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775년 | ||
오스만 제국 코텔(현재 불가리아 슬라벤 지방 코텔) | |||
사망 | 1859년 1월 8일 (향년 84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 | 몰다비아 카이마캄 | ||
1821년 ~ 1822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반 스토이코프 어머니: 안나 | |
형제 | 아타나스 보고리디스 | ||
배우자 | 랄루 스카이리티 | ||
자녀 | 알렉산드르 보고리디스, 니콜라에 보고리디, 스마라그다 보고리디 | ||
가문 | 보고리디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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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2. 생애
1775년경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중부 코텔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이반 스토이코프는 대규모 가축 상인이었으며, 1787년부터 1792년까지 벌어진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친할아버지 스토이코 블라디슬라보프는 코텔 출신의 성직자로, 나중에 소프로니우스 브라찬스키로 개명해 브라찬 주교를 역임했고, 19세기 초에 러시아 제국 정부에 의해 불가리아 공동체의 주요 대표자로 인정되었고, 1964년 불가리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의 형제 아타나스는 뷔르츠부르크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빈과 파리에서 의사로 일했으며, 그리스 문헌학 잡지에 참여하면서 그리스 이민자 혁명 운동에 관여했다.보고리디(Bogoridi)라는 이름은 보고리스(Bogoris) 라고도 알려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정교회 개종을 이끈 보리스 1세를 기리는 의미로 그와 형제 아타나스에게 주어졌다. 그는 부쿠레슈티의 성 사바 그리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출생 이름인 스토이코(Stoiko)를그리스식인 슈테판(Stefan)으로 바꾸었다. 이후 코스탄티니예에서 조부의 추천을 받아 저명한 파나리오테스 집안인 모루지 가문에 들어가서 교육받았고, 오스만 함대의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를 맡은 궁정 직위)에 발탁되었다.
1799년 이집트 원정을 단행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을 상대하는 무스타파 파샤의 원정대에 참여했다. 8월 17일 아부키르 만 전투에서 오스만군이 프랑스군에게 완패했을 때, 그는 바다로 몸을 던진 뒤 인근에 있던 영국 전함에 의해 구출되었다. 1812년 보이보드에 선임된 스카를라트 칼리마치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으로 떠난 뒤 스카를라트 칼리마치에 의해 갈라치의 주지사로 선임되어 1819년까지 통치했다. 1821년 스카를라트 칼리마치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지명되었을 때, 그는 스카를라트의 보좌관이 되었다. 그러나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반란과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이끄는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의 뒤이은 왈라키아 침공으로 인해 별다른 통치를 하지 못했다.
1821년 6월 오스만 제국군이 필리키 에테리아의 봉기를 최종적으로 진압한 뒤 몰다비아 카이마캄으로 부임하여 1822년 9월까지 다스리다 이오안 스투르자가 보이보드로 부임한 뒤 물러났다. 1823년 오스만 제국 함대 드라고만으로 복귀하여 1825년까지 맡았지만, 그리스 독립 전쟁에 연루된 혐의로 소아시아의 이즈미트로 추방되어 1828년까지 억류되었다. 1827년 ~ 1829년 제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종결된 뒤 1829년 9월 14일 에디르네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슈테판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된 오스만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 대표단은 러시아와의 분쟁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뤄내서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의 신뢰를 얻었고, 마흐무트 2세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슈테판은 1830년 그리스 독립 승인, 1833년 훈카리스켈레시 조약 체결 준비, 다뉴브 공국의 지위 결정 등 1830년대 오스만 궁정의 모든 중요한 협상과 결정에 참여했다. 한편 부쿠레슈티의 저명한 불가리아인인 바실 네노비치, 이반 셀리민스키, 미하일 키팔로프, 니콜라 피콜로는 불가리아 자치 공국을 수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 역시 이에 대해 잘 알았고, 이 아이디어를 오스만 궁정에 제기했지만 별다른 동의를 받아내지 못했다. 마흐무트 2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베이(bey) 칭호를 부여했고, 1834년 사모스 총독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고, 개인 비서인 가브릴 크라스테비치가 대리인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그가 무척 탐욕스럽고 독재적인 통치 방식을 구사한다며 미워했다. 1849년 사모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파디샤는 1850년에 사모스 통치권을 박탈했다.
1850년 5~6월 불가리아 북서부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발했다가 오스만 제국군에 진압되었다. 이후 오스만 궁정은 그에게 현지 민심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겼다. 슈테판은 행정 개혁을 단행해 부활한 세 나히야의 새로운 행정 구역을 형성했으며, 농업 개혁을 시행해 불가리아 농민들이 토지를 받을 기회를 갖도록 했다. 이후 오스만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 치세에서 탄지마트 의회의 회원이자 황실 고문으로 선임되었으며, 파디샤로부터 코스탄티니예에 불가리아인을 위한 교회를 지을 수 있는 허가를 받고 페네르 지역에 자기 집을 기증하여 교회를 짓도록 했다. 그 결과 성 슈테판에게 헌정된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고, 나중에 같은 장소에 '철 교회'로 알려진 성 슈테판 성당이 세워졌다. 한편, 그는 고향인 코텔에서 세워진 그리스 및 불가리아어 학교를 지원했으며, 코스탄티니예와 해외에서 공부하는 불가리아 학생들을 후원했다.
1859년 1월 8일 코스탄티니예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랄루 스카이리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