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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reedom to roam일반인이 야생 임산물(열매, 버섯 등)을 채취할 권리가 합법적으로 보장되는 것.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에서 발달한 개념이다.
다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는 채취할 수 있는 임산물의 종류와 횟수가 제한된 곳도 있으며, 이 규칙을 어길 시 불법 채취로 간주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완전히 신뢰하기보단 "이런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구나" 정도로 알아두는 것이 좋다. 아래에도 설명된 것처럼 <자연향유권> 이란 야생 임산물을 아무나 무조건 채취/채집해가도 좋다고 허용하는 권리가 아니라 해당 지역의 관습법 체계에 의해 정해진 범위에서 해당 지역 주민에게 허용된 야생 임산물 채취/채집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세 이래 유럽의 관습법 체계는 세속법(영주법)과 교회법, 민법등이 얽히고 설킨 것이라 더럽게 복잡하고, 각 지역마다 고유의 관습법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했다. 특히 자연향유권은 중세 봉건시대부터 영주와 영지민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으로써 시작된 것이라 각 영지마다, 지역마다 그 범위가 다른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영지 주변의 숲은 영주의 소유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나무(목재)는 영주의 소유이지만 산딸기나 버섯, 연료용 잔가지와 같은 부산물은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채취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숲은 영주의 소유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1] 물론 이런 복잡한 체계는 현대 법체계에 포섭되면서 많이 단순화, 합리화되기는 하였지만 지방자치와 지역문화의 전통에 대한 존중이 강한 유럽의 문화적 특성상 현대에도 각 지역마다 인정해주는 범위가 서로 다른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즉, <토지의 소유자가 배타적으로 용익권을 독점하는 미국이나 캐나다와는 달리, 유럽 대륙에서는 소유지가 아닌 근처 주민들에게도 일부 권리를 인정하는구나!> 라는 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으로만 참고해 두고, (해당 지역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한 토박이가 아니라면) 자연향유권 믿고 숲에서 뭐 따오지 말자.
2. 상세
중세의 장원 중심 경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 장원 주변의 숲은 대부분 영주의 소유였고, 이 숲에서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거나 벌채하여 목재를 얻는 것은 전통적으로 영주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역 주민(평민)들은 숲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고 해버리면 평민들이 살기가 너무 어려워지고 불만을 품게 된다. 이는 영주 입장에서도 별로 좋지 못한 일이므로 '사냥이나 벌목은 영주의 권리지만 야생 열매나 버섯, 땔감용 잔가지와 같은 부산물은 평민도 채취할 수 있다'와 같이 권리를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중세 유럽의 토지 용익권은 '해당 토지를 가진 자가 그 토지의 모든 권리를 가진다'와 같이 배타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토지에 거주하는 여러 집단들 사이에서 복잡한 관습체계에 따라 분점되었던 것이다.[2]봉건제 이래의 영주-토지소유자 개념이 무너지고 토지가 적극적으로 거래의 대상이 되던 19세기 무렵을 보면, 신흥 자본가 계층이 토지거래를 통해[3] 지주로 등장하면서 이러한 관습적 권리들의 인정에 대한 법적 분쟁이 벌어진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부 독일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이 숲에서 연료용 나뭇가지를 주워가는 것을 절도로 처벌해 달라'는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피고측(나뭇가지를 주워가던 지역 주민측)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바로 젊은 시절의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마르크스는 "그걸 절도로 처벌하라고? 차라리 더 막나가서 살인으로 처벌하자고 하지 그러냐?" 라고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등 불성실해 보이는 태도로 재판에 임했지만, 사건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즉 당시 사회 기준에서 이런 권리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특례적으로 허용된 것도 아니고, 토지 소유권과는 별개로 지역 주민들이 가지는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던 것.
이 사건을 현대인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해당 재판에서 원고측의 의도는 "내 땅에서 서리해가는 사람들을 처벌해달라" 보다는 "토지 소유자에게 그 토지의 배타적 용익권을 인정해달라" 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따라서 해당 재판에서 (마르크스가 변호한) 지역 주민측이 손쉽게 승소한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주(봉건시대 이래의 향사)에게서 땅을 구입한 신흥 자본가가 은근슬쩍 이전까지 지주의 권리가 아니었던 것을 은근슬쩍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꼼수를 쓴 것이다. 그러니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거래한 상대는 이전 지주인데, 왜 지주의 권리가 아닌 우리 권리까지 당신것이 된다는거요?" 라고 반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습법이 현대 법 체계 내에 포용된 데에는 사회주의/사민주의 정치세력의 영향이 상당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으나, 권리 자체는 근현대 정치의 개념이 탄생하지 않았던 중세 이래로 전해져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미국/캐나다 등 소위 '신대륙' 국가들은 신대륙에 진출(침략)하여 처음부터 사회적 구조를 건설하면서 각 이주민들이 각자의 영역(토지)를 나눠가지고 그 안에서 배타적인 경제적 권리를 갖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현대에 이른 데 비해 북서유럽 지역에서는 오랜 기간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이권이나 사회적 관계가 유지된 채 현대에 이르렀기에 나타난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3. 관련 문서
[1] 또한 저러한 채집권이 지역 주민에게 인정되는 경우라 해도, 어떤 영지에서는 영지민들의 세력이 나름 강성해서 영주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권리를 인정하도록 한 것일수도 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그냥 영주가 마음씨가 좋거나 영지민들이 어느 정도 여유있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권리를 허용해 준 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과정이 복잡한 만큼 각 지역마다 채취할 수 있는 자원의 종류나 양이 다른 것 역시 당연하다.[2] 단순화한 예시에서는 영주와 평민(영지민)만 두고 따지지만 실제 중세 서유럽의 사회환경에서는 교회, 즉 성당이나 수도원등도 중요한 구성원이었기에 이 관습 체계는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숲은 영주의 것이기에 숲에서 사냥이나 벌목을 하는 것은 영주만의 권리이다. 하지만 평민들 역시 부산물을 채취할 권리는 가지고 있고, 그 숲을 흐르는 강에서 고기를 잡을 권리(어업권)은 수도원이 가진다'와 같은 복잡한 관계도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이런 권리 분점이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고, 특히 근대국가의 성립으로 근대적 법체계가 정비되면서 이전까지의 관습적 체계를 두고 소송이 벌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3] 중세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대에는 토지란 기본적으로 '작위에 붙어있는 것'으로써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스탕달의 소설인 '파르마의 수도원'을 보더라도 피에트라네라 백작부인이 자신의 일을 충실히 도와준 하인에게 상으로 토지를 주기 위해[4] 땅을 주면서 증여계약서나 가짜 매매계약서가 아니라 '정해진 날짜까지 이 빚을 갚지 않으면 담보인 땅을 준다'는 가짜 빚 문서를 만들어서 토지의 소유권을 옮겨주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즉, 토지가 일반적인 거래를 통해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다는 것.
[4] =귀족까지는 아니라도 향사로 만들어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