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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r Nationalismus / German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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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통적으로 독일의 내셔널리즘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내셔널리즘과 차이가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의 내셔널리즘의 경우는 비록 초기에는 백인우월주의적 요소가 있었을지언정 최소한 같은 백인끼리는 혈통을 따지지 않고 시민 내셔널리즘(civic nationalism) 성격이 강한 반면에, 독일의 경우 종족 내셔널리즘(ethnic nationalism)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모든 독일 내셔널리스트들이 극단적인 종족적 민족주의자는 아니었기에 낭만적 내셔널리즘(romantic nationalism)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1]독일 내셔널리즘은 게르만 내셔널리즘과 같은 의미이다. 실제로 영어명인 German[y]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독일은 게르만 민족의 국가로 여겨지고 있다.
2. 역사
2.1. 독일 민족의 성립
독일 내셔널리즘과 독일 민족(Volk) 개념은 칸트에 영향 받은 자유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의되었으며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를 비롯한 낭만적 내셔널리즘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 민족주의는 외세를 배척하며 독일 민족의 혈통을 보존한다는 종족적, 인종적 성격이 강화되었고 시민적 요소는 약화되었다.2.2. 19세기
자세한 내용은 독일 통일 문서 참고하십시오.19세기 초기 까지만 해도 자유주의, 개혁주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아닌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의식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1830년대에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독일 민족주의가 점차 확립해나가기 시작한다.
전통적 보수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1848년 혁명으로 내셔널리스트들은 독일 정치의 주류이자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봉건주의에 맞서 국민국가를 건설한다는 측면에서 유럽 각국의 자유주의 운동은 종종 내셔널리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독일 내셔널리스트들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생겨난 반프랑스 감정,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공포심에 기반한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후 권위주의적인 근대적 보수주의자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독일 보수주의자들도 급진적 자유주의 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내셔널리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소독일주의에 기반한 독일 내셔널리즘은 독일 통일의 주된 발판이 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의 내셔널리즘은 그 이전의 리버럴 자유주의자들의 내셔널리즘과 달리 반자유주의적, 반사회주의적, 반유대주의적 반가톨릭주의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보수적인 독일 내셔널리스트들은 개신교 정체성도 강했는데, 이에 따라 가톨릭 독일인들이 미개한 가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문화투쟁을 벌여서 가톨릭을 탄압하였다.
2.3. 20세기
1933년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의 아돌프 히틀러. |
이 시기의 독일 내셔널리즘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비스마르크의 현실주의를 무시한 빌헬름 2세의 팽창주의 정책은 주변 강대국들로 하여금 독일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 패전 이후 배후중상설과 보수혁명 운동이 유행했는데, 이것은 나치가 집권할 사회적 풍토를 제공했으며,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각종 전쟁범죄들은 독일에서 내셔널리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결과적으로 68운동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독일 내셔널리즘은 점점 독일 정치에서 배척받게 되었다.
2.4. 현대 독일
나치즘의 기억 때문에, 현대 독일에서 내셔널리즘은 주로 극우 이념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내셔널리즘"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에서 내셔널리즘, 국뽕이라고 불릴 요소들조차 독일에서는 내서널리즘이라 안하고 "애국주의"라고 애둘러 표현한다.# 대놓고 "내셔널리즘"을 옹호하는 경우는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극우 세력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하는 것은 아예 금기시되지만 국가적 자존심을 옹호하는 것은 비정치적인 케이스의 경우 금기시되지 않는 경향도 있다. 따라서 독일인들은 월드컵 기간에 자국에 대한 애국주의적 열정으로 드러내기도 한다.독일 재통일은 일정 부분 독일의 민족적 정체성("Volk")에 기반한 것이였기 때문에 독일 내셔널리즘의 사례에 속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이것을 내셔널리즘 담론과 엮는 것을 꺼리며 그저 동독 주민들이 통일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독일은 세계적 기준으로 봤을 때 애국 지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2]
3. 오스트리아의 독일 내셔널리즘
Deutschnationalismus같은 독일어권에 속하는 오스트리아에도 독일 내셔널리즘이 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오스트리아 내셔널리즘'과는 다른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프랑크 왕국부터 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까지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같은 서게르만계 민족으로 같은 독일 문화권이었으니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이뤄야 한다는 관념은 과거 신성 로마 제국 시기부터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독일어권이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으로 양분되자 정치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러 이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동군연합으로 거느린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들 영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가히 살아 있는 역사이자 유럽 최고의 명문가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갑툭튀한 왕실인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의 아래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당시 독일 내셔널리즘은 다민족 연합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주의와 단일한 독일인만으로 이루어진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소독일주의로 나뉘었으며, 여기에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안에서도 여러 의견이 갈렸다.
그러던 중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프로이센의 주도로 소독일주의에 기초한 독일 민족의 통일 국가인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소독일주의의 승리로 독일 제국이 들어선 후에도,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독일 내셔널리즘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양쪽 모두 궁극적으로는 언젠간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지역이 내셔널리즘에 의해 통일 독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상당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방대한 영토, 특히 상공업이 발달한 보헤미아 왕국을 잃어 나타난 경제적 곤란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과 전통적인 독일 내셔널리즘이 결합해 다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관념이 나타났다.[3] 하지만 승전한 협상국의 반대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단일한 국가를 만드는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나, 1933년 독일에서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는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 논의가 진전되기 시작했고 이는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마침내 실현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이와 같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환 환영에 대해 독일군은 '꽃의 전쟁’(블루멘크리그: Blumenkrieg)이라고 불렀다. 사실, 당시 일부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과 불법화되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일부를 빼면, 오스트리아 주민 대다수가 독일 내셔널리즘과 독일과의 통일을 지지했다. 오스트리아의 당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주민들이 가지는 충성의 대상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왕조가 만든 대독일 국가였기 때문에 독일과의 병합으로 대독일주의인 통일 독일이 목전에 다가오자 압도적인 지지로 병합을 지지했다. 지지율이 높았던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합병은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패한 이후로 없던 것이 되었는데, 연합국은 1943년 모스크바 선언에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무효로 선언했다. 주민들의 의견이 어떻든 승전국인 연합국 측에서 무효라 정한 이상 2차 대전의 패전 이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된 상태는 유지될 수 없었다. 연합국의 승전과 함께 오스트리아 병합은 그 자체가 흑역사화 된 셈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에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도 독일 내셔널리즘 성향이 있는 오스트리아 자유당처럼 독일 내셔널리즘에 입각해 자신들이 독일인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인인지를 묻는 독-오통일 의식을 가진 이들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4. 내셔널리즘 기반 주요 사건
- 1848년 혁명 (1948~1849)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 독일 통일 (1871)
-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 뮌헨 폭동 (1923)
- 나치당 집권 (1933)
- 오스트리아 병합 (1938)
-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 독일 재통일 (1990)
5. 독일 내셔널리스트 정당
명칭 통일을 위해 nation을 민족으로 번역한다.[4] 가나다순 정렬.5.1. 과거의 정당
- 독일 민족인민당
- 독일 조국당 (Deutsche Vaterlandspartei, DVLP)
- 독일 인민당
-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민족사회협회 (Nationalsozialer Verein, NSV)
- 민족자유당 (Nationalliberale Partei, NlP)
5.2. 현재의 정당
오스트리아 자유당이 독일 내셔널리즘, 범독일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21세기 와서는 독일 내셔널리즘보단 오스트리아 내셔널리즘 성격이 더 강해지고 있다.
6. 저명한 독일 내셔널리스트들
- 리하르트 바그너
- 막스 베버
- 빌헬름 2세
- 아돌프 히틀러
- 아르미니우스 - 기원전 인물이지만 게르만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 에른스트 니키쉬 (Ernst Niekisch) - 독립사회민주당, 독일공산당, 나치당 등에서 활동한 민족 볼셰비키주의자이다.
- 안톤 드렉슬러
- 오토 슈트라서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카를 되니츠
- 카를 하우스호퍼
- 프리드리히 나우만
7. 같이 보기
- 폴크 (Volk, 민족)
- 푈키셔 내셔널리즘 (Völkischer nationalismus)
- 대독일주의
- 소독일주의
- 범게르만주의
- 독빠 (Germanophile)
- 독일국
- 독일인의 조국은 무엇인가
- 동방식민운동
-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알자스-로렌, 주데텐란트 - 독일 내셔널리즘과 연관이 있는 지역들이며, 과거 직접 통치하거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현재 해당 영토 모두 독일이 실효 지배하지 않고 있으며, 독일에서도 내셔널리스트들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는 영유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 페기다
- 라이히스뷔르거 운동
- 반유대주의
- 안슐루스
-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
8. 둘러보기
사회주의 | 자유주의 질서자유주의 | 보수주의 독일 내셔널리즘 프로이센 사회주의 |
[1] 한국 내의 전통적 민족주의 운동은 미국,프랑스보다 독일 내셔널리즘의 경향성에 더 가까운데, 이는 독일을 롤모델로 삼은 일본 제국의 민족주의 자체가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핏줄이라는 인종과 혈통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이에 저항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조차 일본을 부정하면서도 한민족이라는 혈통을 중시해왔다. 현대 일본도 이민에 대해 껄끄러운 태도나 문화적 동질성 중시 등 시민 내셔널리즘보다는 낭만적 내셔널리즘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2] 물론 내셔널리즘을 반대할 뿐이지, 독일 시민들의 자국 정부나 사법, 국가에 대한 신뢰도는 선진국 중에서도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3] 이는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을 암시하는 조문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2조(영토) 국토는 독일 각 주(州)의 영토로써 성립한다. 만일 다른 지역의 인민으로서 그 자결권에 의하여 병합을 원할 때에는 국가법률에 의하여 이를 국가에 편입할 수 있다.[4] 가령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독일 국가인민당, 독일 국민자유당, 독일 민족민주당에서 각각 국가, 국민, 민족은 사실 같은 nation으로, 한국에서 각기 번역을 달리한 것 뿐이다. 즉 독일 내에서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러안 혼동의 여지를 방지하기 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