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57년 12월 24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54년 3월 ~ 1557년 12월 2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라두 7세 어머니: 스타나 | |
배우자 | 보이카 | ||
자녀 | 페트루 2세, 미하이 2세?, 빈틸라?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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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0대 보이보드.2. 생애
라두 7세와 스타나의 아들로, 1545년 3월 아버지와 계모 룩산드라 및 이복형제들이 이집트로 끌려갔을 때 함께 가지 않았다. 1554년 2월 28일 몰다비아 공국의 공 알렉산드루 4세가 미르체아 5세를 축출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미르체아 5세와는 달리 보야르들을 해치지 않고 평화롭게 다스렸기에 '선한 자(cel Bun)'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556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지그문트 1세의 지원하에 트란실바니아 공 직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왈라키아군을 이끌고 서포여이에게 가담해, 그가 무사히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복위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원정 도중 중병에 걸린 그는 람닉으로 이송되었고, 1557년 12월 24일에 사망했다. 사후 딜루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미르체아 5세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3. 가족
- 보이카: 슬라티오아라의 보야르 가문 출신으로 전해진다.
- 페트루 2세(1556 ~ 1590): 왈라키아 보이보드.
- 사생아
- 미하이 2세(1558 ~ 1601)?: 미하이 2세 본인은 미하이 2세가 파트라스쿠의 사생아이자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인 1558년 초에 태어난 유복자라고 주장했고 루마니아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지만,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총리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를 비롯한 현대의 여러 루마니아 역사가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며 미하이 2세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파트라스쿠를 아버지로 내세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 빈틸라(? ~ 1574): 1574년 4월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를 제치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지만 그해 5월에 알렉산드루 2세의 반격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파르타스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