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8:37:19

아돌프 히틀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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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히틀러의 능력3. 정치적 능력4. 행정 능력5. 군사적 능력
5.1. 히틀러의 군사적 평가
5.1.1. 긍정적 평가
5.1.1.1. 1940년의 '낫질 작전'
5.1.2.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
5.1.2.1. 모스크바 공격 거부5.1.2.2. 1941년 키예프 전투5.1.2.3. 쿠르스크 전투5.1.2.4. 라트비아 북단에 고립되어 있던 쿠를란트 집단군을 빼오지 않은 것
5.1.3. 부정적 평가
5.1.3.1. 소련 공격과 대미 선전포고5.1.3.2. 공수부대 투입을 꺼림5.1.3.3. 신무기 도입 중지5.1.3.4. 바르바로사 작전5.1.3.5. 청색 작전 말아먹기5.1.3.6. 동부방벽 건설 거부 (1943년 3월~8월초)5.1.3.7. 이해할 수 없는 폭격기 중시 사상5.1.3.8. 바그라티온 재앙5.1.3.9. 모르텐 삽질5.1.3.10. 아르덴 공세5.1.3.11. 히틀러의 마지막 뻘짓 '발라톤 호수 공세'
6. 미술적 능력7. 결론8.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9. 참고 문헌

1. 개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다.

2. 히틀러의 능력

히틀러는 분명 한때나마 유럽 대부분을 군사적으로 석권했다. 전성기에는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나치 독일추축동맹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독소전쟁 개전 초기에는 유럽 러시아 영토마저 거의 점령할 뻔 했다. 본국과 점령지에서 저질러진 전쟁 범죄들을 배제한 채 순수 국력만으로 비교한다면 짧게나마 독일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룬 지도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최전성기 때 나치 독일 인구는 9200만에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동맹국과 괴뢰국을 합치면 소련의 인구와도 맞먹었다.[1]

그러나 사악하고 부실한 이념과 무력에 의존한 대제국은 허상에 불과했으며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부전선을 마무리짓지도 못한 상황에서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과소평가하여 섣불리 침공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종말을 앞당겼으며,[2] 독선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군사적 실책을 저지르며 결국 독일에 폐허만을 남긴 채 자살했다.

3. 정치적 능력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어떤 사람이 스탈린에게 히틀러가 "정신병자였는지 아니면 모험가였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가 모험가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미치광이였다는 점에 동의할 수 없다. 히틀러는 재능있는 사람이었지. 단지 재능있는 자만이 독일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법이야!"[3]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히틀러가 아무런 기반이 없는 무능력자였다면 나치당에서 당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나치당은 맥주홀 폭동 이후에 그저 수없이 사라져간 듣보잡 극우정당 중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서도 나치당에서 재건 전에 모든 시도를 해봤으나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졌고[4], 히틀러 없이는 구심점도 없고 선동적인 연설로 흥행도 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

사실 히틀러가 한창 떠오를 때에도 그를 길거리에서 난동 피우는 정치깡패의 우두머리라며 무시했던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는 좌우를 가리지 않아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해서 서로 싸워대는 바람에 정당이 해산당하는 운명을 맞아했고,[5] 우파도 별다를 바는 없어서,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나치당을 한날 군소정당 정도로 여겨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든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탐탁치 않게 여겨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하는 걸 거부해서 집권하는 걸 노골적으로 방해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의 정통 보수세력, 수구세력에서도 히틀러를 하찮게 여겼던 정치인들이 많았고, 히틀러가 집권한 원인도 보수정치인들이 히틀러를 방패막이로 삼으면 대공황 발발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걸 피하면서 집권을 연장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행정경력이 없던 히틀러를 주물러서 꼭두각시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대부분 히틀러의 정치력에 차례차례 굴복하거나 숙청되었고, 파펜을 비롯해 히틀러를 이용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던 정치인들은 뒷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찌보면 히틀러의 가장 뛰어난 능력 중 하나가 이렇듯 권력을 잡는 정치질 능력이었는데, 이를 얕보고 이용하려다가 피본 사람들이 많았다. 히틀러는 필요에 따라 다른 정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줄도 알았고 비위도 맞출 줄도 알았다. 협박이나 겁박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인을 살살 구슬려서 타협을 할 줄도 알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상에서 미치광이처럼 연설을 하는 선동가 히틀러의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밀실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협잡을 하거나 권력을 잡는 정치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히틀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치당 집회 시 히틀러가 없을 때나 연설 금지령을 먹었을 때는 모이는 사람 숫자 단위와 모금액이 크게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1년여의 수감기간 후에 나치당이 재건될 때에도 별다른 반대 없이 당내 절대적 존재로 재추대된다. 물론 1930년 선거에선 지지율이 3.0% 미만으로 떨어지는 시련도 있었다. 집권과정에서는 미국발 대공황과 대통령 비상체제라는 예측 불가능한 운빨이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잡아 챈 것도 능력이다. 당장 2.6%에 불과한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당내에서 히틀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심지어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1921년부터 몰락하기 직전인 1945년 4월까지도 히틀러에게 대놓고 도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그의 권위는 매우 확고했다.

한때 총애를 받다 숙청된 한프슈탱글이나 오토 슈트라서까지도 히틀러의 이런 능력을 인정한다. 학습이나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본능이나 감으로 상대방이나 대중심리를 잡아냈다고. 누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지 세력균형이 어떠한지 약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집권 시에도 블러핑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켰고, 상대진영의 병림픽과 세력구도 역학관계를 잘 파악했으며 마치 오늘날의 북한을 연상케하는 벼랑 끝 전술과 도박에 가까운 무모함에 질린 상대방이 굴복하게 만드는 역량도 뛰어났다. 이러한 전법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병 시까지 잘 통했다.[6]

애초에 복잡한 독일의 정치지형을 분석하고 각 정파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집권전략으로 삼은 것도 보통 지략이 아니면 힘들다. 그를 다른 정파의 수장들이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집권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을 공적으로 만들며 극우뿐만 아니라 우익들을 모두 휘어잡아 총통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을 잘 탄 운빨뿐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정치적 재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7]

히틀러 연구자 이언 커쇼는 히틀러를 현실과 그리 동떨어진 인물이 아니며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고 두뇌회전이 빨랐던 사람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흔히 주변의 아첨꾼들한테만 히틀러의 말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하지만 냉정하고 비판적인 노련한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사안을 신속하게 파악하는 히틀러의 비상한 두뇌에 혀를 내둘렀다는 증언이 많다.

1933년 총리 취임 후 국제 무대에서 히틀러가 거둔 몇 차례의 승리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히틀러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히틀러의 무기는 국내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과감한 승부사 기질이었고, 나치당 선동가 시절부터 즐겨 써 온 공갈 협박도 잘 먹혀들었다.

그러나 계속된 외교적 승리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이은 군사적 승리로 인해 히틀러는 스스로가 ‘무오류의 인간’이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들었으며 모든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점 더 큰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모한 도박의 결과는 독소전쟁을 통해 한계를 드러냈고, 이전까지 출세길을 열어준 '전부 아니면 전무' 식으로 타협을 하지 않던 자신의 지도력을 신봉하던 히틀러는 궁지에 몰렸다고 협상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협상이나 타협은 없다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여 그와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갔다.이래저래 최고의 독재자도 오만해지면 똑같이 망한다.

4. 행정 능력

나치즘이 반관료적인 성향을 보인 것처럼 히틀러도 당연히 행정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지배에 대한 권력욕은 컸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선 행정적인 면은 '무능을 넘어선 무관심'이었다. 관료적인 체제를 박살냈지만 다른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건 아니고 '예술가'를 자처한 만큼, 항상 즉흥적 판단이나 어려울 경우 최대한 질질 끌거나 부하들의 영역이나 권력 다툼에선 방관하다가 이기는 사람 편을 들어주고 건축 프로젝트 같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선 기존 행정체제를 무시하고 항상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의 행정은 중첩되고 혼란스러웠으며 비효율적이었다.

그의 정치적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무렵, 그는 상당한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자리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유능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이 모자랐다. 이는 기본적으로 히틀러의 가방끈이 짧아서 전문지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지성을 갖출 시간을 갖지 못했고, 게다가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군사작전의 그림을 보는 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히틀러 집권 이후 제3제국은 대공황에서 비롯된 경제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군대를 확장하고, 이런저런 군수공업을 일으키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나 철도를 대규모로 확충하느라고 많은 실업자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틀러 본인은 무능했지만 측근인 하인리히 힘러루돌프 헤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8] 같은 자들은 나름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실무를 맡아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시된 것이었으며[9], 메포어음 같은 무책임한 물건이나 전 국민 상대로 뿌려댄 결과였고 군수투자는 다른 산업에 파급 효과가 작기 때문에 침략이 필연적이었다. 또한 몇몇 정책은 단기적인 정책에 불과했다.[10] 1930년대 당시 독일 정부는 무리한 군비 재확장으로 파산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독일 군부가 준비 부족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미온적이었음에도 히틀러가 밀어붙인 것은, 바로 전쟁으로 한 몫 챙기지 않는 한 독일 정부는 파산하고 자신도 하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박이 성공하고 나서는 군부에선 폴란드 침공에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소련 침공 때도 동조했다. 이런 동조는 제3제국의 파멸로 이어졌다.[11]

게다가 나치당이나 제3제국의 하부조직들은 자신들의 지도자[12]를 따라 반목을 거듭했으며, 합심해서 총력전을 벌여야 할 때 낭비적인 자존심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엉성한 행정 때문에 1943년까지 독일은 독재국가인 소련뿐만 아니라 민주국가인 영국이나 미국도 실시하던 전 산업의 총력전 체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군수상이 된 이후에야 어느 정도 정리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불렀다.

결론적으로 히틀러 본인의 업무능력은 그저 그런 편이지만 집권 이후에 히틀러가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도박을 연이어 성공시켰기 때문에 행정에 무능했는데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인재들을 잘 활용한 승리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인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떨어졌을 뿐더러, 히틀러는 엄청나게 위험한 망상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5. 군사적 능력

먼저 주의할 점은, 이런 능력 평가에 있어서 시대를 잘 만났을 뿐이라거나 상대가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막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은 모두 시대적 흐름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올라타 이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지 그러한 배경이 없이 맨땅에 뚝 하고 떨어뜨려놓았을 때도 동일한 결과를 거둘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도 독일이 군사 강국이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의견은 근본적으로 제외하도록 한다.

단순한 결과만 두고 보면, 히틀러는 나폴레옹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하게 넓은 영토를 손에 넣었다. 동맹국의 강역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나폴레옹보다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군사학에 남긴 흔적을 제외해도 명백하다.

물론 히틀러에게 군사적 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 유럽 대륙의 장악이라는 건 단순히 누군가 운이 좋아서 이룩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 실제로 히틀러는 슈투카에 싸이렌을 달아서 재미를 보거나,[13] 스스로 스케치한 유럽 전선 서부 방벽에 대한 토치카는 아마추어가 그린 주제에 육군 사령부의 이의 없이 원안대로 채택된 적도 있었다.[14] 다른 장군들과 달리 파드칼레가 아닌 노르망디연합국의 상륙 가능성이 있다 판단하기도 했고,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공세가 나치의 바르바로사 작전 3주년인 6월 22일쯤 시작되리라고 예상하는 날카로운 면모도 분명 있었다.

문제는 상기한 사례에서도 발견되는 히틀러 특유의 아마추어리즘이다. 실제로 히틀러가 에리히 폰 만슈타인낫질 작전을 승인하거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예측했던 건 사실이지만, 정작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휘하 장군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이런 아마추어리즘은 히틀러의 최대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체코 병합이나 폴란드 침공처럼 군사적 상식에 얽메이지 않는 폭발력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대신 실수를 제거하는 쪽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히틀러의 특징은 그가 전문적인 군사 장교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물론 역사를 돌아보면 별다른 군사 교육을 받지 않고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당시의 군사적 상식을 습득하거나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명장도 분명히 드물지 않다[15]. 허나 히틀러는 어느 정도 군사적 식견이 존재할 뿐 본인의 다른 능력들을 제외하더라도 명장이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을 만한 불세출의 군사 천재는 아니었으며, 이런 점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히틀러의 발목을 잡게 된다.[16]

나치 독일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히틀러는 이런 자신의 아마추어리즘에 오히려 모종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히틀러 자신이 제창한 스스로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주장은, 자신이 1차대전 당시 참호에서 근무한 경험 덕분에 책상머리에 앉아 끙끙대는 장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 덕분에 히틀러는 줄곧 프란츠 할더를 비롯한 참모 장교들과 의견이 충돌하면 실전 경험도 없는 주제에 떠든다고 모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의지가 부족한 겁쟁이라며 까내리고는 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할더에게 엄청난 욕설을 퍼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할더, 당신은 뭘 하자는 건가?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회전의자에 앉아만 있던 당신 같은 자들이 나에게 감히 군대에 대해 논하고 있단 말인가? 당신 같은 사람들은 단 한 번이라도 전상 흑장[17]을 달아 본 적이 있는가!"

히틀러의 이런 면모에 대해 빌헬름 카이텔과 같은 아첨꾼들이 불세출의 군사적 영웅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운 덕분에 그런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고, 초창기엔 기발한 작전을 알아보고 승인해 나치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승리에 의한 낙관주의 + 거기에 반해 악화되는 전황 등으로 인하여 기세가 꺾인 히틀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몰락하고 만다.

정리하자면, 히틀러는 순수한 군사적 능력엔 부족함이 있지만 기발한 책략을 내거나 승인할 만한 식견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발한 책략이 독일 지휘관들의 우수한 전술적 능력과 결합되어 완수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대박을 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여타 지휘관처럼, 혹은 아마추어답게 그 이상으로 승리에 중독된 히틀러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합리적인 식견을 제공하던 참모들의 진언을 점차 무시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파멸에 일조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평가를 두고 언제나 재평가 여론이 존재하는 건, 까놓고 말해 나치 독일의 성공에 있어 히틀러의 그 직감이 필수불가결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으레 전술적 능력이 탁월하면 당연히 전략적 능력도 탁월하리라 지레짐작하지만 당시 독일의 군사귀족들에겐 히틀러만한 전략안도 없었다.

흔히들 히틀러는 왜 스탈린이나 루즈벨트처럼 전문적인 군사 이론가들 사이에서 의견 조율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견이 있는데, 미국이나 소련과 달리 당시 융커들의 전략안은 '전술 단위에서 적들을 갈아버리면 최종적으로 전략 단위에서 유리함을 얻을 수 있다' 이상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장 히틀러의 '도박수'와 융커들의 예측이 갈렸을 때 어느 쪽이 정답이었던 경우가 많은가 셈해보면 알 수 있는 점이지만, 애석하게도 사람들 상상 속의 냉정침착한 전쟁기계들이 내린 판단을 아마추어인 히틀러가 망쳤다고 말할 만한 사례는 정말로 손에 꼽으며, 오히려 그 반대 경우가 훨씬 많았다.

정치적 지도자가 군사적 문제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는 없고, 이는 샤를 드골을 제외한 당시 참전국 지도자 대다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히틀러에겐 그 전문적 식견을 넘치도록 보충해줄 전술적 지휘관들은 수도 없이 많았어도, 전략적 식견을 보충할 인재는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히틀러에겐 그 부재를 만회할 안목이 어느 정도 존재했으나, 그조차도 어디까지나 밀덕질과 군복무 경험으로 전문가를 흉내내는 아마추어로서 가진 능력에 불과했다. 아마추어나 하급 장교라도 기본적인 군사학 지식은 있는 만큼 나름대로 그럴싸한 계획을 만드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체계적인 참모 교육 과정과 지휘 경험 없이는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장의 상황을 온전히 예측할 수 없고 이는 군사적 패배를 거듭할수록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전까지 그 판단에 기대어 어마어마한 대박을 거둔 히틀러가 그 사실을 시인하는 대신 상기한 군사귀족들의 경우처럼 따서 갚으면 되지 하는 마인드로 무장했다는 점이고,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그 한 번의 역전승을 거두지 못한 채 몰락했다.

히틀러는 분명히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레벨의 이야기였으며, 작전이 실패했을 때 그 여파를 줄일 만한 전문적인 지식이 히틀러에겐 부재했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중재자 역할에 만족한 타국의 지도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그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물론 히틀러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으나, 스스로 그 결점을 만회하거나 전문적인 전략 수립 참모를 마련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만큼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히틀러의 뿌리 깊은 군부 불신을 고려하면 설령 당시 전략적 식견이 탁월한 지휘관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귀담아 들었을지 의문스럽다. 히틀러가 독일의 군사 천재들이 내린 판단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나치가 패배했다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히틀러는 좋게도 나쁘게도 약간의 재능과 현장 경험이 있는 밀덕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이런 점은 히틀러 본인이 지녔던 행정 체계에 대한 혐오와 (좋게 말하면) 예술가적 면모에서 기인했다는 평이 있다. 한 마디로, 히틀러에게 있어 전쟁은 국가의 이권을 두고 다투는 각축장이기 이전에 독일 민족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히틀러 자신은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독일 민족을 위한 구세주이자 위버멘쉬였으며, 때문에 예술적인 찰나적 번뜩임으로 상황을 타개할지언정 진득하게 앉아 군사학을 공부하는 건 아리아인의 영웅인 자신에겐 걸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실 정치와 군사 이야기하는 와중에 무슨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히틀러는 실제로 그런 인간이었다.

덕분에 히틀러는 순수하게 판단력이 필요한 분야에 대해선 순발력이 떨어져 군대를 넣고 빼는 능력이 매우 부실했다. 이 때문에 통솔력과 순발력이 뛰어난 에르빈 롬멜과 병력 운용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고,[18]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스탈린그라드에 억지로 집어넣는 병크를 터뜨리기도 했다. 파울루스 부대를 빼야만 하는 상황에서 넣어버린 것이다. 애시당초 OKW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진입보다는 장기인 기동포위로 고사 시키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시가지 진입을 고집했다. 결국 소련의 대규모 반격 작전으로 인해 파울루스의 부대는 통째로 포위당하고 말았으며, 파울루스 본인은 지속적인 철수를 요청했으나 히틀러에게 거부당했고 정작 고립된 상황에서 육군원수로 승진시켜 줄테니 '항복하지 말고 자살하라'는 암묵적인 뜻이 남긴 지시가 내려오자 질려버린 나머지 아예 소련으로 귀순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이런 자신감의 근간이 된 사병 경력은 오히려 독일 병사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는 예전에 이렇게 했는데, 너희는 어째서 그렇게 노오오오력하지 않느냐는 것.[19]

그 외에도 밀덕답게 신무기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서 '보복무기' V1, V2의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덕분에 인류의 로켓 과학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무기 자체의 성과는 가성비가 처참했다. V2의 경우 런던에 총 1358발을 쐈는데 사망자는 2754명. 물론 독일 측의 인명 손실은 없다시피했고, 일방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장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가성비가 저래서야.

거기에 크고 아름다운 슈퍼병기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는지 독소전쟁 개전 즈음에는 1000톤급 차체에 순양전함용 주포를 탑재한 전차 란트크로이처(육상순양함) P.1000 라테의 개발을 지시하기도 했으나,[20] 애초에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개발이 취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중전차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없었던 히틀러는 결국 포르쉐 박사에게 지시하여 200t급의 괴물 마우스 전차를 내놓게 하는데, 그것도 포르쉐 박사가 가져온 초안을 직접 손보면서 어설픈 수정사항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등 밀덕질을 보여준다.

그래도 부정적인 영향만 미친 건 아니어서, 1호 전차부터 시작해 무조건 더 크고 더 강한 전차를 내놓으라는 독촉질로 간접적으로나마 티거, 티거 2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3호전차와 4호전차에 장포신 주포를 장착해야 한다고 닥달했는데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역사학자들은 히틀러의 이런 전차에 대한 비정상적 관심이 1차 대전 도중 일개 보병으로서 참호전을 겪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 추측하고 있다. 물론 국가의 지도자가 무기에 관심을 가지는 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갖는 지도자가 많았으므로 히틀러만 특이한 건 아니다.[21][22]

세계최초로 실전배치된 제트전투기 Me262를 폭격기로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당장의 제공권도 간당간당한데 폭격기를 원했던 이유는 '이런 킹왕짱 빠른 전투기를 사용하면 그만큼 더 빠르게 런던을 폭격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 지시를 무시하고 대부분 전투기로 생산했고 폭격기 버전도 일선에서 전투기로 개조해서 날렸으니 이 결정이 부정적인 영향을 몰고온 건 아니다.

그래도 의외로 인도적인 결단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V1 로켓을 개량해서 사람이 직접 탑승해 목표물로 유도하는 자폭 병기의 개발을 건의하자, 히틀러는 "'자살 공격은 독일 민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반대해서 시제기만 제작하고 끝났다.[23]

그러나 히틀러의 시선에서 '지배민족'인 아리아인이 아닌, 유대인과 슬라브족 같은 '하등족속'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히틀러는 백인우월주의로 찌든 나치당 내부에서 유색인종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그 우호적인 태도도 어디까지나 이용가치가 있을 때만 보여주었지만, 최소한 유색인종이 절멸 대상은 아니었고, 자신에게 쓸모가 있으면 립서비스를 퍼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 후반부에 가서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유색인종들에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매우 히틀러스럽지 않은 발언들을 한다. 당연히 히틀러가 개과천선한 건 절대 아니고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심리로 내뱉은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전쟁 최후반에 독일의 패망이 확정되고 주도권을 완전히 잃은 시점에도, 히틀러는 홀로코스트와 그 외 만행들을 그만둘 생각을 전혀 안했고, 끝까지 유대인과 장애인 학살에 몰두했다.

5.1. 히틀러의 군사적 평가

5.1.1. 긍정적 평가

소련을 공격하고도 성과가 없자 지휘관들과 장군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며 주요 작전들에 개입하고 그 이전에는 룬트슈테트와 괴링의 주장을 믿고 지상군의 진격을 멈추고 공군으로 됭케르크를 공격하지만 성과 없이 철수하는 영국군을 곱게 보내주는 등 상당한 실책이 있었다. 그러나 실책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경우도 제법 있는 편이다. [24]

그리고 내용 중 대부분은 히틀러 혼자만의 실책이 아니라 장성들의 의견 중 하나를 골랐다가 문제가 생긴 것이고 오히려 독단적인 판단이 의외로 대박을 친 사례도 있다. 독일의 패전 이후 독일의 장성들은 회고록 등에서 모든 잘못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경향이 있었다. 당장 앞의 다이나모 작전만 봐도 전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성들을 히틀러 혼자 막은 것이 아니라 장성들의 의견이 대립되는 상태였다. 히틀러의 군사적 결정으로 인한 승리들은 비록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이 결정들이 2차 대전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명백하다. 앞서 히틀러의 수많은 실책들이 있었으나 애초에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은 그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치 독일에게는 대단한 업적인 셈이다.

연합군 지휘부의 경우 샤를 드골은 뛰어난 장군이 정계에 진출한 케이스라 다른 지도자들과 상황이 전혀 다르며, 이오시프 스탈린은 뛰어난 전시 지도자였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처참했으며[25], 윈스턴 처칠은 보기에 따라가 아니라 확실히 히틀러 이하라고 할 만큼 군사적 안목이 형편없었으나[26] 민주국가인 영국은 유능한 지휘관들이 옷이 벗겨지는 것을 각오하고[27] 뜯어말릴 수 있었기 때문에 부각이 덜 된다.
5.1.1.1. 1940년의 '낫질 작전'
'낫질 작전'은 벨기에로 진격하는 독일군에 전력을 쏟지 않고 그 대신에 주력이라고 할 수 있던 기갑부대를 당시에 전차가 기동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아르덴 고원지대로 보내서 고속으로 돌파하게 한 후, 벨기에로 공격해 오리라 생각되던 독일군에 대비하고 있을 프랑스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해 버린다는 내용의 작전이었다. 다시 말해서 참신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무모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이 이러한 작전안을 건의하자, 당시 참모장이었던 할더가 이끄는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끝까지 반대하였고 오히려 만슈타인을 새로 창설된 후방의 제38군단장으로 사실상 좌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만슈타인에게 38군단을 방문한 히틀러와 독대할 기회를 얻게 되는 큰 행운이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총 참모본부가 제시하였던 황색 작전 계획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슈타인이 제안한 낫질 작전을 직접 듣고는 바로 허가하였고, 곧 총통의 지시로 낫질 작전이 준비에 들어갔다.

이 작전이 실행되면서 프랑스 육군은 전력이 양분되었고 결국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같이 됭케르크라는 해안 도시까지 밀리게 된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나도 빠른 상태였고, 또 괴링의 요청이 있었기에 히틀러는 됭케르크에 몰려 있는 프랑스 및 영국 병력은 일단 제쳐두고 프랑스 점령 및 확보에 주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28] [29] 그 덕분에 됭케르크의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결국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주력의 대부분을 잃은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당시에 참모장이었던 할더를 비롯한 육군 수뇌부들은 1차대전 때의 슐리펜 계획과 거의 다름이 없는 황색 작전을 계획하였는데[30] 히틀러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하여 그런 진부한 계획은 취소 되고 참신한 방법의 침공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

이때 만약에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은 묻혔을 것이고 원래의 황색 작전이 시행되었을 텐데, 그리 되었다면 과거 1차대전 때와 같이 끝없는 대치전이 이루어져 결국 그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패전을 되풀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히틀러의 이러한 결정으로 독일이 4년간 서부전선에서 질질 끌다가 결국 패전한 1차대전과는 달리 2차대전에서는 불과 6주 만에 서부전선을 정리하게 되는 엄청난 성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 결정은 2차 대전에서의 가장 중요했던 결정들 중에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독일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승리에서 얻은 결과물들은 어마어마해서 그러한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독일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소련을 공격할 야심을 실행에 옮길 자신을 얻게 되었다. 사실상 2차 대전의 진행 방향을 가장 크게 바꾸어 버렸던 결정이었다. 한마디로 이게 아니었으면 나치 독일은 1차 대전 시즌2 찍고 망했다.

5.1.2.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

5.1.2.1. 모스크바 공격 거부
이 점은 미묘하다. 물론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로서 독소전쟁의 최중요 목표 중 하나였다. 모스크바는 군사, 정치, 공업의 중심지이자 도로와 철도망의 요충지였으며 소련군은 붕괴 직전의 상황이 되었고, 이 독소전쟁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승리를 거두어 소련군의 주력을 괴멸시킨다면 보다 쉽게 우크라이나 공업지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키예프 공략을 우선하고 키예프 함락 후인 늦가을 10월 2일에야 모스크바 공격을 명함으로써 독일군은 소련군의 저항과 동장군으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하고 이는 독소전쟁뿐만 아니라 2차 대전 독일군 패배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된다.[31]

그러나 최근에는 키예프 공략 이전에 모스크바 공세를 행하였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으로 인하여 배후가 위협당해 모스크바 공략이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32]아래 키예프 전투 참조.
5.1.2.2. 1941년 키예프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연전연승을 하던 중 8월 3일,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남쪽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격을 위해 모스크바 전진을 중지했다. 중부집단군에 비해 더 강한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한 남부집단군의 진격속도 떨어지자 키예프 돌출부가 형성되었는데 그곳에는 백만에 가까운 소련 남서 방면군이 있었다.. 이 돌출부의 이 거대한 병력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에 크게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진격이 우선이라며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8월 12일 34 총통 지시령에서 프란츠 할더, 페도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 등 모스크바로 바로 진격하자는 주장과 모스크바 진격을 시작하기 전 중부 집단군을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방면으로 진격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의 의견 사이에서 타협을 이루게 되었다.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을 각각 지원하기 위해 재배치되었던 중부 집단군의 2 기갑 집단과 3 기갑 집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돌린 이후 북부 집단군의 4 기갑 집단과 함께 목표로 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 3 기갑 집단은 중부 집단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8월 18일, OKH가 히틀러에게 동부에서의 연속적인 작전에 대한 전략적 보고서(Denkschrift)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도움 없이 목표 달성이 가능하기에 모스크바로의 진격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의 결정적인 작전을 시작하기까지 겨울이 오고 있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8월 20일, 히틀러는 자신의 우선 순위에 대해 독일을 위해서 산업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8월 21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은 히틀러의 지시 사항을 요약한 보고서를 육군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전달했다. 이 계획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크림 반도 및 돈 강의 석탄 산업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강조했다.

8월 23일 구데리안이 직접 동프로이센 총통 본부에서 히틀러를 면담했지만 결국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즉 수많은 군수뇌부 특히 중부집단군 2기갑단장 구데리안이 계속 해서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끝까지 추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구데리안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히틀러의 결정을 지지한다. 반면 할더는 이러한 결정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본인도 딱히 유망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중부 집단군을 이용하여 남부집단군과 함께 소련군을 포위한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2개의 기갑군이 만든 포위망을 줄이기 시작했다.

키예프 동부의 마지막 군이 9월 26일 항복하였고 독일군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과 함께 약 6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말했다.

만약 여기서 키에프를 무시하고 모스크바를 공격한다고 가정하면 모스크바에 배치된 소련 전력은 실제 역사에서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 손실한 병력이 그대로 보존되므로 오히려 더 강력한 상태가 되고 거기에 키에프 방면에 배치된 60만 명의 소련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독일군 전력을 할당해야 할 것이다.[33] 그러나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을 갈아버리면서 후방을 위협하는 적이 소멸했으니 오히려 키예프 전투가 마음놓고 모스크바를 공격할 수 있게 해준 바탕이 되었던 셈으로 냉전 중이었던 1970년, 서방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당시 서구 군사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주코프가 조소를 날리며 일축했던 일화가 있었을 정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 되지만 키예프 방면 남부집단군의 그 수많은 소련 병력을 그대로 놔두고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진격을 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나도 컸다. 또한 모스크바에는 이미 수많은 전투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중부집단군이 키예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더 빠르게 모스크바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모스크바 함락은 힘들었다라는게 많은 군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5.1.2.3. 쿠르스크 전투
기갑전력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작전 개시일을 7월달로 2달 이상 연기하였고, 이미 우수한 정보수집 능력으로 치타델 작전계획을 파악한 소련군은 그 동안에 6겹으로 된, 대전차지뢰로 도배된 수백km길이의 방어선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독일 또한 준비가 안 되어있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소련군의 방어선은 이미 상당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작전 개시를 미루었던 원인인 증강된 기갑병력들 중 판터는 쿠르스크 남부전역에서 200대중에 1/3 정도인 60대 이상이 작전 초반에 가동불능이 되면서 작전을 연기하였던 이유가 무색하게 되었다.[34] 물론 이 판터가 전부 제대로 돌아갔어도 뚫을 가능성은 희박했을테지만. 그리고 단순히 기갑부대를 보충하려고 미룬 게 아니라 하르코프 전투 이후 해빙기의 진흙탕으로 공세를 펼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던 점도 일조했다.

이런 주장은 만슈타인이 그의 회고록인 '잃어버린 승리'에서 밝혔던 내용인데, 사실 만슈타인이 주장하는 시기에는 아직 독일의 병력이 제대로 집결하지 못했고 또 소련군의 방어선 역시도 이미 그전에 상당수 준비되어 있었고 수많은 예비대들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이러나 저러나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즉, 히틀러의 선택이 그리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세한 정보는 쿠르스크 전투 문서 참조.
5.1.2.4. 라트비아 북단에 고립되어 있던 쿠를란트 집단군을 빼오지 않은 것
쿠를란트 집단군[35]은 1945년 5월 항복할 때도 19만 명의 대병력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독일 항복 이후에도 독일의 점령지인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가 남아있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나치 독일 항복 이후 이 2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은 사실 제때 후퇴했으면 동프로이센으로 충분히 후퇴할 수 있었지만 히틀러의 뻘짓인 사수명령으로 1944년 10월 중순부터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발트해로 바다가 있기 때문에 유보트를 비롯한 해상보급으로 종전까지 계속 버틴다. 늦어도 1944년말 시점에서 쿠를란트 반도를 포기하고 병력을 철수시켜서 동부전선에 돌리든, 서부전선에 돌리든 하는게 훨씬 나았다. 히틀러는 발지전투란 뻘짓을 하면서 인력난으로 노인, 어린 소년까지 박박 긁어서 20만 명을 투입하는데, 정작 동부전선의 정예병력 20만 명을 고립된 라트비아 북단에 방치했다.

이 병력을 철수하자고 제안한것은 구데리안이지만 히틀러가 여기 병력을 남겨서 이 지역을 사수하고자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되니츠는 더 많은 유보트 승무원과 유보트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발트해의 제해권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련 육군과 해군의 발트해 진입을 막아야 했고 되니츠는 이 지역을 사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발트해의 제해권은 유보트 훈련 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철광석을 운반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 덕분에 독일 해군은 종전 직전까지 소련 해군을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 잠수함들이 독일군이 탑승한 수송선들을 족족 잡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쿠를란트 집단군의 철수 자체가 불가능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마냥 히틀러만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 결국 쿠를란트 집단군은 1945년 3월 경, 소련군에 의해 완벽하게 궤멸되나 쿠를란트 집단군이 방치한 수많은 무기들이 그대로 발트 3국의 반소 게릴라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반소게릴라들은 이를 바탕으로 1950년대까지 소련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인다.

5.1.3. 부정적 평가

5.1.3.1. 소련 공격과 대미 선전포고
영국과 한창 전쟁 중이던 1941년,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한다"[36]는 의사를 피력했고 결국 영국 침공 실패 이후 전력을 재정비하여 소련을 공격한다. 기대와는 달리 정작 일본은 도와줄 의사도 능력도 없었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상태였으며, 독일한테 얻어맞은 영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또 소련 침공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식민지 주둔 잔여 프랑스군들과 영국군을 상대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련이 가장 취약하던 시점이었고 여기에 스탈린의 환상적인 트롤링까지 겹쳐서 초반에 독일군은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인해 궁극적인 목표였던 모스크바 점령은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병력 30만 명을 말아먹은 히틀러의 뻘짓 덕분에 이후 인민 웨이브에 털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독일은 유럽을 거의 다 집어삼켰고 소련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했던 차에, 석유와 같은 필수 전쟁물자인 천연자원과 식량이 모자랐으므로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동유럽을 눈독들이고 있던 히틀러가 언젠가는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게다가 시기적 이로움도 있었다. 스탈린이 정적 대숙청을 하면서 여러 장성들이 처형당해 지휘체계가 엉망이었고 더욱이 히틀러가 소련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과소평가[37][38]한 것도 한 몫을 했다.

한술 더 떠서 소련 침공 개시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는 일본 제국이 미국을 건드리는 초대형 병크를 저질렀지만, 이에 매우 기뻐하며 본인들도 미국에게도 선전포고했다. 물론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시기 자체가 늦춰지는 정도지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독일군 장성들도 대미 선전포고에 반대하지 않은 데다 말로는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영국 편을 들면서 잠수함을 선전포고 없이 격침시키는 미국에 분노한 해군은 내심 대미 개전을 바라고 있었고 무엇보다 양면전쟁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소련에게도 양면전쟁을 벌이게 할 수 있는 일본의 참전이 절실한 상황에 일본이 "독일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우리도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뻥을 쳤으니 일본에게 빅엿을 먹은(...) 히틀러만 바보라고 까기도 좀 뭣한 경우.[39][40]

사실 1차 대전 때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술적 차원의 현란한 기동과 포위 섬멸 몇 차례로 나머지 전세계 열강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독일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다. 밀덕후 총통 혼자만이 아니라, 이를 좋다고 따라한 군부와도 참 손발이 잘 맞았다. 그래서 이는 당시 독일이란 나라 전체의 국가 의식과 정치 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면 모른까, 히틀러 혼자만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점을 감안하면 애초에 현대에 와서는 이렇게 아무리 봐도 망상병으로 밖에 안 보이는 히틀러의 대외인식에 그토록 합리성을 중요시한다는 프로이센 군부가 무력하게 끌려다닌 것 또한 당시 동방의 슬라브 국가들은 서구 문명을 파괴하려는 열등민족으로 보면서도 또 역설적으로 서방의 영미와 프랑스는 자유주의적 퇴폐성 때문에 끝장난 문명으로 보았던 전간기 독일의 독특한 우월주의적 사상, 선민의식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5.1.3.2. 공수부대 투입을 꺼림
크레타 전투 이후 공수부대의 피해가 매우 심각하게 크다는 이유로 그 피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공수부대의 공수작전투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최정예 병사들을 방치하고 주요 작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로 독소전쟁몰타. 몰타에서의 전투를 말아먹으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의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알다시피 공수부대는 적진 후방에 낙하해서 유격전을 통해 후방을 노리거나 적의 보급선 공격 혹은 전략거점 수호 등등 여러가지 역할이 가능한 특수부대인데 정작 공수작전을 안한다면 이들은 그냥 알보병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팔쉬름예거의 크레타 전투에서의 피해는 극심했지만 공수사단들의 핵심이 뿌리뽑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작전당시 투입된 신병들 중 생존자들은 극한의 전장에서 최고의 베테랑이 되어 살아남은 공수부대의 전투력자체는 더 좋아졌다. 이는 보충병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오히려 훗날 이 공수사단들이 알보병으로 이탈리아 전역과 노르망디전역에서 압도적 우세의 연합군을 상대로 호각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히틀러의 공수작전 금지령은 좋은 최정예 공수부대를 그대로 말아먹은 어리석은 수라고 할 수 있다.
5.1.3.3. 신무기 도입 중지
42년에 소총과 기관단총을 통일하고 보병화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줄 신무기 FG42MKb42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생산성의 문제와 기존의 무기들의 재고 등을 문제로 계획을 중지시켜 화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심지어 MKb42는 실험명목으로 우회생산해서 보낸 소수물량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 전선에선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어차피 돈은 들어가고 손 닿는대로 이 총 저 총 다끌어다 쓰는 바람에 보급은 잡다하니 아예 몇 가지만 지정하고 물량이 매우 많은 러시아 쪽 노획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탄약을 공용화(7.92x57과 7.92x33mm) 하든가 아니면 도태시키는 것이 더 나은데도 억지를 부려서 하지 않았다. 아예 생산을 안 할 것이면 모를까 나중엔 MKb42같은 것도 잘만 생산해서 쓴 것을 보면 실책이다. 그나마 MKb42는 탄종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FG42는 탄약도 같은데 이런 짓을 저질렀다.[41]

이 문제는 항공 전력 측면에 들어가면 더 문제다. 마음만 먹었다면 Me 262를 Ar 234와 마찬가지로 42년 10월 부터 생산 가능했었지만(심지어 이 Me 262는 현재 우리가 아는 Me 262와 별 반 차이가 없다.)(시제기 3대만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음에도 1942년에 피스톤 엔진을 사용한 시제기가 시험비행에 성공했으며 BMW의 003 터보제트 엔진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엔진이 자꾸만 말썽을 부렸는데, 한번은 시험비행 도중 엔진 트러블이 일어나서 예비로 장착했던 융커스 피스톤 엔진을 쓸 수밖에 없었고 결국 메서슈미트 사는 더 크고 무겁지만 쓸 수 있는 엔진을 달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융커스 유모 004 터보제트였다. 그리고 이로써 Me262는 드디어 제트 전투기가 되었다.)[42] 히틀러가 총통령으로 오래 걸릴 것 같은 무기사업은 싹 다 중단하라는 명령을 1940년 2월 9일에 내리는 바람[43]에 늦어진 것이었다. 아라도 234는 그나마 43년부터 날았지만 메서슈미트 262는 43년에 테스트 전투기로 전투행동에 들어가서[44] 모스키토를 격추하는 등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도 히틀러가 폭격기로 배치 운운하는 것 부터 시작해서 온갖 태클을 걸어버리는 바람에 별 가망 없는 44년에야 전투기로 실전배치 되기 시작했다. 6개월에서 1년이상 개발기간이 소요될 것 같은 무기체계 개발은 폐기하라는 명령 덕분에 항공 전력 말고도 지상전력에도 치명타를 먹였지만 항공 전력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42년에만 실전배치 가능했던 물건만 하더라도 V-1 로켓, Fw190D 도라 전투기, 대형 과급기를 장착한 고공용 DB605엔진, 엔진 출력을 급격히 상승시키고 출력의 지속시간까지 개선시킨 MW50부스터, 세계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 262, MKb42 등의 생산이 1944년까지 미뤄졌다. 그나마 푸쉬가 이루어져서 개발과 생산이 제때 된 것이 전차들일 정도.
5.1.3.4. 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근거없는 망상으로 월동장비 지급을 금지해서(뒤늦게나마 괴벨스가 수습하긴 하였지만) 1941년 12월 말의 시점에서 동상자가 10만 명 이상 발생. 단 이 역시 히틀러 혼자만의 실책이라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애당초 독일군 전체가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11월 7일 오르샤에서의 회의에서 할더는 '최대', '최소' 두 개의 경계선이 그려진 지도를 준비해왔는데 '최소'는 말 그대로 육군이 틀림 없이 도달 가능한 지점을 의미했다. 이 최소 진출선이 모스크바 동쪽 260km를 통과하여 로스토프에서 끝난다. 이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최대경계선은 소련의 동쪽으로 120~150km를 더 전진해 볼로그다, 고르키 산업지대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320km를 더 뻗어서 스탈린그라드 동쪽으로 50km를 넘어 마이코프 유전지대까지 이어졌다. 이것만으로는 할더가 낸 보고서이니 할더만 정신이 나갔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또 골 때리는 것은 동부전선 외국군 정보과는 11월 중순 소련이 200개 주요 부대를 보유했으나 그 부대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질 전투력은 50%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 시점의 소련은 373개의 주요 부대를 보유하였으며 비교적 무장, 훈련 상태도 좋았던 극동 사단들까지 모조리 때려박고 있었다. 설령 이 시점의 일부 장교들은 더 이상의 전진이 힘들다는 정도는 깨달았을지언정 여전히 소련의 저력을 완전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이미 이 시점(41년 11월 10일)에서 전사, 부상, 실종을 전부 합쳐 장교 2만 2432명, 사병 66만 3676명에 달하였고 편제과에서는 136개 사단의 전투력이 83%까지 저하 되었다고 진단하였고 수송체계 역시 라스푸티차가 끝나자 몰아닥친 한파에 차량과 기관차도 피해를 입으며 도로가 얼어붙은 효과가 상쇄되어 버린 판국이었다. 당연히 동계장비 지급이 쉽지도 않았는데 묻고 따블로 가 여기서 모스크바 공격을 결정했으므로 동계장비 대신 공세를 위한 보급품이 우선적으로 지급된 것은 당연한 일.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이 시점의 독일군이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기꺼이 도박에 나서는 소름끼칠 정도의 적극성을 이야기하지만 이 시점의 독일군은 그것이 도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 16일에 시작한 공세는 돈좌 되었고 11월 27일에 바그너는 "인적, 물적으로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였고 소련군이 무너질 것이란 예측은 허구이므로 모스크바를 포위할 능력이 없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결정할 때"라고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공격을 지속했고 12월 4일 아침 소련군은 완벽한 기습으로 독일군에 반격을 가했다.
5.1.3.5. 청색 작전 말아먹기
아군 병력 85만 명을 스탈린그라드와 캅카스에서 말아먹었다. 스탈린그라드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드넓은 캅카스 지역과 바쿠 유전까지 전부 점령하겠다는 무리한 작전안으로 전력을 불필요하게 분산시켰다.

이렇게 날려버린 병력 중에서 45만 명은 동맹군 쩌리병력이라 치더라도 6군(+ 제4장갑군 일부)은 독일군 중에서도 최정예 병력이었다. 이들은 포위당하고 보급까지 차단당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독일 남부집단군의 최정예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소련군을 110만이나 줄여놓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간 투입된 소련군은 결코 고문관들이 아니었고 하나하나 최정예였으며 소련군의 역량이 모두 결집 되어 있었음에도 끝까지 소련군을 상대로 높은 교환비를 보이다가 전멸했다. 만약 이들이 이렇게 소모되지 않고 살아남아 정상적인 작전에서 충실한 보급을 받아가며 작전했다면? 소련군이 독일군을 완전히 포위하기 직전에 6군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B집단군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련군의 서쪽 포위망을 돌파하여 후퇴하겠다는 의견을 전달했으나, 망상에 젖어 있던 히틀러는 후퇴를 허가하지 않았다.[45] 결국 제6군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괴멸되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그나마 파울루스가 소련군을 묶어두는 사이 A집단군은 무사히 탈출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파울루스는 애당초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진입이 아닌 기동포위로 스탈린그라드 수비 병력을 고사시키면서 응원군을 외곽에서 처부순다는 지극히 옳은 작전을 계획했지만 히틀러가 고집해서 시가지로 진입했었다는 것. 그리고 정확히 주코프는 파울루스가 계획했던 것과 비슷하게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해 6군을 고사시키는 동시에 외곽 방어선을 강화에 만슈타인의 겨울폭풍작전을 막아냈으니 스탈린그라드의 패전은 빼도박도 못한 히틀러의 실패작. 그리고 히틀러의 이 초대형 삽질 덕에 독일은 독소전쟁 주도권을 소련군에게 넘겨주며 사형장 티켓을 예약하게 된다.[46]
5.1.3.6. 동부방벽 건설 거부 (1943년 3월~8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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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드네프르강은 10km에서 최대 22km 이상까지 가는 아주 어지간한 넓은 강폭지대가 크게 세 덩어리나 있다. 이를 이용하면 상당한 길이의 전선축소가 가능하고, 강폭이 좁은 지대를 요새화하여 제대로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소련군은 시체로 강을 메우다시피 하며 축차투입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구데리안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요새화할 것을 1943년 3월부터 건의했으나 현지사수 명령을 고집했다. 쿠르스크 실패 이후 1943년 8월부터 발터 모델 원수의 주도로 판터-보탄 라인을 건설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선을 축조할 시간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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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동부방벽은 참호 따위로 엉성하게 구축된 채 소련군에 맞서게 되었으나, 지형 자체가 워낙 요충지로 그래도 소련군이 고전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군의 퇴각 명령이 늦게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현지 빨치산들의 협조를 받아 9월21일에 재빨리 강건너 첫 교두보를 만들어버린다. 한 곳이 뚫리자 교두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결국 드네프르강 라인은 허무하게 뚫려버린다.

게다가 히틀러가 드네프르강 동쪽의 동부전선 독일군에게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를 허용한 것은 9월 15일이었다. 이 때 남부집단군의 상당수가 드네프르강 동쪽에 있었는데 강을 건너 후퇴한 병력은 후퇴시기를 놓쳐서 소모되고 피로가 쌓여 전투력이 급감한 부대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독일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잃고 후퇴하는 동안 수많은 장비와 인력을 잃으며 와해되는 결과를 겪게 되었다.

다만 현지 사수 명령과는 다르게, 히틀러는 처음에 쿠르스크 돌출부보다는 판터-보탄 라인의 핵심지인 도네츠 강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능한 쿠르트 차이츨러 육군참모총장과 남방집단군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지 않고 무모하게 작전을 추진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불협화음으로,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낮았던 쿠르스크 전투가 더욱 차질을 겪어 패배하면서 전력이 급감해 전선이 붕괴하게 된 것이다.
5.1.3.7. 이해할 수 없는 폭격기 중시 사상
히틀러는 폭격기 만능론의 신호탄을 쏴 올린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의 이론에 깊이 빠져 있었다. 적의 전력을 하늘에서 격멸하고 대량 폭격으로 적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한다는 두헤의 이론은 오로지 공격만을 외치던 히틀러의 마음에 아주 쏙 들었던 것.

그 결과, 공군을 공격수단으로 여기는 사상이 루프트바페 지휘부를 지배했고 폭격기가 우선시 되었으며 전투기는 폭격기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했으며 이런 사상은 전쟁 말기까지 이어진다.[47]

이런 상황에서 1939년 생산한 항공기 1,491대 중 전투기는 그 중에서 3분의 1 정도인 449대 뿐이었고 이 비율은 계속 떨어져서 1940년대는 6,618대의 항공기 총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분의 1인 1,693대밖에 되지 않게 된다.

그리고, Ju 87의 전과를 보고 급강하 폭격기에 푹 빠져있던 나머지 장거리 폭격기의 개발과 생산을 늦춰버리는 병크도 저지른다. 쌍발 급강하 폭격기인 ju 88과 do 217을 계속 생산하면서 그 밖의 폭격기와 4발기인 He 177마저 최대한 급강하폭격이 가능하도록 높은 안정성과 급강하 에어브레이크, 자동수평비행장치와 급강하폭격 조준기를 달도록 요구한다.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이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을 때도 히틀러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밀히가 주장하는 전투기 증산계획을 씹어버리고 보복공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하면서 쓸데없는 손실을 낸 것은 물론 '방어용의 전투기는 필요없다, 보복용의 폭격기가 더 필요하다'는 표어를 나치 독일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하게 했으며 알베르트 슈페어가 1944년 4월에 폭격기의 생산을 줄여야 한다는 제안을 했음에도 '항공군수의 핵심은 여전히 중폭격기'라는 결정을 내렸고, 독일 지휘부는 본토방공이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전투기보다도 폭격기를 중시해 폭격기의 생산량을 늘리는 삽질을 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 손실은 물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만 항공기를 8000대를 상실하고[48], 그런 상황에서 1943년 11월 Me 262의 시제비행에 강력한 인상을 받은 히틀러는 1943년 12월에 동프로이센의 인스터부르크 공군기지에서 열었던 최신 연구개발 성과 전시회에 와서 괴링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 항공기로 폭탄을 운반할 수 있나?"

그러자 괴링은 메서슈미트에게 곧바로 물어보고는
"예. 총통, 이론적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500kg 폭탄은 확실히 실을 수 있고 대략 1,000kg까지도 실을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폭탄을 실을 수는 있어도 목표물에 제대로 명중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Me 262는 폭탄용 렉, 투하장치, 신관기동장치, 사격통제장치[49]가 없었고 비행특성과 시야 등으로 봐도 정밀폭격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나마 할 만한 것이라고는 수평폭격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정밀도가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물론 히틀러에게 이런 점을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없었고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고속폭격기'를 공군에 요구해 왔다. 고속폭격기가 있으면 적 전투기의 방어를 상관하지 않고 목표에 확실히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이 소개한 이 항공기를 '전격폭격기(blitz-bomber)'라고 하겠다. 이것으로 유럽침공을 시도하는 연합군을 상륙 초기 단계의 가장 취약한 순간에 공격하겠다. 적의 호위전투기를 돌파해 상륙하는 물자와 부대를 공격해 혼란과 죽음을 가져올 존재, 그것이 바로 전격폭격기다. 여러분 중에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50]

군수당국이 Me 262의 생산량을 월 1,000대 이상으로 끌어올렸음에도 폭격기에 미쳐 있던 히틀러는 바로 태클을 걸었고[51] 지금까지 만든 Me 262 중 폭탄을 실을 수 있는 항공기가 몇 대나 되냐고 밀히에게 물었는데, 히틀러가 인스터부르크에서 소위 전격폭격기에 대한 구상을 떠드는 자리에 없었던 그는
"한 대도 없습니다, 총통. Me 262는 전투기 용도로만 만들었습니다."

라고 말해버렸고 히틀러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화를 낸 다음 밀히, 괴링, 루프트바페 모두를 겁쟁이, 배신자, 반항만 해 대는 것들이라고 싸잡아서 욕해댔다.[52][53] 그리고 괴링에게 Me 262을 죄다 폭격기로 전환, 개조하라는 명령을 하면서 Me 262를 전투기나 전투폭격기가 아니라 전격폭격기라고 부르게 강제했다. 이건 뭐 말을 소라고 부르라는 명령... 물론 괴링은 히틀러의 결정을 지지하고 있었고 부하들에게 히틀러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토론이나 의논을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갈란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실 괴링도 히틀러의 전격폭격기 타령이 헛소리인 것 정도는 알았지만 본인이 총통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체념한 것에 가깝다.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까지 몇 주 동안 독일 본토의 도시, 군수공장, 수송시설, 석탄액화연료공장 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Me 262를 폭격기로 전환하는 시험을 하는 중 6월 6일에 연합군의 유럽 침공이 시작되었지만 당연히 히틀러가 '적의 호위전투기를 돌파해 상륙하는 물자와 부대를 공격해 혼란과 죽음을 가져올 전격폭격기'는 전혀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상륙 후 수 주일동안 전선이 연합군 상륙지대에 제한되어 있던 기간에도 전격폭격기는 출격하지 못했고 1944년 8월이 되어서야 연합군에게 첫 번째로 날아가서 2,3발의 폭탄을 적 영역 어딘가에 연일 던졌지만[54] 연합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물론 Me 262를 폭격기로 쓸 생각이 없었던 공군은 폭격기 버전을 전투기로 개조해 요격 임무에 보내는 한편[55] 히틀러를 설득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물론 히틀러는 'Me 262를 전격폭격기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거나 제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내렸으나, 결국 1944년 9월에 '20대 중 1대는 전투기로 만들어도 된다'며 전투기 버전의 생산을 허가한다.

물론 히틀러가 전투기 증산 계획을 승인했다한들 독일 공군의 패망은 1944년 2월 논쟁작전을 기점으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기존의 독일 공군은 연합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각각 담당하는 요격기와 교전기를 분리하고 지역별로 요격대를 출격해 연합군이 출격-공습-복귀 전 과정에 있어서 출혈을 내도록 강요했으며 미군이 좋아한 컴뱃박스 대형의 후미 편대에 집중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미군이 1944년 P-47, P-51에 연료 탱크를 장착해 호위를 붙이며 독일군 요격기들을 가로막았을 뿐더러 1939년 이후 지속된 소모를 조종사 양성속도가 따라잡지 못했다. 조종사 부족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어쨋든 제공권을 먼저 따야되는 상황에서 폭격기에 미친듯이 집중하며 독일공군의 역량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키지 못한 것은 가히 히틀러의 삽질이 맞다.
5.1.3.8. 바그라티온 재앙
히틀러는 1942년말~1943년초 스탈린그라드는 물론, 1944년초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후퇴 불허, 진지사수명령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고도[56] 히틀러의 진지사수명령, 기동방어를 위한 후퇴불허라는 사상(?)은 굳건했다.

당시 소련군은 233만 명. 독일군은 85만 명이었다. 3:1이 조금 안되는 병력비였는데, 독일군은 수비측의 입장이었고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래 1945년을 제외하고 소련군보다 우세한 교환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간섭 없이 싸웠더라면 소련군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도 있었다. 비록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겠지만.[57]

1. 효율적인 방어를 하려면 병력을 방어가 용이한 곳 위주로 배치해야 하는데, 방어거점이 아닌 행정거점에 병력을 다수 배치했다.
2.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려면 기동방어는 필수였으며 기동방어를 위해서라면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 즉 일시적인 후퇴는 불가피한데, 1cm의 영토도 내주기 싫어하는 히틀러는 6월 말~7월 내내 사실상 기동방어를 거의 불허했다.[58]
3. 바로 위에 언급한 대로 기동방어를 안 하니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은 총 전력의 우세뿐 아니라 몇몇 곳을 집중타격해서 쌈싸먹기 각개격파를 하거나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니 실제로 전투를 할 때는 3:1정도가 아닌 10:1 이상의 병력비도 나오곤 했다.

1944년 6월말 시점의 독일군은 전성기보다는 크게 약화되어있었으며 이미 승리는 소련에게 완전히 기운 상태였지만[59] 히틀러와 최고사령부의 삽질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독일에게 악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의 반격 국면 당시엔 소련군 4 : 독일군 1 정도의 교환비를 냈었는데, 바크라티온에서는 소련군 : 독일군의 교환비가 1(18만) : 1.39(25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60] 그러나 중부 집단군의 상황은 기동방어를 수행하는 것조차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 3기갑군은 이름과는 달리 예하에 기갑부대를 편제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소련의 기만책에 낚인 독일군 사령부가 56기갑군단을 다른 지역으로 배치하는 삽질까지 겹치는 등 히틀러가 아니라도 이미 충분히 망할 상황이었다.

1943년의 소련군은 이미 누룽지 긁듯이 인구를 박박 긁어서 최대로 징병한 병력이 670만 명이었는데, 쿠르스크 전투 손실 85만 명, 쿠르스크 이후 반격에서 60만 명 이상 손실(류만체프, 쿠트죠프), 드네프르강 도하 전투로 최소 40만 명 이상 손실(최대 120만 명까지도 추산)으로 1943년에만 200만 명은 족히 사상자가 발생했고, 1944년 1월~3월 남부 우크라이나 공세로 110만 명 사상자 손실, 1944년 6월~8월 바크라티온 작전 손실 77만,[61] 발트공세 27만 명 손실에다가(1944년 9월~11월) 1944년에도 최소한 214만 명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다.

즉, 1943~1944년 2년간 최소한으로 잡아도 소련군은 414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소련군이 전체 640만 명을 넘는 병력을 유지했던 것은 점령되었던 영토의 탈환을 통한 추가적인 징병과 부상자의 복귀 덕분이다.

히틀러가 뻘짓 안 하고 정상적인 작전운용이 가능했다면 1943~1944년 2년간 소련군의 손실은 실제 발생한 414만 명보다 훨씬 더 커졌을 것이고 드네프르강 라인을 유지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계속 독일이 쥐고 있으면 실제 역사에서 이루어진 영토 회복 후 마구마구 징집해서 벌충도 불가능하다.[62] 문제는 히틀러가 뻘짓을 안 했어도 이미 전세는 소련이 우위였을 것이지만. 물론 덕분에 병력 손실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히틀러의 삽질인 건 맞다.
5.1.3.9. 모르텐 삽질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이 50만의 손실을 내면서 붕괴하고 연합군의 상륙이라도 저지했다면 모를까 이미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이상 그나마 독일이 버텨 보고자 시도라도 해보려면, 서부전선의 병력들을 보존하면서 프랑스 동북부와 독일 서부의 삼림지대로 후퇴시키고[63] 그나마 제공권을 확보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는, Me 262 제트기를 전투기로 몰빵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전을 펼치며 지연전을 벌이고, 동부전선으로 주력을 보내어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사수하는 것이 거의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됐는지 1944년 8월 7일부터 서방 연합군을 대서양으로 쓸어버리겠다는 망상으로 무리하게 모르텐 공세를 시도하다가 1400대의 전차중에서 1300대 이상을 상대측의 폭격에 의해 무의미하게 잃었다.[64] 게다가 어러다 후퇴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20만 명의 포로가 추가로 발생하고 5만 명의 추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뻘짓들을 하는 동안에 소련군은 1944년 9월초부터 루마니아 영내로 대대적으로 진격하여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점령한다. 중부집단군 50만의 괴멸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인적자원 소모였는데 괜히 뻘짓만 하다가 25만 명을 추가로 더 잃으니, 1944년 12월의 아르덴 대공세 때는 당연히 질이 아주 떨어지는 병력인 노인과 어린 소년들이 다수 섞인 국민돌격대로 겨우 20만 명을 편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모르텐 공세의 뻘짓과 플로이에슈티 유전 상실 후, 1944년 9월 시점에서도 아직 헝가리의 유전과 액화석탄이 있긴 했지만, 그동안에 주요 연료 보급로였던 플로이에슈티 유전의 손실은 너무 컸다. 게다가 그와 함께 동맹국들도 줄줄이 이탈하면서 순식간에 발칸반도 거의 전역을 상실한다.
5.1.3.10. 아르덴 공세
1944년 12월 장군들 대다수가 뜯어말린 아르덴 대공세를 히틀러의 고집으로 강행해서 뻘짓으로 전차 800대이상을 또 손실했다. 상당수가 동부전선에서 빼온거라 1945년 1월13일부터 폴란드 비스와강을 건넌 소련군 공세에 동부전선은 쭉쭉 밀린다.[65] 물론 이쯤되면 히틀러가 삽질을 한것과 무관하게 이미 상황을 뒤짚을 방법은 없다(...).
5.1.3.11. 히틀러의 마지막 뻘짓 '발라톤 호수 공세'
1945년 3월초 베를린 방위에 돌려야할 사실상 마지막 기갑병력으로, 헝가리 유전지대를 탈환하려고 공세를 펴다가[66] 겨우 15~40km를 전진하고 실패했다. 마지막 도박 실패로 입은 손실은 전차 331대(완전 파괴 86대 + 가동불능 245대)에 돌격포와 구축전차는 244대 손실(완전 파괴 42대 + 가동불능 202대)로, 전차+돌격포+구축전차 총 575대가 날아갔다. 게다가 하프트랙과 장갑차의 손실도 거의 1000대에 육박했다.

이후 베를린 공방전에서 남은 극소수의 전차 + 팬저파우스트로 소련군을 상대하게 된다. 만약 이 뻘짓 공세를 안하고 베를린 방어전에 돌렸으면 베를린 함락이 최소한 몇 주는 더 늦어졌을 것이다. [67]

이처럼 히틀러의 실책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68] 결국 히틀러는 이렇게 실책을 거듭하여 수백만의 독일군의 목숨을 헛되이 날렸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 유럽을 제패하고 독일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웅비할 기회를 놓쳤을 뿐 아니라 패전하고 자살함으로써 히틀러 그 자신이 인류 역사에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여 초강대국이 되고 히틀러가 자연사했더라도 독일은 머지않아 소련처럼 무너지고 나치 독일은 공산 소련처럼, 히틀러가 스탈린보다 더한 폭군으로 욕을 먹었을 것이라는 점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승리하였다면 미래는 전격 디스토피아의 강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미술적 능력

히틀러가 미대에 불합격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히틀러의 범죄에 대한 괘씸죄까지 적용되어 히틀러의 미술적 재능도 형편없었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지만, 사실 히틀러가 미술적 재능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빈에 거주하던 시절 그림엽서를 그려 팔거나 광고판을 그리는 등의 일을 했는데, 이게 상당히 쏠쏠해서 어지간한 중산층 이상의 수입을 벌며 살았다고 한다.[69] 그리고 이렇게 그림만으로 중산층 이상의 수입을 벌고 살 정도라는 뜻이므로 일반인의 미술적 재능 수준은 한참 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보면 박물관에 걸릴 명화는 절대 되지 못하지만 분위기 좋은 식당이나 카페 벽에는 걸릴만한, '무난한' 풍경화 정도는 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꿈꿨던 것은 그림을 생업으로 사는 평범한 중산층의 삶이 아닌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같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미술가였고, 히틀러는 상업적인 양산형 그림을 그릴 실력은 있었을지 몰라도 세계가 주목할만한 독창성이나 예술적 감각까지는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미대 입시가 좌절되고 1차 대전으로 유럽이 혼란에 빠지면서 히틀러는 미술의 길을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게 되었다. 만일 히틀러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저 조금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을 뿐인 삽화가로 조용히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7. 결론

20세기는 히틀러의 시대였을까? 분명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만큼 20세기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개인은 없다는 사실이다. 무솔리니,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독재자는 정복 전쟁에 나서서 여러 민족을 공포로 휘어잡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 20세기의 성격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처럼 자국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사람들의 의식에 불을 댕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단의 시대에는 이 세기의 긍정적 가치관을 상징하고 인류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몸으로 구현한 지도자도 있었다. 루스벨트, 처칠, 케네디 그리고 가장 최근에 만델라 같은 사람은 그런 인물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힐 만하다. 하지만 히틀러가 20세기에 남긴 흔적은 이런 정치 지도자 어느 누구보다도 깊다.

히틀러의 독재는 스탈린이나 마오쩌둥보다 훨씬 더 20세기에 걸맞은 틀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재는 극단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무엇보다도 현대 국가의 전면적 자기 주장,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한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언론 조작, 지독한 극우 민족주의, 인종 우월주의의 가공할 파괴력과 인종주의의 귀결, 엉뚱한 목적에 동원된 현대 과학기술과 '사회 공학'을 드러냈다. 히틀러의 독재는 아직도 환하게 타오르는 경고의 화톳불을 피웠다. 그것은 문화 수준이 높은 현대의 선진 사회도 하루아침에 야만주의로 치달아 이념 전쟁을 벌이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고 거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야만과 착취와 학살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독재는 현대 문명의 붕괴에 다름 아니었다. 현대 사회 안에서 핵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히틀러 1권 20~21p, 이언 커쇼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권위주의를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걷는 사람들, 소수 인종, 사회 부적응 집단을 억누르는 것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조그만 희생처럼 보였다. 히틀러도 빈 시절에 맛본 굴욕감은 벗어던진 지 오래였고 민족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어둠의 세력과 싸워 이겨서 독일을 혼란에서 구해야 한다는 정치적 사명감에 불탔다. 자아도취에서 나온 자기 미화는 추종자들이 신처럼 떠받들면서 1936년 무렵이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이때쯤이면 이미 자기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고 단적인 오만의 단계로 올라섰다.

지도자 개인의 오만을 낳는 데 일조한 것은 독일 국민이었다. 독일 민족은 유럽 대륙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역사적 도박으로 지도자를 따라 성큼 발을 들여놓았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는다. 스스로 자기 파멸의 길을 걸어가려는 의지를 전제로 삼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만큼 도박의 규모는 컸다. 그런 오만 다음에는 어김없이 네메시스 여신의 복수가 따른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20세기의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기억된다. 역사는 현대 정치의 악을 온몸으로 드러낸 인물로 히틀러를 기록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지 역사적 개념은 아니다. 히틀러는 악인으로 불러야 마땅하고 또 그래야만 속도 후련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으로 부르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 나는 역사적 인물에 드러난 악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히틀러가 도대체 어떻게 한 사회를 휘어잡았기에 그 사회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2권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히틀러는 요행히 손 안에 굴러 들러온 절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었는가, 독일의 권력 실세들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대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개인화된 통치 형식에 어떻게 점점 휘말려들어서 나중에는 보나마나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재자의 의지에 끌려가고 말았는지, 멀쩡한 현대 국가의 시민들이 인류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끔찍한 살육극의 방조자가 되어 국가가 주도하는 대학살이 유럽 전체에서 자행되고 결국은 독일이라는 나라를 궤멸시켰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파멸담이자 나라의 파멸담이다. 한 민족과 민족의 대변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고 나아가서는 유럽 문명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는지를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결과야 익히 알려졌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따져보는 것은 뜻있는 작업이다. 이 책이 그런 방면으로 이해를 돕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히틀러 2권 6~9p, 이언 커쇼

아돌프 히틀러는 여러 면으로 보았을 때 현대 국가의 고위직이 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벌도 변변치 않았으며[70] 게으른 성격에 머리가 남달리 좋은 것도 아니였다.[71] 심지어 사교성도 모자라 가까운 주변인도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정치인으로 살아간 것을 빼면 빈 통이나 다를 바 없는 삭막한 삶을 살면서 참다운 우정도 못 누려보았다. 또한 높은 자리에 오를 만한 뒷배경도 없었고 독일 총리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공직자로 일했던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독일 내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나중에는 독일의 야전사령관들까지도 일개 상병 출신 지도자가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 따르며 충성을 맹세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재주라고는 대중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선동술밖에 없었던 아웃사이더 정치인에게 사회 온갖 분야의 난다 긴다 하는 성직자와 외교관, 법조인 같은 사회 엘리트들까지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너도나도 덮어놓고 히틀러에게 복종했다. 심지어 제3제국의 파멸이 눈 앞까지 다가온 순간에도 독일 국민들 중 히틀러에게 대놓고 반항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일 국민 전체가 히틀러의 통치에 순응했다.

히틀러가 통치한 12년은 독일유럽, 세계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으며, 히틀러는 만약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개인 중 하나로 꼽힌다.[72]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고 겨우 몇 년 만에 유럽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독일이라는 문명화된 국가는 끔찍한 학살 전쟁의 길로 나아갔고 그 학살 전쟁은 독일과 유럽을 철의 장막과 물리적 파괴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갈가리 찢어놓았다. 히틀러는 시대의 모든 동경과 두려움, 원한 등의 합일점으로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 히틀러는 한 개인이 역사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 시대와 히틀러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그 시대를 논할 때 히틀러를 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치관계를 이루어냈다.

흔히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한 인물의 존재가 없더라도 역사의 흐름에는 큰 영향이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한 개인이 역사적인 업적을 이뤘더라도 그 업적은 그 개인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이나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개인의 영향이 적다는 것이다. 즉 이는 시대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로써 시간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를 대신할 다른 개인이 역사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역사의 전개에 있어 대체 불가능한 요소로 자리 잡은 매우 드문 경우 중 하나가 바로 히틀러다. 히틀러는 인류 역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요소가 매우 극단적이면서 부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나치당의 집권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며 희대의 대량학살정책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3]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은 어떤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지만, 아돌프 히틀러라는 단 한사람 때문에 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원흉이자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74]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과 학살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학살당했으며 수많은 국가가 붕괴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게르만 민족주의와 아리아인 우월주의에 빠져 지배민족과 노예민족이라는 고대사적 개념을 20세기에 꺼내들어 폴란드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서 슬라브족과 적대적 인종을 말살시키겠다는 "인종 청소"를 감행하였으며, 유대인들은 오로지 척결해야 할 사회적 기생충일 뿐이라는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유대민족 전체를 절멸시키겠다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량학살 정책을 실행하여 현대 문명에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상처로 남겼다.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역사학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에게 20세기의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기억되며, 역사는 현대 정치의 악을 온몸으로 드러낸 인물로 히틀러를 기록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선거에 나와 표를 얻는 능력과 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히틀러 연구가인 이언 커쇼는 히틀러가 휘두른 권력에서 히틀러 자신이 차지하는 몫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나치당에서 당 지도자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단지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라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에서 권력을 이끌어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권력은 제도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카리스마에서 나온 권력이었고 그는 단순히 운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과 매력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였다. 커쇼는 히틀러가 타고난 연설가이자 선동가, 조직가, 이론가였으며, 히틀러는 “인류의 역사는 곧 인종 투쟁의 역사”라는 발상을 통해 독일 민족의 부활과 재생을 중심에 둔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 정치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이 강요받은 폭군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독일 총리 자리에 올랐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가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히틀러는 별 볼 일 없는 환경에서 자라 한 국가의 절대 권력을 쥔 보기 드문 인물이었으며, 히틀러의 비상한 기억력이나 정치적 수완, 연설가로서 능력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을 사로잡을 정도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만약 히틀러가 정부 수반이 아니었다면 나치 친위대의 무자비한 경찰국가가 과연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다른 지도자라면 과연 독일이 유럽을 상대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유대인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고 해서 그 정책이 홀로코스트라는 대량살육으로 이어졌을까?'에 대한 대답에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 평가하며 다른 외부적 요인과 그 외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가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받는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히틀러가 한 국가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이유는 그가 내세운 지도자 원리가 있었다. 히틀러는 항상 민족은 피라미드를 이루며 그 꼭대기에는 ‘위대한 천재’가 있다고 역설했다. 지도자는 '이념의 구심점'이며 ‘수호자’이기 때문에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지도자 숭배의 확립은 나치 운동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약 히틀러 숭배가 없었더라면 나치당은 분파주의로 갈라져 반자본주의, 반사회주의를 주장하며 타협 없는 과격한 혁명을 부르짖었던 당내 반대파들과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었을 것이나 이러한 문제를 히틀러의 카리스마와 개인 숭배로 봉합할 수 있었다.

나치당은 전략, 파벌 싸움, 해묵은 개인 감정을 둘러싸고 서로 부딪칠 때가 많았으며 대개 이념의 차원보다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전략의 차원에서 갈등과 적대감이 끝없이 불거졌다. 지도자 숭배가 모든 당사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기 때문이었고 단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히틀러에게 개개인이 충성을 바쳐야 했다.

이러한 지도자 숭배는 히틀러의 권력을 매우 강하게 만들었는데, 실제로 히틀러의 권력은 이미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1944년까지도 흔들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력했다.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나 뮌헨 대학 학생들과 교수가 참여한 백장미단 사건 같은 저항 운동이 있긴 했지만 히틀러의 임기 내내 저항 운동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반 국민들도 그렇고 나치 간부들 사이에서도 지도자의 권위는 패전 직전까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매력이나 표를 얻는 능력과는 별개로 히틀러가 행정적인 부분에서 매우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틀러는 종이를 웬만하면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으며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인 지시를 내려 그 지시를 체계화하고 문서화하는 관료들이 매우 어려워했다. 실제로 히틀러의 지시사항들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여 제국 운영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히틀러가 자신 휘하에 있던 측근들을 제대로 통제하기는 커녕 방치하여 측근들끼리 반목을 거듭하여 큰 낭비를 가져온 단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행정에 대한 무관심은 히틀러의 권력을 더 강하게 만든 점도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내각은 유명무실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독재자들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통치 방식 때문이었다. 다른 독재자들이 중앙 통치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려 했다면, 현대 국가의 관료제를 혐오한 히틀러는 통치 기구를 무력화하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대단히 이상한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은 현대화된 선진국인데 중앙에서 조율하는 구심점이 없었고 국가 수반이 통치 기구에 깊이 발을 들여놓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심지어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에서는 각료 회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실제로 1935년에는 각료 회의가 겨우 12번밖에 열리지 않았고 1937년에 이르면 그 숫자는 6번으로 줄었다. 그리고 1938년 2월 5일 이후로는 각료 회의가 아예 열리지 않았다. 히틀러 치하에서 각료 회의가 잘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히틀러가 각료 회의를 워낙에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편 전시에도 히틀러는 장관들이 이따금 모여서 맥주를 마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다가 히틀러의 몸에 밴 비밀주의, 여러 사람보다는 일 대 일로 만나는 것을 선호하는 버릇[75], 정부는 물론이고 당에서도 몇 사람만 총애하는 행태로 인해 통치와 행정의 공식 틀은 더욱 흔들렸다.

나치 독일의 가장 큰 특징인 누적적 급진화(cumulative radicalization)는 이렇게 개인화된 통치 스타일과 맞물려 나타났다. 이언 커쇼는 이를 “히틀러의 개인 통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정부의 공식 기구가 와해되었고 이념이 급진화되었는데 공식 기구가 와해되고 이념이 급진화되니까 거꾸로 히틀러의 개인 지배도 모든 제도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면서 절대 권력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누적적 급진화는 명확하게 정리되고 세분화된 정책 지침이나 관료 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체제의 공무원들과 당 간부들, 체제에 충성을 바쳤던 일반인들이 저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에 히틀러는 단지 모호한 몇 마디 지시나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개인화된 통치 방식은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히틀러가 설정한 목표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히틀러도 이런 호응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부처들은 정부 부처들대로, 그 안에서 일하는 개인들은 개인들대로, 체제의 모든 수준에서 뜨거운 경쟁이 벌어졌다. 다윈주의 적자생존 원리가 적용되는 제3제국에서 권력을 잡고 승진을 하려면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의중’을 미리 헤아려서 히틀러가 추구하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진급을 위한 자세였다. 그렇게 당 간부와 논객, 친위대는 오직 지도자의 뜻을 따른다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급진화로 치닫는 데 일조한 셈이었다.[76] 히틀러는 언제나 급진적인 방안을 선호했으며, 이것을 잘 알았던 측근들은 앞 다투어 남보다 더 급진적인 방안을 내놓으려 경쟁하면서 체제의 급진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화가 거듭되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나치의 야만적 범죄들이 저질러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문제는 히틀러의 능력 중에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안좋은 쪽으로 부각되다보니 똥별이라는 단어가 마치 히틀러를 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며 독일의 패망을 전적으로 히틀러에게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군사적인 능력이 전무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승승장구했던 것과 독소전 초기 여러가지 승리들에 히틀러의 영향이 상당했으며 또한 히틀러의 몰락 이후 독일 군부는 패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가 군사 부문의 전문가일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례로 처칠이나 스탈린도 군사적 무능함으로 신나게 말아먹었으며 특히 처칠의 군사적 무능은 히틀러가 유능해보일 지경이다. 단지 스탈린은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고 처칠은 유능한 참모들이 말려줘서 부각이 덜 되는 것뿐 대전 당시 메이저 열강 중 군사적으로 유능한 정치 지도자는 루스벨트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유능함은 문민통제가 뿌리 박힌 나라에서 자신의 능력 한계를 비전문가로서 확실하게 인정한 것에서 기인했다. 그는 민주 국가의 민간 정치 지도자에게 걸맞게 유능한 장군들이 맘껏 능력을 펼치게 해주고, 다만 장군들 사이의 관계와, 군부와 민간 정부, 군수 기업 간의 관계를 조율해 주는데 초점을 맞추었기에 총력전 시대의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으로 봐도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은 뛰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였기에, 그가 독재자로서 전쟁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기보다는 처음에 자신이 자각했듯이 "독일 민족을 위해 준비된 영웅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으로서 선동가의 위치에 있었거나, 필요할 때 괜찮은 전술적 아이디어나, 위에서 나왔던 날카로운 감이나 배짱을 통한 제3의 시선을 제시하는 하급 야전사령관으로의 역할이나 혹은 철저하게 상징으로 남으면서 추종자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놓고는 전쟁의 구체적인 지휘를 맡겼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의 패망은 히틀러의 군사적 무지 때문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치 독일의 몰락은 독일군 자체의 한계점이 있던 것도 있지만[77] 무엇보다도 빈약한 자원을 가지고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겠다는 히틀러의 체제가 결국 전쟁으로 다른 나라의 부를 약탈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끝없는 침략 전쟁의 늪에 빠져 전선이 넓어지고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는데 독일의 모든 힘을 소진시킨 것을 나치 독일의 몰락을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즉, 나치 독일의 몰락은 히틀러가 침략 전쟁을 진두지휘하여 독일을 끝없는 전쟁의 늪에 빠뜨린 것이 주된 요인이지만 이 침략 전쟁을 지지한 독일 군부와 시민들에게도 나치 독일이 몰락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나치 체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동시에 독일의 행정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효율적인 시스템이 필요했으나 나치 지도부가 지리멸렬한 상태였던 것도 갈수록 나치 독일의 상황이 엉망이 되고 나치 독일이 빠르게 몰락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전후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몰락을 히틀러의 예술가적 능력이 전쟁이 요구하는 격무로 인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여유롭고 자유로운 생활상에서 나오는 위기상황을 기가막히게 빠져나가고 세계를 경악시킨 성과들을 연이어 성취한 히틀러의 직관이 일에만 집착하고 쉬지는 못하면서 재미도 없는 똑같은 얼굴의 보좌진에 둘러싸여 지내는 격무로 인해 무뎌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망하는 것이 뻔한 길만을 고집했다는 것이 슈페어의 진단이다.

실제로 히틀러가 전쟁을 치르느라 전쟁 전의 느긋한 모습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웅장한 건축 사업에 몰두하고 음악오페라, 영화를 보고 들으며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던 모습은 사라지고 빽빽한 일과에 쫒겨 늘 군사 전술을 짜는 데만 신경을 썼지 전쟁 수행과 무관한 일을 할 시간은 없었다. 독소전쟁 이후 히틀러는 밤에는 스트레스와 여러가지 병 때문에 잠을 못자고 아침 늦게 일어나 하루종일 긴장된 상태에서 낮과 초저녁에 장군들과 작전을 짜는데 온 힘을 소진했다. 식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혼자 부실하게 먹었으며, 운동도 하지 않고 셰퍼드 블론디를 데리고 잠깐 산책을 하는 것이 전부였고,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보좌진들만 보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매일을 보내니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고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성찰을 하기도 어려웠으며, 격무로 인해 생각이나 행동도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히틀러는 전쟁을 치르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망가지고 늙어갔다. 한때 히틀러는 주변 사람들에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여졌지만 1944년이 되면 머리카락이 셌고 눈을 충혈되었으며 왼팔을 덜덜 떨면서 잘 가누지 못하는가 하면 걸음걸이도 구부정해졌다. 1941년도에 심전도를 검사해보니 심장이 망가지고 있었으며, 원래부터 안 좋았던 위와 장은 갈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1942년부터는 파킨슨병 증세가 보이더니 1944년에는 눈에 띄게 두드러져서 파킨슨병 발병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왼팔을 갈수록 심하게 떨었고 왼쪽 다리도 경련이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면서 힘들게 걸었다. 그럼에도 몸져누운 적은 없었지만 그건 테오도어 모렐이 주사한 알약과 주사약 때문이였다, 전쟁 동안 히틀러는 총 90가지의 약을 복용했고 하루에 28개까지 알약을 먹었다.[78] 이러한 상황에 전황까지 나빠지면서 히틀러가 판단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주변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신경질적인 반응만 보이다가 나치 독일이 몰락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즉흥성을 좋아하는 천성이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격무로 인한 부담감 때문에 "비범한 재능"을 잃었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이나 이 주장은 독일의 운명을 히틀러라는 "악마 같은"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현실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히틀러가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히틀러의 체제가 가진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통치방식 때문에 모든 권력을 히틀러가 가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 일이였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같은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 심지어 독재 국가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히틀러만큼 권한을 독점하지는 않았고 군사문제를 일일이 챙기느라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독일에서 통치 구조가 급격하게 허물어진 이유는 패전의 기색이 짙어졌음에도 감히 히틀러에게 대들려거나 넘어서려는 조직은 전무했으며 내각이 허수아비가 되면서 전체를 조율하는 기구가 없어진 상황이 되다보니 군사 문제든 국내 문제든 모든 사안을 히틀러가 허가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모든 문제를 히틀러가 혼자서 처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에 있다.

즉, 나치 지도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효율적인 체제가 필요했음에도 히틀러가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보니 모든 의사결정권을 틀어쥐고 모든 사안을 혼자서 결정하면서 국가를 운영했지만 히틀러보다 능력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행정 문제를 혼자서 감당하기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히틀러의 체제가 엉망이 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히틀러는 전쟁의 세부적인 사안에까지 끼어들었지만 원래 군사적인 안목이 떨어졌고 전략적인 면에서도 근시안적인 시각밖에 가지지 못했던 데다가, 격무로 인해 생각이나 행동이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실패를 거듭했다.

게다가 히틀러는 원래 행정에 무관심한 지도자였기에 국내 문제를 등한시하여 독일 내부의 문제들을 그냥 방치하거나 관심을 가진 몇몇 사안들조차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끝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권력을 끝까지 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행정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고 이로 인해 독일의 모든 시스템이 허물어지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나치 독일의 몰락은 히틀러의 체제가 끝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의 모든 힘을 전쟁에 쏟았던 것과, 전쟁을 치르면서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체제가 필요했음에도 히틀러의 체제가 극단화된 개인적 통치로 인해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크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처참한 결과로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 중반까지 연이은 승리를 얻음으로써 생긴 그의 오만 때문이었다.

이언 커쇼는 히틀러가 1930년대의 잇다른 외교 승리와 1941년까지 전쟁 지도자로서 빛을 발한 것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말했던 예술가의 재능 덕분이 아니라 적의 약점과 분열을 이용하는 정확한 솜씨가 있었고 때를 보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는 능력이 뛰어나서였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도박판에서 판돈을 크게 걸고 약한 상대를 몰아붙이는 도박사 본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동안 그런 공격 본능이 효과가 있었지만 도박에 실패하고 질질 끄는 장기전에서 점점 상황이 불리해지고 절망적이 되자 히틀러의 도박사 능력은 효과를 잃고 오히려 독재가 가진 구조적인 허약함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함으로써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히틀러의 몰락의 주요 원인은 자신의 측근과 휘하 장성들에 대한 불신도 있었지만 히틀러의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 화를 자초했다. 특히 히틀러는 계속된 승리를 통해[79] 주변에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자신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들었고 이로 인해 자기만 옳다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화를 내는 히스테리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 이후 군대 작전 지휘권을 접수한 것으로 히틀러의 이런 증세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측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을 계속 관철시키려 하다 보니 장군들과 고함을 지르며 다투는 일이 잦아졌으며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군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상황이 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와 바그라티온 작전과 같은 군사적 실책들을 연이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이 계속 누적되면서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1944년 정도 되면 하나하나의 군사 위기가 차곡차곡 쌓여 도저히 전세는 뒤집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나치 지도자들도 다른 대안들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기에 파울 요제프 괴벨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등 히틀러의 측근들도 소련이나 서방 연합국과 휴전하는 것이 어떻느냐고 히틀러에게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이 모든 주장을 일축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음에도 히틀러는 협상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히틀러는 협상을 할 때 자기가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뿐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집권 초반에 던진 과감한 승부수들이 잇달아 성공을 거둔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전세가 불리해졌으니 평화 교섭에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상황이 불리해질수록 "의지"만 있으면 아무리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라 하더라도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고집만 부렸다.

이처럼 히틀러가 역경을 이겨내려면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동안 독일의 모든 국민들을 죽거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장군들은 전술적 후퇴를 건의했고 점령한 지역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빼내 중요한 전선에 배치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장군들과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떤 군사 논리도 히틀러의 고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히틀러는 그동안 자신의 모든 승부수들이 성공했으므로 자신의 판단이나 전략, 지도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극도의 오만함에 빠졌고, 이 때문에 자기 능력을 턱없이 과대평가하고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합리적인 조언을 한 집단의 의견을 깔아뭉갰다. 아울러 후퇴는 물론이고 타협을 하는 것도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극구 반대했으며, 일이 잘못되면 장군들이 자신의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장군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지휘관들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묻고 성질을 부리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히틀러의 군부에 대한 강한 불신감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발전했고 목숨을 건진 것을 오직 자기만이 독일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운명의 인간이라는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히는 결과만을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군사적 근거나 전략적 근거를 놓고 히틀러와 토론하는 것은 하나마나였다. 오히려 '배반을 일삼는 있으나 마나 한' 장군들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만 커질 뿐이었다.[* 독일 장군들은 모스크바 전투 이후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후퇴하거나 전략을 정하는 일로 히틀러와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당연히 군부에 대한 히틀러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그러나 독일 군부의 여론은 히틀러에게 불만을 가지거나 이견을 제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해도 된다는 분위기였으며, 군 내의 반히틀러 비밀조직에는 군의 고위직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히틀러의 암살을 수십 차례나 시도할 정도로 히틀러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다. 물론 히틀러도 자신에 대한 군부 내의 평판이 나쁜 편이며 군 내의 반항세력이 있다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실체는 알지 못했던 상태였었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군부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해치려 하는 반역자들이었다는 히틀러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후 히틀러는 군부가 전쟁 내내 자신의 발목을 잡았으며, 전황이 불리해지는 이유가 장군들 때문이며 이들은 독일 제국을 몰락시킨 "11월의 범죄자들"과 비슷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히틀러의 의지만 있다면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더라도 문제없다는 생각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으나 히틀러는 자신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져 병사 개인의 죽음은 그들의 나약함 때문이며, 병사 개인의 죽음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부전선의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언제나 그랬듯이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희생양이 되어야 할지는 자명했다. 바로 독일 민족이었다.

히틀러는 "그렇게 무너지는 것은 결국 민족이 약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독일 민족이 약한 것으로 판명되면 더 강한 민족에게 절멸당할 수밖에 없다. 동정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즉, 히틀러는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독일은 자신 같은 영웅적 노력을 한 지도자가 있었음에도 적의 압도적인 무력을 막아내지 못한 것은 독일인은 약하기 때문이라며 독일인은 결국 약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한 장군에게 말한 대로 독일 국민은 자기 같은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 심지어 전쟁 막판에는 독일인들은 살 가치가 없다면서 독일의 모든 기반시설까지 파괴하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이런 히틀러의 오만함 외에도 히틀러가 협상에 나설 수 없었던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단지 나치 독일이 인류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 때문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뒤틀린 생각과 성격 자체가 그 이유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배신 때문에 독일이 패전했다고 믿었던 히틀러는 반역과 배신이라면 치를 떨었으며 독일이 패전하면서 얻게 된 민족적 수모를 씻어내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한 히틀러는 1918년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비겁하게 항복하여 외세한테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러한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에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도 바그너의 가극처럼 웅장하고 장렬한 투쟁으로 가득 찬 히틀러의 사전에 1918년의 수치스러운 항복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히틀러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독일은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승리는 독일 민족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지만 패전은 완전한 소멸 즉, 독일 민족의 멸망이라는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독일이 패전하게 된다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뒤 맺은 베르사유 조약에 휘둘리는 정도가 아니라 독일 민족 전체가 절멸될 것이며 독일이 공중분해될 것이라는 생각에 차 있었다. 따라서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독일 민족이 완전히 절멸될 것이라 생각했던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독일이 초토화되는 한이 있더라도 굴복은 없으며, 오로지 끝까지 싸워 지금이 아니면 후세에라도 그 장렬한 영웅담을 인정받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면 결사 항전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히틀러의 흔들림 없는 자세는 화석처럼 단단했고, 말투도 달라지지 않았다. 잇달아 고배를 마신 것은 배신과 무능, 명령 불복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약함의 탓이었다. 자신의 오류나 오판은 단 한 가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항복은 없다', '굴복도 없다', '후퇴도 없다', '1918년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아무리 승산이 희박해도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버틴다' 이것은 히틀러의 메세지였다. 그렇게 힘껏 버티면 결국 형세가 바뀌어서 독일이 승리하는 날이 온다는 굳은 믿음이었다. 속마음은 달랐을지도 모르고 잠 못 드는 밤에는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을 테지만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맹신이라고나 해야 할 불변의 믿음이였다. 이런 내면의 확신이 있었기에 군 지도자들과 격렬하게 부딪쳤고, 패색이 짙어지던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자기 기만 없이는 그런 낙천주의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히틀러는 시간이 흐를수록 환상 속의 세계에서 살면서 기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전쟁의 결과가 명예로운 승리로 이어지든 아니면 희생적 자기 파멸로 이어지든 위엄을 지키려면 벙커에 끝까지 남아야 했다. 군인과 민간인이 과연 이대로 끝까지 살육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히틀러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처럼 히틀러의 정치 역정에는 "1918년의 반복은 없다. 등에 칼에 맞는 일은 없다. 항복은 없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이후에도 히틀러는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더 중요했다. 전쟁 막판 히틀러에게 남은 것은 나약함과 배신으로 끌어내려진 독일'영웅'으로 역사에 마련될 자리뿐이었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현실인식이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던 히틀러는 전쟁 막판에 이미 전쟁에서 졌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어떤 형식이 되었건 휴전 협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본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설령 평화 협상이 이루어지더라도, 전쟁에서 완패를 해도 히틀러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히틀러 개인으로서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보니 자기 자신과 나치 정권, 독일 시민들의 파멸을 불러올 것이 뻔했어도 항복은 있을 수 없다는 고집을 부린 것이다.[80] 이처럼 히틀러의 절대권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이나 협상을 전부 거부하다 보니 히틀러가 살아 있는 한 독일은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지도자 숭배와 히틀러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모든 결정은 히틀러가 하는 것이고 히틀러의 결정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원래 히틀러는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거나 상충되는 조언에 귀를 기울이거나 장단점을 따져보고서 결론을 내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룻밤 생각해보고 이거다 싶으면 사람들에게 들이밀고서 박수가 쏟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아니면 마냥 독백을 하면서 궁리를 하다가 자기 확신에 이르곤 했다. 히틀러 혼자서 결정을 내리다 보니 일관성, 투명성, 합리성이 부족했다. 우왕좌왕하다가 급조되었다는 것, 금세 바뀐다는 것, 두루뭉술하다는 것이 히틀러가 내린 결정의 특징이었다. 히틀러는 자기 성질대로 살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았다. 폴란드 침공 직전 히틀러가 비타협적인 자세를 고수한 것도 뮌헨 협정을 체결한 것은 패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39년 8월 29일 괴링이 "꼭 끝장을 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 히틀러가 "나는 일평생 언제나 끝장을 보았다."고 말한 것은 히틀러의 기질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81]

히틀러의 이분법적인 독단, 타협이나 양보를 모르는 원칙주의는 약하고 분열되고 우유부단한 적과 싸우는 동안에는 잘 먹혀들었고 그의 정치적 성공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적이 강하고 하나로 뭉쳐 있을 때, 주도권을 잃어버렸을 때는 교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는 유연한 군사전술과 섬세한 정치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정치에 입문한 뒤 협상을 통한 해결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성격으로 1921년 당권을 쟁취했을 때, 1923년 틀어진 쿠테타를 밀어붙였을 때, 1932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도전을 받았을 때 등 절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위기에 부딪쳤을 때마다 드러난 히틀러의 기질은 자기 고집대로 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자멸도 불사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사태 당시 당이 분열될 조짐이 보이자 히틀러는 당원들 앞에서 "만약 당이 쪼개진다면, 나는 차라리 자살하겠다."라 말하며 자살쇼를 감행했는데, 이 때 히틀러의 협박은 연기일 수도 있었고 그의 극단적인 히스테리가 드러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히틀러의 성격이 인생을 투쟁으로 보는 철학, 모든 갈등 요소를 무조건 '흑'과 '백'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만 몰아가는 버릇, 모든 문제를 급진적으로 풀어 가는 천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수많은 독일인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후퇴나 타협은 애당초 불가능했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지 못하면 자폭하겠다는 협박 말고는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독일을 무모한 도박으로 끌고 갔으며, 과감성과 잔인성, 주도권 장악에서 나오는 비타협성으로 거둔 연전연승으로 세계를 경악시킨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투쟁 원칙 위에 수립된 지도력은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외교적 해법을 찾거나 즐기는 지도력은 아니였다. 결국 히틀러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분법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와 이전까지 얻은 연이은 승리들로 생긴 오만은 히틀러 스스로의 몰락과 제국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패전의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함으로써 독일이 초토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8.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유럽 문명은 일찍이 그런 재앙을 겪은 적이 없으며 그 후유증에서 언제쯤이나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시작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맨체스터 가디언 1945년 5월 2일
아돌프 히틀러는 20세기를 격변시킨 가장 위대한 운동가인지도 모른다. 히틀러만큼 우리 시대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고 수많은 증오심을 유발시킨 사람도 없다. 그는 많은 사람들한테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수백만 명의 희망과 이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지 30년 이상이 되었는데도 적이나 진정한 추종자들의 견해는 바뀌지 않았다. .... 아직도 충실한 극소수에게 그는 영웅이자 좌절한 구세주이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에게는 여전히 미친 사람,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패한 사람이고 범죄적 수단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용서받지 못할 사악한 살인마이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서문 9페이지

히틀러와 제3제국에 대한 자료는 수준도 높고 양 또한 풍부하다. 역사가 이언 커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5년 기준으로 1500편이 넘는 연구서가 나왔으며, 논문도 12만 편이 넘어갈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히틀러를 총체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전기는 손에 꼽을 정도며 히틀러를 보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1920년대 히틀러가 역사에 등장한 이후 히틀러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제각각이었다. 히틀러를 "인총철학을 내세웠지만 지배욕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파괴욕에 가득찬 인물이자 자신의 권력을 연장해야겠다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시각. "독일 국민을 홀려 혼란을 부채질하는 정치적 모사꾼"으로 보는 시각과 히틀러를 "독일의 운명을 담은 신비로운 인물" 또는 "악령 같은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단순히 "히틀러는 대기업과 대자본가의 사주를 받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었으며 히틀러를 그냥 단순히 "말만 많은 미치광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히틀러에 대한 시각은 현재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독일의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는 히틀러를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똑같은 독재자로 평가했다. 즉, 계급을 철폐하자며 학살을 자행한 볼셰비즘에 증오심을 가진 히틀러가 볼셰비즘을 타도하자는 명분으로 인종 학살을 저지른 지도자로 평가한 것이다. 물론 이 의도는 히틀러는 물론 악독했지만 스탈린보다는 덜 악독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진짜 악당은 스탈린이었고 이에 비하면 히틀러는 아류였을 뿐이라는 논리다. 결국 나치가 저지른 인종학살의 원조는 소련이 자행한 계급학살이라는 것이다.

한편 역사가 라이너 치텔만(Rainer Zitelmann)은 히틀러가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노동자에게 더 좋은 집을 지어주고 산업을 현대화했으며 복지 제도를 확립하고 과거의 반동적 특권을 없애는데 관심이 많았던 정치인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잔인한 방법들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더 좋고 더 발전한 계급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독일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즉, 히틀러는 아무리 유대인을 악마로 몰아세우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승산이 희박하고 무모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베르너 쉬스는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독일의 현대화"였다 말하며 "히틀러가 비록 악독하기는 했지만 독일 사회를 위해서는 선한 의도를 가졌던 사람이며 적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을 지녔던 사람"이라 주장했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 전기 출판 전 대표적인 히틀러 전기로 평가받는 “히틀러 평전“을 서술한 요하임 c. 페스트는 이러한 변명을 넘어서 히틀러 복권의 분위기를 풍기는 주장까지 했다. 즉, 히틀러가 아무리 인류를 상대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히틀러는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지도자이고 특히 만약 그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다면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아 마땅한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히틀러가 정치적 매력과 영향력은 엄청났지만 히틀러라는 사람 자체는 고상한 맛도 없고, 위로 고양시키거나, 풍요로운 맛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고 위대함을 재정의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관점이다. 즉, 히틀러가 전통적인 시각에서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문제를 비켜가는 것은 히틀러에게 "그늘진 위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늘진 위대성이란 히틀러가 고귀한 위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역사에 가한 충격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파국을 초래했다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것이다."는 주장으로, 히틀러의 위대성은 히틀러 시대에 일어난 일은 아무리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도 어느 모로 보나 히틀러가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페스트가 주장한 그늘진 위대성이라는 말에는 히틀러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놀라운 업적을 쌓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고 민족의 영광이 민족의 재앙으로 바뀌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히틀러의 복권이라는 뉘앙스가 밴 주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틀러와 나폴레옹은 유사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던 무명의 인물이 갑자기 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으며,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유럽을 사실상 지배하여 전 세계를 호령하는 엄청난 인물이였지만, 영국과 대치하던 중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패배하여 몰락한 이후 그동안 이루었던 업적들이 평가절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이언 커쇼는 이러한 주장들을 전부 쓸모 없는 주장이라고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들은 사태를 호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알맹이가 없는 무익하고 뜬구름을 잡는 변명조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를 재평가하려는 주장들의 문제점은 그 주장이 평가자 개인의 주관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기에 구체성이 결여된 철학적•윤리적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뜬구름을 잡는 주장이라는 이유는 히틀러의 위대성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제3제국이 저질렀던 반인륜적인 범죄들을 역사적 인물의 위대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며, 변명조의 주장이라는 이유는 히틀러에게 위대성을 찾으려는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히틀러의 악행이 흐려지고 그의 위대성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며, 히틀러의 통치를 지지하고 그의 지시에 복종했던 독일인들을 사실상 위인의 들러리 역할로 축소시켜 역사를 극단적으로 개인화시키고 독일인들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커쇼는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몰락한 후 업적이 평가절하된 역사적 위인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나폴레옹은 히틀러와 달리 프랑스를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행정적인 분야에서의 업적이 상당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를 아우르는 행정망과 교육제도, 법전이라는 나폴레옹의 3대 유산은 현재까지도 건재하다. 그것만으로도 나폴레옹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라는 평을 받는다. 최소한 오늘날 나폴레옹을 히틀러와 동급으로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오늘에 와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자랑스러워하고 우러러본다.[82]

그러나 히틀러는 나폴레옹과 같은 업적이나 유산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히틀러와 나치의 유산은 하나같이 파괴의 유산으로 도덕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건축물이나 예술품, 정치 구조나 경제 모델에서도 내세울 만한 업적이 도저히 없다. 히틀러의 유산은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언론 조작, 지독한 극우 민족주의, 인종 우월주의의 가공할 파괴력, 엉뚱한 목적에 동원된 현대 과학기술과 사회 공학, 특정 민족 전체를 절멸시키려 했던 홀로코스트 등등 인류역사에 하나같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들 밖에 없다. 물론 자동차 산업과 비행기를 비롯한 항공기술의 발전 등이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발전들이 히틀러 때문에 발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당시의 산업 발전은 전쟁으로 인한 특수를 무시할 수 없고 독일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발전했기 때문에 히틀러가 없었어도 독일은 발전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발전했다고 한들 전쟁기간 동안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발전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부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과는 달리 히틀러는 인류 문명에 엄청난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죽은 지 몇십년이 지났어도 일부 광신도를 제외하고는 히틀러와 나치는 지탄과 경멸의 대상이지 우러러보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베니토 무솔리니,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히틀러만큼 비난받지는 않았다.[83][84]히틀러가 이토록 비난받는 이유는 침략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생학인종주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비인간적인 학살을 일으킨 점이 가장 크다. 물론 20세기 초 우생학과 인종주의는 세계적으로 유행했으며, 연합국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동양인과 흑인 등 기타 인종보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대놓고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며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언 커쇼는 히틀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어떻게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역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온 세계를 전율케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며, 히틀러를 단순히 말만 많은 미치광이 또는 무식한 인물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만약 히틀러가 그런 인물이였다면 복잡하고 현대화된 독일 시민들이 치료를 받아야 할 미치광이에게 홀려 그를 믿고 따르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기괴한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며, 히틀러의 정적들이나 각국의 정치인, 외교관들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다가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던 실책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쇼는 히틀러가 위인이 아니며 학식이 부족하고 성격과 인격이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다고 평가하면서도 상당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했다. 즉, 히틀러는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독일 민족의 부활과 재생을 중심에 둔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 일관성 있는 지도자이며, 비상한 기억력과 정치적 수완, 연설가로서 능력을 갖춘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을 사로잡을 매력이 있던 정치인이였다는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절대 다수 시민들의 지지 속에 집권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케 한 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의 굴욕감,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 민주주의를 파괴하고자 한 세력들의 지지 등등의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당세를 넓히고 상당한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독일 총리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비록 권력층의 내분으로 인해 총리 자리에 오른 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굳혔지만 집권 이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적 성과들을 연이어 성취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후 전 유럽을 정복하는 성과들을 얻으면서 독일 국민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처럼 히틀러 집권 이후 굵직굵직한 성과들이 잇다르자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비스마르크에 버금가는 정치인이자 민족 지도자로 추앙하면서 히틀러의 권력은 절대권력으로 굳었다.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엄격한 권위주의 체제, 인권 퇴보, 좌파에 대한 가혹한 탄압,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유대인 같은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은 민족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85] 치를 만한 가치 있는 희생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을 오히려 바람직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재는 경제 회복, 질서 확립,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을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호시절은 무한정 이어질 수가 없었다. 제3제국은 전쟁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고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는 원래부터 지속 불가능한 체제였다. 왜냐하면 빈약한 자원을 가지고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에게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전쟁으로 다른 나라의 부를 약탈하는 것만이 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던 점과 히틀러의 기질이 전쟁으로 가는 것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독재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손에 넣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히틀러에게는 두 가지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독일의 철천지 원수인 유대인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인을 제거한 여세를 몰아 유럽 대륙을 집어 삼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원래부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감수하는 승부사 기질이 강했는데 이런 성격은 계속된 승리를 통해 자신감이 붙으며 더욱 힘을 받았다. 날이 갈수록 커지던 히틀러의 메시아주의는 대중의 아첨과 주변인의 아부라는 마약을 먹고 자랐다. 거기에 히틀러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조바심에 쫓겼으며, 본인이 생각하는 천년왕국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히틀러의 굳은 믿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히틀러의 성격이 원래 그랬던 데다가 외부 상황까지 유리하게 작용하자 나치 체제의 이념적 활력은 시들어가기는커녕 더울 타올랐고 급진화에도 날이 갈수록 속도가 붙었다. 사실 웬만한 독재자라면 연이은 승리에 만족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멈추었을 것이지만 히틀러에게 외교적 승리는 유럽의 패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디딤돌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의 급진화는 1937년 말부터 두드러졌고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독일과 유럽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정복한 나라들에게 경제적 이권을 뜯어내는 것으로 체제는 유지되는 듯 보였고,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고 경제적 풍요를 안겨준 히틀러와 나치 체제에 열광한 독일 국민들은 이 침략 전쟁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오직 전쟁만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치 체제는 침략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체제가 되었고, 히틀러는 계속 침략 전쟁을 벌였으며, 국민들도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면서 나치는 끝없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끝없는 전쟁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고, 독일은 끝없는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모든 힘을 잃고 몰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절대권력을 가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사상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도 구체성이 떨어지고 지속성이 결여된 인물이었으며 행정에 무관심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독일에서 나치즘의 가장 큰 특징인 ‘누적적 급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마디로 히틀러는 추상적으로는 장애인과 유대주의, 볼셰비즘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그런 적개심을 막연하게만 드러냈다.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와 절대 권력이 있었기에 아래 사람들이 지도자의 뜻을 헤아리고 거기에 부응하게 되었고, 히틀러가 분명한 지침을 내리지 않으니까 아래 사람들은 절대권력을 쥔 히틀러의 눈에 들기 위해 더더욱 경쟁적으로 과격한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나치 독일은 극단적인 야만으로 치닫게 되어 T4 프로그램독소전쟁 당시의 학살, 홀로코스트와 같은 범죄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 범죄들은 히틀러를 믿고 따르면서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정권의 악행을 집행하고 묵인한 히틀러의 측근들뿐만이 아니라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 국민들 또한 이 끔찍한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죽고 난 이후 히틀러 다음으로 이 끔찍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반인륜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 중 다수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전후에 출세한 사람도 있었다. 히틀러 밑에서 자신이 한 일을 해명해야 할 사람들 중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나치 독일이 극단적인 야만으로 치달았고 나치가 저질렀던 반인륜 범죄들이 자신이 거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짓말과 왜곡, 변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책임지는 것을 꺼리는 심리적 장벽 때문이었다. 그 장벽은 자신들의 가치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이 매달렸고 일을 벌일 때 힘이 되었고 명분이 되어주었던 히틀러의 우상화된 이미지가 깨져버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자기 기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경력, 야심, 열망이 오직 히틀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에 만족해왔기에 이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이 오직 히틀러의 광기와 범죄성 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집권 초기에는 히틀러를 우러러보면서 히틀러가 그리는 유토피아를 열심히 따르던 그들이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히틀러가 자신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들을 속여 야만적 계획의 무력한 공범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패전 이후 평범한 독일인들은 왜 자기가 히틀러한테 속아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혹은 마땅히 했어야 할 행동을 안 했는지를 설명하거나 항변하고 싶어했다.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 지도자가 알고 보니 재앙을 가져왔다는 논리였다. 아니면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반항을 허용하지 않았던 히틀러의 공포 정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히틀러를 따랐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한 12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지지 기반이 취약하면서도 정권에 등을 돌린 국민 대다수를 탄압하고 억압하며 히틀러의 의지를 집행한 정권이 아니었다. 비록 전쟁 막판에는 무자비한 광기를 보여주었지만 나치의 공포 정치는 적어도 독일안에서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정의된 인종적, 정치적인 적들만을 겨냥했으며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86] 비록 독일 시민들은 대단히 선진적이고 세련되며 다원화된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민족적 수모와 경제적 파산, 극심한 사회적, 정치적, 이념적 양극화를 겪으면서 권력자들도 그렇고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 또한 정치 제도를 불신하는 분위기에서 실제로는 아주 위험했지만 "내가 여러분을 구해주겠다"고 큰소리치는 정치인에게 점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히틀러 집권 이후 경제적 성장과 각종 외교적 승리가 이어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버리고 위대한 지도자가 제시하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

나라의 위신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상승하자 워낙 요란하게 선전을 한 것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적으로 다가왔고 지도자의 능력이 가져온 명예 회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독일 민족의 구원과 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띈 인물로 선전되었고, 당시만 하더라도 대체로 신앙심이 깊었던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속세의 구세주로 떠받드는 열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이러한 마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는 히틀러의 권력 기반이 되었고, 이런 종교적 요소가 있었기에 나치 독일의 통치에서 일상 생활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었을지라도 사람들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심지어 폴란드소련에서 자행된 만행을 히틀러는 몰랐고 오로지 하인리히 힘러의 잘못이라고 전쟁 막판까지 믿었던 지식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러한 지도자 숭배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 마음 속에 파고든 것은 물론이고 고위직에 있고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까지도 속으로는 비판하고 우습게 볼지언정 지도자 숭배를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하다 보니 히틀러의 권력은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으로 굳었다. 번영으로 간다던 길이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히틀러의 개인화된 통치가 이미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치 체제는 통치자 개인에 대한 충성과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만 느슨하게 묶였지 점점 파편처럼 쪼개졌고 자연스럽게 히틀러는 어느 누구한테도 견제를 받지 않았다. 파멸로 가는 길은 활짝 열렸고, 용기 있는 집단과 개인이 나섰을 때 계획이 부실했다기보다 운이 안 좋아서 히틀러 제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는 이제 그 파멸의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치러야 하는 대가, 특히 독일 국민을 비롯하여 독일 안팎에서 나치 정권에게 당한 수많은 희생자의 수는 숫자로는 따질 수가 없으며 물질적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물리적 차원에서건 도덕적 차원에서건 한 국가의 파멸이 오직 한 사람의 이름하고만 결부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볼 수 없었다. 히틀러의 이름은 현대에는 문명의 가장 심각한 몰락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늘 거론된다. 제대로 못 배운 술집 선동가에 고집불통의 인종주의자이자 자기도취와 과대망상에 젖었으며 민족의 구세주를 자처했던 사람이 철학자와 시인의 나라로 알려졌고 발달된 경제를 가진 현대 문명국에서 휘두를 수 있었던 극단적 형태의 개인화된 통치는 그 운명의 12년 동안 끔찍한 사건들이 펼쳐질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히틀러는 5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낳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별의 아픔을 딛고 갈가리 찢긴 삶을 봉합할 수밖에 없게 만든 전쟁의 줄거리를 쓴 대표 작가였고, 이 세상에 유례가 없었고 20세기를 정의하는 사건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대량 학살극을 만들어낸 주모자였다. 히틀러가 영광을 되찾아주려고 했던 제국은 결국은 무너져 내렸고 그 찌꺼기는 전승국들과 점령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본인이 불구대천의 원수라 여겼던 볼셰비즘은 유럽의 절반을 차지하고 미국과 대립하는 초강대국이 되어 세계를 호령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 자신이 정치를 시작한 이유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내내 말했지만 독일 민족에게 히틀러는 차라리 없으니만 못했던 존재였다.

히틀러의 통치는 20세기 초반부터 반세기 동안 독일을 지배하면서 유럽과 세계를 두번이나 끔찍한 전쟁으로 몰아넣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입각한 세계 패권의 야심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아돌프 히틀러를 낳았고 히틀러의 비전에서 미래를 보았고 히틀러를 흔쾌히 섬겼고 히틀러의 오만을 공유했던 독일은 결국 히틀러가 받았어야 할 복수도 받게 되었다. 히틀러 사후 독일은 히틀러 시대라는 역사를 반성하며 폐허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바탕으로 한 사회를 건설했다. 비록 히틀러 시대가 남긴 거대한 도덕적 상처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은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9. 참고 문헌



[1] 이 점이 독소전쟁 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소련은 초기에 병력을 잃으면 그만큼 추가보충해가며 싸울 수 있었는데 독일은 그만큼의 피해를 입으면 복구가 어려웠다.[2]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나는 바다사자 작전의 무산. 처음부터 독일의 해군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공군의 바보짓으로 취소되었다. 둘째는 비대한 군사력.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독일의 경제는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폐쇄적인 경제였으므로 빠르게 한계가 찾아옴은 불보듯 뻔했다.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된 이후 독일은 또다른 전선을 만들 곳이 소련말고는 없었고 소련을 치지 않으면 깨진 독에 물을 붓듯이 군 유지비용으로 경제가 줄줄 샜을 것이다. 세번째는 겨울전쟁에서의 소련의 추태이다. 히틀러가 소련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에는 이런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개전 당시의 붉은 군대는 대숙청으로 인해 개판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과소평가한 것보다 독일을 과대평가했다는 더 큰 실책을 저질렀다. 월동장비도 제대로 가져오지 않은데다가 과하게 이른 기간에 전선을 정리하려는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히틀러가 조금이라도 독일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면, 또 41년의 겨울에 기록적인 혹한이 오지 않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3] 출처- Robert Dallek, The Lost Peace: Leadership in a Time of Horror and Hope, 1945-1953, Harper Perennial; Reprint edition (December 5, 2011), p.9[4] 6.5%에서 3%로[5] 이렇게 정권을 빼앗긴 교훈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범중도파~좌파를 아우르는 인민전선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6] 물론 그 배경에는 북한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강대국인 독일의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북한 1패[7] 히틀러가 만약 (수정의 밤 이전인) 1938년에 암살당해 사망했더라면 그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았을 것이다. 이건 <히틀러 평전>을 쓴 요아힘 페스트가 하는 말이다. 결국 전쟁과 전쟁 범죄가 문제. 요아힘 페스트는 히틀러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8] 2차 대전 이전에는 제3제국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 예로, 난립하던 중소기업들을 하나로 통합해 Reichswerke Hermann Göring(헤르만 괴링 국가공업)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나치 독일의 국가조합주의 체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를 효율적으로 편제한 장본인도 괴링이다.[9] 재정적자가 경제에 순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존재한다.[10] 국가노동단(Reichsarbeitsdienst)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을 반강제 가입시켜서 투입하였다.[11]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의 최고사령부>에선 라인란트 재점령 및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는 군부가 반대했지만 이후엔 히틀러에 동조했다고 한다. 단 여기서 반대했다는 것은 시기상조란 것이지 절대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20년대부터 독일 군부에선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침공을 대놓고 얘기했고 그에 대해 인도적, 윤리적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히틀러만큼 막 나가지 않았다뿐이지 군부 역시 베르사유 체제를 증오했다. 군부에게 있어 체코나 폴란드처럼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탄생한 신생국들 역시도 언젠가 한번 손 봐줘야 할 타도 대상일 뿐이었다.[12] SS의 힘러, 공군의 괴링, 나치당의 보어만, 해군의 되니츠, 그리고 육군 수뇌부…등등[13] 이로 인해 슈투카가 큰 피해를 주지 못해도 소음으로 인한 공황상태가 발생해 적들이 붕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붙은 별명이 제리코의 나팔.[14] 여기서 말하는 아마추어란 히틀러가 미대 지망생이었고 건축이나 풍경화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군사학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물론 건축물을 그린 경험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정확한 척도는 미지수.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 서부 방벽 토치카는 롬멜의 예상대로 아무 쓸모 없게 되기는 했다.[15] 사례를 딱 하나만 들자면 잔 다르크. 일개 농민의 딸로 태어난 만큼 군사 교육을 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으나,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16] 실제로 비슷한 시기의 미군이 현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전쟁 영웅들에게 사관학교 복무를 제안하거나 일정 계급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반드시 사관학교 졸업장을 요구한 건 그런 군사적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게 아니라, 설령 어지간한 천재라 하더라도 자신에 맞춰 시대의 군사적 패러다임을 바꿔버릴 정도가 아니라면 탄탄한 기본기를 갖춰두는 게 훨씬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직감이 맞아떨어지면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지만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순식간에 파산하는 지휘관과, 거기에 더해 추가로 군사적인 지식을 습득해 설령 실패하더라도 안정적인 수습이 가능한 지휘관을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에 무게가 쏠릴 수밖에 없으니까. 화려한 군사적 전공은 틀림없이 사람들의 눈을 빼앗는 부분이 있지만, 현실에서 군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건 실패의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휘관이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17] 1918년에 제정된 부상병들에게 수여된 전상 공로장(1급:금색, 2급:은색, 3급:흑색의 세 등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 수훈되었다. 당연히 부상의 상태가 심할수록 높은 등급의 전상장이 수여되었다.), 한마디로 최전방에서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싸워본 경험도 없는 책상배기라는 의미.[18]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에르빈 롬멜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와 미국의 횃불 작전 성공 이후 히틀러에게 강력히 철수를 주장했지만 씹혔고 이후 히틀러는 폰 아르님을 우겨넣어 안 그래도 남의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롬멜과 통수권 문제로 싸움을 일으켜 북아프리카 전역 말기 혼란을 가중시킨 적도 있었다.[19] 이는 동맹국이었던 일제의 장군 도조 히데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보헤미아 상병 따리였던 히틀러와 달리 도조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이다![20] 히틀러가 직접 개발을 지시했다는 설도 있고 크루프사에서 제안한 것을 히틀러가 승인했다는 설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좋아했기 때문에 개발이 시작됐다는 점은 동일하다. 움직이는 요새와 같은 개념으로 방어 시엔 토치카나 고정포대처럼 기능하고, 공격 시엔 진격도 할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하는, 참으로 현실감이 결여된 히틀러다운 발상이었다. 당연하지만, 대다수 무기들은 장점을 덕지덕지 붙인다고 완전체가 나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장점을 얻기 위해 일정 부분의 능력치를 희생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런 꿈의 병기는 말 그대로 꿈처럼 남을 뿐이다.[21] 예컨대, 비록 임진왜란 와중에 잘못된 판단으로 큰 피해를 초래하기는 했으나 선조 임금도 일본군의 조총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개발한 조총을 조정 대신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22]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은 실용성에 회의적이던 해군을 루스벨트가 설득해서 잘 써먹은 사례고, 반대로 처칠은 6파운더의 양산을 미뤄서 영국 전차의 화력 개선을 가로막는 삽질을 했다. 스탈린 또한 다포탑 전차를 두고 '왜 전차에 백화점을 차리려고 하느냐'는 말로 다포탑 전차를 포기하게 만들었다.[23] 그런데 지구 반대편의 동맹군이 짓진짜로 했다(...). 그나마 독일군의 그것은 중간에 조종사가 탈출하는 방식인 반면에 이쪽은 아니었고, 일본도 공대공 자폭에는 독일처럼 조종사를 탈출할 수 있게 했다.[24] 이건 룬트슈테트를 위시한 보수적인 독일 장교들의 문제에 더 가깝긴 하지만. 자세한 전말은 전격전의 전설에서 나와있다.[25] 스탈린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억지에 가깝다. 스탈린이 직접 개입하고 주도한 작전들은 대부분 말아먹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겨울전쟁. 원래 군부가 입안한 작전은 대부분의 병력을 헬싱키 공격에 투입한다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작전이었지만, 전력을 쓸데없이 분산시키는 복잡기괴한 작전으로 바꾼 스탈린의 결정 덕분에 소련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살리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외에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무리한 공격 명령을 끊임없이 내려 대부분의 병력을 소진했고, 1942년 여름에 또 무리한 공세를 퍼부었다가 실패했다. 반대로 1942년 이후부터 소련군이 대승을 거둔 작전들은 스탈린이 승인하기만 할 뿐, 입안과 진행은 휘하 장군들이 다 했다. 그래도 적백내전에서 준수한 군공을 세우긴 했지만, 세묜 부됸니의 예를 보면 알듯이 아무리 처음에 좋은 전공을 세워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지휘관은 명장이라 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러시아 내전에서 스탈린이 저지른 삽질도 적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적인 능력에 한해서는 히틀러가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는 게, 히틀러는 군사적인 실책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자기가 주도적으로 밀어붙여서 대성공을 거둔 사례도 꽤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침공이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거둔 성공적인 기습이 그 예. 하지만 비록 군사적인 능력은 히틀러 이하였어도, 정작 전시 지도자로서 가장 필요한 자질인 외교적, 정치적, 행정적인 능력은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훨씬 뛰어났다.[26]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그의 국가인 영국이 승전국이었기에 망정이지 두 차례 모두 지거나 두 차례 중 한 번이라도 졌다면 지금보다 그의 무능한 군사적 식견이 더 드러났을 것이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갈리폴리 전투만 봐도 답 나온다. 오죽하면 그의 정적들이 잘난 척하는 처칠의 모습을 보기 싫으면 갈리폴리라는 말을 하면 된다고 하고 그의 앞에서는 사람들이 갈리폴리 전투를 언급하는 걸 싫어했다고 할까. 그나마 처칠 본인은 실책에 어느 정도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물론 본인이 민주국가의 인물이고 최고 지위에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지만. 히틀러도 독재자가 되기 전에는 맥주홀 폭동으로 인해 붙잡혔을 때는 솜방망이 처벌이기는 하지만 처벌을 받았듯이 말이다. 다만 2차대전 개전 이후 본인의 삽질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노르웨이 전역의 패배는 처칠 탓이 컸지만 체임벌린만 갈리고 오히려 처칠이 총리가 되었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이 날뛸 수 있던 것도 처칠이 롬멜이 원하는 대로 영국 8군을 전장으로 내몬 것이 큰 요인 중 하나였다. 몽고메리가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처칠의 공격명령을 상큼히 다 씹고 제자리를 고수하며 롬멜의 소모를 기다린 후 가한 공세 덕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27] 실제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에게 소모전을 강요하며 영국군의 자신감을 끌어올린 클로드 오킨렉은 처칠의 공격 독촉을 상큼히 씹고 방어진지를 고수하다가 몽고메리로 갈려버렸다. 물론 몽고메리는 오킨렉보다 더한 장군이었고 자신이 독일군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때까지 엘 알라메인 방어선에 틀어박혀있었다.[28] 됭게르크에 모여 있던 병력은 34만 명이 넘었지만 사실상 고립되어 공세를 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히틀러가 됭게르크 공격을 명령했다면 거기에 시간을 빼앗기는 동안 프랑스가 대비할 기회만 주었을 것이다.[29] 다만 덩케르크를 목전에 둔 부대를 돌려서 북프랑스 타지역의 프랑스군을 정리했던 것도 아니고 해당 시점에서 프랑스군 지휘부의 상황을 고려하면 결코 합리적인 예측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선 지휘관들이 됭케르크의 대륙원정군을 격파하려던 것은 공세에 대한 우려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30] 물론 여기서 함정은 프란츠 할더는 히틀러에게 영국과 프랑스가 가짜전쟁으로 별 전쟁수행 의지도 없으니 협상테이블로 가라고 강권했고 그런면에서 성공가능성이 전혀 없는 황색작전안을 만들어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의지를 포기하려 했다.[31] 특히 모스크바 공략을 주장한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은 모스크바로의 쾌속 진군 도중에 히틀러가 개입하여 중부집단군을 키예프 방면 포위전에 투입하게 되고 이는 소련군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로 작용했다.[32] 굳이 냉전 종식 후가 아니더라도 서방과의 인터뷰에서 구 국방군의 출신 장성들의 해당 견해를 전해들은 주코프 이하 소련군 관계자들이 어이없단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33] 한국전쟁 당시에도 UN군이 북진하는 과정에서 그리 많지도 않은 빨치산이 후방을 교란하는것이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제대로 훈련도 안된 게릴라들이 설치는 것도 골치아픈데 60만 명에 달하는 그럭저럭 잘 훈련된 병력을 후방에 남겨두고 진격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지는...[34] 물론 판터가 이 꼴이 날거라고 예상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35] 북부집단군의 잔존병력[36] 물론 나치 사상이 사회주의자들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에 레벤스라움 문제도 같이 들어가 있기도 했었고.[37] 실제로 독일군은 T-34전차의 45도 경사면 장갑으로 기동력과 방호력을 살린 것에 놀랐으며 이 외에도 PPSh-41, SVT-40의 성능을 고평가 하고 노획해서 잘 써먹었다. 소련군이 초반에 참패를 거듭하며 후퇴한 것은 대숙청으로 인한 군대의 마비, 소련-폴란드 국경에 있던 방어선에서 더 전진하여 독-소 국경에 새로운 방어선을 만들었던 것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 겨울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작계를 전환하는 중이어서 소련이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불가침 조약마저 파기하고 기습한 것이 완전히 허를 찌른 탓이다. 여러모로 소련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독일이 예상한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고 최근으로 올 수록 소련은 그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잘 싸웠다는 평가가 나오는 중이다.[38] 또한 히틀러가 소련을 얕잡아 봤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것이 히틀러 뿐 아니라 독일군 전체가 똑같이 생각했다. 소련은 (결과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독일의 전면공격이 있을 것을 날짜까지 정확히 예측해낼 정도였지만 독일은 잘못된 정보에 의하여 소련이 3개월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고 전쟁 내내 소련의 총체적인 전쟁수행역량은 고사하고 당장 소련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그게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파악 못 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39] 당시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한참 공략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정확히 히틀러의 삽질에 대한 OKW를 비롯한 장성들과 현역 병사들의 반응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말리지 않았다면 독일군 OKW가 프랑스 침공 작전 입안 시 만슈타인이 등장할 때까지 일부러 불가능한 계획을 낸 것처럼 무능하고 장기적 전쟁에 대한 식견이 매우 부족하다고 볼수 있다.[40] 사실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피하려 애썼어도 루스벨트의 미국은 고립주의와 명분 부족, 처칠의 영국은 육군력 부족, 스탈린의 소련은 대숙청으로 불구가 된 군대를 회복시켜야 했기에 싸우지 않았을 뿐, 세 명 모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둘 다와 대극점에 위치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조질 생각을 하고 있어서 결국 독일은 셋의 다굴로 양면전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단기전으로 한쪽 전선을 빠르게 밀려 해도 미국과 영국은 해군력이 딸려 본토 접근이 안되고 소련은 국토가 더럽게 넓어 세 나라 모두 독일이 단기전으로 제압이 불가능한 상대다.[41] 다만 FG42는 경기관총과 개인화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가 생산성을 말아먹었다. 전쟁 전체적으로 봤을때 군수공업력이 부족한 독일로서 좋은 선택지는 아닌 셈이다. 물론 MKb는 그런 거 없는데, Kar98k 1개 분대급 화력의 혁신적 총기 한 정이 Kar98k 한 정보다 조금 더 비싼 정도이다.[42] 일반적으로는 세계 최초의 제트 엔진 전투기로 알려져 있지만 1938년에 이미 융커스 사에서 EF009 제트 전투기를 개발했으며 하인켈사가 1939년에 먼저 He 178 제트기의 시험 비행에 성공했고 그 뒤를 잇는 제트 전투기인 He 280의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Fw 190와의 경쟁 당시의 독일군 관계자들의 제트 엔진에 관한 무관심 덕분에 Fw 190에 밀려 채택되지 못하였다.) Me 262는 세계 최초로 실전배치된 제트 전투기만 해당된다.[43] 총통명령 Führerprotokoll[44] 이것부터가 이미 당초 예정보다 1년이상 늦은 것이다.[45] 히틀러와 허세왕괴링은 스탈린그라드의 병력에게 공중으로 물자를 보급하겠다!며 호언장담했으나, 양에 명확한 한계가 있는 공중 보급으로 30만 병력을 살리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후에 사태를 깨닫고 겨울폭풍 작전을 통해 제6군 구출을 명령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런데 이전에 파울루스는 총통의 후퇴 금지령을 충실히 이행해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태도 변화를 보고 그의 반역 가능성을 의심했을 수도 있다. 결국 총통은 파울루스에게 자살하라는 암묵적 메시지를전한다.[46] 청색작전의 실패로 독일군이 소련군을 더 이상 밀어낼 수 없게 되었지만 전선지탱 능력은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전선을 굳건히 방어하며 소련군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독일군 전선이 그리 빨리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병력을 그대로 쿠르스크에서 날려먹으며 사형장 티켓을 발급받는다.[47] 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서 폭격기의 넓은 행동반경을 제한할 수 있으므로 전략적 공격수단인 폭격기의 발목을 잡는다고 여겼다.[48] 단, 이 손실은 이탈리아군과 비시 프랑스군이 보유한 항공기 손실을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손실한 항공기가 1,400여대임을 고려하면 결코 가벼운 손실은 아니다.[49] 노든폭격조준장치의 카피판이 있었지만 전투기로 쓸 물건에 그런 걸 배치할 리가...[50] 아돌프 갈란트는 '말은 맞다. 우리들 중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비꼬았다. 그걸 제외하고라도 히틀러가 폭격기에 얼마나 미쳐있었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51] 히틀러는 방공전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다.[52] 아돌프 갈란트의 회고록에서 '주위에 있던 장교들의 말을 빌리자면 "히틀러가 그 정도로 화내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고'.[53] 이 때문에 밀히가 실각했다는 말도 있지만 밀히의 실각은 1944년 8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Me 262의 생산문제보다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달 효율이 낮은 탓과 함께 본토 방공전 전략에서 히틀러 및 괴링과의 의견 충돌이 심했던 탓이 더 크다.[54] 물론 성과는 어느 정도 올렸는지, 성과가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55] 어차피 폭격기 버전에도 기관포가 달려 있었고, 전투기로의 개조는 거기에 기관포를 2문 더 장착하고 폭탄창을 철거하는 방식이었다.[56] 그나마 뒤늦게나마 만슈타인의 재량으로 병력은 상당수 살려냈지만 알토란같은 기갑장비들은 대다수 버리고 후퇴해야했다. 그리고 인명 구출도 기존의 인명피해보다 적었다는 것이지 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는 참사였다.[57] 소련의 T-34는 공방능력에 있어서는 티거나 판터에 못미치고 4호 전차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전략적 기동성은 당대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장비였다. 게다가 독일군은 수송량의 절대다수를 말에 의존한 반면에 소련군은 차량을 이용했다. 말과 차량의 기동력 차이는 명백하다.[58] 8월에 뒤늦게 발터 모델이 기동방어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입은 피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승기는 진작에 소련군이 잡은 상태였다.[59]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독소전의 무게추는 완전히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60] 전사 및 실종자만 집계한 수치. 포로와 부상자를 전부 집계하면 소련이 77만 명, 독일이 60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61] 이는 사수명령으로 60만 명의 독일군이 77만 명의 소련군 사상자를 내고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된 이유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기동력 차이로(소련은 랜드리스로 받아온 차량을 이용한 반면에 독일은 말을 이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62] 드네프르 서안 우크라이나 인구만 해도 족히 2500만 명은 되고, 벨라루스도 거의 1000만 명 정도였으니 여기서 러시아 본토 식으로 10% 이상 징병하면 최소가 350만 명이다.[63] 1944년 8월 팔레즈 포켓 재앙,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뻘짓으로 독일군이 거의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도 서부전선의 연합군이 독일 서부의 삼림지대를 완전히 돌파한 것은 1945년 3월이 되어서였다. 모르텐 공세에서의 뻘짓으로 날린 전차 1300대와 25만의 병력, 그리고 아르덴 공세에서 뻘짓으로 날린 전차 800대와 10만 명 전후의 병력을 보전했더라면 서부전선은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64] 이정도 규모의 손해이면 쿠르스크 전역에서 손실하였던 기갑병력의 거의 2배에 달한다.[65] 그나마 보유하던 헝가리유전도 이때 함락된다.[66] 물론 이때도 장군들은 반대했는데 히틀러가 관철시켰다.[67] 이 작전의 실패로 남아있는 정예 병력과 제대로 된 기갑 전력마저 싸그리 말아먹어 베를린 공방전 때의 독일군은 수 천대의 전차가 몰려드는 소련군과 비교해 기갑전력이라고는 1500대정도의 이마저도 장갑차 위주로 양과 질에서 모두 밀렸다. 이 작전안을 실행하지않고 기갑전력을 베를린에 투입했더라면 그래도 2:1정도의 비율로 메꿀 수는 있어, 패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독일군다운 전투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68] 그러나 이런 실책은 히틀러만 저지른 것이 아니며, 스탈린이나 처칠도 이런 유의 실책은 히틀러 못지 않게 많이 저질렀으니 히틀러만 무능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당장 소련이 초반에 탈탈 털린 이유가 히틀러는 저리 갈 정도로 스탈린의 엄청난 트롤링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69] 컴퓨터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림엽서, 광고판 등을 그려주고 다니는 것이 그림쟁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는데, 현대에 비유하자면 커미션이나 상업지로 먹고사는 픽시브 일러스트레이터와 비슷한 위치였던 셈이다.[70] 학벌 자체는 조지 워싱턴도 중등학교 수준인 등, 국가수뇌로서 평가하기에는 애매한 척도인 것이기는 한데, 문제는 히틀러의 그나마 있는 학벌은 예술가로서의 학벌이라는 것이다.[71] 다만 그의 대중선동능력이나 예술가로써의 면모를 보자면 아주 바보도 아니었고 실제로 그의 IQ는 141로 전해지며 이는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물론 지능이 순수하게 학술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부분에서 발현되는 지 다르므로 지도자로써 적합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그의 내치를 보면 오히려 학살 등 다른 악행을 베재하고 순수히 능력적인 면만으로도 부적절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72] 제3제국의 장관으로 히틀러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히틀러를 "마성을 지닌 사람", "개인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류사에서 어쩌다가 나타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적 현상의 하나"로 묘사했다. 출처: 이언 커쇼 히틀러 1권 프롤로그 25페이지[73] 이언 커쇼는 히틀러가 아니었어도 당시 독일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해서 유대인 차별정책은 실시되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아예 유대인들을 전부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 정책은 히틀러라서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74] 제2차 세계대전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 배경[75] 히틀러는 이렇게 해야 상대방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76] 히틀러 1권 13장 지도자 숭배(736~737쪽)[77] 독일 군부는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점, 문민통제를 거부한 점, 의견이 다르면 최고 지휘관의 명령도 무시했던 점, 전략적 안목이 전무했던 점에서 일본 군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만 해도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빌헬름 2세의 책임이 크긴 하지만 슐리펜 계획을 중지하라는 빌헬름 2세의 명령에 독일 제국군이 복종했다면 전쟁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센 군부의 안하무인적 엘리트주의를 뼈저리게 체감하고 이를 조지려고 했던 히틀러의 행보는 당시 나치당과 나치 독일이 정상 국가였더라면 오히려 칭찬해줄 만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행보였다. 다만 군부의 독립성을 조지면서 나치 당의 통제라는 더 정신나간 독약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크게 보면 긍정적인 면이 결코 부각 될 수 없는 것이나, 확실한 건 루즈벨트 정권이 보여주었던 민간 지도자들과 군부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조율하며 합리적으로 전쟁을 끌어가는 분위기는 히틀러가 아니라 비스마르크가 2차대전 당시 지도자였어도 독일 실정에는 불가능했다.[78]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히틀러의 정신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확증은 없다. 자세한 내용은 테오도어 모렐 항목 참고.[79] 특히 히틀러는 도박적인 행동과 자신의 고집으로 일을 밀어붙여 성공한 인물이였다. 실제로 무명의 정당이였던 나치당에 들어가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든 뒤, 불가능해보였던 집권에 성공하여 독일 총통 자리에 올랐다. 이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며 독일의 절대권력을 거머쥐었고, 독일의 실업•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외교적으로는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 체코 슬로바키아 병합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연속해서 이뤘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폴란드 침공에서의 성공, 프랑스 침공에서의 승리 독소전쟁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 키예프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 등 아무리 평범하고 겸손한 인물이어도 대단히 오만해질 수 있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게다가 장군들과 측근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만류했던 것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붙여 이루어냈기에 이러한 도박수의 연속된 대성공 이후에는 히틀러의 반대파들조차 점점 히틀러의 결정을 말리기보다는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분위기가 더욱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져 히틀러가 전쟁도 평화도 결정하는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었다.[80] 실제로 1942년 발두어 폰 시라흐가 히틀러에게 "아무래도 전쟁을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어보자 히틀러는 펄쩍 뛰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내 손으로 내 머리에 총을 쏘지 않는 한 그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 텐데."라 대답한 적이 있었다. 출처: 히틀러 2권 16장 몰락 의지 919페이지[81] 출처 : 히틀러 2권 5장 세계대전 속으로 302page[82]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 시절 폐지된 노예제를 부활시킨 것과 그가 아이티로 보낸 프랑스군이 아이티인들을 학살했고 스페인, 이집트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비난 받는 부분도 있지만 히틀러같이 민족 전체를 몰살시키려 한 적은 없다.[83] 그나마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탈린이 히틀러와 종종 같이 엮이지만 인류의 도덕성이나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을 논하지않고 오로지 결과만을 놓고 보더라도 스탈린은 독재와 탄압, 철권통치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소련을 초강대국의 반열로 올려놓았고 이는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자행한 엄청난 과가 있음에도 분명히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간기 동안 이루었던 업적들이 전쟁으로 인해 모조리 말아먹은걸 넘어서서 독일이 지금까지 이루었던 수많은 분야의 성과들도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어쩌면 히틀러도 전쟁에서 이기거나, 또는 전쟁이 일어나지않았더라면 스탈린정도의 과가 많지만 공도 분명히 있는 지도자로 기록됐을 것이다.[84] 사실 히로히토도 히틀러만큼 비난받아 마땅한 놈이지만 미국이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는 바람에 그다지 비난받지 않았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히로히토도 비난받았을 것이다.[85] 특히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서는 적극 찬동하지도, 적극 반대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치가 일으킨 사건이 바로 수정의 밤이다. 이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약탈 전시경제와 맞물려 절멸로 자리잡힌다.[86] 물론 당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지지하는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견해와 태도만을 골라낸 다음 그러한 의견들이 독일 사회 전체의 분위기였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즉, 히틀러가 독일의 절대 권력자가 된 모든 이유를 독일 사회 안에서 찾으려는 것도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지만, 마치 히틀러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독일을 통치하게 되었고 독일 시민들이 갑자기 통치자가 된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한 사람온 나라를 최면에 빠뜨려 건강하게 발전해 가고 있던 독일이 망가졌다"라는 진실을 호도하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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