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본명 | 라두 5세 Radu V | |||
이명 | 아푸마티 사람(de la Afumați)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29년 1월 2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521년 10월 ~ 1523년 4월 | |||
2차 | 1524년 1월 ~ 6월 | |||
3차 | 1524년 9월 ~ 1525년 4월 | |||
4차 | 1525년 8월 ~ 1529년 1월 2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라두 4세 어머니: 카탈리나 크르노예비치 | ||
배우자 | 보이카, 룩산드라 | |||
자녀 | 라두 8세, 블라드, 앙카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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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27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21대 보이보드 라두 4세와 제타 데스포티스 안드리아 크르노예비치의 딸인 카탈리나 크르노예비치의 아들이다. 왈라키아 공국 일포브주 아푸마치에 조부 블라드 4세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푸마치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졌다. 1508년 라두 4세가 사망한 뒤 블라드 3세의 아들인 미네아 1세가 라두 4세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보이보드 직위를 획득했다. 이후 10여 년간 조용히 지내던 라두 5세는 1521년 9월 15일 왈라키아 제25대 보이보드 네아고에 바사라브가 사망한 뒤 어린 테오도시에가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자, 그해 10월 반란을 일으켜 타르고비슈테 전투에서 토벌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했다.오랫동안 왈라키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스만 제국의 니코폴리스 베이인 메흐메트 베그 미할로글루는 왈라키아를 오스만 제국의 파찰리크(pachalik: 오스만 제국 직할령.)로 삼으려 했다. 1522년 1월, 메흐메트 베그가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군하자, 라두 5세는 구바비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곧 네아고에 바사라브와 테오도시에를 보이보드로 배출한 크라이오베슈티 가문과 이복형제인 라두 6세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1522년 4월, 메흐메트 베그는 라두 5세를 배제하기 위해 다뉴브 강을 다시 넘어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라두 5세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유격전으로 맞서 싸웠지만, 점점 불리해지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 러요시 2세가 영지로 부여한 트란실바니아로 철수했다. 메흐메트 베그는 왈라키아를 여러 개로 분할해서 직할 통치를 실시하려 했지만, 왈라키아 보야르와 백성들은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를 거부하고 라두 5세를 꿋꿋이 지지했다. 라두 5세는 1522년 6월 왈라키아로 귀환해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서포여이 야노시가 보내준 트란실바니아 분견대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군을 다뉴브 강 너머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해 8월 메흐메트 베그가 재차 공세를 가해오자 트란실바니아로 도주했고, 메흐메트 베그는 신 정부를 세운 뒤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 자들을 모조리 탄압했다.
1522년 10월, 라두 5세가 트란실바니아 분견대의 지원에 힘입어 또다시 오스만군을 격퇴하고 1523년 4월까지 군림했다. 그러나 1523년 4월 다니슈티 가문의 블라디슬라프 3세가 정변을 일으켜 그를 축출했다. 그는 체포된 뒤 오스만군에 넘겨져서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524년 1월 이복형제 라두 6세로부터 보이보드 직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해 6월 블라디슬라프 3세에게 재차 쫓겨났다. 그 후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한 후 러요시 2세의 지원을 얻어 1524년 9월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탈환했다. 1525년 4월 블라디슬라프 3세에게 또다시 축출되었지만, 그 해 8월 블라디슬라프 3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재선임되었다.
그 후 올테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크라이오베스쿠 가문과 화해하고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딸인 룩산드라와 결혼했다. 여기에 1525년 11월 코스탄티니예로 가서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쉴레이만 1세는 연간 공물을 12,000 두카트에서 14,000 두카트로 늘리는 조건으로 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집권하는 걸 용인하기로 했다. 1526년 8월 29일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완패하고 러요시 2세가 전사한 뒤 헝가리 왕국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라두 5세는 장남이자 상속자인 블라드를 코스탄티니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1528년 말, 드라쿨레슈티 가문의 전통적인 지지자인 보니치 네그루와 포스텔닉 드라간이 이끄는 보야르들은 라두 5세가 크라이오베스쿠 가문과 너무 밀접하게 의존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정변을 계획했다. 1529년 1월 2일, 그는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램니쿠 발체아 인근의 체타수이아 교회로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아들 블라드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목이 잘린 시체는 이틀 후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머리는 파디샤에게 복종하겠다는 표시로 코스탄티니예에 보내졌다. 이후 바사라브 6세가 세워졌다가 한 달 만에 축출되었고, 블라디슬라프 3세의 아들인 모이세가 새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보이카(? ~ 1525): 부차니 출신의 보니치 블라이쿠의 딸.
- 블라드: 1529년 1월 2일에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다.
- 라두 8세: 왈라키아 보이보드.
- 앙카: 마르기네니 출신의 보야르 우드리슈테의 부인.
- 룩산드라: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딸. 라두 5세가 살해된 뒤 라두 7세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