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원(莊園, manor)은 부호나 영주 등이 땅을 소유하는 형태이다. 경제단위를 일컫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장원은 농민과 영주의 거주지와 경작지인 밭은 물론 경작하지 않는 들이나 삼림 등의 임야도 포함한다.동양에도 있었으며 수호전을 읽어보면 종종 등장한다. 책에 나오는 '이가장', '송가장' 등의 표현은 이씨네 장원, 송씨네 장원이라는 뜻.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후부터 근대까지 존재했다. 장원이란 본디 관리나 귀족의 사유지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한국에서도 지배계층 대다수는 장원을 운영하였으며 일본에서도 8세기부터 장원이 있었다. 중국에서 부유한 장원은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구성원들이 무술을 익히고 무력을 보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쉽게 말해 지방 호족(豪族) 세력. 일반적인 장원보다는 세력이 크지만 세가(世家)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2. 개념
이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흔히 집, 즉 귀족이 사는 '저택'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물론 나름 유용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장원이란 현대의 도시 거주자들에게 익숙한 "주거시설"과는 다른 "생산시설"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장원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부차적 요소이며, 농토와 작업장 등이야말로 본질적 요소이다. 따라서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등은 물론이거니와 마을하고도 다르며, 오히려 각종 공장이나 공방, 사무실 등과 같은 부류이다. 그렇기에 사학이나 경제학 등에서도 장원은 경제적 의미를 기본으로 삼아 다룬다. 대표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중세 장원제 생산양식(Manorialism) 같은 예가 있다.분업화와 전문화가 익숙한 현대인의 삶, 특히 도시적 생활에서 집이란 그 보유자와 가족이 사는 건물, 여기서 확장되어 봐야 그 건물에 부속된 마당과 같은 공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농업인이 소유한 부동산에서는 농토가 핵심이고, 거주를 위한 건물은 그 토지의 한켠에 지을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몇몇 수공업을 위한 작업장 역할까지도 겸할 수 있다. 장원이란 바로 이런 '사유지'를 가리키는 것이며, 당연히 그 사유지의 중심에는 지주가 사는 집도 있을 뿐이다. 만약 여러 장원을 거느린 사람이라면 직접 살지 않는 곳도 있을 것이고, 이런 곳에서는 관리인이 지내거나 아예 주거 기능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즉, "집과 그에 딸린 농토(논밭)"라기보다는 "농토(논밭)와 그에 딸린 집"이 장원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유지의 크기가 작다면 한 가족이 한켠에 작은 집을 지어 살면서 자기 가족의 힘으로 농사지으며 살겠지만, 이보다 규모가 더 커지면 가족의 힘만으로 모자란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머슴이나 하인도 고용하고, 피고용인들을 숙식할 곳을 주고자 더 큰 집을 지을 터이다. 사유지의 규모가 더 커진다면 단순히 몇몇 고용인을 고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다수의 소작인이나 농노들을 거느리고, 이런 소작인이나 농노들이 모여 사는 집들이나 마을들 역시 그 사유지에 포함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농장을 원활히 경영하고자 필요한 여러 부대시설, 이를테면 방앗간이나 대장간, 축사 및 그 시설의 기술자들도 거류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 마을을 포함한 사유지 자체가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춘 상당한 규모의 경제 활동 단위로 작동할 터, 규모가 커지고 사업범위가 다양한 만큼 논밭뿐 아니라 호수나 하천, 산림, 들판이나 방목지도 사유지 내에 포함될 것이다.[1] 이렇게 일가족의 생계를 뛰어넘는 규모에 이른 사유지가 바로 '장원'이다.
3. 라티푼디움
자세한 내용은 라티푼디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중세 유럽
4.1. 형성
서유럽에서는 안정된 행정력을 가졌던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각 마을 단위로 자기네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시대적 환경에 따라, 그리고 서로마 말기 부터 전쟁병력의 주력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넘어가면서, 중앙정부가 각지에 기병을 비롯한 병력을 유지 및 관리할 책임과 권한을 땅과 함께 각지에 위탁 및 할당하는 봉건제도가 유행하였다. 동로마 제국 역시 대량의 중장기병을 유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그 땅에서 얻는 소득으로 스스로 무장하여 복무하도록 하는 일정 부분 봉건적 제도를 시행하였다.봉건제도로 땅을 받은 영주들의 농토는 장원이 되었는데, 이러한 장원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프랑크족의 왕국이 세워지고 있던 7세기경의 오늘날의 프랑스 일대의 왕령과 교회령에서 점차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9세기에는 이탈리아 왕국, 라인 강 유역, 이베리아 반도 동부해안 등지 그리고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잉글랜드 왕국에도 장원이 퍼졌다.
본래 게르만 사회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장원 역시 라티푼디움과 마찬가지로 노예에 의해 경작되었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노예의 숫자가 부족하여 노예만으로 경작을 맡길 수 없었으므로 인접한 농민에게 경작을 맡기게 되었다.
당시 농민은 가난했으며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농지의 생산력이 낮았기에,[2] 장원과 영주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바이킹과 같은 외적의 약탈로 인해 치안이 막장이었기에, 농민들은 전문화된 전사 집단인 영주와 기사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아야 했다. 장원에 예속되어 자유가 제한되었던 농민들을 농노라고 한다.
4.2. 구조와 형태
장원의 규모는 대체적으로 수백에서 수천 에이커까지 이르렀다. 1에이커는 약 4천 제곱미터이다. 참고로 한국과 비교하면 현대의 농업기술로 쌀을 1000석 수확하려면 대략 160에이커, 1만 석을 수확하려면 1600에이커 남짓한 농지가 필요했다.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센텀시티몰 포함) 연면적과 경복궁의 규모가 100에이커, 여의도가 1000에이커 정도이다. 다만 유럽의 보리-밀 생산량은 동아시아의 쌀 생산량만 못함을 감안해야 한다.
장원의 중심에는 장관 또는 영주관이 있어 영주와 관리인이 살았고, 여기에 더해서 하인·직인 등의 오두막집·창고 등이 있었다. 영주의 저택은 성까지는 아니어도 외부로부터의 기습을 막기 위해 통나무 울타리나 두꺼운 벽으로 요새화되었다. 물론 몇몇 군사적 요지에 자리잡은 장원은 성을 건축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농민의 취락이 있었으며, 각자 자신의 조그만 채소밭과 창고 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성당이 있고 제분소·작업장 등의 시설도 갖추었다. 제분소와 작업장은 영주의 재산으로 농민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영주에게 사용료를 내야했다. 촌락과 농토 외에도 장원에는 들과 숲으로 이루어진 임야(林野)도 포함되었다.
중세 초기에 땅은 남아돌고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장원과 장원 사이에는 숲과 황무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각 장원은 고립되어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했다. 농민들은 마을에 모여서 살았는데,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유럽은 북쪽으로부터 바이킹, 동쪽에서는 유목 민족, 그리고 남쪽 이베리아 반도 지역에서는 이슬람교 세력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렸고 영지와 영지 사이의 지역에는 도적이 들끓었기 때문에, 한 농민 가족이 영주의 보호를 벗어나 혼자 미개척지에 나가서 산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경작지는 여러 개의 가늘고 긴 지목으로 분할되어 각각 영주 직영지와 교회 영지, 농민 보유지로 나뉘었다. 가늘고 긴 지목으로 분할된 이유는 밭을 갈아 엎을 때 소나 말에 쟁기를 씌워서 직선으로 쭉 갈게 시키기 때문에 띠 모양으로 길게 분할해야 관리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중세 농사기술의 한계로 인해서 각 지목은 매년 경작을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 묵혀서 지력을 회복시켜야 했다. 중세 초기에는 경작지와 휴경지로 땅을 반반씩 나누어 농사를 지었지만 13세기 즈음에는 3년을 주기로 순서대로 바꾸어 경작하는 삼포제가 대세가 되었다.[3] 그리고 삼림, 목초지, 황무지 등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유지로 두어 흉작으로 생계가 나빠지면 삼림의 야생작물인 도토리 등을 채집하며 생계에 보태거나 농업용 가축을 방목하는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다만 유럽권에서 도토리는 사람이 먹기보단 돼지 사료로 쓰였다.
마을 하나에 장원 하나가 딸려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행정구역(즉 마을의 경계)와 장원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봉건시대 초기 서유럽의 분할상속 전통, 화폐경제의 미비로 인해 영주들도 자신의 가신에게 봉토를 분배하는 등 여러 사정 때문에 한 마을에도 각기 다른 장원에 속한 농민들이 섞여 살았다.
반대로 상속이 꼬여서 토지가 이어지지 않은, 즉 일종의 월경지로 한 영주가 소유하는 장원도 있었다. 심지어 한 농민이 A 장원의 예속민이면서 B 장원의 예속민이고, A장원과 B장원이 한 영주의 소유여서, 사실 상 한 영주의 한 농민의 예속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두 영주에게 예속된 것처럼 일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복잡함은 파고들면 끝이 없는데, 마을의 조세권은 A영주, 사법권은 B영주, 소유권은 C영주 등등으로 나뉘기도 했다.
수도원이 관리하는 대장원은 여러 장원이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20∼30개씩 산재되어 빌리카치온제에 의하여 통관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원에 예속된 농민은 농노라 불리며 영주의 보호를 받는 대신 거주 이전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중세의 특징은 세금으로 현물이나 화폐를 내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농민은 1주일 중 6일간을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4] 6일 중에서 사흘간은 영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사흘간의 노동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농사를 지어주는 것부터,[5] 영주가 사용할 탁자를 만들어 주거나 영주의 닭장에서 닭을 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가족이 죽었을 때의 사망세나 자녀가 결혼을 할 때의 결혼세 등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방앗간과 제분소와 같은 영주 소유의 시설물을 이용할 때도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6]
이렇게 세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장원 제도가 도입될 당시의 부실한 상업 체계 때문에 자급 자족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도시는 몇 곳 되지 않았고, 농촌의 장원은 잉여 생산력이 부족하여 교역에 참여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불안한 치안 때문에 상인은 여럿이 모여 크게 상단을 꾸려서 다니며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상인들은 시장이 크게 들어선 곳만 다녔고 경제력이 부족한 장원들을 하나하나 들려서 장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지 못하고 영지에서 직접 생산해야 했던 당시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현물이나 화폐보다 노동력을 제공받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그러다가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화폐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11~12세기 기간에는 노동력보다는 세금을 걷는 것으로 점차 조세 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베니스, 피렌체, 피사와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활발하게 중동 지역과 동방 무역을 하며 향신료를 비롯한 사치품을 수입하였고, 현재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의 저지대 국가에서는 모직물 산업이 발전하였기에 유럽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무역로가 흥하였다.
서양에서 중세의 역사 동안 모직물 산업은 매우 중요했다. 죽어라 노동을 해서 겨우 의식주를 해결하는 시대였기에 생필품인 옷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고, 특히 추위를 막아주는 모직물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양털을 깎고, 털을 분류하고, 여러 차례 세척하고, 염색하고, 실로 꼬아내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가는 데다가 전문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반 가정이 자체적으로 털실을 생산할 수 없었고 모직옷 기성품을 사거나, 털실을 구입해서 옷을 뜨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세 시절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은 서유럽 모직물 시장을 거의 장악하였다. 모직물을 만드는 여러 단계를 분업화하고 각 단계마다 전문화된 길드를 설립하여 다른 유럽 지역보다 훨씬 저렴하게 모직물을 생산하는 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남부 지역은 중세 말기에 영국의 모직물 산업이 떠오르기 전까지 유럽 남부의 이탈리아에 맞먹는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중세 말기부터는 길드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모직물 산업을 더 고도화시킨 영국과 북부 네덜란드가 유럽 모직물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여전히 길드의 제약이 강했던 남부 저지대의 모직물 산업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잃어갔다.[7]
또한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과거 장원 외부에 넓게 펼쳐진 황무지를 개간하고 삼포제와 같이 생산력이 높은 농업기술이 도입되자, 장원의 생산력이 시장 경제에 참여할 만큼 성장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늘어난 인구 덕에 직업의 분화가 진척되어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서 점차 화폐 경제가 퍼져나갔다. 이 때문에 영주들이 점차 화폐를 받는 것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화폐보다는 부역을 제공받는 것으로 조세 제도가 회귀하였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 더글라스 노스(Douglass North)[8]는 12세기부터 시작된 농작물 가격 상승과 이에 따른 농지의 가치 급등을 지목한다. 이 시기에 농촌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성장으로 인해 농산물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지만 더 이상 개간할 황무지가 없어지면서 농산물 생산량의 증가는 정체기에 접어들었고, 결과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였다.
농산물 가격 폭등은 당연히 농지 가치의 상승을 이끌었고, 여기에 더해서 농지 면적은 한정된 것에 반해 농사를 지으려는 농민의 수가 증가하자 농지의 가치가 더욱 상승하였다. 반면에 당시의 관습은 영주가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여 매년 농민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물리는 것이 아니라, 한 농민은 평생 같은 세금을 내다가 그 농민이 죽고 다른 사람이 그 농지를 이어 받았을 때에 새로운 세금의 액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동결되는 토지 계약이 급격한 농지 가치의 상승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자, 영주의 입장에서는 과거로 퇴보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농민이 영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하게 각 영주는 전쟁 시에 복무하는 형태로 국왕에게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영주는 수십 명까지 휘하 기사를 동원하여 참전하였고, 1년에 최대 40일까지 종군해야 했다. 그러나 11~12세기에 상업 경제가 발달하자 국왕은 관세와 시장 등록세로 상당한 추가 세금을 걷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국왕이 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에 나가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영주가 농노들을 마구잡이로 수탈할 수는 없었다. 관습에 따라 농노들은 영주의 땅에 양을 방목해 기를 수 있고, 추수 후 이삭을 주워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관습은 영주조차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고, 영주로서도 농노는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지나친 착취로 장원을 마비시킴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사실 중세에는 체계적인 행정 자체가 부실했기 때문에 영주의 통치도 교회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면서 또한 지방 관습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영주의 활동은 주로 치안과 판결 분야에 집중되었다.
만일 영주의 착취가 심할 경우 장원에 예속된 농민들은 장원에서 이탈해 다른 장원이나 도시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영주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도망치는데 성공한 농민이 다른 곳에서 잡히면 다시 원래 장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중세 초기만 해도 땅은 남아돌고 인구수가 곧 힘이었던 시절이었기에 다른 영주가 도망쳐온 농민을 굳이 돌려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3세기부터는 늘어난 인구 때문에 농지가 부족해지자, 원래 경작하던 농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농민은 오히려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는 그나마 절반의 자유민 취급을 받던 농민은 영주에게 더욱 심하게 예속되었다.
4.3. 쇠퇴
유럽의 분할세습 전통에 따라 장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유관계가 복잡하고 불분명해지며 세분되었다. 초기에는 영주의 직영지가 광대했으며, 장원에 종속된 토지들은 연결되고 연속되었다. 하지만 농민 계층에서도 분할 상속이 일어났을 뿐더러 영주층도 분할 상속이 되며, 영주 휘하의 가신 기사들 역시 토지를 분할해야했다. 영주는 행정력 강화를 위해 가신들을 더 고용해야했는데 그 과정에서 봉토를 가신들에게 더 나눠줘야했고, 영주의 직영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장원의 쇠퇴가 본격적으로 발생한 계기는 14~15세기 유럽의 인구 감소였다.[9] 기후 변화로 인해서 기온이 떨어지면서 계속해서 기근이 찾아왔고 중세 흑사병이 거듭 대유행하면서 유럽 인구의 30~60%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10] 여기에 더해서 유럽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은 인구의 감소를 부채질했다. 유명한 백년전쟁이 이 시기와 겹치고, 오늘날의 독일과 스페인 지역도 전쟁에 시달렸다. 삶이 어려워지자 유럽 곳곳에서 농민 반란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는데, 영주들은 농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기에 한 마을 전체가 쓸려나간 뒤에 재건되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렇게 인구가 급감한 이후 곡물의 가격이 빠르게 하락했고, 이 때문에 13세기까지의 인구 증가 덕에 잠시 부역의 형태로 회귀했던 세금 제도는 14~15세기 동안 현물이나 화폐 위주의 수취 구조로 다시 바뀌어 소작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갔다.
한편 전쟁에서 다수의 용병이 동원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영주가 농민들에게 신변보호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용병들은 진격로나 전장 주변 지역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며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지방 소영주의 군사력으로는 다수의 용병단에 대적할 수가 없었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시골 마을에 대한 외적의 위협은 바이킹의 침략과 같은 소규모 약탈이 대부분이었기에 자체적으로 영주를 중심으로 마을을 방어해볼 수 있었으나, 이제 국가간의 전쟁에 동원된 용병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국왕이나 대영주가 아니고서는 막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주가 농민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대신에 농민은 영주에게 노동력이나 세금을 제공한다'라는 장원의 기본 성립 조건 자체가 붕괴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지의 사유 재산화가 장원의 해체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러한 변화는 14~16세기 사회경제적 상황이 바뀌던 것에 기인하였다. 인구 감소로 인해 농지가 남아돌게 되면서, 생산성이 남들보다 뛰어난 농부들은 남은 농지를 차지하여 부농이 되었고, 더 수완이 좋은 사람은 소작인을 다수 거느린 지주가 되었다. 한편 곡물의 가격이 하락하자 여력이 있는 농부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유제품이나 양모를 생산하는 축산업으로 눈을 놀리게 되었다. 소나 양을 방목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인클로저 운동이 발생하였고, 과거 공유지였던 지역이 사유지로 바뀌기 시작하였다.[11] 이러한 농촌 사회의 변화는 '국왕에게 장원을 하사받은 영주의 소유이지만 농민이 조상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던 땅'이라는 미묘한 위치에 있던 농지가 점차 '개인이 사사로이 사고팔 수 있는 사유지'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만들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국왕은 자유인이 가진 사유지의 경우 장원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도록 보호했기 때문에, 사유지의 증가는 장원의 축소와 다름없었다.
상술한 것처럼 국왕이 사유 재산권을 보호하게 된 원인은 전쟁의 양상 변화와 이에 따른 증세와 관련이 깊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소집된 기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용병을 고용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고,[12] 원시적인 대포를 비롯한 화약 무기가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신무기도 많은 비용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국세가 필요해졌고,[13] 수백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세금이 신설되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격화되자, 세금을 걷는 대가로 국왕이 사유 재산권을 보호하여 민심를 안정시켜야 했다.
이렇게 장원 제도가 점차 유명무실화되어 가다가 프랑스 혁명 때 완전히 법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에도 유럽의 몇몇 지역에서 장원 제도가 존속하기는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더 이상 유럽에서 장원 제도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동유럽에서 잔재로 있었으나 독소전쟁 통해 사라졌다.
5. 중국
5.1. 주나라
중국에선 일찍부터인 주나라 때부터 장원이 있었는데, 이때의 장원은 왕과 왕족들 혹은 제후들에게 토지를 주고 그들에게 조공을 받는 봉건제도로 부터 비롯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수입원이자 경제적 근간은 농업과 토지였다. 주로 밀과 기장을 재배하였으며, 농지의 분배는 왕을 중심으로 봉토가 하사되고, 하사받은 봉토가 귀족의 자식에게 상속되었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토지의 공식적인 주인은 왕이었으나, 왕족이나 귀족 간에 토지와 노동력을 사사로이 거래했고 이를 왕실의 감독관들에게 확인 받고 토지의 소유여부를 확정하여 청동기에 새겼다. 더불어 귀족 간에 땅을 거래하면 거기서 농사를 짓는 농민도 딸려갔다. 서양의 장원과 달리 이시기 중국의 장원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자기 땅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5.2. 춘추 전국 ~ 진, 한나라 초기
서주(西周)시대 말 견융의 침략으로 기존의 수도가 함락되고, 수도를 이전하면서 동주(東周)시대가 시작되었다. 외침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귀족의 농지의 크기 또한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다보니 귀족과 왕족의 소유 농지는 점점 규모가 작아졌다. 그리하여 왕/귀족을 대신하여 제후와 함께 새로운 후국들이 할거했으며, 또 사회적으로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전쟁터에서 보병이 주력이되었다. 각국간의 경쟁이 과열되고, 동시에 각국은 경쟁에서 우위를 얻기 위해서 병력과 식량 확보에 주력했다.이를 위해 각국은 농가의 인구 증가와 소득과 생산을 안정시킬 수 있는 그리고 세수를 확보하고 노역과 병역인원을 파악하기 쉬운 4~5명 소가족 단위의 농경을 장려하였고, 장원경영을 배제하였다. 상업과 유통도 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족하거나 많은 농작물을 재분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나라에서도 이를 위해 힘썼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전쟁의 공훈에 따라 병사와 백성들에게 농토를 할당하는 명전택(名田宅)제도를 실시해 땅을 나눠주었고 동시에 전국의 농업을 왕실의 농산물 및 생필품 재분배 유통망으로 통합하였으며, 이를 위해 화폐를 유통시켰으며, 농민에게 노역과 세금을 거두어 관리하였다. 직업이 없는 자에게는 땅을 주지 않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되었으며, 이런 전제군주정 농업사회기조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漢)이 들어선 초반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5.3. 전한 말기 ~ 수나라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부터 북방의 국경지역에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는 부담을 줄이고자 그 사이의 완충지역에 농민들을 이주시켜 농작을 하게하고 현물세를 면제시켜주었는데, 오히려 과도한 노역부담과 흉작이나 기아/파산으로 인해서 빚을 지고, 땅을 상인이나 호족에게 파는일이 잦아졌다. 반대로 이틈을 타 상인과 호족은 땅을 구해 장원을 형성하고 파산한 농민들을 받아들였다. 당시의 농업은 가축이 끄는 쟁기와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수확을 올리는 데 유리하게끔 발전하였는데, 이 때문에 호족의 장원에 농기구나 종자 등을 대여받거나, 식량을 공급받기 위해 의탁하는 자들이 많았다. 전한 때는 일찍부터 소작제도가 실시되어 호족이 농민에게 소작지를 내어주고, 수확량의 절반을 수취하는 대신 앞서 말한 대로 쟁기나, 소, 종자 등을 대여할 수 있었다. 농지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호족은 소작내주는 것을 선호했다.더불어 이미 전국시대부터 상인은 물류와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는데, 호족세력은 대규모 농지를 보유하면서 거둬들이는 농산품을 상인들 통해 팔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무제(武帝) 때는 흉노와의 원정을 위해서 호족과 상인을 규제하고 잦은 노역과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담시켰는데, 다시 경제적 부담을 느낀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팔고 지방의 호족들에게 의탁하게 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고, 나라에서 농민에게 땅을 분배해주는 명전택제도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도중에 한황실의 외척 왕망이 아예 신(新)나라를 새로 새우고 개혁제도로 장원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들의 땅을 빼앗아 정전제의 이념에 따라 소농들에게 땅을 나눠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호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이후 한나라가 다시 세워지는 후한(後漢)때는 중앙재정의 영향력이 더욱 감소하고 호족과 장원이 더 성장하였다. 더욱이 중앙정부의 통제력과 치안이 나빠지자 장원을 지닌 호족들이 사병을 모집하고 방위시설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혼란한 와중에 신변을 보호받고 싶은 농민들이 호족과 장원에 의탁 및 의존하면서 더욱 기세를 부렸다.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황실이 사실상 와해되고, 조조(曺操)에 의해 둔전제도가 실시되어 잠시 진이나 한나라 때 처럼 국가적으로 농가와 농업을 직접 관리하였으나, 조조가 죽은 뒤 후계 군벌들이 둔전의 땅을 각각 나눠가짐에 따라 다시금 장원과 호족이 득세하였다. 이후 계속되는 전란으로 신변을 보호받고 싶은 농민이 지속적으로 장원에 몰려듬에 따라 오랫 동안 호족과 장원이 존속하게 된다.
다른지역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이른 전한 때부터 소작과 장원이 공존하였는데, 자기 농지를 직접 관리하는 호족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러하질 않아 농업용 종자와 가축, 쟁기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소작지를 내주고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갔다. 특히 장강 이북의 경우 기장과 밀을 주식으로 삼았는데, 밀과 기장을 가공하기 위한 물레방아는 보통 호족이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를 임대하기 위해서라도 호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주변보다 농업발전속도가 빨라 기원 후 4~5세기 북위 때부터 토지의 지력을 회복하고 1년에 3작을 하는 연작농법이 개발되고 개간을 위한 가축의 수도 소2마리에서 한마리로 줄었지만, 오히려 가족단위의 농경보다 장원관리를 위한 농경노동력을 경감시켜주는 효과가 더 컸다. 한나라 때에는 그나마 농민에게 노역과 세금을 부과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혼란기가 가중되면서 농민들이 호족에게 의탁하여 노비나 노예로 전락하게 됨에 따라 조정의 인구조사에서도 누락되고, 과세대상에서도 제외되면서 호족의 경제력은 강한 가운데 중앙 재정은 피폐해져만 갔다.
이후 5호16국, 남북조시대를 지나도 이런 경향이 지속되는데, 북위에서는 문성문명황후, 효문제 등이 균전제를 실시하였으나, 도리어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부여하다 보니, 노비를 많이 보유한 대토지 소유자가 더 땅을 많이 받게되어 사실상 호족들의 대토지소유 즉 토지 겸병을 오히려 조정에서 공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조에서도 중앙재정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호족의 토지겸병은 매우 심각하여 땅과 농민을 많이 거느린 자는 그 수가 헤아려 수천 명에 이르는 자도 등장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수제국에서는 부병제와 함께 균전제를 실시하고, 후대에 이를수록 장원의 농민이 호족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해방되고, 노비의 수도 급격히 줄었지만, 그래도 토지소유량의 양극화 즉 땅을 많이 가진자와 적게 가진자의 차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유량농민에게 정착용 농토를 주는 양세법도 실시하고, 호족을 해체해서 중앙에서 지방으로 절도사를 파견하지만, 반대로 이들 절도사가 그지방에서 새로이 장원을 만들고 사실상 지방 호족 및 군벌화가 되면서 토지겸병 및 양극화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5.4. 당나라 이후
당나라에서는 중앙에서 지방관리인 절도사들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무역로 거점에 있는 절도사 안녹산이 강력한 군벌이 되어 안사의 난 등의 내란이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토번의 힘이 강성해진 탓에, 전국토가 전쟁에 시달리며 수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하여 유랑민이 되었다. 780년 당에서는 유랑농민에게 토지를 주어 세금을 거두게 하는 양세법이 실시되지만 그 이후에도 100년간 전란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당말과 5대10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며 중요한 변혁을 맞는다.우선 남북조시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던 일이지만, 안사의 난 이전에는 중국 인구의 2/3가량이 장강이북인 황하유역 즉 중원이나 관중/관서지역에 거주하였던 것이, 안사의 난 이후로는 강남으로의 인구 이전이 부쩍 늘어났다.
황하 인근은 토지의 침식이 많아 수분이 오래 머물지 않고 밭농사에 적합하여, 면적당 생산량은 그리 높지않고 인구밀도나 부양력도 높지 않아 대토지 경작이나 광작경영에 적합하였다. 그러나 장강이남은 양자강 하부 삼각지를 비롯해서 방조제나 관개시설을 정비하여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고, 토양 또한 벼농사에 적합하였다. 논과 논에서 재배하는 벼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았고, 그만큼 적은 면적의 땅에 제초나 파종 등에서 손이 많이갔다. 자연히 장강 이북과 달리 보다 적은 면적의 땅에서 5~6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효율이 좋았고 또 생산성 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같은 면적에서 밭보다 5배 가량 생산성이 높았고, 벼를 재배하지 못하는 계절에 겨울밀이나 다른 작물을 심으면서 지력을 보존 및 회복시키는 이모작이 실시됨에 따라 굳이 지주나 호족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기 논에서 지속적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했고, 북부와 달리 호족의 경제적 영향력이나 농민의 의존도도 떨어졌고, 당송변혁기에 장강이남으로의 인구 이동이 심화됨에 따라 호족의 경제적 위세가 떨어지고 가족단위로 농사를 짓는 소농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성인 남성이 경작 가능한 토지를 60~70무(畝)로 보았는데, 13세기 절강성의 온주(溫州)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농지 400무 이상을 소유한 집은 전체의 1.5 %에 불과하고 전체가구의 85%가 30~150무의 농지를 가지고 있는 등[14] 당송변혁기를 거쳐 강남으로의 인구이동과 개간 및 정착이 증가하면서 장원경영이 쇠퇴하고 소농경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하북에서는 요, 금, 원 등이 차례로 오가면서 농촌이 사실상 파괴되었고 원명교체기의 혼란으로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1세기 동안에도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해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다가, 명나라 중흥기와 이후 청나라를 거치면서 이지역도 장원보다 소토지 경작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대토지 소유자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8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가 전체의 5%, 10%미만인데다 이들의 보유토지도 전체 농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6. 한국
고대 삼국시대부터, 신라, 고려를 지나기 까지 한국의 농업은 꾸준하게 가축을 이용한 대토지 경작이 주류를 이어왔고, 조선초기에서 조차 5인 내외의 농가도 농장에 의존적인 존재였다.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 시대와 원간섭기를 거치며 국가의 자영농 계층이 크게 붕괴되고 더 이상 제대로된 세금을 걷기 못하게 되어, 일부 관료 계층에 황무지 개간을 명목으로 국가의 토지를 뭉터기로 나누어 주고 조정이 관료에게 세금을 걷는 사태가 벌어진다. 대토지를 분급받은 관료들은 해당 지역의 농민들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지방 관리들이 지주들로부터 봉급을 받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백성들을 사병으로 무장시키기도 하는 등 흡사 중세 봉건 장원 영주 같은 지위를 누린다. 참고로 함흥평야 전체가 조선 태조 이성계 가문의 영지였다. 조선 초기에 들어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지방 구석구석까지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도록 하였으며, 과전법을 실시하여 신진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향촌 세력가들이 임의로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후 조선 중기에는 16~17세기 양란(왜란, 호란)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개간이 되지 않은 황무지가 많아졌으나 재지양반(내지는 향촌양반)에 의해 간척지와 황무지의 개간이 주도되면서 다시금 장원인 농장이 생겨났다.[15] 양반의 농장은 주로 전호(佃戶)인 노비나 양인들에 의해 경작되었는데, 그중 노비가 양인 못지않게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비는 크게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는데, 오희문이 <쇄미록>에 노비를 묘사한 바에 의하면, 자기 집과 논밭을 따로 가지고 양반지주의 농장을 경작하여 주는 외거노비가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6]
17세기 중엽까지 농장은 크게 흥했으나, 연작인 이모작과 물을 대어 논을 만드는 수도작(水稻作)법이 도입됨에 따라 큰 변화를 맞는다. 이모작이 시행되면서 더이상 전호가 자기 밭을 묵혀둘 필요가 없어졌고, 수도작법에서는 모를 심거나 모주변의 잡초를 제초하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농지가 작을 수록 더 유리하였다.[17] 이 때문에 영세경작이 유행하자, 농장경영은 점차 쇠퇴하였고 농장이 유지되더라도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 종자만 빼돌려서 자기 논밭에 심는등 양반농장 보다 자기 논밭에 힘을 쓰는 경우가 많아 농장의 생산량은 점차 감소하였다. 농장이 유행하던 시절에도 오희문이 쇄미록(16세기 말)에서 자기 노비가 이런 짓을 한다고 욕을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양반지주는 농장을 포기하고 전호에게 소작을 내주고 그 대가로 수확의 절반을 소작료를 받는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실시하면서 장원은 사라지게된다.
7. 일본
일본에서는 서기 8세기 무렵인 헤이안 시대에 본격적으로 장원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본래 국가의 법인 율령으로 모든 토지를 천황 소유로 규정했기 때문에[18] 백성이 토지를 사유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나, 귀족만은 예외로 두어[19]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하였다. 정계에 있는 귀족들은 재산을 늘리고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해 재산을 증식하려했고, 식량생산이 경제의 주력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주로 농토를 이용하였다. 당시 귀족들의 토지는 불윤조(不輪租)라고 하여 세금을 면제받았다.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재산을 늘려나가, 농토의 대부분이 장원화 되었으나 개개 장원의 크기는 같은 시기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꽤 작았다. 이는 영주가 장원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각각의 농지에 지토(地頭)라는 중간관리를 두어 대리경영을 맡겼기 때문인데, 귀족들은 지토에게 관리를 맡기고 매년 일정한 수확물을 받았는데, 이를 연공(年貢)이라고 한다. 장원의 규모가 작은 탓에 다른 나라에 비해 농민에 대한 인신예속은 적은 편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면 지토의 역할을 슈고(守護)가 계승하였다. 그 중 훗날 다이묘로 성장한 이들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라 부른다.
센고쿠 시대가 되면서 각지에 퍼진 이들 다이묘들이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무력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줄 장원과 영지의 경영도 중시되었다. 또한, 장원은 농사를 지어주는 농민들에게 크게 의존하였고, 이들은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노동력으로서 전장에 동원되거나 경우에 따라 아시가루로 징병되어 싸웠으므로, 장원경영은 경제활동인 동시에 병력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이 시대에는 토지의 지력이나 수확량 등이 좋지 않아 넓은 땅을 두고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는 광작(廣作)이 일반적이었고, 그 때문에 농촌의 가족은 20명~30명 정도의 대가족이 많았다. 가족은 묘슈(名主)라는 지도자격 농민을 두고, 그 밑에서 나고(名子), 게닌(下人) 등의 하층민을 포함하였다. 하층민인 나고나 게닌은 한국의 노비와 전호, 유럽의 농노, 중국의 전호 등과 달리 자기 농지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원제는 15~16세기 기나이 평원[20]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세금인 연공을 수확물인 현물 대신 화폐(금전)로도 납부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를 위해 농민이 스스로 농작물을 시장에다 내다 팔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21], 시장을 이용해본 농민들이 더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수확량을 더 늘리려 들었다.[22]
때마침 농지에 물을 대주는 수도작법이나 보리와 벼를 번갈아 심는 이모작법, 그리고 비료를 사용하여 지력을 높이는 시비법등이 도입되자, 적은 면적으로도 일가족이 생활할 만큼의 수확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넓은 토지를 광작경영하는 것보다 보다 제초나 비료투입 등 보다 적은 면적에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하는게 생산성에 더 효과적이었고, 이미 시장을 통해 자기 땅을 경작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직결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장원이나 대가족에 의존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에 장원은 점진적으로 쇠퇴하였고, 종래 20~30명에 달하였던 대가족들은 4~5명의 소가족으로 분할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경작지가 없던 나고와 게닌도 소작지를 얻기 시작하여 예속농민에서 소작농민으로서 지위가 상승하였다.
[1] 관습에 따라서는 사유지가 아니라 공유지일 수도 있다.[2] 중세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가 농지를 휴경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이 생계를 유지하기에 곤란했다는 것이지만, 장원이 형성된 중세 초기에 휴경은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중세까지 토지의 지력을 회복시킬만한 농사 기술이 없었기에 한번 농사를 지으면 1~2년간 농지를 휴경해야 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오히려 농민의 수가 부족하고 땅은 남아돌았기에 휴경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휴경보다는 당시의 후진적인 농업 기술 때문에 전체적인 효율성이 떨어져서, 한 농민이 1년간 투입할 수 있는 총 노동력에 비해 농작물 생산량이 많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참고로 농지 전체를 1년간 휴경한 것이 아니고, 농지를 반으로 나누어 농사를 지었다. 매년 농지 전체에 쟁기질을 해서 갈아 엎은 뒤에, 그 중 그 전해에 휴경해서 지력을 회복한 절반에만 농사를 짓고, 전해에 농사를 지었던 남은 절반은 휴경했다. 즉 당연히 농민들은 매년 농사를 지었다.[3] 삼포제가 처음 개발된 때는 8-9세기 무렵이었지만, 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는 데에는 수 세기가 걸렸다. 어차피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인구가 부족하고 토지가 남아돌았기 때문에 휴경지가 넓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 당연히 안식일인 일요일은 일을 쉬고 교회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5] 사실 영주의 직영지에서 얼마나 부역하느냐는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각기 달랐다.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이틀에 하루 꼴로 일해야 했던 경우도 있지만 1년 중 다 합쳐서 수주일만큼만 일해도 되는 경우도 있었다.[6] 농노가 영주 소유의 방앗간, 제분소를 거치지 않고 몰래 곡식을 탈곡하거나 제분하다가 걸리면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7] 모직물 산업에 더해서 14세기부터 염장 청어 산업이 크게 흥하면서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한 북부 저지대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하였다.[8] 199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서는 특이하게 중세~근세 유럽의 경제사를 연구한 경제사학자이다.[9] 14~15세기는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서 르네상스가 발생했던 시기이지만,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가혹한 생존 경쟁에 몰려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도 기근, 흑사병,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여파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비교적 덜 심각하였다. 대신에 이탈리아는 17세기에 전염병과 전쟁의 타격을 세게 얻어맞고, 유럽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쇠퇴하게 된다.[10] 유럽 전체에 대한 정확한 인구 통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30~60%라는 숫자는 추정치이며 학자마다 주장하는 값이 다르다. 무려 유럽 전체 인구의 60%가 사망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는 반면에, 보수적으로 보는 학자는 30%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11]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은 특유의 세금 제도 때문에 상업적 축산업의 발달에서 예외였다. 국내 지역간의 교역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는 구조였기에, 당장의 세금에 목마른 정부는 작은 지역 단위로만 자체적으로 상품이 겨우 순환되는 전통적 농업 국가 형태를 원했고, 결국 넓은 배후 시장이 필요한 산업의 발달은 지체되었다.[12] 처음에는 국왕의 여유 자금으로 용병을 적당히 고용한 뒤 이를 기사나 종사 등 봉건적 소집군에 더해서 적국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였으나, 상업과 교역의 발전 속에서 성장한 도시들로부터 세금과 인력을 제공받는 군주가 늘어나면서 너도나도 용병을 동원하기 시작하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세입을 아득히 넘어서는 비용으로 대규모 병력을 고용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군주가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나중에는 국채 및 지폐(태환권)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한편, 용병의 수요가 늘어나자 영국 장궁병, 제노바 쇠뇌병, 스위스 장창병 등 전문화된 용병들이 맹위를 떨쳤고, 잘 훈련된 용병이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물론 중기병의 돌격은 머스킷 총이 전장에서 주력으로 자리잡기 전까지는 여전히 적진을 와해시키는 데에 효과적이기는 했으나, 정작 기사들조차 자기 군역은 계약대로 방어전과 같은 최소한만 지키거나 아예 금납으로 때우고는 전장에서 스스로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돈을 벌거나 자기 영지 경영에 집중하였다. 이는 기사만이 아니라 부유한 평민들도 마찬가지여서 차츰 이러한 탈신분적 중기병대를 일컫는 맨앳암즈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13] 한번 큰 전쟁이 벌어지면 평균적으로 3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되는 돈이 소모되었다.[14] 리처드 폰 글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소와당, 2016, 404~405쪽[15]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 강, 1996[16] 노비의 성격에 관하여서는 노비참고[17] 그래서 중국으로 부터 들여오던 새로운 농기구도 소형농기구 위주였다.[18] "하늘 아래 땅 끝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19]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과 간전영세사재법(墾田永世私財法)[20] 교토 근방의 야마시로,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 셋츠 지방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교토시를 포함한 교토부 남부, 나라현, 오사카부에 해당한다.[21] 그전까지 시장은 귀족과 소수 상공업자들의 전유물이었다.[22] 물론 초기에는 기나이 지방에만 변화를 보이고, 다른 지역은 여전히 장원제가 보편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