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54년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844년 12월 27일(향년 90세) | |||
그리스 왕국 아테네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812년 8월 27일 ~ 1818년 9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게오르기오스 카라차스 어머니: 술타나 마브로코르다토스 | ||
형제 | 콘스탄틴, 엘레니, 스칼라토스 | |||
배우자 | 엘레나 스카나비 | |||
자녀 | 랄루, 게오르기오스, 스마라그다, 로산니, 콘스탄티노스 | |||
가문 | 카라제아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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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89대 보이보드.2. 생애
1754년경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출생했다. 그가 속한 카라제아 가문은 다양한 출처에서 라구사 공화국, 카라만 왕조,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출신으로 거론되었다. '카라제아(Caradja)'는 튀르크어로 알을 의미하는데, 루마니아 학자이자 총리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는 이를 근거로 카라제아 가문이 아시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게오르기오스 카라차스는 오스만 제국 궁정의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을 역임했고, 삼촌 니콜라에 카라제아는 왈라키아 공국 82대 보이보드를 역임했으며, 또다른 삼촌 요안니키오스는 1761년부터 1763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역임했다. 어머니는 술타나 마브로코르다토스로, 그는 모계를 통해 1740년대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역임한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의 손자였다. 형제로 콘스탄틴[1], 엘레니[2], 스칼라토스[3]가 있었다.1790년 9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지우르지우에서 휴전 협상을 할 때 통역으로 활동했다. 1792년 초 프로이센 왕국을 방문해 외교 활동을 수행했으며, 1792~1793년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의 <전쟁 전반에 관한 논문(Traité de la guerre en généra)>을 기반으로 한 군사 훈련 교본인 'Usūl ü Fenn-i Harb'를 발간했다. 55세 때인 1808년 10월 아버지가 맡았던 대 드라고만에 선임되었다. 이후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의 신임을 받고 외교 활동을 수행했으며, 1812년 8월 27일 러시아군이 왈라키아에서 철수한 뒤 왈라키아의 보디보드로 선임되었다. 코스탄티니예 주재 프랑스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되기 위해 8,000자루의 황금을 오스만 궁정에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부쿠레슈티에서 보낸 첫날 밤, 델룰 스피리에 있던 왕족의 거주지가 화재에 휘말려 소실되었다. 얼마 후 수행원 한 명이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왈라키아는 1813년부터 1814년까지 이어진 대역병에 휘말렸다. 일명 '카라게아 역병'으로 일컬어진 이 역병에서, 7만에 달하는 왈라키아인이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는데, 그중 4만 명은 부쿠레슈티 시민이었다. 그는 역병이 창궐하는 동안 코트로체니 수도원에 피신했다.
역병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814년 3월 26일, 플로이에슈티 시민들이 그의 사촌인 코스타슈 카라제아의 도시 소유 주장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행정관들은 강하게 진압하길 꺼렸다. 그가 사촌의 주장을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하자, 도시 상인들은 4월 14일에 모든 상점을 폐쇄해 도시의 모든 활동을 마비했다. 그는 이에 강력하게 개입해 반란을 일으킨 모든 지도자를 재판없이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나중에 주동자 중 한 명이 러시아 국적을 지닌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면하기로 했다. 1816년 6월, 왈라키아 디반(Divan, 국가 평의회)에 속했던 2명의 오스트리아인을 포함한 음모자들이 그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여기에 콘스탄틴 필리페스쿠, 콘스탄틴 발라세아누, 그리고레 기카 등 여러 보야르가 반란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어 자기들 영지에 있는 저택으로 추방되었다.
1818년, 그는 일명 '카라제아 법령'으로 알려진 새로운 법규르 반포했다. 이 법령은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처음 4개 부분은 민법 및 상법 조항을 포함했고, 다섯 번째 부분은 형법을 포함했으며, 여섯 번째 부분은 사법 절차 규범을 포함했다. 이때 제1부 '얼굴에 대하여'에서는 인간들을 성별, 출생, 능력에 따라 분류하고 이에 맞는 직책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명시하면서, "여성은 모든 정당, 지배권 및 공직에서 제거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제3부 '흥정에 대하여'는 계약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법적 조건을 제시했다.
이오안은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역임하는 동안 농민과 장인 길드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조계 광산과 세관에서 4,762개의 귀족 칭호를 판매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의 수입은 약 150만 레이에서 370만 레이로 증가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그가 공물을 잘 납부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었고, 러시아 외교관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한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알렉산드루 수추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 위해 그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벌였다. 얼마 후, 그는 오스만 궁정이 곧 자신을 소환하거나 처형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키시너우에 머물던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대신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왈라키아를 침공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기나긴 전쟁을 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쳤던 러시아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18년 9월 28일, 이오안은 디반을 소집한 뒤 자기가 부재한 동안 섭정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저녁 올테니아의 반(Ban) 라두 골레스쿠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부쿠레슈티 외곽에서 가족을 데리고 여유로운 마차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연출했다가, 아르나우트 경비대 300명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도시인 크론슈타트로 망명했다. 이후 오스만 당국이 파견한 추격대를 피해 스위스로 이동해 제네바에 수개월간 거주했다가,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해 피사에 정착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벌어지자 그리스 독립군에 재정 지원을 해줬고, 전쟁이 끝난 후인 1830년 그리스 왕국의 수도 아테네로 이동해 그곳에 정착했고, 현대 그리스 연극을 상영하는 데 재정 지원을 해주는 등 문화 후원에 힘썼다. 1844년 12월 27일 90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성 이리니 성당에서 열렸고, 유해는 그의 후원으로 지어진 콜로킨토우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엘레나 스카나비: 코스탄티니예 은행가의 딸.
- 랄루 카라차(1799 ~ 1870): 그리스 여배우, 연극 감독, 번역가,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 회원.
- 게오르기오스: 스마라그다 로세티의 남편.
- 스마라그다(1780 ~ 1871): 왈라키아 포스텔닉 콘스탄틴 블라쿠타스의 부인.
- 록산니(1763 ~ 1868): 몰다비아 보이보드 미하이 수추의 부인.
- 콘스탄티노스(1799 ~ 1860): 1821년 12월 20일에서 1822년 1월 15일까지 개회해 그리스의 독립을 선포한 에피다우로스 제1차 국회의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