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이후 1933년 나치당의 집권 이전까지 독일에서 실시된 총선 결과를 다루는 문서다.2. 대공황 이전
2.1. 초대 총선 (1919)
1919년 1월 19일 총원: 423석, 과반의석: 212석 | ||||||
샤이데만 내각 331석 | 야당 92석 | |||||
사회민주당 | 중앙당 | 민주당 | 국가인민당 | 독립사회민주당 | 인민당 | 기타 |
165석 | 91석 | 75석 | 44석 | 22석 | 19석 | 7석 |
헤르만 뮐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37.9%를 득표하며 제1당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함께 주도한 중앙당, 민주당과 흑적황 연정을 구성했고, 사회민주당의 필리프 샤이데만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이후 개각을 거치며 총리는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로 교체되었지만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정 구성은 1920년 선거 전까지 유지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출범을 지지한 친(親)민주주의 정당들이 압도적 과반을 유지한, 사실상 유일한 시기였다.
2.2. 제2대 총선 (1920)
1920년 6월 6일 총원: 459석, 과반의석: 230석 | ||||||||
페렌바흐 내각 168석 | 야당 291석 | |||||||
인민당 | 중앙당 | 민주당 | 사회민주당[신임] | 독립사회민주당 | 국가인민당 | 바이에른 인민당 | 공산당 | 기타 |
65석 | 64석 | 39석 | 103석 | 83석 | 71석 | 20석 | 4석 | 10석 |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립정부는 출범 1년여만에 과반을 상실하였다. 이에 제1당인 사회민주당은 기존의 3당에 독립사회민주당을 추가하는 4당 연정을 구상하였으나 독립사회민주당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독립사회민주당 대신 인민당을 추가하는 4당 연정도 제안되었으나 이는 정작 제1당인 사회민주당 측에서 미온적이었다. 결국 중앙당-인민당-민주당이 소수연정을 구성하고 사회민주당이 내각에는 참여하지는 않되 외곽에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1차대전 전후협상 문제로 연립정부 내 이견이 커지자 페렌바흐 내각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사임하였다. 이후 1924년 5월 선거 이전까지 가까스로 연립내각이 세워졌다가 단기간에 붕괴, 교체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2.3. 제3대 총선 (1924.5)
1924년 5월 4일 총원: 472석, 과반의석: 237석 | |||||||||
마르크스 2기 내각 138석 | 야당 334석 | ||||||||
중앙당 | 인민당 | 민주당 | 사회민주당[신임] | 국가인민당 | 공산당 |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 | 바이에른 인민당 | 중산층 경제당 | 기타 |
65석 | 45석 | 28석 | 100석 | 95석 | 62석 | 32석 | 16석 | 7석 | 22석 |
이로 인해 정부 구성을 위한 과반 확보가 선거 이전보다 까다로워지면서 안정적인 다수연정이 구성되지 못했다. 결국 다시 한 번 사회민주당의 외곽 지원을 받는 중앙당-인민당-민주당 소수연정이 빌헬름 마르크스 2기 내각으로서 출범하였다.
2.4. 제4대 총선 (1924.12)
1924년 12월 7일 총원: 493석, 과반의석: 247석 | |||||||||
루터 1기 내각 242석 | 야당 251석 | ||||||||
국가인민당 | 중앙당 | 인민당 | 바이에른 인민당 | 사회민주당 | 공산당 | 민주당[신임] |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 | 중산층 경제당 | 기타 |
103석 | 69석 | 51석 | 19석 | 131석 | 45석 | 32석 | 14석 | 11석 | 18석 |
연립정부 협상 결과, 국가인민당-중앙당-인민당-바이에른 인민당 소수연정이 민주당의 지원을 받아 출범하였다. 총리직은 이전 내각에서[5] 하이퍼인플레이션 해결에 기여한 재무부 장관 한스 루터가 맡았다.[6]
하지만 이내 로카르노 조약에 반대해 국가인민당이 연정에서 탈퇴했고, 이후 정국 불안정 속에서 여러 차례 개각이 단행되었지만 모두 단명하였다.
2.5. 제5대 총선 (1928)
1928년 5월 20일 총원: 491석, 과반의석: 246석 | |||||||||
뮐러 2기 내각 301석 | 야당 190석 | ||||||||
사회민주당 | 중앙당 | 인민당 | 민주당 | 바이에른 인민당 | 국가인민당 | 공산당 | 중산층 제국당 | 나치당 | 기타 |
153석 | 61석 | 45석 | 25석 | 17석 | 73석 | 54석 | 23석 | 12석 | 28석 |
헤르만 뮐러 2기 내각은 1년 9개월 동안 유지되며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존속했으나 결국 1930년 3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사임한다. 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처음으로 헌법 상의 대통령 비상대권을 발동하여 의회의 인준 없이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하는 '대통령 내각'을 구성한다. 이 내각에는 국가인민당[A],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 그 외 보수우파 소수정당들이 참여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브뤼닝 1기 내각부터는 모든 내각이 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서만 세워졌다.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이 일상(...)이 된 것이다. 즉, 공식적으로 의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얻어 출범한 내각은 뮐러 2기 내각 이후로는 없었다.
3. 대공황 이후
3.1. 제6대 총선 (1930)
1930년 9월 14일 총원: 577석, 과반의석: 289석 | ||||||||||
브뤼닝 1기 내각[비상] 197석 | 야당 380석 | |||||||||
중앙당 | 인민당 | 중산층 제국당 | 국가당 | 바이에른 인민당 | 기타[9] | 사회민주당[신임] | 나치당 | 공산당 | 국가인민당[A] | 기타 |
68석 | 30석 | 23석 | 20석 | 19석 | 37석 | 143석 | 107석 | 77석 | 41석 | 12석 |
하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민심은 끊임없이 정국 불안정이 반복되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 공산당과 나치당이 민심을 파고들며 선전하였고, 특히 나치당의 득표율은 2년만에 2.6%에서 18.3%로 수직상승하며, 나치당은 순식간에 원내 제2당으로 비약하였다.
이러한 나치당과 공산당의 상승세에 놀라 정국 안정을 급선무로 받아들인 사회민주당은 브뤼닝 내각에 적극 협조하는 방향으로 정치 노선을 전격 선회하였다.[12] 이를 통해 브뤼닝 내각은 국정운영에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3.2. 제7대 총선 (1932.7)
1932년 7월 31일 총원: 608석, 과반의석: 305석 | |||||||||
파펜 내각[비상] 37석 | 야당 571석 | ||||||||
국가인민당[B] | 나치당 | 사회민주당 | 공산당 | 중앙당 | 바이에른 인민당 | 인민당 | 국가당 | 중산층 제국당 | 기타 |
37석 | 230석 | 133석 | 89석 | 75석 | 22석 | 7석 | 4석 | 2석 | 9석 |
나치당이 37.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처음으로 원내 1당에 등극했다. 게다가 처음으로 나치당과 공산당의 의석을 합산하면 과반을 넘겼다. 즉, 나치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단결해도 다수연정을 구성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고, 결국 별수없이 파펜 내각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유지된다.
3.3. 제8대 총선 (1932.11)
1932년 11월 6일 총원: 584석, 과반의석: 293석 | |||||||||
파펜 내각[비상] 51석 | 야당 533석 | ||||||||
국가인민당[B] | 나치당 | 사회민주당 | 공산당 | 중앙당 | 바이에른 인민당 | 인민당 | 국가당 | 중산층 제국당 | 기타 |
51석 | 196석 | 121석 | 100석 | 70석 | 20석 | 11석 | 2석 | 1석 | 12석 |
나치당은 여전히 원내 1당이었지만 과반에는 실패했으며 오히려 4개월 전보다 득표율 및 의석수가 감소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나치당과 공산당이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정국은 여전히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교착 상태였다. 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내 전직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회복을 위해 히틀러의 총리 임명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의 설득 끝에 1933년 1월 히틀러를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총리에 임명하였다.
3.4. 제9대 총선 (1933.3)
1933년 3월 5일 총원: 647석, 과반의석: 324석 | |||||||||
히틀러 내각 340석 | 야당 307석 | ||||||||
나치당 | 국가인민당 | 사회민주당 | 공산당 | 중앙당 | 바이에른 인민당 | 국가당 | 인민당 | 기타 | |
288석 | 52석 | 120석 | 81석 | 73석 | 19석 | 5석 | 2석 | 7석 |
선거운동 과정에서 나치의 돌격대와 친위대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며 테러를 자행하였다.[18] 중앙당 계열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자 나치 정부는 중앙당까지 탄압하였다.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에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당 정부는 이를 독일 공산당의 소행으로 단정하며 공산당이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전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명을 체포했다. 다만 사회민주당으로의 좌파진영 표 결집을 막기 위해 공산당을 불법화하지는 않았다.
나치당은 4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자그마치 288석을 확보했고, 연립여당 국가인민당의 의석수를 합쳐 과반을 달성하였다.[19]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한 나치당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묵인 속에 속전속결로 수권법을 발의하였다. 야당에 대한 탄압과 회유 속에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나치당의 권력은 공고해졌고 이후의 선거는 모두 나치당만이 존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일당독재 속에서 진행되었다.
4. 관련 문서
[신임] 인준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거나 내각불신임결의에서 정부 측에 힘을 실어주는 등, 사실상 신임 공급에 준하는 협력이 이뤄진 경우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각의 핵심 정책 추진을 돕거나 일부 당원이 당의 묵인 하에 개인 자격으로 내각에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신임] [3] 1923년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의 활동은 불법화되었고, 히틀러를 비롯한 당 간부들은 체포되었다. 이에 나치당 잔존 세력은 독일민족자유당과 통합하여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나치당원들은 우회적으로 원내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히틀러가 석방되고 나치당이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면서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어 나치당에 흡수되었다.[신임] [5]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2기, 빌헬름 마르크스 1-2기 내각에서 연이어 재무부 장관직을 맡았다.[6] 한스 루터는 총리직에서 내려오고 몇 년 뒤에서야 인민당에 가입하며 당적을 가졌다. 즉, 총리직을 수행할 당시에는 무소속이었다.[A] 국가인민당은 본래 1930년 3월에 결성된 브뤼닝 1기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국가인민당 소속 장관이 1930년 7월 탈당하여 기독교국가농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야당이 되었다. 국가인민당 내 대다수는 애초부터 브뤼닝 내각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비상] 의회의 신임 절차 없이 대통령 비상대권에 의존하여 수립된 내각. 의회의 불신임투표가 가결되거나 대통령이 해임하지 않는 한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내각은 그대로 유지된다.[9] 기독교국가농민당 19석, 기독교사회인민봉사 14석, 보수인민당 4석. 세 정당 모두 독일 국가인민당 내에서 급진화, 우경화에 반발하며 탈당한 인사들을 주축으로 창당되었다.[신임] [A] [12] 심지어 브뤼닝 내각이 적극적으로 재정 긴축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한 민심 이반이 심각했음에도 사회민주당은 이를 수용하였다.[비상] [B]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성립된 파펜 내각은 국가인민당 인사들을 장관직에 기용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국가인민당이 여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인민당은 애초부터 두 내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15] 힌덴부르크는 나치당에게 총리직을 제외한 장관직을 양보해서라도 보다 우익 성향이 짙은 정부가 자리잡기를 희망했다.[비상] [B] [18] 사회민주당에는 국기단이, 공산당은 전위대가 당집회를 보호하였지만 행정력까지 동원해 무작정 체포하는 탓에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19]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 처음 총리직에 임명되었을 때는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의 의석 합이 과반에 못미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