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01:58:51

레오 1세(황제)

레오 1세 트라키안에서 넘어옴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원수정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가이우스(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네 황제의 해 갈바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비텔리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공동 즉위 루키우스 베루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비정통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다섯 황제의 해 페르티낙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공동 즉위 게타 · 카라칼라
- 마크리누스 · 디아두메니아누스
세베루스 왕조 엘라가발루스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군인 황제 시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1세 · 고르디아누스 2세 | 공동 즉위 푸피에누스(막시무스) · 발비누스 | 고르디아누스 3세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필리푸스 2세 | 데키우스 | 공동 통치 데키우스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공동 즉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호스틸리아누스 · 볼루시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 | 공동 즉위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퀸틸루스 | 아우렐리아누스 | 타키투스 | 플로리아누스 | 프로부스 | 카루스 | 공동 즉위 누메리아누스 · 카리누스
비정통 스폰시아누스 · 실반나쿠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 카리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서방 동방
양두정치 막시미아누스 양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막센티우스 | 2차 재위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
비정통 마그넨티우스 ·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 · 베트라니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율리아누스
- 요비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서방 동방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 그라티아누스 |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스
비정통 프로코피우스
비정통 에우게니우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마그누스 막시무스 · 플라비우스 빅토르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통일
테오도시우스 왕조 테오도시우스 1세
서방 동방
테오도시우스 왕조 호노리우스 | 콘스탄티우스 3세 | 발렌티니아누스 3세
비정통 히스파니아의 막시무스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르카디우스 | 테오도시우스 2세 | 마르키아누스
비정통 콘스탄티누스 3세 ·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 요안네스
최후의 순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아비투스 | 마요리아누스 | 리비우스 세베루스 | 안테미우스 | 올리브리우스 | 글리케리우스 | 율리우스 네포스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레오 왕조 레오 1세 | 레오 2세 | 제노 | 바실리스쿠스 · 마르쿠스 | 2차 재위 제노
동방
레오 왕조 2차 재위 제노 | 아나스타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유스티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유스티누스 2세 | 티베리우스 2세 | 마우리키우스 · 테오도시우스
- 포카스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라클리오스 | 공동 즉위 콘스탄티노스 3세 · 이라클로나스 · 다비드 티베리오스 | 콘스탄스 2세 · 콘스탄티노스 4세 · 이라클리오스 · 티베리오스 | 유스티니아노스 2세
20년간의 혼란 레온티오스 | 티베리오스 3세 | 2차 재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 필리피코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 테오도시오스 3세
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FCE77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레오 1세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Annus A post consulatum B (et C): B(와 C)의 집정관 집권으로부터 A년 뒤
황제 겸 집정관 }}}
401년 402년 403년 404년
플라비우스 빈켄티우스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프라비타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루모리두스
동방 아리스타이네투스
405년 406년 407년 408년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아니키우스 아우케니우스 바수스
아니키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필리푸스
동방 플라비우스 안테미우스
409년 410년 411년 412년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바라네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sine collega sine collega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테르툴루스
브리타니아·갈리아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413년 414년 415년 416년 417년
헤라클리아누스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콘스탄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유니우스 콰르투스 팔라디우스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418년 419년 420년 421년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모낙시우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플린타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동방 플라비우스 에우스타티우스
서방 플라비우스 아그리콜라
422년 423년 424년 425년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동방 플라비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 빅토르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카이사르
서방 플라비우스 아비투스 마리니아누스 플라비우스 카스티누스 요안네스 아우구스투스
426년 427년 428년 429년 430년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히에리우스 플라비우스 펠릭스 플라비우스 플로렌티우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플라비우스 타우루스 플라비우스 디오니시우스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431년 432년 433년 434년
동방 플라비우스 안티오쿠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플라비우스 아레오빈두스
서방 아니키우스 아우케니우스 바수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아스파르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435년 436년 437년 438년 439년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플라비우스 안테미우스 이시도루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세나토르 플라비우스 시기스불투스 아니키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파우스투스 페스투스
440년 441년 442년 443년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타우루스 셀레우쿠스 키루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플라비우스 아나톨리우스 sine collega 플라비우스 파테리우스
동방 플라비우스 에우독시우스
서방 플라비우스 디오스코루스
444년 445년 446년 447년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Ⅷ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카이키나 데키우스 아기나티우스 알비누스 플라비우스 노무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동방 플라비우스 아르다부르
서방 플라비우스 칼레피우스
448년 449년 450년 451년
동방 플라비우스 제노 플라비우스 Flor(entius) 로마누스 프로토게네스 마르키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루피우스 프라이텍스타투스 포스투미아누스 플라비우스 아스티리우스 발레리우스 팔토니우스 아델피우스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겐나디우스 아비에누스
452년 453년 454년 455년
동방 플라비우스 스포라키우스 요안네스 빈코말루스
서방 플라비우스 바수스 헤르쿨라누스 플라비우스 오필리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스투디우스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456년 457년 458년 459년
동방 바라네스 플라비우스 파트리키우스
요한네스
서방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sine collega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루푸스
460년 461년 462년 463년
동방 플라비우스 아폴로니우스 플라비우스 다갈라이푸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안토니누스 메살라 비비아누스
서방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플라비우스 세베리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아우구스투스 카이키나 데키우스 바실리우스
464년 465년 466년 467년
플라비우스 루스티키우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푸사이우스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 (타티아누스) 플라비우스 요한네스
동방 플라비우스 바실리스쿠스
서방 플라비우스 헤르메네리쿠스
468년 469년 470년 471년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아우구스투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sine collega 카일리우스 아코니우스 프로비아누스
동방 플라비우스 제노 플라비우스 요르다네스
서방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메시우스 포에부스 세베루스
472년 473년 474년 475년
동방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서방 루피우스 포스투미우스 페스투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레오 아우구스투스 플라비우스 제노 아우구스투스
sine collega sine collega sine collega
476년 477년 478년 479년 480년
플라비우스 바실리스쿠스 아우구스투스 Annuspost consulatum Basilisci Augustiet Armati 일루스 플라비우스 제노 아우구스투스 카이키나 데키우스 막시무스 바실리우스
플라비우스 아르마투스 sine collega sine collega sine collega
481년 482년 483년 484년
동방 sine collega 플라비우스 아팔리우스 일루스 트로쿤데스 Annuspost consulatum Trocundi 플라비우스 테오데리쿠스
서방 루피우스 아킬리우스 마이키우스 플라키두스 세베리누스 아니키우스 아킬리우스 아기난티우스 파우스투스 데키우스 마리우스 베난티우스 바실리우스
485년 486년 487년 488년
동방 Annuspost consulatum Theoderici 플라비우스 롱기누스 Annuspost consulatum Longini Annuspost consulatum Longini
서방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멤미우스 심마쿠스 카이키나 마보르티우스 바실리우스 데키우스 Nar. 만리우스 보에티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우스 에클레시우스 디나미우스
루피우스 아킬리우스 시비디우스
489년 490년 491년 492년
동방 플라비우스 에우세비우스 플라비우스 롱기누스 sine collega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우구스투스
서방 페트로니우스 프로비누스 아니키우스 프로부스 파우스투스 플라비우스 올리브리우스 플라비우스 루푸스
493년 494년 495년 496년
동방 플라비우스 에우세비우스 Annuspost consulatum Eusebii sine collega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서방 카이키나 데키우스 파우스투스 알비누스 투르키우스 루피우스 아프로니아누스 아스테리우스 플라비우스 비아토르 Annuspost consulatum Viatoris
플라비우스 프라이시디우스
497년 498년 499년 500년
동방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우구스투스 요한네스 스키타 요한네스 퀴 에트 깁부스 플라비우스 파트리키우스
플라비우스 히파티우스
서방 Annuspost consulatum Viatoris 플라비우스 파울리누스 Annuspost consulatum Paulini Annuspost consulatum Paulini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8px; padding: 0 6px"
}}}}}}}}}}}}}}}


로마 제국 제55대 황제
레오 1세
LEO I | Λέων Α΄
파일:Leo_I_Louvre_Ma1012_n2.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
(Flavius Valerius Leo)
출생 401년
로마 제국 다키아
사망 474년 1월 18일 (향년 73세)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457년 2월 7일 ~ 474년 1월 18일 (17년)
전임자 마르키아누스
후임자 레오 2세
배우자 아일리아 베리나
자녀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종교 기독교
1. 개요2. 이름에 관해3. 생애
3.1. 황제가 되기 전3.2. 즉위 과정3.3. 집권 시기
3.3.1. 아스파르와의 대립3.3.2. 대외 정책
3.3.2.1. 서로마 제국3.3.2.2. 반달 왕국 공격
3.3.3. 아스파르의 반격과 후유증3.3.4. 종교 정책 등 내정3.3.5. 사망
4. 성인 시성5.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55대 황제. 이름은 Flavius Valerius Leo(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레오)이며, 457년에 즉위하여 474년에 사망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 황제로 재위했다. 마르키아누스가 사망한 이후, 단절된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새로이 레오 왕조를 열었다.

2. 이름에 관해

레오의 이름 뒤에는 레오가 트리키아 출신이라는 것을 명시하는 트라키아인(라틴어: Thrax / 헬라스어: ο Θραξ)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트라키아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수도권이었는데, 이렇게 '트라키아 출신'인 것이 특징이 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되짚어 보면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중세 시대의 인구 50만 되고 그런 으리으리하고 짱짱한 위세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1]

그렇기 때문에 '트라키아'라는 출신지가 특징으로 잡혀 있다는 것은, 수도권으로서의 우월한 지위가 아직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더 나중의 동로마 황제들도 아르메니아인(레온 5세), 이사우(브)리아인(레온 3세), 프리기아인(미하일 2세) 등의 출신지명이 특징으로 잡혀 별명으로 붙어 있는데, 다들 수도권(콘스탄티노폴리스 및 마르마라 해 연안 지역) 및 동로마의 핵심지(앞의 수도권+서쪽으로는 테살로니카까지의 해안지대 및 소아시아 서부)와 거리가 다소 있는 지방들이었다.

3. 생애

3.1. 황제가 되기 전

트라키아에서 레오 마르켈루스라는 이름으로 401년에 트라키아계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레오는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건강하고 주체적이며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직업군인으로써 황제가 되기 전 살았으며, 정통파 그리스도 교인이었고 당시 막후의 실력자인 아스파르의 산하 여러 부대 중 한 부대장으로 있다가 제위를 잇게 되었다.[2]

3.2. 즉위 과정

457년 1월 또는 2월 초,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사망으로 테오도시우스 혈통의 남자가 대가 끊기게 되었다[3]. 이미 453년 아일리아 풀케리아 역시 아틸라 사망 직후 사망하였기에 테오도시우스 2세 사망때처럼 후계자 공백 상황을 돌파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제 원칙에 따라 새로운 황제는 군대에 의해 선출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결정은 동로마 제국 군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령관[4] 아스파르에게 달려 있었다.

3.2.1. 아스파르

파트리키우스(patricius, 최고 귀족)이라는 신분을 가진 아스파르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424년 라벤나 원정에 참여하여 서로마 황제를 참칭한 요안네스를 폐위시키고 아이에 불과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제위에 옹립했을 당시부터 제국 내에서 명성을 쌓은 유능한 장군이었다. 8년 뒤인 43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가서 반달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이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때 그가 보여준 용기와 지도력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집정관으로 재직했고[5], 무일푼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마르키아누스는 20년 동안 그의 전속부관(Domesticus)으로 복무했고 그의 도움으로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2가지 약점이 있었고, 이는 그가 유능하고 가장 인기있는 장군이었음에도 테오도시우스 2세 사망 당시 제위를 잇지 못했던 이유가 되었다. 먼저, 그는 흑해 연안 출신의 이란계 알란족과 게르만족의 혼혈이었다.[6] 따라서 그는 태어날 때부터 국적상 로마인[7]이 아니었고 이는 그가 황제에 오르지 못하는 결점이 되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종교적인 부분인데 아스파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게르만족들이 대개 그렇듯 아리우스파에 속한 인물이었다.[8] 동시에 아스파르 본인 역시 성향상 60년 전 서로마의 프랑크족 태생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와 마찬가지로 꼭두각시를 내세워 장막 뒤에서 실권을 가진 실력자로서의 삶에 만족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에 따라 아스파르는 자신의 집안에서 집사로 근무 중이었던 직업군인이자 집사 레오를 새로운 황제 후보로 뽑은 뒤 그를 추천했다. 이는 본인의 미래에 있어서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제국의 황제를 정하는 기준에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레오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트라키아계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나 정통 그리스도교이며 건강하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원로원은 새 황제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였던 안테미우스[9]를 지명하고 싶어했지만, 안테미우스는 테오도시우스 왕조 입장에서 사위의 사위라[10] 왕조와 직접적인 연이 없었다는 점이 그가 제위후보에서 기각당했던 데에 작용했다고 한다. 한편 아스파르로 위시되는 군부의 힘에 밀려서 안테미우스가 황제가 못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는 사정이 달라졌는지는 몰라도, 후대의 마우리키우스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실제 혈통상 황제였던 유스티누스 2세의 사위의 사위였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점이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를 계승받는 데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3.2.2. 대관식

아스파르의 결정에 동로마 군대는 새 황제를 박수로 환영했다. 군대는 전통에 따라 방패 위에 레오를 올리고 그를 인정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정통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레오는 동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황제관을 받아 대관식을 거행한 것이다. 457년 2월 7일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인 아나톨리우스에게서 공식적으로 제관을 받고 대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에 있어서 큰 사건이었다. 먼저 레오 1세 즉위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는 대주교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거행해야 하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다음으로 칼케돈 공의회 이후 높아진 총대주교의 위상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그 이전에는 대주교(Archbishop)이었는데 칼케돈 공의회를 계기로 대주교(Patriarch)로 올라갔다.) 즉, 레오 1세의 대관식은 ('임페라토르'라는 유래에서 보이듯) 기존의 군대 베이스의 즉위식에서 종교 베이스의 즉위식으로의 변화를 뜻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 아스파르의 부하장수 출신이자 황실이나 귀족 가문과의 혈연도 없었던 평범한 출신이 갑자기 황제로 급 신분상승이 되었던 사실에서 기인한 정통성의 약점을 종교적인 절차를 통해서 보완하고자 했던 발상도 있었다고 한다. 마르키아누스와 형식상이나마 결혼한 풀케리아처럼, 정통성을 보강해 줄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여성 또한 남아 있지 않았기도 했다.

3.3. 집권 시기

3.3.1. 아스파르와의 대립

아스파르는 그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누리려 하였으나 레오 1세는 호락호락한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레오 1세가 즉위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불화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아스파르의 요구[11]를 황제가 거절한 것이 시작이었다.

레오 1세는 아스파르를 중심으로 한 게르만계 군부와 게르만적 요소를 제국 내에서 무력화시키고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황제는 게르만족 군대를 숙청하고 새로운 군대의 주축으로 이사우리아족을 기용하는 이이제이적인 인사조치를 꺼내들었다. 이사우리아족은 소아시아 중남부의 거친 산악민족이었다. 이러한 레오 1세의 조치에 아스파르는 자연히 반대하였고, 그는 현상유지[12]를 주장했다. 이에 맞서 레오 1세는 이사우리아 출신의 제노[13]를 등용하고 그를 트라키아 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아스파르를 견제했다. 기존의 근위대인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또한 게르만계가 많았는데, 이 안에서 인적 청산을 하기에는 너무 뿌리가 깊다보니 어려웠던 탓에, 또다른 새로운 근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를 창설하고 거기에 이사우리아인을 대거 충원하는 옥상옥 발상을 통해서 해결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스파르의 지지자들은 궁정 내에 많았다. 레오 1세의 황후 아일리아 베리나의 오빠 바실리스쿠스가 대표적이었다. 바실리스쿠스는 헬레니즘에 익숙한 로마 상류층 스타일의 전형적인, 교양 있는 로마인이었다. 그는 열성 단성론자로 게르만족 출신이자 교양이 떨어지고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아스파르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사우리아족에 대한 증오심으로 뭉쳐져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3.3.2. 대외 정책

3.3.2.1. 서로마 제국
레오 1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마요리아누스를 승인하여 즉위시켰다. 그러다가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암살되고, 서로마에서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서방 황제로 추대되자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전임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이자 테오도시우스 2세 재위 초 훌륭한 섭정 겸 친위대장 안테미우스의 손자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3.3.2.2. 반달 왕국 공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Vandals_455.jpg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세워진 반달왕국의 영역)

레오 1세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세운 뒤, 467년 반달왕국의 가이세리크를 공격할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대규모 공동 원정 계획과 동시에 뚜렷한 황제만의 독자 노선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황후와 아스파르는 원정사령관으로 바실리스쿠스를 추천하며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레오 1세는 바실리스쿠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서로마와 연합하여 468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가이세리크 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내전을 이용하여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반달족 전체를 이끌고 로마 제국의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공격,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반달족을 정착시킨 뒤 동로마 함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서로마로부터 반달왕국을 공인받았으며,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계 로마인들을 선원으로 부리며 대규모 함대를 조직,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점령하여 해상권을 장악했다. 또한 455년 6월에는 로마를 공격, 서고트족의 알라리크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런 그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바실리스쿠스는 지극히 무능했고 468년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원정 초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반달 왕국 세력을 몰아낸 뒤, 헤라클리우스 장군이 카르타고 남동쪽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능한 바실리스쿠스였다. 그가 이끄는 본진은 북아프리카에서 상륙한 이후 곧바로 진군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반달 왕국에게 패배 후 한숨을 돌리게 해줬고, 그 사이 경험많고 똑똑한 가이세리크는 연합군 측에 사신을 보내 항복할 테니 닷새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바실리스쿠스는 그 계략에 넘어가 반달 왕국에게 더욱더 시간을 주고 말았고, 닷새후 나타난 가이세리크는 때마침 바뀐 바람의 힘을 빌어 로마군의 연합함대 1,113척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바실리스쿠스는 당황하여 병력을 거의 잃고 겨우 도망친 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

결과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했다. 레오 1세와 가이세리크는 강화를 맺었고, 13만 리브라(48,750kg 상당)의 황금을 사용하면서 준비한 동로마 제국이 입은 피해는 거의 3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을 괴롭히고 말았다. 또한 레오 1세의 입지는 제국 내에서 급격히 약화되었다.

3.3.3. 아스파르의 반격과 후유증

레오 1세는 원정 사령관인 바실리스쿠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지만 황후인 베리나의 간곡한 설득에 목숨을 살려주며 용서하였다. 그러나 정적이자 게르만 군부의 수장 아스파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즉각 반격하였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여 레오 1세의 둘째 딸 레온티아과 자신의 아들 파트리키우스(Patricius)의 결혼을 강제로 성사시켰다. 그리고 황제의 사위가 된 아들 파트리키우스를 카이사르로 선포했다. 이어 아스파르와 아들들은 음모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에 레오 1세와 제노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고 471년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궁전으로 초대해 환관들이 칼을 들고 공격하게 하여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 이때 레오 1세의 사위이자 아스파르의 아들 중 1명인 파트리키우스는 부상만 입은 채 목숨을 건졌다. 레온티아는 대신 안테미우스 황제의 아들이자 마르키아누스의 외손자인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게 되었다.[14]

아스파르의 살해사건은 레오 1세의 황권을 강화시켜 주었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곳에서 불통이 튀고 말았다.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스트라보(Theodoric Strabo)가 아스파르 살해를 구실로 삼아 레오 1세에게 트라키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아스파르의 권한을 넘기고 영토를 동고트족에게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레오 1세는 제안을 즉각 거절하였고, 테오도리크는 트라키아를 공격하여 유린하였다. 결국 레오 1세는 473년 합의를 도출하게 되었는데 조건은 테오도리크가 아스파르의 옛 지위를 받고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족에게 매년 금 2천 파운드를 공납금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3.3.4. 종교 정책 등 내정

준비되지 않았던 황제답지 않게 내정에도 족적을 남겼다. 농민 곡물수매법과 3심제를 확립했다. 또한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입법하기 시작한 최초의 황제였다.[15] 그 이전에는 법조문 원문은 거의 전적으로 라틴어였고 그리스어는 동방 지역에 라틴어 원문을 번역하여 배포하는 등의 제한적이고 보조적인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472년에는 이교 의식이 이루어진 곳의 주인에게 강한 처벌을 내리는 그리스도교 정책을 반포했다. 이는 종전의 마르키아누스보다 더욱 심해진 것으로서, 그가 사회적 지위나 자산수준 등이 높을 경우 직책, 직업을 박탈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그런 게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게 시켜서 여생 내내 광산에서 노예처럼 일하게끔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인기가 매우 없었다고 한다.

3.3.5. 사망

473년 10월, 레오 1세는 제노가 자신의 딸 아리아드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손자 레오를 자신의 동료 겸 후계자로 삼은 뒤, 레오 2세로 즉위시켜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5개월 뒤인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는 7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4. 성인 시성

동로마 제국 황제 최초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황제관을 받아 대관식을 거행한 것 등을 포함해 정통 그리스도교인으로서 굵직한 종교적 업적을 남긴 레오 1세를 기념하고자 정교회에서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있다. 축일은 1월 20일.

5. 여담

공교롭게도 동시대의 유명 교황으로 레오 1세[16]가 있어서 5세기 서양사의 맥락에서 아무 수식어 없이 레오 1세라고만 적으면 황제인지 교황인지 혼동의 여지가 있다. 구분을 위해서는 황제라는 것을 문맥상 분명히 하여야 한다. 혹은 아예 헬라스어로 레 1세라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17]


[1] 마찬가지의 현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중앙정치 무대, 언론이 서울에 있는 만큼, 정치인이나 내각 인사를 출신별로 분류할 때 수도권 외의 타 지방은 xx도, xx도, 이렇게 분류하지만 정작 서울 출신은 은근슬쩍 통계에서 빼거나, 아니면 'aa도 몇 명! bb도 몇 명! 대탕평인사!' 이렇게 강조하면서도 서울 출신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서울이 기본값(디폴트)이기에 당연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대중문화(노래제목, 각종 예능, 드라마 등)에서도 서울의 지명들은 청담동, 대치동, 평창동, 여의도, 광화문, 쌍문동, 상계동, 신림동, 잠실, 반포동, 노량진동 등 이렇게 서울이라는 점은 당연히 알 거라는 듯이 생략하고 동네 이름만 적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찬가지의 현상이다.[2] 영어 위키백과 Aspar 중 'Aspar, who in this occasion was probably offered the throne by the senate but refused, could have chosen his own son Ardabur, but instead selected an obscure tribune of one of his military units, Leo I.'[3] 그는 풀케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일원이 되었다.[4] 당시 직책명은 '마기스테르 밀리툼'.[5] 그의 아들들 역시 훗날 집정관을 지냈다.[6] 영어 위키백과 Aspar 중, 'Flavius Ardabur Aspar (c. 400 – 471) was an Eastern Roman patrician and magister militum ("master of soldiers") of Alanic-Gothic descent.'[7]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필두로 수많은 비 라틴계 종족 출신자가 황제가 되어 온 지 오래였기 때문에 게르만계인 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부족장 출신으로 귀화(?)한 1세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하면 쉬운데, 아놀드 슈워제네거본인이 오스트리아에서 이민온 1세대라서, 주지사는 역임했지만, 태어날 당시부터 시민권이 주어진 미국인이어야만 대통령 피선거권을 인정하는 미국 헌법상 본인이 대통령은 될 수 없는 처지인데, 이것과 유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8] 이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 몇 십 년 후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도 비정통인 단성론자였다.[9] 후대 서로마 황제 그 안테미우스가 맞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실제 총책임자였던 프라이펙투스 안테미우스의 외손자였다.[10] 더구나, 마르키아누스와 풀케리아의 결혼은 정상적·일반적인 결혼이 아닌, 순전히 왕위계승을 위한 상징적·법적인 결혼이라, 마르키아누스를 아르카디우스의 직접적인 '사위'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11] 아스파르는 자신의 아들을 봉급이 많은 고위직에 임명해달라고 레오 1세에게 요구했다.[12] 기존처럼 게르만족 중심의 로마군[13] 원래 이름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 이사우리아 족장으로 레오 1세의 딸 아리아드네와 결혼한 이후, 동로마 색채의 이름인 제노로 바꿨다.[14] 이 마르키아누스는 향후 아내의 언니의 남편, 즉 한국식으로 일컫자면 큰동서인 제노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15] 영어 위키백과 Leo I (emperor) 중, 'He is notable for being the first Eastern Emperor to legislate in Koine Greek rather than Late Latin.'[16]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 중 하나로 꼽히는 성인(聖人)이자 교부이다.[17] 레온 1세는 입법을 라틴어보다는 헬라스어로 하길 선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