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 휴 라이머
1. 개요
Enclosure(종획운동).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 현상. 운동이라고 해서 어느 집단이 "으쌰으쌰! 이런 것을 하자!"가 아니라 그냥 당시의 경향, 트렌드를 나타내는 용어다. 따라서 인클로저 '운동'보다는 인클로저 '신드롬'이나 인클로저 '현상' 정도로 번역하는 게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다 잘 드러내는 번역일 것이다.한국어로 풀어쓰면 울타리 치기 운동으로,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共有地)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사유지 간에 양이나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혹은 자신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 자산으로 만들었다.
기원을 찾자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개는 16~17세기 튜더 왕조 시대 인클로저를 1차, 의회에 의해 주도된 18~19세기 인클로저를 2차로 구분한다.
2. 과정
장원이 성행하던 시대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숲이나 들 등의 임야 토지를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이 공유지는 흉년기에 먹을 야생 식물[2]을 채취하거나 가축의 방목이나 벌목 등을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13-15세기 사이 곡물시장의 성장과 토지거래의 증가로 장원이 해체되면서 이들 공유지도 어느덧 각각의 지주들에 의해 사유지가 되어 울타리가 쳐졌다.이후에도 잉글랜드 사회는 계속 변화하였는데, 이를 설명하던 주장[3]은 다음과 같다.
- 중상주의의 대두로 해상무역과 시장을 통해 농산품을 팔 수 있게 되었다.
- 그런데 면직물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땅을 가진 지주와 부농들은 일손이 적게드는 양목축지를 더 선호하여 농경지를 목축지로 전환하면서 그 자리에 양을 키웠다.
- 이를 잘 활용한 농민들은 부농이 되었고, 반대로 활용하지 못한 농민들은 빈농이 되었는데,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은 자기땅을 팔고 도시로 유입되어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당시에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목축지 증가로 농경지가 줄어들어 일자리를 잃는 농촌노동자가 많아지자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목축지의 증가로 인한 농경지의 감소는 과장된 것으로 오히려 최근의 연구 성과에서는 1차 인클로저시기에 농지가 더욱 증가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4][5] 게다가 정작 도시의 노동자는 외지인보다는 주로 도시 출신이거나 인접 지역 출신인 경우가 많았고, 농촌에서도 빈농들 대다수가 자기 땅을 팔고 임금노동자가 되었지만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일[6]은 매우 드물었다. [7] 그러니까 3번째까지는 맞지만 그 이후 항목은 실상과 맞지 않는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보편화되고, 임금노동자가 된 농민들은 주로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아니면 농촌의 수공업이나 상업등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촌에서의 직업분화를 촉진시켰다.
하지만 차지농과 지주를 중심으로 토지소유가 집중화, 대형화되는데에 반해 공유지들이 사라짐으로써, 영세농민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임금노동자라고 할지라도 그리 풍족한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 종전에는 흉작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공유지에서 야생식물을 채취해서 먹고 살거나, 임목을 채취하여 연료나 자재 등을 공급받았지만, 인클로저가 진행되고 공유지가 사라지면서 그러한 것이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차지농에게 고용되더라도, 차지농들은 일손이 많이필요한 수확기 가을에 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다른계절에는 고용하지 않았으므로 항상 일자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에 농촌의 소득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갔다.
보통 인클로저의 시기를 1차와 2차로 구분할 때에, 1차는 양목축지를 대폭 늘린 것으로 보고, 2차는 농경지를 늘린 것으로 보는 것이 기존의 의견이었으나 앞서 설명했듯이 1차 때는 목축지보다 실제로는 농경지의 증가가 더두드러졌다. 굳이 구분하자면 1차의 경우 진행주체가 지주나 농민등 민간인 경우였고, 2차의 경우 집행주체가 지역민의 청원을 받은 의회라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전자는 주로 지주나 농민들의 단순한 합의에 의존하였으나, 후자는 의회를 통하여 법적인 절차로 소유권을 정하는 경우가 다소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역민 합의로 진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뚜렷한 의의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관습뿐만이 아니라 법으로 확인되고 보장되었다는 데에 있다.
3. 반발
원래 인클로저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들이나 숲이 포함된 땅들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유지였고, 이 공유지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소나 돼지를 방목할 수 있었고, 난방에 쓸 땔감이나, 집을 만들 자재나 농기구나 도구로 쓸 목재를 채취할 수도 있었다. 또한 흉작시에는 도토리 등과 같은 야생식물을 채집하여 먹는 등 생계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관습적으로 공유지에는 일종의 공공소유권 같은 것이 존재하여서 특정인이 땅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작에서 수입이 변변치 않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이 공유지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그러나 인클로저가 진행되면서 이 공유지와 공동권이 침해되고, 이 땅들이 사유지로 나뉘자 더이상 예전처럼 임목이나 야생색물을 채취하며 생계를 보조할 수 없었다. 이에 공유지에 의존하던 농민들은 대규모 반대운동을 펼치는데, 대표적으로 땅의 울타리등을 부수며 일어났던 1549년 케트의 난(Kett's Rebellion), 1607년 중북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1607년 뉴턴의 난(Newton Rebellion)등이 있었다. 16~17세기 말고도, 19세기 의회 인클로저 당시에도 영세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지역민들의 저항과 반발으로 인클로저가 늦게 실행되거나, 실행을 할때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4. 결과
토지소유권이 확보되자 농토의 수확량이 증가하였고,[8] 증가한 수확량은 도시의 인구증가를 효과적으로 뒷받침 하였다. 또한 농민층이 분화하여 임금노동자가 생겨나자 농촌에서는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외에도 고용주와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근로계약이 자리잡게 되고 이들 농촌의 노동자들 중 일부는 농촌지역의 수공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촌수공업과 상공업 발전에 영향력을 끼쳤다.전반적으로 인클로저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했던 도시와 농촌의 노동력을 증가시키고, 제도적으로 사유재산권과 근로계약을 확립하는 등 전국적인 산업기반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직업분화와 함께 농민들의 소득격차도 벌어짐에 따라 빈부격차와 실업율, 빈민구제에 대한 각종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1] 당연히 식인은 아니고(...) 그만큼 일자리를 대체해서 잡아먹는다는 것을 과격하게 비유한 것이다.[2] 도토리나 산딸기, 버섯 등등[3] 예컨데 마르크스의 잉글랜드 농민층 3분화설.3분화의 구성은 1)지주, 2)부농인 차지농, 3)임금노동자가 된 빈농[4] 영문 위키를 살펴보면 농촌 유랑민이 도시로 유입되어 도시노동자가 되었다는 주장은 마르크스 등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이고, 암스트롱등 최근의 학자들은 인클로저에 대한 기존의 마르크스 학설은 너무 과장 및 단순화되었고, 실제로 인클로저로 발생한 많은 토지는 오히려 농민들의 소유로 돌아갔고 인클로저의 실제 영향력은 식량 생산력의 증가와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더 크다고 주장한다. "W. A. Armstrong, among others, argued that this is perhaps an oversimplification (중략) The impact of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enclosure has been grossly exaggerated. (중략) Enclosed land was under control of the farmer who was free to adopt better farming practices. (중략) Following enclosure, crop yields increased while at the same time labor productivity increased enough to create a surplus of labor. The increased labor supply is considered one of the cause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5] 위키원문의 출처는 1) Armstrong, W A(1981). "The Influence of Demographic Factors on the Position of the Agricultural Labourer in England and Wales, c.1750–1914". in "Agricultural History Review.". The Agricultural History Review 29 (British Agricultural History Society). pp. 71–82, 2) Hey, David; John L. Halstead , R. W. Hoyle , Brian M. Short (2008). David Hey, ed. Themes in The Oxford Companion to Family and Local Hist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9-53298-2. Cite uses deprecated parameter |coauthors= (help), 3) Overton, Mark (1996). Agricultural Revolution in England: The transformation if the agrarian economy 1500-18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56859-3.[6] 도리어 이러한 대규모의 이농현상은 선발산업국인 영국보다는 되려 후발산업화국가에서 두드러졌다.[7] http://cafe.naver.com/economicreview/314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송병건,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해남, 2008 참고[8] 인클로저를 한 땅은 안한 땅보다 수확량이 지역에 따라 10%~25% 가량 높았다고 한다. (송병건, <영국근대화의 재구성>, 해남, 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