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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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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형3. 역사
3.1. 시초와 중흥3.2. 몰락3.3. 현재
4. 특징5. 기타6. 관련 개념
6.1. 창작물의 길드6.2. 게이머들의 집단 길드

1. 개요

길드(Guild)는 중세 유럽에서 상인장인 등등의 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2. 어형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중세의 조합들을 길드라는 용어로 포괄해서 부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각지에서 Arte, Corporazioni, Collegia, Corpus, hansa, zunft 등 다양한 용어로 통칭되었다.

의외로 '양보'로 유명한 'yield'와도 어원이 같다. yield는 "산출"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길드나 yield나 "보상"이라는 기원적인 뜻에서 비롯했다.#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오래된 말인데, 고대~중세 영어에서는 "geld"(지불, 부조, 조공, 비용)가 있고, 같은 인도유럽어족에서 갈라져나온 동원어로는 현대 노르웨이어의 "gjeld"와 스웨덴어의 "gäld"(), 영어나 독일어, 네덜란드어의 "geld" 혹은 "gelt"(돈, 금전, 세금)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앵글로색슨시대에 인명배상금 혹은 목숨값을 의미하였던 "wergeld"나 데인로노르드인에게 지불하였던 "danegeld"도 있다. 대체로 의미상 (특히 돈과 같은 )재산을 주거나 나누는 것과 관계되어 있는데, 최초에 길드의 목적이 "무언가를 함께 나누어 부담하는 유무형의 공공부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역시 무언가를 넘겨주거나 얻는다는 뜻인 yield와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3. 역사

3.1. 시초와 중흥

고대 로마 시대에 콜레기아라는 수공업자들의 결사체가 있었다. 콜레기아는 중세 유럽의 길드와 달리 중앙정부가 인가를 내리고 행정장관이 감독하며, 공권력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계획적으로 운용했다. 콜레기아는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에 그대로 잔존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내의 모든 수공업과 상업을, 특히 자금 조달과 징세 목적으로 엄격히 통제하는데 활용되는 등, 길드와 비슷한 성격이 있긴 하지만 기능적인 차이가 있다.

중세 초에도 비슷한 신분이나 직종끼리 종교행사나 공공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길드가 존재하였으나, 흔히 일컫는 전형적인 길드의 직접적 기원은 10세기 중엽 내지 11세기 이래 서유럽에서 돈 있는 상인들이나 돈 되는 기술을 지닌 장인들끼리 모여 조합원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결성한 조직으로, 카롤루스 대제 시기의 법령에서 유사한 서약단체가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서유럽은 동로마와 달리 중앙권력이 한번 소멸한 뒤 영주들의 권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에서 도시의 발전이 일어났기에 동로마와는 성립 배경이 다르다. 물론 서유럽의 길드 역시 중앙집권체제의 발달 이후에는 그 내부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3.2. 몰락

14~15세기에 들어서 르네상스의 도래와 종교개혁이 발생하면서 길드는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다. 16세기엔 절대왕정이 성립해가면서 중상주의 정책이 실시되면서 새로운 시장과 보다 큰 자본 자원의 출현으로 수공업 길드들은 심각하게 약해졌다. 17세기에 들어서도 유럽 전역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길드들이 설립되고 있었으나, 상인들은 길드를 만들기보다는 자본을 갖춘 기업가가 되어 상인 길드의 중요성을 떨어뜨렸고, 수공업 길드들은 기술혁신이 가속화되고 새로운 거래 기회들이 특정 산업 분야에 대한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무산시킴에 따라 와해되었다. 길드 연맹체중 하나였던 한자동맹도 바로 이시기에 와해되었다.

이후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숙련공보다 기계와 비숙련자 공정이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던 길드는 점점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1791년에 있었던 '노동의 자유에 관한 선언'은 폐쇄적인 길드 체제가 이미 구시대적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1798년에 제 1회 산업박람회에서 폐쇄적 지역산업의 상징인 길드는 설 자리가 없었고 뒤이어 1840년 스페인에서 1859~60년에 독일오스트리아 등지, 1864년에 이탈리아에서 길드를 폐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3.3. 현재

자유시장과 대규모 상공업이 일반화한 현대에 와서는 문화보존 차원을 제외하고는 영 찾기 어렵다. 그래도 노동자의 권리 등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 등은 노동조합과 같은 제도로 이어졌다.

영국 등 명목상으로 '길드'가 아직 남아있는 곳도 있다. 영국은 아직도 마그나 카르타에 의하여 영국 국왕시티 오브 런던 땅을 밟으려면 시티의 길드들(!)이 선출한 대표인 '정의롭고 명예로운 런던 시장 경'의 허락을 받아야한다. 독일에서도 과거 한자동맹에 가맹했던 도시들 중에는 아직도 소규모나 관광차원이나마 조합이 남아있기도 하고, 특히 브레멘이나 함부르크는 지금도 정식명칭은 자유한자도시이다.

길드와는 약간 다르지만, 현대 이탈리아의 경제구조는 아직도 이렇다할 대기업이 없는 길드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세계대전 전간기에 서유럽식 대규모 기업경제를 싫어했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 집권하면서 파시스트 정책을 밀어붙였다. 당시에는 덕분에 많은 대기업들이 파시즘 정책의 비효율성으로 파산하면서 이탈리아 경제를 허약하게 만들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중소기업과 협동조합이 주를 이루는 명품과 장인의 산업구조를 만들어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부유한 주 중 하나인 에밀리아로마냐 주가 이런 구조를 주도하며 실업률도 매우 낮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 특유의 경제구조를 에밀리아 모델이라고 부르며 현대 이탈리아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4. 특징

설립 목적은 그리스도교의 우애정신에 입각한 상부상조였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교역과 생산을 독점했으며, 그만큼 폐쇄성도 강해서 비조합원들에 대해 심각하게 배타적이었다. 조합원이 아닌 자가 조합의 이익에 방해된다면 은밀하게 제거해버릴 수 있었을 정도였다.

지금에 비하면 중세 도시들은 서로 간의 왕래가 극히 적었고 도시도 좁은 데다가 인구가 생각보다 많지 않고 도시 밖 거주민과의 왕래도 적었으므로 얼마 안 되는 성 거주민으로 수요자가 한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자유경쟁을 하다간 그야말로 모두 망할 판이었기 때문에 길드가 독점을 하는 식으로 흘러가게 됐는데 그 때문에 고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각 길드끼리 싸움을 벌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제과사 조합이 제빵사 조합을 고소했기 때문에 바게트를 비롯한 '빵'류에 밀가루, 소금, 물밖에 쓸 수 없게 된 사건도 있었다. 길드 내부에서도 영 빡빡하긴 매일반이라 새로운 장인이 되려고 하면 견습 기간을 거친 다음 도제 기간을 거쳐야 하며 도제를 거쳐서 장인이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당 업종에 빈 자리가 나야지만 제대로 독립을 할 수 있었다.[1] 가장 쉬운 장인 승격 비법은 장인의 장인의 친족녀와 혼인하거나 장인이 죽어 장인의 돈많은 과부와 결혼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중세에는 장인들은 기반을 갖춘 3, 40세 이후에야 제대로 결혼할 수 있었으며 결혼은 일반적으로 20대 초반 10대의 여성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장인이 죽어도, 장인의 부인들은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성욕도 강하고 외로움도 강할 나이여서 과부의 재혼을 노리는 젊은 도제도 많았고 과부를 살살 꼬셔서 부인과 장인 모두를 꿰차는 사례들이 빈번히 꽤 벌어졌다. 관련 사이트

상인 길드나 장인 길드가 유명하지만, 기사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사례가 있었다. 원래 이익집단으로서의 길드는 구분 없이 그 지역 내에 활동하는 상업인들이 참여했으나, 12세기부터는 상인들이 결성한 길드인 상인 길드와 수공업자들이 결성한 장인 길드로 나뉘게 되었다. 후자는 대표적으로 모직업에는 직공·염색공·축융공 등의 길드, 건축업에는 석공·건축기사 등의 길드, 그리고 그 밖에 도장공·금속세공인·대장장이·제과기술자·푸주간·무두장이·비누제조공과 환전상 등의 길드가 있었다. 한편, 길드 그 자체는 본래 동종업계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그대로 공동체 일원의 공익을 위한 단체였던 까닭에, 학생·교수길드나 검술길드처럼 비생산적이지만 공공의 권리를 위해 결성된 길드도 있었다.[2] 심지어 역내 구걸권을 관리하는 거지길드가 있었던 곳도 존재했다.

이러한 이익적 길드 중 가장 오래된 길드는 상인 길드로, 13세기에 들어서는 그 영향력이 커서, 봉건적 영지영주의 권력에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며, 도시의 경제적 발전과 자치권 획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나중에 시의회(혹은 시참사회)를 장악해 도시의 행정권을 장악하여 도시의 통치자가 되어 과두정으로써 도시를 운영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 수공업자들이 장인 길드를 결성해 도시의 행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상인 길드와 경쟁하면서 도제제도를 창안하는 등 경제적·교육적 기능 외에 다른 목적에도 이바지했으며, 산업혁명 전까지 유럽의 생산업을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

길드는 흔히 수호성인과 연관되었으며, 지방의 길드가 교구교회 안에 성당을 마련하여 회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길드는 가난한 회원만이 아니라 지역 전체를 상대로 하는 자선 사업도 벌였다. 또한 회원들이 연회를 개최하고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길드 집회소 건물을 지어 운영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회원의 자식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5. 기타

  • 길드는 독립적인 도시에 많았고 농촌의 소도시나 시장거리에서는 상인이나 수공업자나 길드를 결성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 굳이 길드를 형성해봐야 큰 이득을 보기 어렵고, 거기다 상인길드가 주도하던 도시당국이 주변 농촌에 대한 상공업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독점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기를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적 자유시장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3]

6. 관련 개념

6.1. 창작물의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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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게이머들의 집단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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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노동 형태는 근대에 들어 많이 사라졌지만 대학원생-교수 체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학교 이외의 취직 자리가 적은 학과에서는 기존 교수 자리가 빠져야 신임 교수 취직이 가능하다.[2] 예를 들어 학생길드의 경우, 숙박비 등이 너무 비싸다면 "계속 가격이 이런 식이면 우린 단체로 이 도시에서 나갈거고, 그럼 학생들한테 방 빌려주고 음식 팔아서 연명하는 이 지역 상권은 박살날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가격 내려라." 같은 식으로 지역 상인과 협상하는 식.[3] 다만 별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일도 아닌것이 근대 자유시장과 이전 시대의 시장은 차이가 크다. 당장 조선 시대 한양(서울)에서도 육의전 상인들의 금난전권 대문에 사대문 안에서는 일반적인 자유시장이 발달하지 못하고, 주요 시장들은 주로 사대문 바깥에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