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교회의 일파로, 17세기 중엽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에 반발하여 분리되었다.
2. 역사
17세기 중엽 니콘 총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지나친 현지화와 '변형'을 개혁하려고 했는데 성경을 재번역해 오류를 수정하고 그리스 정교회처럼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방식을 도입했으며 교회 슬라브어로 진행하는 예배를 당대 러시아어로 진행하도록 바꾸고 여러 분야에서 그리스 정교회와 일치를 추구했다. 1654년의 교회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니콘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와 교회 예식을 그리스와 러시아의 전통에 일치시키자고 제안했다. 니콘의 개혁은 니콘 개인의 지나친 야심과 차르와의 불화로 인해 좌초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니콘은 내쳤어도 그의 개혁은 존중한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개혁 찬성파의 지지 덕분에 지속될 수 있었다.그러나 니콘의 개혁에 반발한 세력도 적지 않았다. 반대파들은 니콘의 개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이 무너진다고 판단하여 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이들은 소위 '구교도'라고 불렸으며 고의식파의 기원이 되었다.
고의식파를 추종한 이유로 체포되는 귀족 여성을 그린 그림 《귀족 부인 모로조바》[1]
황제와 개혁파들은 이들을 모두 파문하고 수좌대주교 아바쿰 페트로비치(Аввакум Петрович) 등을 화형하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계속 지켜나갔다. 러시아 정부도 완전히 구교도들을 '개종'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갖가지 차별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했으나 구교도들은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거나 정부의 통치력이 약한 지방으로 이주하는 식으로 대응하여 생존했다. 구교도들이 이주하자 지방 농민들과 카자크들 사이에서 구교도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져서 이들을 뿌리뽑기 불가능해졌을 뿐더러 도리어 인구의 상당수가 구교도가 되어 버렸다. 서방 교회가 구교와 신교로 갈린 것처럼 러시아 정교회도 니콘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전통의식파(구교도)'와 개혁파(니콘파)'로 나뉘어 버렸다.
다만 전통의식파들은 정부와 개혁파의 탄압과 세력 이주, 교회의 분산으로 인해 일체된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분파로 쪼개졌는데 대표적으로 성직자를 인정하는 파(Поповцы)와 인정하지 않는 파(Безпоповцы)로 분열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단 종파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거세파'로 남자라면 생식기, 여자라면 유방을 원죄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인데 19세기 초에 러시아 제국 정부에게 발각당했으며 발각당하자마자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마니교' 이단, '보고밀파' 이단으로 간주받고 크게 탄압받았다.
1917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교회의 수입이 정부의 규제로 막혀 버리고 볼셰비키 민병대의 공격에 교회가 불타 버리기까지 하자 일부 신자들은 탄압을 피해 아메리카 등으로 이주하기도 하였으며 종교 탄압을 피해 42년간 시베리아 오지에 은둔해 살았던 리코프 가족의 사례도 있다.
3. 현황
신자 수는 러시아 제국 말기인 1905년에는 220만 4596명(1.75%)으로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약 50만 명으로 대부분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구 소련 지역에 살고 루마니아에도 다뉴브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리포반 러시아인'으로서 2만여 명이 거주한다.4. 관련 문서
[1]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그림. 그림에서 체포되는 귀족 여성 페오도시아 모로조바가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고 십자가를 그리는데 이들이 세 손가락 대신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행위 자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