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슈테판 3세 | 카롤 1세 | 미하이 에미네스쿠 | 미하이 2세 |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블라드 3세 | 조지 비칼리 | 헨리 코안더 | 게오르게 하지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 | ||||
호칭 | 루마니아어: Constantin Brâncoveanu | |||
출생 | 1654년 8월 15일 | |||
왈라키아 공국 브랑코베니 | ||||
사망 | 1714년 8월 15일 (향년 60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직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688년 ~ 1714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마테이 브랑코비아누 어머니: 스탄카 칸타쿠지노 | ||
형제 | 바르부, 마테이 | |||
배우자 | 마리카 | |||
자녀 | 콘스탄틴 2세, 슈테판, 라두, 마테이, 스탄카, 마리아, 일린카, 사프타, 안쿠타, 발라샤, 스마라그다 | |||
가문 | 브랑코비아누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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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67대 보이보드. 루마니아 정교회 성인.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1654년 왈라키아 공국 브랑코베니[1]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포스텔닉 직책을 역임한 마테이 브랑코비아누이며, 어머니는 역시 포스텔닉을 역임한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손자이자 왈라키아 공국 제66대 보이보드 셰르반 칸타쿠지노의 누이인 스탄카 칸타쿠지노였다. 형제로 바르부, 마테이가 있었다. 1655년, 아버지 마테이는 제59대 보이보드 콘스탄틴 셰르반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용병부대 세이멘과 도로반츠에 의해 미트로폴리아 언덕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하인들이 집시 아이와 바꿔치기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조부 프레다는 아들이 죽은 장소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고, 그의 장남 콘스탄틴 2세 브란코비아누는 1712년에 돌 십자가를 세웠다.그 후 콘스탄틴은 조부 프레다의 집에서 양육되었지만, 1658년 프레다마저 왈라키아 공국 제60대 보이보드 미네아 3세의 명령으로 목이 졸려 죽었다. 이후 어머니 스탄카와 그는 프레다의 미망인 파우나의 보호를 받았다. 1659년, 파우나는 콘스탄틴과 바르부 형제와[2] 함께 사도바 수도원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한편, 그는 외삼촌인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후견을 받으면서, 그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슬라브어 등 다양한 언어를 익혔다. 또한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던 외삼촌이 파도바 대학교를 본따서 세운 그리스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분야를 착실히 익혔다.
1674년, 형제 바르부가 코스탄티니예에 있는 도중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브란코베니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콘스탄틴과 어머니 스탄카는 로마나치 카운티에 있는 오브샤 마을을 수도원에 기부했다. 이리하여 콘스탄틴은 브란코비아누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유일하게 상속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 후 왈라키아 공국 제65대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에 의해 브라쇼브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난민으로 지내던 보야르들이 조국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에 포페스티 출신의 보야르 네아고에의 딸 마리카와 결혼했다.
1676년, 그는 게오르게 두카가 체린 공방전을 수행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돕기 위해 파견한 왈라키아 분견대에 합류했다. 그 해 9월 본국에 돌아온 그는 삼촌 셰르반 칸타쿠지노가 게오르게 두카의 숙청을 피해 에디르네로 망명했다는 걸 알게 되자 그에게 가세했다. 1678년 11월 29일 게오르게 두카가 폐위되고 셰르반 칸타쿠지노가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된 뒤, 그는 부쿠레슈티의 행정관에 선임되었고, 뒤이어 아버지의 직책이었던 포스텔닉 직위를 물려받았다. 1681년 코스탄티니예에 방문해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축출된 라디슬라우 차키, 크리스토포 파스코와 만났다. 두 사람은 어퍼피 미하이 1세를 전복한 후 트란실바니아에서 루마니아 법을 다시 확립하고 대주교인 사바 브란코비치를 복귀시킬 거라고 맹세했고, 그 역시 이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1683년 오스만 제국군이 제2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을 때, 왈라키아 보이보드 셰르반 칸타쿠지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 편에서 참전했다. 빈 공방전이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나고 합스부르크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등이 신성 동맹을 창설한 뒤 대튀르크 전쟁을 단행해 오스만 제국을 몰아붙이자, 셰르반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합스부르크 제국과 손잡기로 마음먹었다. 1688년 10월, 콘스탄틴은 셰르반의 형제 이오르디케, 셰르반의 조카 셰르반 칸타쿠지노 등과 함께 빈에 파견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에 경의를 표하며, 합스부르크군이 왈라키아 근방까지 이르렀을 때 오스만 제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그들 편에 서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양자간의 합의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셰르반은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이 패배한 뒤 합스부르르 제국군에 합류함으로써,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이 왈라키아를 파괴하지 않기를 바랐다.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 진영은 왈라키아인들을 좀더 일찍 끌어들여서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몰아내길 바랐다. 결국 왈라키아 측이 언제 전쟁에 참여할 지는 정해지지 않은 채, 사절단은 1688년 5월 18일에 왈라키아로 귀환했다. 그 후 베테라니 장군이 이끄는 4,000명 가량의 오스트리아 분견대가 리포바를 점령한 뒤 왈라키아 영내로 진입해 루고이, 카란세베슈를 거쳐 8월 14일에 체르네치에 입성했다. 셰르반은 급히 외조카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를 베테라니 장군에게 보내 값비싼 선물을 넘기며 설득하도록 했다. 콘스탄틴은 그가 왈라키아에 계속 있으면 오스만 제국이 왈라키아가 합스부르르 제국군에 가세한다는 걸 눈치챌 테니 이만 물러나달라고 청했고, 베테라니는 그 말에 따라 왈라키아 외곽으로 물러났다.
콘스탄틴은 베테라니가 물러난 장소인 캠풀룽구로 가서 셰르반 보이보드의 형제 미하이와 보야르 콘스탄틴 발라세아누와 함께 베테라니와 추가 협상했다. 베테라니는 셰르반이 가까운 친척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빈에 보내 왈라키아 공국이 신성 동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대가로 브라쇼프로 철수하기로 했다. 10월 2일, 콘스탄틴은 게오르게 칸타쿠지노, 미하이 칸타쿠지노, 셰르반 블라데스쿠와 함께 빈으로 떠났지만,위임장이 유효하지 않았기에 일주일 후 트란실바니아의 재향군인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셰르반 보이보드는 사절단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유효한 위임장을 보냈고, 사절단은 빈으로의 여정을 이어갔다.
2.2. 집권
1688년 10월 29일 또는 11월 8일, 왈라키아 보이보드 셰르반 칸타쿠지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비서였던 이탈리아 학자 안톤 마리아 델 치아로는 셰르반의 두 형제 콘스탄틴과 미하이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걸 언급했다.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이온 네쿨리스(Ion Neculce, 1672 ~ 1745)는 단순한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치세 때 왈라키아 궁정 연대기 작가로 활동한 라두 포페스쿠(Radu Popescu, 1655 ~ 1729)는 두 형제가 분명히 그를 독살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려는 그의 행동이 너무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그가 독살했는지 여부에 대해 진위가 불분명하다고 본다.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셰르반 칸타쿠지노 사후,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와 미하이 칸타쿠지노가 권력을 잡은 뒤 새 보이보드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여정 도중에 이 소식을 접했지만, 빈으로의 여정을 이어가기로 했다. 1688년 12월 10일 빈에 도착한 사절단은 이듬해 1월 30일 레오폴트 1세 앞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서약했다. 그와 함께 사절 임무를 수행했던 게오르게와 미하이가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빈에 인질로 남아있게 됭써다. 그 후 귀국길에 오른 콘스탄틴은 도중에 셰르반 칸타쿠지노의 미망인 마리아와 함께 트란실바니아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 사이에 그와 함께 돌아가던 셰르반 블라데스쿠가 단독으로 왈라키아로 돌아갔는데, 콘스탄틴은 나중에 왈라키아에 도착한 후 셰르반을 추방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셰르반 블라데스쿠가 먼저 돌아가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가로채려 시도했다가 콘스탄틴에게 발각되어 추방당했다고 추정하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2.3. 자르네슈티 전투와 입지 다지기
콘스탄틴은 왈라키아에 도착한 뒤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고 했던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으며, 전쟁에 뛰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대튀르크 전쟁을 치르면서 왈라키아군의 지원이 필요했던 합스부르르 제국군의 불만을 샀다. 이에 그들은 무력으로 그를 복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689년 11월 초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침공해 부쿠레슈티를 비롯한 여러 마을을 점거하자, 콘스탄티은 1688년 1월 공물을 지급하고 합스부르르 제국군 12개 연대가 겨울 기간 동안 왈라키아에 주둔하는 걸 받아들였으며, 말 1,500마리 이상을 합스부르르 제국군에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왈라키아에서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1690년 1월 크림 칸국에서 파견된 타타르족이 왈라키아에 진입하자, 합스부르르 제국군은 급히 철수했다.하지만 콘스탄틴은 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 국경에 위치한 합스부르르 제국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트란실바니아 공위 주장자 퇴쾨이 임레와 함께 1690년 여름에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산길을 이용해 브란 강을 우회한 뒤 합스부르르 제국군을 자르네슈티에서 기습 공격했다. 그 결과 합스부르르 제국군은 궤멸되었고, 합스부르르 제국군 사령관 하이터스하임의 하이슬러 백작 도나트 요한이 생포되었다. 이후 퇴쾨이 임레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취임했지만,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반격을 가해오자 카르파티아 산맥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후 전선은 다뉴브 강 북쪽에 형성되었고, 왈라키아는 전장이 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콘스탄틴은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부쿠레슈티를 강제 점령했을 때 자금을 보낸 몰다비아 공국을 응징하고 싶어했다. 1693년 봄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칸테미르가 사망하고 디미트리에 칸테미르가 집권했다. 디미트리에가 셰르반의 미망인 마리아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음모를 꾸미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자기 딸 마리아를 전 몰다비아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의 아들인 콘스탄틴 두카와 약혼시켰다. 그해 4월, 콘스탄틴 두카는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지원에 힘입어 디미트리에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즉위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두카는 집권 이래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가해 오스만 제국 총독의 분노를 샀고,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총독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재정을 털어서 뇌물을 줘야 했다.
1693년 6월,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이 왈라키아의 문테니아를 거쳐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콘스탄틴은 두 군대가 그 계획대로 움직였다가는 이들이 지나가면서 왈라키아를 약탈할 거라고 우려해 루시우크로 달려가 원정군 지휘부와 접견했고, 운테니아 대신 텔레아젠 강쪽으로 진군하라고 조언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군이 베오그라드를 포위한 합스부르르 제국군을 격파햐기 위해 베오그라드로 방향을 돌리면서,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에 의해 약탈당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95년, 오스만 파디샤 무스타파 2세가 헝가리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리포바를 공략했으며, 루고이 인근에서 베테라니를 사살했다. 한편 콘스탄틴은 체르네시에서 다뉴브 강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클라도바 요새를 수리했다.
2.4.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이후
1698년 11월 16일, 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한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의 평화 협약인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면서, 발칸 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 1700년 초, 콘스탄틴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노가이에 맞서 싸우는 크림 칸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드라가네스티로 이동했다가, 거기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귀환해도 좋자는 파디샤의 전갈을 받았다. 그 사이, 두미트라슈쿠 코르베아누, 그리고레 발레아누, 라두 흐리제아 포페스쿠 등이 오스만 총독에게 콘스탄틴이 합스부르크 제국과 손잡고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오스만 총독은 이 사실을 콘스탄틴에게 알려줬고, 콘스탄틴은 즉각 자기를 모해하려 했던 보야르들을 투옥했다. 다만 그는 재무부에 보관중이던 67,500 탈러와 자신의 수입에서 82,500 탈러를 챙겨서 300자루에 넣은 뒤,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오스만 총독에게 이 막대한 자금을 바쳐야 했다.1702년, 콘스탄틴은 브란코베니 수도원에서 코스탄티니예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파제트를 영접했다. 그는 영국 대사로부터 잔인하고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무스타파 파샤 탈타반이 다뉴브 공국 방면 대총독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무스타파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민들이 바쳐야 할 세금을 한꺼번에 거둬들였고, 관직을 매매해 추가 금액을 확보했다. 그렇게 연말까지 자금을 모은 뒤 무스타파에게 바쳤다. 그러나 무스타파는 곧 피살면서 그 뇌물은 쓸모가 없어졌다. 1703년, 콘스탄틴에 반대하는 보야르들이 루마니아 출신 오스만 제국 기병대장이자 대총독인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에게 사람을 보내 콘스탄틴을 모함했다.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는 콘스탄틴에게 사람을 보내 50자루에 돈을 담아서 자기에게 보내면 봐줄 의사가 있다고 전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그해 4월, 쿠치우크 셀린이 이끄는 사절단이 부쿠레슈티에 도착해 콘스탄틴이 직접 에디르네로 와서 충성서약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콘스탄틴은 자기가 독감에 걸렸다는 이유로 출발을 4주간 연기했다.
4주 후 몸이 회복된 그는 5월에 칸타쿠지노 일가를 비롯한 강력한 보야르들, 지역 유지 등 1,500명을 이끌고 에디르네로 이동했다. 이윽고 에디르네에 도착한 그는 오스만 제국 고관으로부터 공물을 280자루에서 520자루로 늘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와 보야르들은 이에 분개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콘스탄틴은 고관이 보이보드와 보야르들에게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긴 망토인 카프탄을 입히는 의식을 통해 보이보드로서의 주권을 재확인받았다. 그러나 그가 떠날 때 가져온 뇌물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자, 보야르 토마 부쿨비사를 시켜 더 많은 돈을 가져와서 파디샤 본인과 그의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도록 했다.
한편, 그는 자기를 실망시킨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두카를 몰아내기 위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설득했다. 오스만 관리들이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겸임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자기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복심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채고 거절했다. 그 대신 미하이 라코비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콘스탄틴이 에디르네로 향하는 여정, 파디샤를 접견한 모습, 부쿠레슈티로 돌아온 모습은 부쿠레슈티 중심가에서 15km 떨어진 별궁인 모고쇼아이아 궁전의 프레스코에 장식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1705년 초, 콘스탄틴은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와 도시테 총대주교의 중재에 따라 안티오 칸테미르와 다시는 서로 다투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 후 미하이 라코비차가 폐위되었고, 안티오 칸테미르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707년 6월, 미하이 칸타쿠지노가 그랜드백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외교 임무를 수행하던 대사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소환되었다. 그가 자기 외삼촌 2명을 경질한 건 그해 4월 프란시스 라코치를 러시아 주재 대사로 삼으려 했는데 두 사람이 이를 무시하고 데이비드 코베아를 대사로 삼았고, 이후 코베아는 칸타쿠지노 인사들에게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인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루스 차르국이 개입해 자기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미하이 칸타쿠지노를 복직시키라고 요구하자, 콘스탄틴은 두 삼촌은 여전히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며 듣지 않았다. 그해 7월, 표트르 1세가 콘스탄틴에게 서신을 보내 미하이 칸타쿠지노를 복권시켜달라고 청했지만, 콘스탄틴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이후 콘스탄틴과 그의 두 삼촌간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미하이는 표트르 1세에게 망명을 요청했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는 영지로 물러났다.
한편, 콘스탄틴은 1707년 초 안티오 칸테미르와 함께 오스만 제국 파디샤로부터 벤더 요새의 수리 및 요새화에 참여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들은 목수 200명, 석공, 100명, 인부 2,000명, 마차 350대를 제공해야 했다. 이듬해 봄에도 요청이 반복되어 살라호리 1,500명, 전차병 220명, 도끼병 60명을 벤더에 파견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을 보낸 지 며칠 후, 살라호리 500명, 마차 운전사 100명, 목수 40명을 추가로 보내라는 명령이 도착했다. 여기에 그해 여름에는 오스만 제국 궁정으로부터 공물 142자루를 미리 보내라는 요구가 전달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공물을 거둬들인 끝에 180자루를 거둬들여 오스만 제국 궁정에 바쳤다. 오스만 제국 측은 목표를 추가 달성한 것에 흡족해 하며 감사의 표시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옷걸이를 하사했다. 그러나 1709년 초, 오스만 제국은 그만큼의 공물을 또 다시 요구했고, 콘스탄틴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서 나는 수입과 유력한 보야르들, 길드, 수도사들로부터 자금을 뜯어내야 했다.
이렇듯 오스만 제국의 수탈이 심하자, 콘스탄틴은 자연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했다. 때마침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가 스웨덴-우크라이나 카자크를 상대로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그는 표트르 1세와 손잡기로 마음먹었다. 1709년, 그는 표트르 1세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왈라키아 측은 루스 차르국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 30,000명을 지원해주며, 러시아는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걸 보장하며, 콘스탄틴은 평생 통치를 보장받았다.
2.5.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최후
1710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1711년 5월 러시아군이 몰다비아에 입성하자 몰다비아 보이보드 디미트리에 칸테미르는 표트르 1세 편으로 돌아서면서 러시아 측에 17,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 인근 티기나에 집결한 걸 보고, 사전에 맺은 약속대로 러시아군과 합세하려 했다간 오스만 제국군이 곧바로 자국으로 쳐들어와 파괴를 자행할 거라 여기고 망설였다. 그러던 중 오스만 제국 사절로부터 러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그는 1711년 5월 18일 부쿠레슈티에서 출발해 게르기차에 이르렀다. 이때 우르라티 강 어귀인 알베슈티에서 기다리라는 오스만 제국의 지령이 전달되었다.그 후 다뉴브 대총독 흐리산트 노타라는 콘스탄틴에게 표트르 1세와 자신 사이에서 중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려 했지만, 표트르 1세는 자기와 합류하지 않는 대신 중재하려는 것에 분개해 그가 약속을 위반했다고 간주했고, 왈라키아 장성 토마 칸타쿠지노가 일부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떠나 표트르 1세에 가담해 버렸다. 결국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뒤이은 전투에서 표트르 1세가 스타닐레슈티에서 패배한 뒤 오스만 제국과 평화협상을 벌인 끝에 7월 21일 휴전을 체결하고 본국으로 물러났다. 콘스탄틴은 즉각 러시아군에 가담했다가 러시아로 도망친 토마 칸타쿠지노의 그의 동료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다시 서약하고 러시아로부터 받은 선물을 넘기고 공물을 바치는 등, 입지를 다지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오스만 제국이 자신을 해치려 들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자신을 위한 피난처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궁정은 콘스탄틴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칸타쿠지노 가문으로부터 그가 러시아와 비밀 협약을 맺은 사실을 상세히 전해들은 뒤, 러시아와 손잡고 독립하려 했던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로 했다. 1714년 3월,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는 그를 폐위하고 코스탄티니예로 소환했다. 그는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체포된 뒤 예디쿨레 요새에 투옥되어 입고 있던 모든 옷이 벗겨졌으며, 슈테판 칸타쿠지노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이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1714년 8월 15일 네 아들 및 그의 충실한 친구이자 대재무관인 에나체 바카레스쿠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는 참수되기 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사형을 모면할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그와 네 아들의 수급은 창에 꿰어져 전시되었고, 유해는 보스보퍼스 해협에 던져졌다가 기독교인 어부들이 시신을 건져서 섬에 묻었다. 1720년 미망인 마리카가 콘스탄틴의 유해를 부쿠레슈티의 성 게오르게 수도원에 옮겼다.
콘스탄틴은 사후에 일련의 무나미나 민속 발라드에서 기독교를 끝까지 지키다가 순교한 영웅으로 추앙되었으며, 루마니아의 공식 화폐에도 등재되었다. 1992년 함께 처형된 네 아들과 함께 루마니아 정교회 성인이자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8월 16일이다. 2018년 3월 7일 러시아 정교회도 그들을 성인으로 인정하고, 러시아 정교회의 달력에 추가했다. 2020년 8월 16일, 루마니아 당국은 처음으로 전 세계의 기독교인 박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3.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치세의 왈라키아 문화
콘스탄틴은 26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문화 증진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건축, 벽화 및 조각에서 왈라키아 전통, 네오비잔틴 스타일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조합한 '브랑코벤 스타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예술이 왈라키아 전역에 널리 퍼지도록 장려했다. 브랑코벤 스타일은 외부 계단, 전망대 또는 로지아의 건축적 볼륨을 강조한다. 멀리언 아치를 갖춘 전통적인 장식 시스템이 여전히 적용되지만, 프레임, 기둥 및 난간의 풍부한 장식이 추가로 들어갔다. 또한 개방형 현관이 건물의 대표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둥근 천장은 일반적으로 반원통형이나 반구형 돔에서 이뤄졌다. 장식은 돌로 조각하거나 치장벽토 부조 형태로 적용되었다. 돌 장식에는 꽃 무늬가 주로 쓰였고, 치장 벽토에서는 동양 장식품이 자주 쓰였다.그의 치세에 지어진 대표적인 궁전으로 포트로그 여름 별궁, 부쿠레슈티의 모고쇼아이아 궁전과 메트로폴리탄 궁전, 수 삼바타 드 수스의 브랑코비아누 성을 들 수 있으며, 성당으로는 부쿠레슈티의 총대주교청 대성당, 성 게오르게 교회, 람니쿠 사라트의 성모 수도원, 보르데슈티의 가정 성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그의 치세에 그려진 그림들은 기독교와 왈라키아 역사를 주제로 삼았으며, 서양화, 특히 이탈리아-크레타 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부쿠레슈티 성모 교회의 프레스코, 후레지 수도원의 벽화, 필리페슈티 데 파두레의 칸타쿠지노 가문 봉헌화를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화가로는 왈라키아의 성화 화가 파르부 무투와 왈라키아 태생 그리스인 콘스탄티노스를 들 수 있다.
콘스탄틴은 1694년 스판둘 사바 수도원에 고대 그리스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고등학교인 부쿠레슈티 왕립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여기에 일부 수도원 구내에는 슬라브어와 루마니아를 가르치는 학교들이 운영되었다. 부쿠레슈티에 있는 스판툴 게오르게 베키 수도원과 콜차 수도원 내 학교들은 왕실 장관, 사제 및 교사를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일련의 루마니아 학교가 해당 국가의 도시, 수도원, 심지어 시골에 신설되었으며, 몇몇 수도원에서는 도서관이 생겨났다. 또한 그의 치세에 여러 인쇄소가 새롭게 설립되어 루마니아어, 그리스어, 슬라브어, 아랍어, 튀르크어, 조지아어로 인쇄된 종교 서적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4. 가족
- 마리카: 포페스티 출신의 보야르 네아고에의 딸. 왈라키아 공국 제64대 보이보드 안토니에 딘 포페슈티의 조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나 불확실하다.
- 콘스탄틴 2세 브랑코비아누(1683 ~ 1714):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3세만이 살아남아 브랑코비아누 가문의 명맥을 이어갔다.
- 슈테판 브랑코비아누(1685 ~ 1714): 고대 그리스어로 글을 쓸만큼 학식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 라두 브랑코비아누(? ~ 1714):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 마테이 브랑코비아누(1702 ~ 1714):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루마니아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세 형이 잇달아 처형되는 걸 보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버지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자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버지 콘스탄틴은 "우리 종족은 아무도 신앙을 잃지 않았다. 신앙을 버리고 이 땅에서 몇 년 더 사는 것보다는 천 번 죽는 게 낫다"라고 답했고, 마테이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머리를 내밀었다고 한다.
- 스탄카(1676 ~ 1714): 일리아슈 보다의 아들 라두의 부인.
- 마리아(1678 ~ 1697):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두카의 부인.
- 일린카(1681 ~ ?): 다뉴브 대총독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의 아들 스칼라타체와 초혼, 보야르 셰르반 그레세아누의 아들 셰르반과 재혼.
- 사프타(1687 ~ 1747): 요르다체 크렐레스쿠의 부인.
- 안쿠타(1691 ~ 1730): 니콜라에 루셋의 부인.
- 발라샤(1693 ~ 1752): 미놀라체 람브리노의 부인.
- 스마라그다(1696 ~ ?): 콘스탄틴 발라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