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9:19:54

어퍼피 미하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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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7대 공
어퍼피 미하이 1세
I. Apafi Mihály
파일:어퍼피 미하이 1세.jpg
이름 어퍼피 미하이
(Apafi Mihály)
출생 1632년 11월 3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에베스팔바(현재 루마니아 시비우 카운티 덤브라베니)
사망 1690년 4월 15일 (향년 57세)
트란실바니아 공국 포가라스(현재 루마니아 브라쇼브 카운티 파가라슈)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661년 9월 14일 ~ 1690년 4월 15일
배우자 보르네미자 언너 (1653년 결혼 / 1688년 사망)
자녀 어퍼피 미하이 2세 외 13명
아버지 어퍼피 죄르지
어머니 페키 보르바라
종교 칼뱅파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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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7대 .

2. 생애

1632년 11월 3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에베스팔바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쿠쿨로 카운티의 최고 영주인 어퍼피 죄르지이고, 어머니는 트란실바니아 총리인 페키 야노시의 딸인 페키 보르바라였다. 그에게는 다섯 형제와 다섯 자매가 있었다. 어린시절을 나지사요(현재 루마니아 베슈테르체-나조드 카운티 슈에우)에 있는 부모님의 저택에서 보냈으며, 1650년 라코치 죄르지 2세의 궁정으로 가서 3년간 궁정에서 일했다. 1653년 라코치 죄르지 2세의 몰다비아 공국 원정에 참여했으며, 1657년 라코치 죄르지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트란실바니아군이 크림 칸국의 타타르군에게 궤멸되었을 때 생포된 뒤 3년간 크림 반도에 억류되었다가 1660년 11월 아내가 몸값을 겨우 마련하면서 풀려났다.

이후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케메니 야노시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에 분노한 오스만 제국군이 1661년 6월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여 전역을 휩쓴 뒤 그 해 9월 14일 오스만 제국군 지휘관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에 의해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으로 선임되었다. 1662년 1월, 케메니 야노시는 합스부르크 장성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는 식량난에 시달리다가 클루지만 점령한 뒤 철수해 버렸고, 케메니 야노시는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다가 그해 1월 23일 세게스바르 인근 나지스졸로스에서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과 맞붙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 덕분에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굳힌 뒤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봉신을 자처했고, 250,000 플로린을 자기를 옹립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바치고, 매년 50,000 플로린을 코스탄티니예에 공물로 바쳤으며,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그대로 주둔한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의 통제에 따랐다. 트란실바니아 북부 콜로즈스바르 요새의 독일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자,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는 그 요새를 포위했고,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이에 가담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북부 요충지인 이곳을 장악하고 싶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이곳을 아예 지배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콜로즈스바르에 입성하는 걸 막으려 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 레오폴트 1세에게 콜로즈스바르 수비대에 항복을 명령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레오폴트 1세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쿠추크 메흐메트 파샤는 1662년 6월 15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1663년 2월 22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케메니 야노시의 전 지지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이때 사면된 인사 중 한 명인 반피 데네시는 트란실바니아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4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선전포고한 뒤 대재상 파질 에흐메트 파샤에게 원정군을 맡겼다. 파질은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합스부르크 헝가리를 오스만 제국의 산하로 삼기 위해 원정을 단행하니 작전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감히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지만, 헝가리 총독 베셀리니 페렌츠에게 오스만 제국의 계획에 대해 알리고 출전을 가능한 한 미뤘다. 그러다가 파질이 크림 칸국을 시켜 타타르족이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자, 별 수 없이 원정에 참여했다. 1663년 10월 에르셰쿠이바르에 있는 파질의 진영에 도착한 뒤, 파질의 지시에 따라 헝가리 귀족들에게 오스만 제국군에 항전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촉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해 10월 말 오스만 제국군이 베오그라드에서 겨울을 보낼 때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1664년 초, 합스부르크 제국 당국으로부터 한 달 치 급여를 받지 못한 세켈리히드와 콜로즈스바르의 독일 용병대가 반란을 일으켜 두 요새를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넘겼다. 이후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코스탄티니예에 있는 잉글랜드 대사인 윈칠시아 3대 백작 헤니지 핀치에게 접근해, 개신교 군주인 잉글랜드 국왕이 트란실바니아의 주권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헀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으며, 프랑스 외교부 장관인 위그 드 리옹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또한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그리고레 1세 기카가 1664년 11월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자 망명을 받아주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보내줬다.

1664년 8월 1일, 파질 아헤므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생고트하르트 전투에서 라이몬드 몬테쿠콜리가 이끄는 황제군에게 패배했다. 이리하여 전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유리해졌지만,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 왕국의 침공을 우려해 오스만 제국을 더 밀어붙이지 않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8월 11일에 바스마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22년간 휴전하기로 했고, 오스만 제국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대를 철수하되 트란실바니아와 에르셰쿠이바르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황제군이 장악했던 크로아티아 해안지대와 헝가리 땅 일부가 도로 오스만 제국의 소유로 돌아갔고, 즈린스키 가문의 영지였던 노비즈린 성은 해체되었다. 또한 양국은 서로에게 공물을 보내기로 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잠재적인 새로운 공 후보 및 서로의 적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된 뒤, 트란실바니아는 오랜만에 평화를 맞이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정치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 대신 아내인 보르네미자 언너와 총리 텔레키 미하이가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의 치세에 산업 부흥이 활발히 일어났고, 고르게니 제지 공장이 수리되어 책이 대량으로 인쇄되었으며, 보이더후녀드에서 제철소가 건설되었으며, 유리와 직조 생산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한편,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독실한 칼뱅파 신자로서 종교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백성들에게 욕설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반포했고, 교회와 목회자를 보호하기 위한 엄격한 조항을 실시했다. 그러면서도 가톨릭 신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며,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이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걸 허용했다. 또한 그는 학교를 교회의 "수확된 정원"으로 여기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1682년 베틀렌 가보르가 설립한 줄러페헤르바르의 '베틀렌 가보르 대학'을 재건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합스부르크 헝가리 내 귀족들과 친분을 다졌고, 바스마르 조약에 반감을 품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레오폴트 1세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당하자 트란실바니아로 대거 망명했을 때 기꺼이 받아들였다. 1677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강적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공식적인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헝가리 내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상 헝가리에서 반란을 일으킨 쿠루츠(Kurucs) 지도자 퇴쾨이 임레를 지원했다. 그러나 1679년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네이메헌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하자, 그는 이제 합스부르크 제국이 트란실바니아에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그들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따라 퇴쾨이 임레에 대한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그러자 퇴쾨이 임레는 1681년 그의 아들이 트란실바니아 공을 세습하는 걸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노골적으로 적대 의식을 내비쳤다. 이에 오스만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퇴쾨이 임레의 편을 들어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퇴쾨이 임레에 대한 원조를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1683년, 오스만 제국군이 퇴쾨이 임레의 요청에 따라 제2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다. 이때 어퍼피 미하이 1세도 오스만 궁정의 지시에 따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빈 공방전에 참여하고자 행군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라바 강 다리를 지키는 임무만 맡았다. 제2차 빈 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1684년 봄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한 신성 동맹이 신성 로마 제국폴란드-리투아니아의 주도하에 결성되었다. 이후 신성 동맹이 오스만 제국을 거침없이 몰아붙이자,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레오폴트 1세와 협의한 끝에 1686년 6월 28일 할러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트란실바니아 공은 자녀에게 세습하는 걸 인정받는다.
2. 트란실바니아 공이 사망한 후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3.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종교, 법률, 자유, 그리고 모든 교회 및 세속 문제를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4. 트란실바니아 공은 오스트리아 가문과 헝가리 왕에게 명백히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기독교 통치자와도 자유롭게 동맹을 맺을 수 있다.
5. 트란실바니아 공은 헝가리 왕에게 매년 50,000 제국 탈러를 지불하고 경의를 표한다.
6. 트란실바니아 군대가 오스만군으로부터 회수한 영토는 트란실바니아의 것으로 돌아가고, 황제군과 트란실바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관련 지역에서 회수한 것은 트란실바니아에 넘어가야 하지만 헝가리 왕의 주권을 인정한다.
7. 제국군의 1/6은 트란실바니아 수비를 위해 현지에 파견되고, 트란실바니아 공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한다.
8. 클루지와 데바의 2/3은 제국 경비대가 지키고, 1/3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 경비대가 지킨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제국 경비대는 철수하고 트란실바니아 공이 가진다.

계약서 사본은 외국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졌다. 그 후 오스만군은 황제군에게 공략당한 부더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합류를 요청했지만,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할러 비밀 조약이 실현되리라 믿고 거부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그가 배신했다고 믿고 퇴쾨이 임레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우고 대항하게 했지만,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퇴쾨이 임레의 침공을 격퇴했다. 1686년 겨울 안토니오 카라파와 요한 프리드리히 안톤 암브로시우스 폰 베테라니가 이끄는 황제군이 할러 비밀 조약에 따라 트란실바니아에서 겨울을 보내려 하자, 어퍼피 미하이 1세는 막대한 뇌물을 두 장군에게 줘서 다른 지역에서 겨울을 보내게 했다.

1687년 8월 12일, 로렌 공작 샤를 4세가 지휘하는 황제군이 나기하르사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그 후 샤를 4세는 트란실바니아로 곧장 진군해 솜요, 클루지, 세즈반, 사모수이바르를 점령헀다. 그 후 어퍼피 미하이 1세가 급히 파견한 사절단과 접견한 샤를 4세는 본인은 트란실바니아를 강점할 생각은 없으며,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협상 결과, 양자는 발라즈스팔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트란실바니아 공은 700,000 탈러를 황제군에 군자금으로 지불하고, 밀 66,000 부셸, 귀리 120,000 부셸, 건초 144,000 부셸, 짚 50만 단, 고기 40,000 점, 와인 7,000 배럴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 대신, 샤를 4세는 어퍼피 미하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걸 보장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내치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농노가 무료로 일하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를 완전히 복속하길 원했던 레오폴트 1세는 발라즈스팔비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샤를 4세는 곧 소환되었고, 안토니오 카라파가 샤를 4세를 대신해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안토니오 카라파는 1688년 2월 시비우로 진군한 뒤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서신을 보내 군대 공급과 관련된 논란이 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총리 텔레키 미하이 등 트란실바니아의 핵심 귀족들과 접견한 그는 텔레키 미하이와 협상한 뒤 다른 대표단과 별도로 협상했다. 5월 3일, 비서 다니엘 압솔론과 합께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안토니오 카라파는 대표단에게 선언문에 서명하라고 권고했다. 사전에 안토니오 카라파와 협의했던 텔레키 미하이는 즉시 서명하려 했지만, 다른 대표단은 먼저 선언문 내용을 본 뒤 협의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이 지연되자, 안토니오 카라파는 대포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열린 포가라스 성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대표단은 5월 9일에 선언문에 서명했다.

포가라스 선언문에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귀속될 것이 명시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은 레오폴트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오스만 제국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 했다. 또한 황제군은 트란실바니아의 요충지인 코바르, 후슈트, 괴르게니 및 브라쇼브 성에 주둔하며, 공국은 연간 70만 탈러를 황제에게 바쳐야 했다.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이 선언문으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되고, 공국의 자치권과 트란실바니아 공의 권력이 침해되어 버린 것에 깊이 상심했지만, 감히 황제군에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1688년 8월 아내가 사망한 후,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1690년 초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냥에 나섰다가 감기에 걸렸고, 그해 4월 15일 포가라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파가라스의 개혁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트란실바니아 총리 보르네미자 팔의 딸인 보르네미자 언너와의 사이에서 14명을 낳았지만, 아들 어퍼피 미하이 2세를 제외한 모든 아이가 유년기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어퍼피 미하이 2세는 아버지 사후 14세의 나이에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출되었지만, 실제로는 레오폴트 1세가 지명한 총독이 트란실바니아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