다.
나치 정권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했을 때 22개의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그 중에서 북동부의 이다비루 주의 바이바라(Vaivara)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바이바라 강제 수용소가 가장 규모가 컸으며, 하리우 주의 클루가(Klooga)에 클루가 강제 수용소를 분소로 세웠는데 무차별적인 살인, 전염병, 노동 환경으로 인해서 1,800명에서 2,000명의 수감자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수감자는 소련군이 진격하기 전에 이미 점령했던 폴란드의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39년~2001년, 에스토니아의 국경
1988년 발트해 3국 중에서 처음으로 공산당 이외의 정치 단체인 인민전선이 결성되었다. 인민전선은 1990년 2월 최고 회의 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1991년 3월 3일 국민 투표에서 77.8%가 독립을 지지하였다. 1991년 8월 쿠데타를 계기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9월 구소련이 이를 승인하였다. 결국 1991년 8월 20일 독립을 되찾았다. 8월 20일은 에스토니아의 국경일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노래 혁명'이 유명하다. 시작은 1988년 5월 타르투에서 열린 인기 가요 축제에서 어떤 가수가 에스토니아가 독립국이던 시절의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탈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독립 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20일, 에스토니아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에 집결했는데, 수도 탈린에 전체 에스토니아 인구의 1/5 이상인 30만 명 가까운 수가 모였다. 이후 동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든 2백여만 명이 넘는 군중이 빌뉴스-탈린 사이의 가도를 점거한 채 손을 맞잡고 노래했는데, 그 행렬은 600km 이상 이어졌다.[6] 이는 1939년 8월 23일에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발트 3국이 소련에 편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맞아 열린 시위였고 이후 발트 3국은 50여 년 만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소련은 독립 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하자 이를 무력 진압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타르투에 있던 공군 기지 사령관이자 에스토니아 주둔 소련군내에서 강력하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조하르 두다예프가 에스토니아의 독립 운동에 호감을 표시하면서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무력 진압 시도는 실패한다. 무력진압을 하려면 두다예프의 묵인 이상을 얻어내야할 필요가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두다예프가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마당에 그게 될리가... 결국 1990년 타르투 공군 기지는 철수해야 했고, 조하르 두다예프는 고향인 체첸으로 귀환. 이츠케리아 체첸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독립 운동을 벌이다 1996년 4월 21일 러시아군의 미사일에 맞아 전사했다. 그가 사망한 후 타르투에는 조하르 두다예프 거리가 생겼고, 그의 집무실이 보존되어 있다.
여하튼 독립 직후에는 러시아로부터 자원을 헐값에 수입할 수 없게 되고 무역도 크게 줄면서 경제난[7]으로 한동안 고생하는 듯 싶었다가 1990년대 중반에 바닥을 찍고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구 소련권에서 가장 먼저 침체에서 벗어나서 그럭저럭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후 2004년에 나토(NATO)와 유럽연합에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1년에는 유로를 도입했다.
7. 관련 항목
[1] 덴마크는 발데마르 4세의 백부 에리크 6세의 환장할 통치로 파산한 상황이었다.[2] 지금의 발트 3국과 다르다. 에스토니아(Эстля́ндская губе́рнія), 리보니아(Лифля́ндская губе́рнія), 쿠를란트 현(Курля́ндская губерния).[3] 당시 핀란드는 스웨덴의 근대의 식민지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일부로 간주되었다. 핀란드의 과거 행정구역은 모두 스웨덴이 만든 행정구역에서 출발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4]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에서는 인구의 5% 정도만이 소작농이었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형태의 자영농 혹은 화전민이었다.[5] 참고로 20세기 초반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에스토니아 내 에스토니아인들의 인구수는 거의 변함이 없다. 그만큼 출산율이 낮았거나 많은 사람들이 핀란드로 빠져나갔다는 얘기다.[6] 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큰 영감을 줬는데, 당시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도 서울역에서 판문점까지 통일을 염원하는 '인간띠' 행사를 펼치기도 했다.[7] 사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핀란드도 소련 붕괴로 인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힘들었던 것도 있었다. 당시 핀란드의 경제도 에스토니아와 비슷하게 소련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었는데, 소련이 붕괴되고 새로 탄생한 독립국가연합 회원국들이 잇따라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에 핀란드의 경제도 같이 침체에 빠졌고 그 때문에 에스토니아에 지원을 많이 주지는 못했다. 이후 핀란드의 경제가 나아진 건 노키아가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하면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