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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colbgcolor=#fffacd> 러시아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сси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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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 ||
출생 | 1899년 6월 26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 |||
사망 | 1918년 7월 17일 (향년 19세) |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하우스 | |||
아버지 | 니콜라이 2세 | ||
어머니 | 헤센의 알릭스 공녀 | ||
형제 | 언니 올가, 타티야나, 동생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서명 | 파일:Signature_Maria.svg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시성 정보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acd><colcolor=#000> 시성 |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 2000년: 러시아 정교회 | |
축일 | 그레고리력: 7월 17일 율리우스력: 7월 4일 | ||
호칭 | 해외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순교자[1]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수난자[2] | ||
성인 추대 교파 | 러시아 정교회 해외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안티오키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 }}}}}}}}}}}} |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녀.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셋째이자 3녀이다.2. 생애
2.1. 탄생
마리야가 태어났을 당시 상황이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기쁜 날, 하느님께서 셋째 딸 마리야를 보내주셨다. 마리야는 12시 10분에 무사히 태어났다. 알릭스[3]는 매우 힘들었는지, 신체적 고통으로 밤에서 아침 무렵까지 자고 있다. 하느님, 고통을 빨리 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야의 외모는 파랗고 큰 눈동자와 밝은 밤 색깔 머리색을 가졌고, 장밋빛 뺨과 더불어 키가 크고 튼튼했다고 한다. 때문에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4]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마리야는 종종 "마샤" 또는 "마쉬카"라고 불렸다.
2.2. 꿈 많은 셋째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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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1906년도 모습 |
마리야는 러시아식 미인으로 성장하고 가족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 니콜라이 2세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방에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밤마다 보며 울기도 했다.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를 닮아 건강하고 힘이 세 때때로 가정교사들을 번쩍 들어올리는 장난을 쳤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던 1917년 초 황녀 자매들은 홍역에 걸렸는데, 마리야는 가장 늦게 걸려 황실 군인들을 설득하려 외출하는 어머니를 따라가기도 했다.
무척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 마리야에겐 꿈이 있었다. 바로 '가정'을 이루는 것.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은 낭만적인 사랑과 연애 결혼을 꿈꾸며, 언제나 결혼과 가정에 대해 동경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모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연애결혼을 했고 그만큼 부부 금슬도 좋았기 때문.[5] 하지만 1918년 러시아 내전 당시 본인과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하면서 끝내 이루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1916년,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니콜라이 2세는 전선에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와 두 언니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다친 병사, 장교들을 치료했고,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는 어리기 때문에 옆에서 조수 역할을 했다. 마리야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곳에서 만난 장교와 친해져 아버지에게 가끔 그의 안부를 묻곤 했다.
2.3. OTMAA 5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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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OTMAA 5남매 |
자매들은 그런 마리야의 착한 성품을 무척 좋아했고, 네 자매는 서로 무척 친했다.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로 표현할 정도로, 거기다 두 언니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여동생 아나스타시야뿐만 아니라, 오 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부부는 자식들을 편애하지 않고 사랑했기에 오 남매 모두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2.4.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마리야는 예카테린부르크로 망명할 때 남매들 중 유일하게 부모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 황후의 생각으로는 올가는 기운이 없었고, 타티야나는 알렉세이를 돌봐야 했고, 아나스타시야는 아직 너무 어리고 혈우병 환자인 알렉세이는 다친 게 심해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의 문을 못 잠그게 하였으며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농담이랍시고 성희롱을 해 황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언니 타티야나가 충격을 받아 울면서 뛰쳐나가자, 마리야가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몰락한 비참한 순간이었음에도 마리야에게는 아직도 황녀로서의 위엄이 남아있었다.
마리야는 황제 일가 중에서 감금 생활에 가장 잘 적응했으며, 일가를 감시하던 경비병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마리야의 생일에 생일 케이크를 몰래 가져다 준 경비병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마리야와 결혼을 하거나 그녀를 감금지에서 구출하고 싶다고 부모에게 말한 경비병도 있었다. 이런 경비병들의 동요는 볼셰비키 측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볼셰비키는 감금지 경비병들을 대거 교체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2.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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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918년 7월 16일 밤 12시경, 유로프스키가 이파티예프 하우스의 문을 두드리고 지하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들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줄로만 알았으나, 지하실에서 유로프스키는 황제 일가에게 처형 사실을 통보한 후 볼셰비키 요원들과 함께 황제 일가에게 총을 난사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와 그 가족은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를 제외하고 전원 즉사했다. 마리야는 허벅지에 총을 맞고 총검에 찔렸지만 그녀의 옷 안에 있던 보석들 덕분에 죽지 않았고, 결국 볼셰비키 요원은 마리야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다.
그러나 뒤늦게 발견된 그녀의 두개골에는 총상이 없었다고 한다.[7] 그렇게 그녀를 포함한 일족 모두가 죽은 줄 알고 시신을 처리하던 중 기절해있던 마리야가 다시 깨어나서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격했다.[8]
총에 맞고 급사한 다른 가족과 달리 마리야는 죽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9] 당시 그녀의 나이는 만 19세였다.
다음날에는 마리야의 둘째 이모인 옐리자베타 대공비도 살해되었다.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둘째 언니로,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서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세르게이 대공[10]과 옐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였고,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편 여동생 아나스타시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생존설이 돌았고, 남동생 알렉세이 생존설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6. 사후
1991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되었으나, 당초 11구여야 할 시신이 9구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실종된 시신 2구가 아나스타시야 공주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인 줄 알았지만 곧 아나스타시야 공주가 아닌 마리야 공주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2007년 실종되었던 유골 2구가 추가적으로 발굴되었는데, DNA 검사를 통해 각각 마리야 공주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5년 부모님과 언니들 곁에 묻힐 예정이었으나 교회 쪽의 추가적인 DNA 검사 요구[11]로 인해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3. 가족관계
<rowcolor=#000> 1913년 가족사진 |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러시아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ссийская) |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 알렉산드르 3세 (Аляксандр III) | |
알렉산드르 2세 (Аляксандр III) | |||
헤센의 마리 공녀 (Prinzessin Marie von Hessen) |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Prinsesse Dagmar af Danmark)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zessin Louise von Hessen-Kassel) | |||
헤센의 알릭스 공녀 (Prinzessin Aliz von Hessen-Kassel) | |||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Ludwig IV., Großherzog von Hessen) | |||
헤센의 카를 공자 (Prinz Karl von Hessen und bei Rhein) | |||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zessin Elisabeth von Preußen) | |||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z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 |||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4. 여담
-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숙부 루이 마운트배튼이 마리야를 짝사랑했다고 한다. 루이 마운트배튼의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친언니었기에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종사촌 관계였다. 그 때문에 어릴 적의 루이 마운트배튼은 자기 이모의 시가인 러시아 제국에 종종 들르곤 했는데, 거기서 한 살 위의 이종사촌누나인 마리야에게 반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루이는 성장한 뒤에 마리야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마리야가 러시아 혁명 와중에 총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언론에서 해당 사실을 밝혔고,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세력인 IRA의 폭탄 테러로 희생당한 날에도 루이의 서재에는 마리야의 사진이 있었다고 한다.
- 종종 "마샤" 또는 "마쉬카"라고 불렸다.
- 부모 니콜라이 2세와 헤센의 알릭스 공녀 같은 연애 결혼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구며 가정을 이루는 꿈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모인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연애결혼을 했고 그만큼 부부 금슬도 좋았기 때문이다.
5. 대중매체
-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는 마리야가 러시아 혁명 당시 살아남아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코사카 키이치(더빙판 채길석)와 결혼하여 일본(더빙판에선 한국)으로 건너와 살았다고 하며, 마리야가 일찍 죽자 독일식 성을 짓고 그 곳에 작중에 나오는 중요한 보물인 파베르제의 달걀과 유해를 안치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달걀과 유해는 마리야의 증손녀 코사카 나츠미(더빙판 채나미)가 찾게 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 실제 역사와 달리 활달한 성격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루이 마운트배튼의 짝사랑 상대가 되지만 눈치를 채지 못하다 결혼한다.
[1] Царственные мученики[2] Царственными страстотерпцами[3] 알렉산드라 황후의 결혼 전 이름. 본래 그녀는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으로 이름은 '알릭스'였는데, 결혼하면서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로 개명했다.[4] 작은 언니 타티야나와 더불어 자매들 중 가장 예뻤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5] 그렇다고 알렉산드라 황후의 집안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황후의 아버지는 헤센의 대공 루트비히 4세이고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로, 엄연히 러시아의 황제와 혼인이 가능한 통치 가문의 공녀였다. 다만 마리야의 친할머니 마리야 황태후는 며느리감으로 프랑스 공주를 원했고, 황태후의 친정인 덴마크와 황후의 친정인 독일이 사이가 나쁜 것, 활달한 시어머니와 음울한 며느리의 성격 차이, 알렉산드라가 연달아 딸만 넷을 낳는 등의 이유로 고부관계가 냉랭했다고 한다.[6] 첫째 올가와 둘째 타티야나도 서로 가장 친했다.[7] 아마 두피에 상처가 나서 기절했고, 이로 인해 죽은 것으로 오인했던 것 같다.[8] 실제로 마리야의 두개골은 구타의 흔적으로 상당히 손상되어 있었다고 한다.[9] 죽은 원인을 밝히려면 시체를 부검해야 하는데 발견 당시에도 거의 100년이 지난 후였기에 부검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두개골에 총상의 흔적이 있지 않는 이상 어떻게 죽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총격 당시 확실히 죽지 않았었고 두개골 확인 결과 구타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만큼 마리야의 사인은 '구타' 였을 확률이 높다.[10] 니콜라이 2세의 작은아버지[11] DNA 재검사를 위해 이미 매장한 니콜라이 2세와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무덤을 다시 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