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1 03:34:51

로마노프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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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 문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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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2] 국장[3]
<colbgcolor=#FFCC33><colcolor=#000> 건립일 1613년 2월 21일
창립자 미하일 1세
現 가주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왕자
라이닝겐의 카를 에미히 왕자[4]
국가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
본가 로마노프 가문[5]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표트르 3세 이후)[6]
링크 파일:로마노프 가문 문장(흑백).svg[7]
1. 개요2. 명칭3. 역사
3.1. 로마노프 왕조(1613 ~ 1762)3.2.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1762 ~ 1918)
4. 역대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5. 현존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6. 여담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파일:romanov300yrs.jpg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역대 황제들과 당시 황제•황후•황태자의 초상화 (1913년)[8][]이 그림이 제작되고 고작 4년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한다. 멸망 이후이긴 하지만, 유사품으로 2013년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제작한 로마노프 왕조 400주년 기념 우표가 있다. 물론 이건 역대 차르들 뿐 아니라 황위 요구자들도 포함했다.]
파일:로마노프 왕조 전황제들.jpg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4년간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 쌍두수리가 상징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는 미하일 1세다.

1762년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이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이후의 정식 명칭은 독일어로는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Holstein-Gottorp-Romanov), 러시아어로는 골시테인고토르프로마노프(Гольштейн-Готторп-Романов) 왕조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전대에서 이어 로마노프 왕조라고 부르는 편이다.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본가는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왕조와 함께 올덴부르크 왕조의 주요 분가 중 하나다.

2. 명칭

가문의 시조는 독일 올덴부르크[10]의 귀족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로 14세기 무렵, 현재의 프로이센 지역에 위치한 튜튼 기사단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11] 그러나 이는 족보에 기록된 일종의 시조 전설로 그 시대에도 반쯤 허구로 취급받았으므로 곧이곧대로 믿을만한게 못된다.

로마노프 가문 출신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이반 뇌제의 황후가 되어 로마노프 가문은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었다. 이후 표도르 1세 사후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고, 1598년부터 15년간 이어진 혼란 시대로 돌입했다. 이 와중에 코빌라의 7대손인 미하일 1세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가 1613년 러시아의 여러 보야르(귀족)들의 추대로 러시아의 차르(Царь)로 추대받으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성씨의 약사는 다음과 같다.

안드레이 코빌라의 아들은 표도르 안드레이비치 코빌린(Фёдор Андрейвич Кобылин)으로, 그 아들인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은 코시킨으로 '코빌라'를 썼는데, 러시아식으로 성을 차차 바꿔나갔기 때문에 3대의 성이 제각각이다. 이반 대부터 코시킨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반의 아들인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Zahari Ivanovich Koshkin)이 무슨 큰 공을 세웠는지 자하리의 아들 유리 자하리예비치 코시킨(Juri Zaharievich Koshkin)이 그의 자녀들 대부터 성씨를 모두 '자하린코시킨(Zaharin-Koshkin)'으로 바꿔버렸다.

하여 유리의 아들인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Roman Jurievich Zaharin-Koshkin)은 가만히 있나 싶었더니 아들인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Nikita Romanovich Zaharin-Juriev)대부터는 아예 '코시킨'을 버리고 자하린유리예프(Zaharin-Juriev)로 성을 또 갈아치운다. 그리고 니키타 로마노비치의 아들인 표도르 때 드디어 로마노비치에서 따 온 로마노프로 성씨를 완전히 굳히고 다시 그 아들 미하일부터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 (Андрй Иванович Кобыла / Andrei Ivanovich Kobyla)
  •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코빌린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Кобылин / Fyodor Andreevich Kobylin)
  • 이반 표도로비치 코시킨 (Иван Фёдорович Кошкин / Ivan Fyodorovich Koshkin)
  •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 (Захарий Иванович Кошкин / Zakhary Ivanovich Koshkin)
  • 유리 자하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Юрий Заха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Yuri zakharyevich Zakharyin-Koshkin)
  •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 (Роман Юрьевич Захарьин-Ко́шкин / Roman Yurievich Zakharyin-Koshkin)
  •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 (Никита Романович Захарьин-Юрьев / Nikita Romanovich Zakharyin-Yuriev)
  • 표도르 니키티치 로마노프 (Фёдор Никитич Романов / Fyodor Nikitich Romanov)
  •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 Mikhail Fyodorovich Romanov)
원래 슬라브 계통 민족은 류리크 왕조의 이고리 류리코비치(Игорь Рюрикович, '류리크의 아들 이고리')같이 성을 별도로 쓰지 않았던 관습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오래 지속됐다. 즉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작명 방식을 취했기에 저런 괴악한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보면 편하다.

남자 친족들은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여자 친족들은 여대공(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칭호를 썼다. 그러다 1886년 알렉산드르 3세 때부터 Великий Князь는 황제의 아들과 친손자,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는 황제의 딸과 친손녀, 그리고 대공의 정식 부인에게만 쓰도록 했다. 그 외의 친족은 그냥 Князь/княгиня.[12] 일본 황실친왕/내친왕과 왕/여왕의 구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3. 역사

3.1. 로마노프 왕조(1613 ~ 1762)

3.1.1. 초창기 ~ 표트르 대제 시대

초대 황제인 미하일 1세(재위 1613~1645) 이후 표도르 3세(재위 1676~1682)가 죽은 뒤 제위를 놓고 다소의 혼란이 일어나다가, 1682년 유명한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가 즉위하면서 수습된다.

표트르 1세는 강력한 황제권을 추구해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기틀을 다졌으며,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체질을 바꿔놓으려 했다. 또한 이를 통해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1700~1721)을 치러 아조프해발트해로 나가는 통로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렐리아 등을 정복하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다. 대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1721년에는 나라 이름을 루스 차르국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열강으로서의 러시아의 등장을 알리기도 했다. 이때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그 일대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 과중한 노동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체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 생겨났다.

3.1.2. 예카테리나 1세 ~ 안나 이바노브나 시대

1725년 표트르 1세가 사망한 뒤 또다시 제위를 놓고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는데, 어린 황제들의 급서로 중간중간마다 많은 여제가 권력을 잡았다.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1727)는 표트르 대제의 아내로서 문맹이었기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고 재위 기간도 불과 2년으로 끝났지만, 안나 이바노브나(재위 1730~1740)는 10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러시아 정교회 중심의 공포정치를 펼쳤다.

3.1.3.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시대

이후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이자 아버지 표트르를 빼닮은 뛰어난 지성인으로 칭송 받던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1세의 둘째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재위 1741~1762)가 근위대를 이끌고 이복 사촌 언니 안나 이바노브나가 지명한 제위 계승자이자 생후 2개월의 갓난아기에 불과한 이반 6세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노프 왕조 제6대 황제로 즉위했다. 옐리자베타 여제의 치세 21년 동안 러시아는 안정을 회복하여 7년 전쟁에서도 그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그 다음에 이어진 팽창의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옐리자베타는 황권을 강화하고 당시의 가부장제 사상에 의해 남편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않기 위해 잉글랜드엘리자베스 1세처럼 평생토록 타국의 고귀한 통치 가문 출신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녀 여왕으로 남은 엘리자베스 1세와 달리 평생 처녀로 살지 않고 남첩과의 관계로 두 딸을 낳았지만 모두 사생아였기 때문에 황위를 물려줄 수 없었다.

3.2.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1762 ~ 1918)

3.2.1. 예카테리나 대제 시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는 재위 기간 내내 타국의 통치 가문 출신 남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신분 낮은 남첩하고만 관계를 맺으며 살았기에, 외조카이자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의 아들이자 프로이센 왕국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였다. 카를 페터 울리히 폰 홀슈타인고토르프는 이름을 러시아식인 표트르 표도로비치 로마노프로 바꾸고 러시아의 표트르 3세로 즉위한다.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 왕국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출신의 공작이었기 때문에 표트르 3세의 즉위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가 성립되었다. 다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데릴사위 프란츠 1세의 결혼과 막강한 동군연합 체제로 개창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가 후대에 와서도 합스부르크 왕조로 불리듯이 로마노프 왕조라고 이어서 불린다.

이때 카를 페터 울리히의 육촌 남매, 아내이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조피[13]도 남편을 따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가에서 로마노프 왕조로 또다시 시집을 새로 오게 된다.[14] 그리고 프로이센식 본명도 버리고 이름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로 개명한다.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궁정의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궁정 문화에 감탄했다. 엄청난 야심가에 여장부였던 그는 러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궁정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여 시이모(실질적인 시어머니)인 옐리자베타로부터 꾸준히 점수를 따고 표트르 3세와의 결혼을 허락 받아 러시아 황후의 자리도 얻었다. 그리고 더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포착하면서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표트르를 불신하고 경계하던 러시아의 상류층 귀족들의 호감을 끌어모아 자기 편으로 빠르게 포섭했다.

한편 옐리자베타 여제의 지지와 기대와 달리 표트르 3세는 외조부 표트르 대제와 이름만 같을 뿐 너무나도 한심하고 무능한 암군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정체성이 뼛속까지 독일인이었다. 이모 옐리자베타 여제에 의해 프로이센에서 러시아로 국적을 바꾸고 운 좋게 차기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러시아어를 하나도 몰랐고 직접 공부하려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독일어를 계속 썼으며 어머니의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심지어 러시아 궁정 문화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궁중 문화까지 프로이센풍으로 억지로 바꾸려고 했다. 표트르 3세는 당시 전쟁 중이었던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열혈 빠돌이를 자처할 정도로 극단적인 친프로이센 성향이었다. 문제는 이게 너무 심해서 러시아 황제인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공사구분도 못하고 러시아의 명예와 명운이 걸린 전쟁에까지 개인적인 팬심을 적용했다는 것. 다 이긴 전쟁을 중단하고 급히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정까지 맺는 이적 행위(소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를 저질렀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빠심에 미쳐 적국에게 조국을 팔아넘기는 명백한 이적 행위를 저지른 셈이었다.[15] 한때 고국이었다고는 해도 적국의 왕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동경심에 눈이 멀어 다 이긴 전쟁에서 갑자기 발을 빼고 조국을 팔아넘긴 표트르 3세의 행위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국가 지도자로서 매국노라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는 미친 짓거리였다. 뿐만 아니라 자길 기꺼이 러시아 황제로 만들어준 은인에 자길 공개적으로 모욕한 프리드리히 2세[16]에게 이를 갈고 조카가 복수하기를 기대하고 있던 이모 옐리자베타의 뒤통수까지 쳐버린 것이다.

내정에서의 실책도 상당했다.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주제에 정교회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식 문화를 강요했고[17] 농노들까지 가혹하게 수탈하고 억압하였다. 결국 표트르 3세는 자업자득으로 남녀노소, 지위고하 막론하고 러시아의 누구에게도 지지도 얻지 못한 채 욕받이로 찍히고 아내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에게도 실망과 미움을 사게 된다. 결국 표트르 3세는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고 돌아오다가 정교회와 귀족, 특히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가 근위대와 귀족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재위 반년 만에 폐위당하고 8일 후 사망한다.[18] 공식 사인은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발표되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야심 강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는 스스로 남편을 몰아내고 러시아 제국 제8대 황제 예카테리나 2세로 즉위한다. 프로이센과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가문 중 하나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가의 공녀 → 프로이센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 러시아 제국 황후 → 러시아 제국 황제에 이르기까지 일반 공작가의 영애에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만승지군의 지위에 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 가난한 평민 → 대북방전쟁 전쟁 포로 → 러시아 황제의 로얄 미스트리스 → 러시아 황후 → 제2대 러시아 황제로 어마어마한 신분상승을 이룬 이름이 같은 시외할머니 예카테리나 1세만큼은 아니지만, 백작가 영애에서 왕비가 된 신데렐라는 물론 웬만한 로판 여주인공도 울고 갈 파격적인 출세 가도와 신분 상승을 달린 가히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19] 가난한 농민 출신 문맹아라는 한계상 남편의 지명 상속만 빼면 정통성과 입지가 너무 미약하고 정치에도 무지해서 뭘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시외조모와 달리 예카테리나는 신분과 태생이 엄연한 독일계 공작가의 영애였다. 당시 유럽에는 귀족 영애들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가르치는 문화와 딸사랑이 지극한 어머니에게 체계적 교육 덕분에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덕분에 예카테리나는 지성과 교양, 처세술에 무척 뛰어난 재색겸비여걸이자 총명한 지성인이 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황권 강화는 물론 정치, 외교, 경제, 군사, 학문, 예술, 문화, 교육 방면으로 엄청난 활약과 치적을 세웠다.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의 실정을 만회하기 위해 혼란스러워진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안정화시켰다.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20]농민을 이주시켜 대규모의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전체적인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또한 공업도 진흥시켜 러시아의 경제력과 국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러시아의 교육 제도를 개혁하였다. 볼테르 등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당대 최고의 문인예술가, 학자들을 후원하고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학문과 예술, 문화적인 면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또한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도 놀라운 대성과를 거두었다.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1611년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도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림반도캅카스를 할양 받아 영토를 확장했다. 루스 차르국 시조이자 초대 황제 이반 4세 이래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영토 확장을 이룩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내치와 외치에서 찬란한 업적과 공훈을 세워 시외조부 표트르 1세와 맞먹는 대제로 칭송 받았다. 세계사에 손꼽히는 파격적인 출세와 입지전적인 신분 상승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녀는 시외조모 예카테리나 1세처럼 로마노프 왕조, 특히 표트르 대제와 아무런 혈연이 없었다. 그나마 왕족의 대우를 받는 통치 가문 출신이라곤 해도,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로 귀화한 순혈 독일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전임자들은 예카테리나 1세만 빼면 어떤 식으로든 표트르 1세와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나 이바노브나 황제의 경우 표트르 대제의 이복 조카[21]였고 시이모 옐리자베타는 표트르 1세의 둘째 딸, 남편 표트르 3세는 표트르 1세의 외손자였다. 이름이 똑같지만 외국인 출신이라 정통성도 미약하고 무지한 문맹아였던 예카테리나 1세와 표트르 3세라는 최악의 선례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쿠데타를 주도한 귀족들 중 출신과 성별, 정통성을 이유로 예카테리나를 대놓고 허수아비 취급하며 무시하는 이들도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도 정통성을 명분으로 반란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오로지 능력으로서의 증명과 귀족들의 지지로 보완해야 했던 예카테리나는 재위 기간 내내 세력 기반이 되어준 귀족들에게 감사하고 지속적으로 비위를 맞춰주면서 굳건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는 뼛속까지 러시아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오히려 표트르 1세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국인 귀족 여성이라는 명확한 핸디캡을 갖고 있음에도 많은 러시아 귀족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죽을 때까지 다방면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업적을 쌓아올린 건 엄연히 예카테리나 본인의 능력과 카리스마 덕분이다. 실제로 재위 기간 동안 뛰어난 능력으로 성공적인 통치를 해내자, 귀족들도 점차 불신과 경계를 거두고 진심으로 예카테리나 2세의 위신을 세워주고 주군으로 모시며 따르게 되었다.

물론 동서고금 막론하고 완벽한 성군도 폭군도 없듯이 예카테리나 역시 암이 매우 뚜렷한 군주였다. 그는 자유주의계몽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계몽전제군주라는 입장과 쿠데타를 일으켜준 귀족들과의 상시적 친분 유지를 위해 농노를 해방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농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귀족들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친귀족적 정책의 도구로 써먹고 착취했다. 또한 국유지를 친분이 있는 귀족이나 남첩에게 하사하여 그곳에 사는 국유지의 농민도 순식간에 농노로 추락하는 일도 흔했다. 의도치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러시아의 전제군주제가 다시 귀족 중심적인 봉건제로 후퇴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농노 탄압도 너무 심했기 때문에 푸가초프의 난(1772~1775)을 비롯한 농민 반란까지 일어났다. 물론 예카테리나 2세는 망설이지 않고 충신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 휘하의 러시아 군대를 앞세워 강경하게 진압했다. 푸가초프를 공개처형한 뒤에도 농노제를 강화하여 러시아 민중을 탄압했다. 가정적으로도 하나뿐인 아들이자 황태자인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에게도 상당한 막장 부모라 마지막 순간까지 모자는 화해하지 않았다. 사실 예카테리나를 변호하자면 파벨을 낳자마자 시이모 옐리자베타 여제에게 양육권을 빼앗겨서 키울 틈도 없었고 나름대로 아들에 대한 정과 미안함도 갖고 있었지만, 모친과의 정이 없었던 파벨은 예카테리나 2세를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죽인 여자라고 증오하고 어머니의 남첩들도 혐오했다.

설상가상으로 주변의 이간질과 3년의 반란으로 남러시아를 초토화시킨 이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 푸가초프가 여느 왕족 사칭자들처럼 어떻게든 여제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살아돌아온 표트르 3세라고 사칭하며 예카테리나 2세의 폐위와 파벨 황태자의 옹립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다. 파벨은 푸카초프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반란의 숨겨진 흑막이자 주동자로 용의선상에 오르고 모자 관계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었다. 파벨은 모친을 향한 증오심을 혼자만의 감정으로 끝내지 않고 아예 앞으로 태어날 모든 러시아 여성 왕족들을 제위 계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장자계승원칙과 서유럽의 전통을 따른다는 명분까지 가져오며 준살리카법을 도입하는 계기로 삼았다.

3.2.2. 알렉산드르 1세 시대 (나폴레옹 전쟁)

예카테리나 2세는 훗날에 대비해 사이가 나쁘고 자길 대놓고 미워하는 아들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나머지 아들이 아닌 손주를 정식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1777년 12월 23일 장손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이 태어나자마자 예전에 시이모 옐리자베타 여제가 어린 파벨을 빼앗아 키웠듯이 원래부터 파벨과 둘째 맏며느리 마리야 표도로브나 부부로부터 장손을 빼앗아, 엄격하고 철저한 제왕학 교육을 시켰다.[22] 여기에 2년 후, 1779년 태어난 둘째 손자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까지 데려가 본인이 직접 키웠다.

그러다 12년 후 1789년, 알렉산드르 대공이 12살이 되었을 때 서유럽프랑스 왕국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전유럽에 민주주의계몽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의 광풍이 들끓는다. 한때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지지했던 예카테리나는 이를 보고 자신도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남편 표트르 3세처럼 러시아 민중에게 폐위 후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위협을 느낀 예카테리나 대제는 계몽주의에서 반동주의로 노선을 틀었다.[23]

예카테리나 2세의 승하 직후 황위에 오른 그의 맏이이자 장남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로 유럽 전역에 돌기 시작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배격하였고 전제군주로서 보수주의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근데 문제는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개인적 분노와 원한, 트라우마 때문에 살리카법을 강화하여 여제의 즉위를 금지시키는 동시에 장자계승원칙을 확립시켰고, 러시아 최고의 전략가이자 명장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마저 러시아 구국 영웅이기 전에 어머니의 충신이라서 꼴도 보기 싫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졸렬한 심보로 알현도 거부하고 장례식까지 공식 칭호인 대원수가 아닌 일반 원수의 격에 맞게 의전을 치르는 식으로 푸대접했다. 거기다 농노제까지 손대려 하는 폭압적인 정책 추진 끝에 기존 권력 지지층이자 가장 핵심적인 세력 기반인 귀족들의 반발과 분노를 사게 된다.[24]

이렇게 파벨 1세는 성격과 외모 면에서 아버지 표트르 3세의 안 좋은 점을 그대로 닮아 키 작고 볼품 없는 추남에 통치자로서의 능력이 뒤떨어졌다. 그래서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에 비하면 인간적인 매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극도의 인간불신에 찌든 충동적이고 히스테릭한 성격 탓에 사방에 적을 잔뜩 만들었다. 때문에 인기와 신뢰도 차츰 잃어갔고, 황후와 자식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일단 멀쩡히 살아있고 인격에도 아무 하자가 없는 장남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차남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황태자로 삼으려 들었다. 이는 살리카법과 장자계승원칙으로 확립시킨 기존의 후계 구도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미친 짓이었다. 결국 파벨 1세를 표트르 3세와 다를 게 없다고 본 귀족들과 근위대는 일제히 쿠데타를 일으켜 선제 예카테리나가 후계자로 지목한 알렉산드르 대공을 즉위시키는 계획을 꾸민다. 한편 명분을 얻기 위해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파벨 1세의 성격을 파고들어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 황후와 자식들이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교묘한 거짓말과 이간질을 한다. 멍청하게도 파벨 1세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서는 후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와 자식들을 궁전에서 내쫓고 만다. 결국 그는 귀족들의 쿠데타, 그리고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 형제의 고의적 묵인에 의해 즉위 5년 만에 암살당한다. 그 틈을 타 장남인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가 만장일치로 귀족들의 압도적 지지와 추대를 받아 로마노프 왕조 제10대 황제로 즉위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1804년 평생의 숙적이자 라이벌 나폴레옹황제가 되자 앙숙 관계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초대 황제인 프란츠 1세와 동맹을 맺고 직접 군대를 지휘해 프랑스에 대항했는데,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통칭 '삼제三帝회전')에서 대참패하여 황제 신분으로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될 뻔한 굴욕을 당했다. 이 굴욕적인 패배로 러시아에 돌아온 후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 평생에 걸친 라이벌리와 악연을 쌓았지만 개인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나누면서 러시아를 유럽 제패의 동맹군으로 삼고 싶었던 나폴레옹과 그의 전략안에 상당한 매력과 호감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대륙 봉쇄령도 무시하고 영국조지 3세와 몰래 밀무역을 하는 행보를 보였다. 1812년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어긴 알렉산드르 1세에게 대군을 이끌고 동진하여 러시아 원정을 일으켰지만, 그는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의 첫 교전인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패배한 이래 수차례에 걸친 혹독한 전투와 장기간의 원정을 거듭한 끝에 군사적 경험과 관록이 쌓이고 크게 성장해 있었다. 아직 한창 넘치는 혈기와 군사적 식견 부족으로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던 철없는 과거와 달리 러시아 원정 때는 나폴레옹과 맞먹을 만한 냉철하고 진중한 사령관으로 변모해 있었고, 이미 나폴레옹의 침공을 꿰뚫어보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한 상태였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청야전술과 초토화 전술을 감행하여 프랑스 군대에 엄청난 타격과 피해를 안겨주었다.

연이은 승리와 성공, 황제 즉위에 오만해진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국의 부도(副都)인 모스크바만 함락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한 듯 싶지만, 러시아답게 모스크바 시민을 소개하고 도시를 파괴한 뒤 인근 농가를 초토화시켜 프랑스군이 폐허의 혼란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 사이 러시아는 다시 한 번 군대를 끌어모았다. 알렉산드르 1세와 쿠투조프 원수가 지휘한 러시아 군대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참패를 반면교사 삼아 단순무식하게 정면전으로 치고 들어가지 않고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혔다.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소득 없이 철수하거나 수도인 북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는 방안 중에서 선택해야 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군대에게 퇴각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러시아 원정에서의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한 패배는 워털루 전투에서의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에 의한 패배와 함께 나폴레옹의 몰락을 결정 지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러시아의 승리는 그때까지 적어도 육상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불패의 명장이었던 나폴레옹을 확실히 꺾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러시아는 위대한 '조국전쟁'의 이념을 선전하며 제국의 위세를 드높였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이때 러시아의 힘을 과대평가한 서방국가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무훈과 업적을 다시 보고는 러시아를 유럽 세계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한 몫 끼워주게 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치세 말년에 사이비종교에 심취하고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금슬이 좋지 못한 데다 슬하의 두 딸들도 모두 이른 나이에 죽고 황위 계승권자인 아들도 두지 않고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820년, 콘스탄틴 대공이 본인의 폭력적인 성격과 지나친 의처증, 가정폭력 문제와 지칠 대로 지친 안나 대공비의 지속적인 이혼 요구로 안나 표도로브나 대공비와 1796년부터 이어진 24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공식적으로 혼인무효화를 한다. 그리고 곧바로 폴란드 귀족 영애 요아나 그루진스카와 재혼하면서 폴란드 총독이 된다. 이 때문에 귀천상혼 문제로 시끌벅적해지자 알렉산드르는 뒷수습을 위해 1820년에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식들의 황위 계승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새로 제정했다. 그러다 공표를 5년간 미뤘다가 1825년 겨울에 급사한다. 신하들은 장자계승원칙과 선제 파벨 1세의 뜻에 따라 체사레비치 칭호를 받은 황태제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콘스탄틴 본인이 귀천상혼을 이유로 스스로 러시아의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17살 연하의 남동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에게 양보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아직 살아 있는 형을 누르고 황위를 빼앗을 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유럽의 자유주의에 물든 몇몇 청년 장교들도 이 결정에 반발하며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라는 봉기를 일으켰다. 결국 25일 동안 바르샤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왕래하며 폴란드 총독과 러시아 황제 일을 병행하던 콘스탄틴은 막내 남동생 미하일을 보내 간곡히 설득했고, 결국 니콜라이 대공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로 즉위한다.

3.2.3. 니콜라이 1세 시대

러시아 제국은 그 광대한 국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서유럽과는 달리 계속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많이 잡으면 전체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농노들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았지만 냉전 시기부터 등장한 수정주의적 사관에 의하면 농노들이 빈곤하게 산 건 맞지만 농노들의 생활상은 이전의 전통주의적 사관에서 묘사하던 지옥 같은 생활상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수정주의적 사관에 의하면 러시아의 농노나 서유럽의 자영농이나 빈곤하게 산 건 매한가지였으며 당시 러시아 농노들이 서유럽 농민들보다 나았던 상황도 분명히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농노가 지주의 지원을 받아 사업가로 변신하는 사례도 있었다.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젊은 귀족들이 러시아의 문제점과 후진성을 자각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정작 그들 또한 봉건 귀족이었기에 농노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고 국가를 전제군주제로 다시 되돌린 니콜라이 1세 시기에야 서서히 농노제에 대한 폐지 수순이 이루어지는 등 개혁의 발판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3.2.4. 왕조 말기

3.2.4.1. 알렉산드르 2세 시대
러시아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크림 전쟁(1853~1856) 때였다. 러시아 군대의 후진적인 모습은 당시 참전국이 다같이 막장이었음에도 두드러져 보였고, 패전 직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더 낫다'고 역설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1861년 역사적인 농노 해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을 위시한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은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귀족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보니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불충분한 개혁이 되었다. 더욱이 이로 인해 군주제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이 생겨나 꾸준히 테러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인민주의 단체의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첫 테러 때는 무사했으나, 직접 부상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난 괜찮다"고 말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대기했던 또다른 암살범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폭탄을 던졌다.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도다…"라는 말을 겨우 했는데,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가서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3.2.4.2. 알렉산드르 3세 시대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둘째 아들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복수를 위해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아버지의 어설픈 대개혁 시도가 도리어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과 더불어 러시아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그는 전제군주정에 위협이 되는 개혁 기조들만 철회시키는 선에서 반동주의로 돌아섰다.

이때 비밀경찰조직까지 세워 전제군주제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를 탄압해 내부 기강을 확실히 세웠고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큰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1, 2세와 달리 정부도 들이지 않고 오로지 일찍 죽은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의 전 약혼녀이자 아내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러시아식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에게 충실한 애처가이자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으나, 자신의 체력과 건강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어려서부터 황태자 니콜라이의 후계 교육을 소홀히 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아들이 30세가 되면 후계 교육을 시키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급격한 건강 악화로 급사한다.
3.2.4.3. 니콜라이 2세 시대
알렉산드르 3세의 맏아들이자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가정적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유쾌한 애처가에 자식바보 아버지였지만 군주로서는 너무 무능해서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에 독단적이었고 주변 신하들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많았다. 동시에 그는 개혁에 전혀 관심 없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러시아의 국정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대외 전략이나 내정 개혁 비전도 없었고 군사 지휘관으로서도 매우 무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기도 했었다.

러일 전쟁 도중 발생한 경제난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제정에 최후의 희망을 가졌던 모든 이들의 기대는 박살났고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은 이것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즉, 1905년 터진 1차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에 격렬히 항의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12년 후의 2차 혁명의 전조였다.

처음에는 민중들의 거센 항의를 무시했던 니콜라이 2세는 저항이 점점 더 커지자 두려운 마음에 개혁을 약속했고, 의회인 두마를 설치하고 겉으로나마 입헌군주제를 표방했다. 차르는 이 요구가 아마 한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 민중은 제정에 희망을 완전히 버렸다. 1914년, 복잡한 동맹 관계에 의해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자 이러한 불만과 분노와 증오가 일시에 폭발했다.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 계속되는 전선의 패배 소식 등 모든 것이 제국의 실정(失政)과 무능과 부패를 보여주었다.

1917년, 러시아력 2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빵을 달라는 민중시위는 금세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 마침내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2월 혁명) 전선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 동생에게 양위하였지만 동생 미하일 대공이 거부하여 제정은 붕괴되고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선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러시아력 10월에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뒤엎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건국된다. (10월 혁명) 1918년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자 유폐되었던 황제 일가는 처형되었으며, 다른 황족들 역시 국외로 망명하거나 피살당하고, 이것으로 300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도 역사 속의 잔재로만 남게 되었다.

3.2.5. 현황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며 제위를 잃은 로마노프 왕조는,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이 전부 살해당하여 직계가 단절되었다.[25] 이후 니콜라이 2세의 숙부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들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26][27][28] 이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이 되었고 키릴 대공의 사후 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1917~1992) 대공 또한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현재 여러 개의 파벌로 갈라지게 되었다.

현재 러시아 제위 요구자(=로마노프 가문의 수장)는 총 3명으로 그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는 당연히 블라디미르 대공의 외동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이다.[29] 그녀의 외아들 게오르기 대공은 현재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으며, 러시아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이는 바로 앤드루 로마노프 공작(Prince Andrew Romanoff/Prince Andrew Andreevich of Russia)[30]이었는데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이 되어 작가이자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앤드루 공작은 2021년 98살에 사망했는데, 문제는 장남 알렉시스(1953년생)는 자녀가 없고 남동생 둘에 조카딸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는 앤드루 공작의 5촌 조카[31]인 로스티슬라프(1985년생, [age(1985-01-01)]살)[32], 니키타(1987년생, [age(1987-01-01)]살) 형제가 있다. 알렉시스 공작 기준으로는 두 형제가 알렉시스 공작의 두 남동생 뒤를 이어 계승순위 3위와 4위가 된다.

마지막 인물은 독일어로는 카를 에미히 추 라이닝겐(Karl Emich Prinz zu Leiningen), 러시아어로는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레이닌겐로마노프(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Лейнинген-Романов)인 인물로 자신의 5대조가 알렉산드르 2세이고, 그는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파벨 1세가 제정한 러시아 제위 계승법에서 규정한 동등결혼(= 통치 가문끼리의 결혼만 동등결혼)을 하지 않았으니[33] 그의 딸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에게 계승권이 없다는 주장을 근거로 자신이 적통 러시아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34] 그는 제7대 라이닝겐 후작[35] 에미히(Emich, Emich Fürst zu Leiningen)의 장남으로 라이닝겐 후작위 후계자였으나 귀천상혼[36][37]을 하는 바람에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안톤 알렉세예비치 바코프(Anton Alekseyevich Bakov)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의 도움을 얻어 로마노프 제국(Romanov Empire)이라는 초소형 국민체를 만든 뒤 자신을 전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 Всероссийский)[38] 니콜라이 3세로 칭하며 즉위해버렸다. 이후 그는 로마노프 제국이 초소형 국민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실제 영토를 알아보고 있다고 하고, 실제로 땅을 구입하여 그 곳에 로마노프 제국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게 번번히 저지당했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이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가장 정통성에 가까운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외아들, 게오르기 대공의 아버지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카를 프란츠 공[39]으로[40] 마리야 여대공 사후 게오르기 대공이 어머니의 지위를 계승한다면 가문의 이름이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에서 호엔촐레른로마노프로 바뀔 예정이기 때문에 혹여 러시아에서 왕정 복고가 실현된다고 해도 1차,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이라면 이를 가는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적이던 프로이센 왕가의 성씨를 사용하는, 빌헬름 2세의 직계후손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이다.[41] 물론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역시 공식적으로는 로마노프 왕조라는 이름으로 러시아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 전 사례와 같이 공식적으로는 그냥 로마노프 가문으로 유지될 가능성도 있다.

거기다가 게오르기 대공은 독일에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구사하는 4가지의 언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 독일어가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언론에 따르면 게오르기 대공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자신이 로마노프 왕조의 수장이 될 것이라는 것과 표트르 대제의 위대함 및 러시아의 역사를 배우며 자란지라 완벽하게 러시아계 스페인인으로 자랐다고 한다.[42] 게다가 그는 2006년을 시작으로 러시아에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2014년 브뤼셀에 설립한 회사의 이름은 Romanoff & Partners (로마노프 & 파트너스)라고 한다. 즉, 현재까지의 게오르기 대공은 러시아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21년 10월 2일.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장남 게오르기 대공이 레베카 베타리니(Rebecca Virginia Bettarini)라는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성 이사악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로마노프 가문의 결혼식이 러시아 본토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 신부인 레베카 베타리니가 통치 가문, 즉 왕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레베카 베타리니는 러시아 대공비가 아닌 '빅토리아 로마노프 공작 부인 전하(Her Serene Highness Princess Victoria Romanoff)'로 불릴 예정이라고 한다.

4. 역대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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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리크 왕조 고두노프 왕조
이반 4세 표도르 1세 이리나 고두노바 보리스 고두노프
고두노프 왕조 비왕조 슈이스키 왕조 바사 왕조
표도르 2세 가짜 드미트리 1세 바실리 4세 블라디슬라프 지기몬토비치
로마노프 왕조
미하일 1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표도르 3세 이반 5세
표트르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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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2세 안나 이바노브나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반 6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표트르 3세 예카테리나 2세
제9대 제10대 임시 제11대
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니콜라이 1세
제12대 제13대 제14대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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Та же верховная Самодержавная власть принадлежит Государыне Императрице, когда наследство Престола в порядке, для сего установленном, дойдет до лица женского; но супруг Ее не почитается Государем; Он пользуется почестями и преимуществами, наравне с Супругами Государей, кроме титула.
여제(女帝)가 제위를 승계할 때, 여제는 동일한 최고 전제권을 가지지만 국서(國壻)는 군주가 아니다. 국서는 칭호를 제외하고 황후[43]와 동일한 명예와 특권을 누린다.
러시아 제국 헌법 제6조, 1905년

뒤에 붙는 '~비치(남성)'나 '~브나(여성)'의 경우는 누구의 자식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국가에서 시집온 여성들은 정교회 세례성사견진성사를 새로 받을 때 대부모 또는 주보성인의 이름을 부칭으로 삼았다. 예컨대 예카테리나 1세, 2세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같은 경우.
대수 이름 탄생 사망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비고
01 미하일 1세 표도르비치
Михаи́л I Фёдорович
1596.7.12 1645.7.13 1613.2.21 1645.7.12 32년 149일
02 알렉세이 3세 미하일로비치
Алексей III Михайлович
1629.3.9 1676.1.29 1645.7.12 1676.1.29 20년 208일
03 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
Фёдор III Алексеевич
1661.6.9 1682.5.7 1676.1.29 1682.5.7 6년 100일 [44]
04 이반 5세 알렉세예비치
Иван V Алексеевич
1666.8.27 1696.2.8 1682.5.7 1696.2.8 13년 280일 [45]
04 표트르 1세 알렉세예비치
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6.9 1725.2.8 1682.5.7
1696.2.8
1696.2.8
1725.2.8

42년 280일
[46]
여황제 시대
05 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1684.4.15 1727.5.17 1725.2.8 1727.5.17 2년 98일 [47]
06 표트르 2세 알렉세예비치
Пётр II Алексеевич
1715.10.23 1730.1.30 1727.5.18 1730.1.30 2년 258일 [48]
07 안나 이바노브나
А́нна Иоа́нновна
1693.2.7 1740.10.28 1730.1.30 1740.10.28 10년 274일 [49]
08 이반 6세 안토노비치
Иоанн IV Антонович
1740.8.23 1764.7.16 1740.10.28 1741.12.6 1년 39일 [50]
09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
1709.12.29 1762.2.3 1741.12.6 1762.1.5 20년 30일 [51]
10 표트르 3세 표도로비치
Пётр III Фёдорович
1728.2.21 1762.7.17 1762.1.5 1762.7.9 185일 [52]
11 예카테리나 2세 알렉세예브나
Екатерина II Алексеевна
1729.5.2 1796.11.17 1762.7.9 1796.11.17 34년 140일 [53]
여제 시대 이후
12 파벨 1세 페트로비치
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1754.10.1 1801.3.23 1796.11.17 1801.5.23 4년 187일
13 알렉산드르 1세 파블로비치
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1777.12.23 1825.12.1 1801.3.24 1825.12.1 24년 258일
14 니콜라이 1세 파블로비치
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1796.7.6 1855.3.2 1825.12.1 1855.3.2 29년 98일
15 알렉산드르 2세 니콜라예비치
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1818.4.29 1881.3.13 1855.3.2 1881.3.13 26년 11일
16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로비치
Александр I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5.3.10 1894.11.1 1881.3.13 1894.11.1 13년 236일
17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로비치
Николай II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68.5.18 1918.7.17 1894.11.1 1917.3.15 22년 139일 [54]

5. 현존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55]

노랑색 바탕은 러시아 제국 황제 현재 가주는 굵은 글씨로 표기. 미성년에 죽은 사람들과 여계 계승이 아닌 여자는 생략. 이름 앞의 숫자는 올덴부르크 왕조의 현 종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 본가 당주 계승 순위.

5.1. 직계(알렉산드르 2세의 후손)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 알렉세이
미하일 게오르기
블라디미르 키릴 마리야[56] 에미히[57] 카를 에미히[58] 에미히
블라디미르 마리야 게오르기[59] 알렉산드르
보리스
안드레이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알렉세이 세르게이
세르게이
파벨 드미트리 파벨 로마놉스키 38.디미트리 로마놉스키
39.미하일 로마놉스키

5.2.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후손[절손]

니콜라이 1세 콘스탄틴 니콜라이 아르테미
알렉산드르 키릴
콘스탄틴 이오안 베스폴로드
가브릴
콘스탄틴
올레그
이고르
게오르기
드미트리

5.3.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후손[절손]

니콜라이 1세 니콜라이 니콜라이
페테르 로만 니콜라이
드미트리

5.4.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후손

니콜라이
1세
미하일 니콜라이
미하일 미하일
게오르기
알렉산드르 안드레이 미하일
안드레이 40.알렉시스
41.표트르
42.안드레이
표도르 미하일 미하일
니키타 니키타 표도르
드미트리
로스티슬라프 로스티슬라프 43.로스티슬라프 로스티슬라프[62]
44.니키타
니콜라이 45.니콜라이
46.다닐 47.잭슨 다닐
바실리
세르게이
알렉세이

6. 여담

  •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가는 창시자인 표트르 3세와 그의 아들 파벨 1세가 키도 작은 추남이었지만, 19세기 이후에는 미인이 많은 왕가로 정평이 나게 된다. 다름아닌 파벨 1세의 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가 굉장한 미인으로 그 유전자를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들에게도 제대로 물려줬기 때문이다.[63] 니콜라이 1세로부터 시작되는 미남미녀의 황족 계보는 모두 조피 도로테아의 자녀였다.[64] 그런데 그에 비례해서 경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황족이 늘어났다. 이런 점 때문에 외모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로마노프 왕가의 평판은 러시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자신의 딸들이 잘생긴 외사촌들에게 호감을 보이자, 딸들에게 '네 사촌들이 그 잘생긴 얼굴로 문 뒤에서 시녀들과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되면 놀라 뒤집어질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리야의 차녀 빅토리아 멜리타는 기어코 외사촌인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결혼했지만, 말년에 키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피는 걸 보고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었다며 기겁했다.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까지 갈 것 없이 로마노프 왕조의 사실상 중시조인 니콜라이 1세부터가 수많은 내연녀를 두며 사생아를 낳았던 사람이고,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드르 2세[65],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66],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67]도 화려한 여성편력을 벌이며 수많은 여자와 혼외정사를 하여 사생아를 낳아댔다. 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 중 사생아를 낳거나 내연녀를 들이지 않고 오로지 아내에게만 충실한 사람은 막내아들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뿐이다.
  • 참고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모계조상인 로마노프 왕조는 키가 더 큰데, 초대 황제 표트르 1세의 키는 203cm, 조카이자 4대 여제 안나 이바노브나의 키는 189cm, 차녀이자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키는 180cm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구성원들보다 평균키가 훨씬 더 크다.
  •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키는 이렇다.
  •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딸부잣집에 유일한 아들이 혈우병 환자여서 아들 병 고치려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등용했다가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는데 한몫해서(...) 부각이 잘 안되는데 니콜라이 1세 이래로 러시아 황실은 아들부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니콜라이 1세가 4남 4녀, 알렉산드르 2세가 6남 2녀(귀천상혼 자녀까지 합하면 8남 4녀), 알렉산드르 2세의 남동생들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4남 2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2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 알렉산드르 3세가 4남 2녀, 그 밑에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4남 1녀를 두었다. 그 외에도 콘스탄틴 대공의 차남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 6남 3녀, 미하일 대공의 4남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6남 1녀를 두었다. 사생아를 제외하고 아들을 6남이상 낳은 사람만 4명이다. 그리고 황자들이 황녀보다 2배 이상 더 많았다. 러시아 혁명으로 많은 황족들이 총살당했지만 자손들이 워낙 많아서 현재도 로마노프 가문의 후손들이 많이 있다. 물론 윗 문단에서 보듯 엄격하게 규정된 귀천상혼 문제와 준살리카법 문제로 실제 계승권이 있는 후손은 그렇게 많지 않다.

7. 대중매체에서

  • 러시아 왕조라는 내력 탓인지 나타샤 로마노프, 알렉산더 로마노프처럼 러시아인이거나 러시아 혈통의 캐릭터한테 로마노프 왕조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종종 붙는다.
  • 명탐정 코난: 세기말의 마술사에서는 원래 이들의 소유였던 임페리얼 이스터 에그[71]가 작중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니콜라이 2세의 후손과 라스푸틴의 후손이 등장하는 건 덤.
  • 야인시대 54화에서 유진산이 짤막하게 언급한다. "오랫동안 국민을 착취하고 유린한 것은 사실"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한다. 유진산이 이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극렬 반공주의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로마노프 왕조에게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은 특이하다.[72]
  • <마지막 차르>라는 넷플릭스 다큐에서는, 이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그에 대비되는 씁쓸한 몰락을 볼 수 있다.
  • 한국의 대체역사물 동방의 라스푸틴의 주 배경이 로마노프 왕조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다. 21세기에도 멀쩡히 러시아 제국이 존속하는 만큼 로마노프 왕조도 여전히 제위를 이어가고 있다.[73]

[1] 로마노프 가문의 문장.[2]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문장. 왼쪽이 로마노프 가문의 문장이며 오른쪽이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문장이다.[3] 러시아 제국 대형 국장.[4] 러시아식으로는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레이닌겐로마노프. 자칭 니콜라이 3세.[5] 표트르 3세의 외가다.[6]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종가다. 본가는 올덴부르크 왕조덴마크, 노르웨이, 영국의 왕조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본가다.[7]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파벌 공식 홈페이지.[8] 이반 5세표트르 2세, 이반 6세, 표트르 3세가 빠져있다. 아무래도 왕조 내에서 흑역사라 치부될 차르들은 제외한 듯.[] [10] 참고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의 본가도 이쪽 출신이다.[11] 이주 경위에 대해서는, 코빌라의 아버지가 튜튼 기사단에 반역을 저지르려다 실패해서 도망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2] 참고로 Великий Князь/Великая княгиня는 영어로 번역할 때 Grand Duke/Duchess로 번역하고 Князь/княгиня는 Prince/Princess로 번역해서 번역이 원어와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Князь가 의미 및 기원상 슬라브어권 고유의 작위에 가까운 것에 기인한다.[13] 본명은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Sophie Auguste Friederike von Anhalt-Zerbst).[14] 물론 친모 요안나 엘리자베트를 통해 모계로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와 이어져 있고, 그녀의 친정 가문 안할트체르프스트도 안할트 지방을 다스리는 통치 가문으로서 사실상 왕족과 동등한 대우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세력과 규모가 작아 보일 뿐이지 그녀도 사실상 왕족이다.[15] 물론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행운이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러시아 입장에서도 슬슬 발을 뺄 타이밍이긴 했다. 문제는 평화 협정의 내용이 한참 프로이센을 밀어붙이던 러시아가 패전국이고 한참 러시아에 밀리던 프로이센이 실질적인 승전국이라 봐도 될 정도의 내용이었다는 것이다.[16]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폭력과 학대로 점철된 암울한 유년기와 대왕으로서의 명성과 별개로 엄청난 남성우월주의자였다. 그 스스로도 부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는 형식적인 부부 관계였고 남자 애인들과만 어울린 동성애자였고, 유럽 강국의 여러 여성 권력자들을 깔보다 못해 공식 석상에서도 조롱하고 모욕하는 언동을 저질렀다. 이를테면 자기가 키우는 개들에게 각각 프랑스 왕국의 실권을 쥔 퐁파두르 여후작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 그리고 러시아의 옐리자베타라 이름 짓고 그 개들을 괴롭히고 학대했다. 당연히 이는 졸렬한 굴절분노를 투과한 동물학대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현대 관점으로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외교적 결례이자 모욕이다.[17]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아버지를 더 좋아했던 장남 파벨 1세도 서유럽화의 정책을 펼쳐 7년 전쟁이라면 치를 떠는 러시아 제국군을 프로이센풍으로 바꾸려고 들었다. 이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살리카법까지 동원하면서 확립한 후계구도를 갑자기 깨뜨려서 장남 알렉산드르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차남 콘스탄틴 대공을 황태자로 책봉하려들고 러시아 역대 최고의 명장이자 구국 영웅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마저 단지 어머니의 신하라서 곁에 두기 싫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장례식에서까지 푸대접하는 짓을 저질렀다가 아버지처럼 제국군과 정교회, 귀족들에게 찍혀 즉위 5년 만에 암살당하는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억울하게 쫓겨난 맏아들 알렉산드르 1세도 제위에 오르기 위해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이 일로 모후에게 비난을 받고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렸다.[18] 알렉세이 오를로프라는 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가설이 있다.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은밀한 지시(혹은 방조)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19] 동서고금 막론하고 예카테리나와 대등할 정도의 전례 없는 드라마틱한 신분 상승과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나고 유능한 정치력을 보인 여성은 중국 당나라측천무후 정도이다. 차이점은 예카테리나는 순수 외국인이고 측천무후는 중국인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외국인이라 러시아 귀족들의 쿠데타에 의지해야 했지만 측천무후는 오로지 본인의 능력으로 쿠데타를 이끌어서 황위를 차지했다. 측천무후조차 스스로 황제라 칭하지 않고 실권을 쥔 황후로 만족해야 했지만, 예카테리나는 공식 칭호도 실권도 당당한 황제였다.[20] 흔히 우리가 흑토라고 부르는 그 천혜의 농토이다.[21] 표트르 대제의 이복 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이반 5세의 딸이었다.[22] 물론 즉위 전이나 즉위 후나 어머니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지우려든 파벨의 행적을 보면 파벨이 분명 알렉산드르에게 할머니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잔인한 악녀, 폭군이란 식으로 세뇌교육시킬 게 너무 뻔해서 선수친 것도 있어보인다. 실제로 파벨은 알렉산드르를 지나치게 불신한 나머지 아예 맏아들을 건너뛰고 차남에게 황태자의 칭호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2살 터울의 친형과 사이가 좋았고 할머니의 조기 교육까지 미리 받아둔 콘스탄틴은 당시나 형의 승하 이후에도 제위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아버지의 분별 없는 행동을 못마땅히 여겼다.[23] 후일 장손 알렉산드르 1세도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처럼 정치적으로 똑같은 행보를 걸었다. 할머니의 교육과 갓 황위에 오른 청년 시절의 혈기의 영향으로 수많은 대학 건설을 추진했을 정도로 계몽주의자유주의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1805년부터 수십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험난한 위협과 풍파를 겪으면서 현실적 고뇌에 이르고 회의적으로 변해갔다. 대외적으로도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을 몰락시키고 러시아를 수호한 구국 영웅과 유럽의 해방자라는 타이틀과 지위, 그리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로버트 스튜어트와 함께 확립한 빈 체제를 지키기 위해 반동주의와 보수주의 노선을 걸었고, 중년기에는 거세파라는 사이비 종교에 심취했다.[24] 파벨 1세는 프랑스 대혁명을 적대하고 왕권신수설을 지지한 전형적인 전제군주인 만큼 절대 농노제에 핍박받는 농노들을 불쌍히 여기고 농노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서 농노제를 개혁하려고 한 게 아니다. 단지 어머니의 총신과 애인들로부터 환수한 농노들을 어머니에게 핍박받는 현재의 총신들에게 나누어준 것만 빼면 달라진 게 없었다. 새로 개척된 러시아 남부까지 농노제를 퍼뜨리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총신들에겐 예카테리나 2세보다 더 빠르게 농노들을 분배했다. 일단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총신들에게 뿌려진 국가 소유 농노들을 환수하고 여제의 남첩들을 궁정에서 쫓아내는 한편, 당시 1주일에 4일간 지주에게 봉사해야 하는 농노의 의무를 3일로 단축시키고 남는 시간에는 국가 농장에 투입하려 했다. 단순 산술적으로 지주들의 수입이 4분의 1은 줄어드는 격이었다. 단, 농노제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에게 위협이 되기는 충분했다. 농노제 개혁을 최초로 시도한 러시아 황제는 삼남 니콜라이 1세였으며, 농노들을 완전히 해방한 러시아 황제는 손자 알렉산드르 2세였다.[25] 니콜라이 2세의 넷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다섯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총살 현장에서 살아남아 몰래 빠져나갔다는 루머가 계속 있었다. 실제로 아나스타시야 공주를 사칭한 여성도,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착각한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물론 알렉세이 황태자의 경우 남성분은 진짜는 아니지만, 나중에 니콜라이 2세의 유전자와 검사 결과 친족인 것으로 확인되어 혼외자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26] 빅토리아 멜리타의 남편. 1917년 당시 제위 계승 순위 3위였다. 계승 순위 1위였던 황태자 알렉세이와 2위 미하일 대공(니콜라이 2세의 막내 남동생)은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미하일 대공은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외아들에게는 제위 계승권이 없었고 그마저도 21살에 교통사고로 요절했다.[27] 그러나 다른 로마노프 황족들의 항의를 받았는데 키릴 대공은 당시 3순위 계승권자였지만 정교회에서 금지한 사촌간 혼인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하면서 계승권이 박탈될 뻔했는데, 니콜라이 2세가 원활한 제위 계승을 위해 그 혼사를 인정해 주었는데도 정작 로마노프 황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러시아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서 배신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28] 키릴 대공은 파시즘공산주의에도 관심을 보여 한때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제정복고 단체인 믈라도로시 연합을 지원하기도 했고, 소련을 참고한 제국 재건안을 구상하여 '소비에트 차르'로 불렸다.[29] 러시아 제국의 제위 계승법은 남자 계승권자가 없는 경우에 한해 딸의 제위 계승을 허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귀천상혼한 후손을 제외한 로마노프 가문의 남계후손이 남아있지 않음을 근거로 본인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마리야 여대공의 고모이자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작은누나인 키라 여대공은 현재 프로이센 왕실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할머니이다.[30] 러시아식으로 안드레이 로마노프. 순수 혈통의 마지막 남계 로마노프 혈통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막내 미하일과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아 여대공의 손자로 크세니아가 크리스티안 9세의 손녀이므로 덴마크 왕실 혈통도 아주 조금은 있다. 1923년생으로 끝내 2021년 11월 28일 사망.[31] 앤드루 공작의 사촌동생의 아들이므로 역시 니콜라이 1세-미하일의 후손이고, 또한 크세니아 공주의 후손도 된다.[32] 아내와의 사이에 이미 [age(2013-01-01)]살 된 아들이 있는데, 2021년 9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33] 그는 조지아를 통치했었던 왕가인 바그라티온 왕가 출신 여성과 결혼했는데, 카를 에미히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왕가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미 주권 가문이 아니었으므로 귀천상혼이라는 것이다.[34] 상기한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장녀 마리아 키릴로브나 여대공의 손자로,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또한 마리아 키릴로브나의 여동생의 손자인, 프로이센 왕실 수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는 6촌간이다.[35] 슈탄데스헤어 중 하나이다.[36] 정확히는 사별 후 재혼이 귀천상혼이다. 재혼 상대는 티센 가문 출신의 가브리엘레 레나테 티센이었는데, 귀천상혼까지 해가며 결혼했지만 1998년에 이혼하고 레나테는 바로 이스마일파의 수장 아가 칸 4세와 결혼한다. 아가 칸 4세에게도 재혼이었다가 끝내 2014년 또 이혼. 한편 에미히는 2007년에 백작가 딸과 3혼했고, 그 결혼에서 아들 에미히를 봤다.[37] 재밌는 건 그가 로마노프 수장을 자칭한 주장에 근거하면 자기 자식에게 수장직을 못 물려준다는거다. 재혼 사이에서 난 자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3혼한 백작가 여식과의 결혼은 라이닝겐 가문 기준으로는 동등결혼이지만, 그녀가 통치 가문은 물론 슈탄데스헤어 출신도 아니기 때문에 러시아 제위 계승법 기준으로는 귀천상혼인 것이다. 그래서 영어 위키에서는 그의 후계자를 그의 아들 에미히가 아니라 동생이자 현재 라이닝겐 가문 수장인 안드레아스로 보고 있다. 그는 하노버 가문 수장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의 3녀 알렉산드라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고 있다.[38] 러시아 제국 시절 황제의 공식 약칭이다.[39] 카를 프란츠 공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직계 후손(6남 요아힘 왕자의 손자.)으로, 게오르기 대공은 현재 프로이센 왕실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와는 부계혈통상 8촌 사이이다. 또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할머니 키라 여대공이 마리야 여대공의 고모이므로,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기준으로 하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게오르기 대공은 6촌이 된다.[40] 즉, 마리야 여대공과 카를 프란츠 공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게오르기 대공이다. 현재는 카를 프란츠 왕자과 마리아 여대공은 이혼한 상태로 게오르기 대공은 어머니와 함께 자랐다고 한다.[41] 여담으로 빌헬름 2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프린세스 로얄(Victoria, Princess Royal)이기 때문에 게오르기 대공 역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42] 반대로 그의 아버지인 카를 프란츠 공은 게오르기 대공에게 "너는 러시아 황실의 모계 후손이므로 러시아의 대공이 아닌 프로이센의 게오르크 공(His Royal Highness Prince Georg of Prussia)이다."라고 교육시켰다고 한다.[43] 남자 황제의 황후를 말함.[44] 표트르 1세의 이복형.[45] 공동황제. 표트르 1세의 이복형으로, 정신지체가 있어서 실제 정무는 보지 못했다.[46] 1696년 2월 8일까지 이복형 이반 5세와 공동황제였다가 그 이후부터는 단독황제가 되었다. 1721년, 러시아 제국을 정식 선포하고 자신을 "임페라토르(황제)"라고 칭함.[47] 황태자 알렉세이가 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고문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훗날의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2번째 황후인 예카테리나가 즉위했다. 농민 출신에, 게다가 러시아인도 아니고 독일계였다. 그래서 문맹이었기에, 정무는 귀족들의 추밀원이 맡았다. 표트르 1세가 재위하던 중 제위계승자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는 생전에 그녀를 공동통치자로 못박아 놓았었다.[48]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할아버지 표트르 1세의 개혁 반대자라고 자칭하며 반개혁에 앞장섰으나 결혼식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 남계가 단절된다.[49] 이반 5세의 딸. 정권의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반 5세 혈통의 안정을 위해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손자 이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50]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벨프 가문 출신의 군주. 생후 2개월의 나이에 즉위했다. 섭정은 비론과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가 맡았으나, 다음해 일어난 엘리자베타의 쿠데타로 슐레실부르크 요새에 유폐되었다. 이후 육군장교 미로비치가 그를 탈출시키려다가 실패, 23세의 나이로 살해당한다.[51] 정통 로마노프 왕조의 종식.[52] 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 왕조 창건. 즉위 6개월 4일만에 폐위되었다가 급사.[53] 표트르 3세의 아내.[54] 피의 일요일, 러시아 혁명. 퇴위 후 유배되었다가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총살.[55] 대공 여대공 등의 호칭은 생략.[56] 6대 에미닝겐 후작 부인[57] 7대 에미닝겐 후작[58] 자칭[59] 빌헬름 2세의 막내아들인 요아힘 폰 프로이센의 장손.[절손] 남계는 절손됨.[절손] 남계는 절손됨.[62]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계승권이 없음.[63] 뷔르템베르크의 키크고 잘생긴 유전자를 로마노프에게 물려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피 도로테아의 뷔르템베르크 가문은 비텔스바흐 가문처럼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64] 그나마 파벨 1세의 자녀들도 전부 다 미인은 아니고 어머니를 닮아, 외모가 뛰어난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를 닮아 약간 외모가 딸리는 자녀들도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전자였고 그도 당대 미녀 공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와 결혼하면서, 그 둘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로마노프 왕조에선 정말 장신의 미남미녀들이 많아진다.[65] 자기 딸보다 어린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사생아를 낳았으며, 황후 헤센의 마리 공녀가 사망한지 얼마 안된 말년에는 돌고루코바와 귀천상혼으로 재혼까지 했다. 정작 돌고루코바는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마자 자식들과 함께 러시아에서 쫒겨났다.[66]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와 연애결혼을 했지만 발레리나 출신의 내연녀와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야반도주하고 사생아까지 낳으면서 가정을 파탄냈다.[67] 발레리나 출신의 내연녀와 대놓고 동거하며 사생아까지 낳다가 그 내연녀가 먼저 죽자 미쳐버려서 유폐된 채로 죽었다.[68]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193cm, 사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198cm로 알렉산드르 3세보다 더 크다.[69] 4위는 187cm의 보리스 옐친.[70] 다른 한 명은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71] 게임에서 떡밥이나 패러디 등을 집어놓은 걸 말하는 이스터 에그가 아니라, 부활절날 러시아 황실에 바쳐지는 보석으로 만든 달걀 모양 장식품이다.[72] 물론 드라마 내에 반공 성향을 좀 덜어내기 위한 각색일 수도 있으며, 애초에 반공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그나마 민주주의 성향의 정치인으로도 묘사되는 그가 부패한 왕족들을 좋게 볼 이유도 전무하다. 무엇보다 유진산의 말도 잘 들어보면 "공산당이 억울한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냈다."가 아니라 "공산당은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냈으면서 그들보다 잘 하지도 못하고 있다."에 가깝다. 유진산이 공산당을 두고 로마노프 왕조처럼 인민을 착취하고 유린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숙청에 대해 언급하며 개인은 사라지고 누구도 말할 자유를 잃었다며 로마노프 왕조 못지않게 공산당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73] 다만 여러 차례의 법 개정으로 니콜라이 2세의 후손만이 제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는데, 알렉세이 로마노프가 딸 하나만 남겨놓고 죽는 바람에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의 모계 후손으로 제위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