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7:54:12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


1. 개요2. 배경3. 비극적인 죽음4. 암매장5. 사후6. 누가 지시를 내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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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8년 7월 17일 우랄 소비에트 볼셰비키에 의해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총살당한 사건.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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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스코예 셀로에 연금된 로마노프 황가의 자매들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러시아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폐위된 황제 일가는 1917년 3월 9일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롭스키 궁전에 연금되었고 1917년 8월 영국으로의 망명이 좌절되자[1] 토볼스크로 이송되었다.[2] 황제 일가는 토볼스크의 시베리아 총독관저로 이용되었던 저택에서 안락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10월 혁명으로 인해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 황제 일가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였다. 볼셰비키의 감시는 훨씬 삼엄해졌으며, 하인들과 이별하고 지원금도 대폭 삭감당한 황제 일가는 직접 노동을 해야 했다. 심지어 러시아 곳곳에서 볼셰비키의 집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 즉 백군이 들고 일어나 러시아 전역이 적군(혁명군)과 백군(반혁명군)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또한 미국, 영국, 독일 등 여러 국가들이 군대를 파견하면서 전쟁이 국제적으로 번졌고, 황제 일가가 백군에게 구출될 것을 우려한 볼셰비키는 황제 일가를 이리저리 옮겼다. 그리고 이들이 최후로 도착한 곳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였다.

한편 니콜라이 2세는 착용하고 있던 군복에서 견장을 착장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감시 군인들은 황녀들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기 위해 울타리에 음란한 낙서를 해놓았다. 1918년 4월 황제 일가는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으나, 당시 막내 알렉세이 황태자혈우병 탓에 즉시 가지 못했고 이후 누나들과 함께 이송되었다고 한다. 한편 장녀 올가, 차녀 타티야나, 4녀 아나스타시야는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보석들을 모두 옷 속에 꿰메어 두었다. 실제로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수색을 받고 각종 물품들을 빼앗겼지만, 옷에 숨겨 둔 건 빼앗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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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볼스크에서의 타티야나, 알렉산드라 황후, 올가

1918년 5월 이파티예프 하우스에 수감된 황실은 상당수의 노동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볼셰비키들은 그들을 엄격히 감시했다. 러시아어 이외의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황제 일가가 소지하고 있던 사진기 등의 소지품도 압수되었다. 이파티예프 하우스의 창문도 모두 봉쇄된 상태로 통제되었고 그나마 황제의 방에 있던 창문 하나를 열 수 있게 되었다. 경비병들은 언제든지 수감자들의 방에[3] 들어갈 수 있었으며, 황제 일가는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벨을 눌러 경비병을 호출해야 했다. 청소를 위해 고용된 가정부들은 청소하는 동안 황족과 대화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고, 볼셰비키 경비병들은 황제 부부의 침실 옆 사령관실에 피아노를 가져다두고 혁명가를 불렀다. 볼셰비키 경비병들에겐 이파티예프 하우스와 그 반대편의 포포프 하우스 지하실에 성관계와 음주를 위해 외부 여성을 데려오는 것이 허가되었다. 황제 일가가 살해될 당시 저택 경비병은 거의 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황녀들은 수감 생활 중 경비병들과 차를 마시며 가족에 대해 물어보거나 망명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등 감시하던 군인들과 나름의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특히 3녀 마리야는 군인들에게 말을 걸고 친해지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한 군인은 마리야를 구출해 결혼하고 싶어했고 생일 케이크를 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에 따르면 군인들과의 대화 도중 한 군인이 음담패설을 내뱉었는데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작은언니 타티야나가 울면서 뛰쳐나가자 마리야는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감시 책임자가 교체되면서 군인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금지되었다.

3. 비극적인 죽음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1918년 7월 중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예카테린부르크로 진군해 왔다. 이에 원래 재판을 거쳐 황제를 처형하려고 했던[4] 볼셰비키들은 이들이 황가를 구출하러 온다고 믿고 황제 일가의[5][6] 전원 처형을 서둘렀다. 6월 29일 우랄 소비에트는 회의를 통해 황제 일가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는데 황제뿐 아니라 황제의 처자식까지 처형하는 것은 인도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이를 비밀로 부쳤다. 7월 14일 처형 책임자 야코프 유롭스키는 처형을 위한 준비를 거의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시신처리반을 이끌 표트르 예르마코프와의 협의를 통해 마을 외곽에 시신을 유기하기로 결정했다. 유롭스키는 총 11명의 수감자(니콜라이 2세 가족과 일행 4명)을 효율적으로 처형하기 위해 탈출이 불가능하게 밀폐된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을 처형장소로 결정했으며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창문에 빗장을 달았다. 또한 유롭스키는 처형 과정에서 집행인들이 여성을 강간하거나 시신에서 보석을 찾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도 고려했다.[7] 유롭스키는 선발된 사형집행인들에게 권총과 총검을 나눠주고 심장 부분을 쏴서 최대한 신속하게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7월 16일 우랄 소비에트 위원회는 유롭스키에게 '적군(혁명군)이 사방에서 패퇴하고 있으니, 더 이상 처형을 미룰 수 없다.'는 전보를 보냈다. 이에 처형 준비를 마친 유롭스키는 당시 주방에서 일하던 14살 소년 레오니트 세드네프(Леонид Седнев)에게 짐을 챙겨 삼촌을 만나러[8] 떠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레오니트는 알렉세이 황태자의 놀이친구였기 때문에 황제 일가는 이를 못마땅해했다. 유롭스키는 레오니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일가를 달랬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했던 것인지 죽기 몇 시간 전에 쓴 일기에 "우리는 그 소년을 다시는 못 볼 거야"라고 기술했다.
7월 17일 자정에 가까워진 무렵 유롭스키는 황실의 주치의였던 예브게니 봇킨 박사에게 황제 일가를 깨우도록 했다. 유롭스키는 "안전을 위해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둘러대며 황제 일가를 지하실로 안내했다. 알렉산드라 황후와 알렉세이 황태자는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의자를 요청했으며 볼셰비키들은 의자를 가져다 주었다. 몇 분 후 처형집행대가 나타났고 유롭스키는 니콜라이 2세에게 처형 통보를 했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씨. 반혁명 세력이 당신들을 구출하려다가 실패했소. 이에 따라 우랄 노동자 소비에트는 당신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

이때 니콜라이는 유롭스키가 가져온 자동차의 소음 때문에 통보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라고[9][10] 반문했지만 유롭스키와 부하들은 짤막하게 통보를 반복하고 황제 일가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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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는 가슴에 총알이 3발 이상 명중당해 즉사했고 예르마코프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머리에 총을 쏴 죽였다. 둘째 황녀 타티야나는 옆문으로 도망쳤으나 예르마코프가 쏜 총에 허벅지를 명중당했다. 총알이 지하실 벽 여기저기를 명중하며 온갖 연기와 잔해들이 발생했고, 처형자들은 연기가 잦아든 후 피해자들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총알이 명중해 즉사했지만 황제의 자녀들은 멀쩡히 살아있었다. 처형자들은 총검을 사용해 황녀들과 황태자를 찔렀지만 옷 속의 보석의 방검효과로 몸통을 파고들지 않았고 결국 총을 사용해야 했다. 유롭스키의 부하 니쿨린은 의자에 앉아 겁에 질려 있던 알렉세이에게 권총을 쏘았는데 옷 속의 보석의 방탄효과 때문에 총알이 빗나가자 유롭스키는 니쿨린을 밀치고 알렉세이의 머리에 총을 쏘아 살해했다. 이후 서로 부둥켜안고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던 장녀 올가와 차녀 타티야나도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으며 셋째 마리야와 넷째 아나스타시야는 겁에 질려 베개로 얼굴을 감싼 채 구석에 웅크려 있다가 피살되었다. 하지만 마리야는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11] 깨어나 비명을 질렀는데 이 때 볼셰비키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마리야의 얼굴을 마구 구타해 죽였다고 한다. 차르 일가를 모시던 하녀 안나 데미도바는 보석이 든 베개로 자신을 방어하려다가 총검에 찔려 숨졌으며 주치의 봇킨 박사, 요리사 이반 하리토노프, 하인 알렉세이 트루프까지 모조리 살해당했다. 조사에 따르면 처형에 약 70발의 총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4. 암매장

유롭스키는 니콜라이 일가와 하인들의 전원 사망을 확인한 후 미리 준비된 들것에 시신을 날랐다. 이 과정에서 예르마코프가 데려온[12] 시신 처리반 중 일부는 보석을 찾기 위해 시신을 뒤지거나 황후의 치마를 들추었고, 유롭스키는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이후 시신들을 잔디밭에 눕히고 옷을 벗겨 옷은 모두 불태워 버렸고, 그동안 옷속에 숨겨둔 보석들은 유롭스키가 회수해 크렘린으로 보냈다. 한편 마리야에게서는 어떤 보석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마리야가 경비병들과 친밀히 지내면서 다른 가족들로부터 약간의 불신을 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볼셰비키들은 시체들에 황산을 뿌려 시체를 완전히 훼손하고 폐광에 던진 후 수류탄으로 폐광을 무너뜨리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유롭스키는 시신을 파묻은 구덩이가 너무 얕다고 판단하여 예카테린부르크 서쪽에 위치한 구리 광산에 다시 파묻기로 결정했는데, 이 구리 광산은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갱도의 깊이 자체도 더 깊어서 시신들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7월 18일 오후 10시쯤 체카와의 협의를 위해 숙소에 가 있던 유롭스키가 다시 돌아왔고, 시체들은 다시 끄집어내져 트럭에 실렸다.

볼셰비키들은 시신들을 트럭에 싣고 서쪽의 구리 광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트럭이 진흙에 갇히고 말았다. 이 때쯤부터 이미 지쳐 버린 사람들은 유롭스키의 지시에 불응하기 시작했고, 결국 유롭스키는 트럭이 멈춘 길 밑에 황제 일가를 매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깊이 60cm 정도의 구덩이를 팠고 시신에 다시 황산을 부어 철저히 훼손하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박살낸 뒤 시신들을 매장했다. 매장 후 나무 침목을 땅에 파묻음으로써 황제 일가의 매장작업이 완료되었다. 한편 유롭스키는 혼란을 주기 위해 황태자 알렉세이마리야의 시신을 약간 떨어진 곳에 따로 매장해, 1991년 황제 일가가 공식 발굴되었을 때 총 11구의 시신 중 9구만 발견되어[13] 아나스타시야와 알렉세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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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를 조사하는 백군
황제 일가가 처형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이끄는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점령했고 곧바로 조사에 돌입하여 황제 일가의 몇몇 소지품과 절단된 유해들을 발견했으나 매장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백군은 적군에 밀려 패배했고 소련 당국이 사건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황제 일가는 80년 가량 암매장되었다. 사실 1979년 아마추어 발굴가들이 황제 일가의 무덤을 찾아냈으나 당시는 여전히 소련 치하였기 때문에 이를 비밀에 부쳤다.

5.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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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로부터 7년이 지난 1998년 러시아 당국은 DNA 검사를 통해 1991년 발굴된 유골들이 황제 일가의 유골이 맞음을 발표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사망한 지 80년 만인 1998년 7월 17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추모사에서 "황제 일가의 죽음은 러시아/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아나스타시야와 알렉세이를 제외한 차르, 차리나와 세 딸들은 모두 로마노프 황가의 묘역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당에 안장되었다. 2000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을 "황실 수난자(Царственными страстотерпцами)"로 인정하여 시성했고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알렉세이 트루프를 제외한 나머지 하인들도 시성했다. 2008년 러시아 대법원은 "황제 가족이 부당한 정치 탄압으로 인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리며 정치적 복권도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 판결에 소련 공산당의 후신격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반발했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자신들의 흑역사를 들추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던 아나스타시야와 알렉세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고, 실제로 안나 앤더슨 같은 사기꾼들이 더러 등장했다. 하지만 2007년 황제 일가가 발견되었던 매장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유골 2구가 추가적으로 발견되었고 확인 결과 1구는 알렉세이, 다른 1구는 마리야의 유골로 밝혀졌다. 즉, 이전에 마리야의 것인 줄 알았던 유골이 사실 아나스타시야였다. 이로써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1918년 7월 17일에 전원 처형되었음이 공식 확인되었다. 현재 마리야와 알렉세이는 러시아 정교회 측의 추가적인 요구로 DNA 검사를 거치고 있어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황제 일가가 살해당한 이파티예프 하우스는 현재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황제 일가를 추모하는 피의 성당이 들어섰다.

6. 누가 지시를 내렸는가?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을 지시한 한 사람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먼저 강경파였던 트로츠키가 의심 받았으나, 회고록에서 오히려 레닌이 명령했다는 정황을 남겼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예카테린부르크가 체코 군단(반혁명군)에게 함락된 이후에, 레닌에게 차르 일가의 상황을 물었고, 레닌은 "차르 일가는 끝났다네. 모두 다."라고 짧게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이 때문에 일부 반공주의자들은 레닌이 황제 처형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또한 황제 일가를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다가 백군의 위협으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처형에 동의했다는 설도 있다. 혹여 황실 처형 건이 레닌이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레닌이 알고 나서도 묵인했다는 건 사실로 보인다. 아니면 적당히 암시만 주어 아랫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움직이게끔 했을 수도 있다.

레닌 외에도 가장 가능성 높은 건 당시 예카테린부르크를 관할하던 우랄 소비에트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전국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이었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가 있다. 하지만 스베르들로프가 불과 1년이 지난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병사해버린 덕에 진실은 오리무중으로 넘어갔다.

1993년 러시아 연방의 공식 조사로는 레닌이나 트로츠키, 그리고 또 1명의 유력한 후보자인 스베들로프의 공식 명령은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이때는 소련 해체의 주역 보리스 옐친 집권기라서 소련을 흑역사로 간주하고 악마화하던 시절이라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리는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소련 지도부를 악마화하려던 입장에서도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를 못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문서화할 수도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기도 했고, 볼셰비키 입장에서도 가족까지 처형한다는 것은 훗날 크게 욕먹을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사후 문서화 역시 따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 사실 니콜라이 2세도 망명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고 한다. 영국 망명의 좌절은 한동안 영국 내각의 주도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국왕 조지 5세가 평판이 추락할대로 추락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받아줬다간 자국민들의 민심이 격앙될 것을 우려하여 오히려 망명을 추진하고 있던 내각을 제지한 결과였다. 물론 이후 니콜라이 2세 일가 몰살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알게 된 조지 5세는 그들의 망명을 받아주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이후 튀르키예 독립 전쟁 여파로 그리스 왕국 왕정이 폐지되자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스 왕국에 있던 왕실 친적들을 구해낸다.[2] 이는 당시 소요사태가 점차 격렬해졌기 때문에 황제 일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추정된다.[3] 사령관이 야코프 유롭스키로 교체된 이후에는 오로지 유롭스키만이 방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4] 재판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레프 트로츠키가 검사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설이 있다.[5] 사실 황제 가족까지 처형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인도적으로 비판받는 부분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 황태자뿐 아니라 황녀 1명이라도 구출될시에는 이미 차리나(여성 차르)가 통치한 전례가 있는 러시아의 정서상 백군의 구심점이 될 것이 뻔했고 이 때문에 일가족 전체를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볼셰비키에서도 가족까지 처형한 것은 비합법적인 학살 행위임을 인지했기 때문에, 이후 황제의 처형은 발표해도 "황제의 처자식은 안전한 곳으로 이송되었다"고 거짓 발표를 하기도 했다.[6] 볼셰비키는 황제 일가의 처형에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제 지지파가 보낸 것으로 조작된(실제로는 체카가 작성한) 불어로 된 편지를 니콜라이에게 보냈고 니콜라이가 이 편지봉투에 답변을 적자 이것을 황제 일가를 처형할 추가적인 빌미로 삼았다.[7] 이전에 보석들을 압수했지만 추가로 보석을 숨긴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8] 이는 볼셰비키들이 그 소년까지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9] 이때 알렉산드라 황후첫째 황녀 올가는 이를 제대로 알아듣고 성호를 그으려 했다고 한다.[10] 빅토르 세르주는 니콜라이 2세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라고 했다는 앞의 말과 사뭇 다른 기록을 남겼다.[11] 총알이 빗나가서 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12] 시체 운반을 위해 동원된 자들은 황제 일가가 모두 죽은 것을 보고 분노했다고 한다. 물론 황제를 죽여서가 아닌, 본인들도 살해에 동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3] 최초 발견 당시에는 아나스타시야의 유골이 마리야의 것인 줄 알았으나, 2007년 2구의 유해가 추가적으로 발견되며 이전에 발굴된 유해 중 1구가 아나스타시야였음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