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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반 시슈만 (영어: Ivan Shishman, 불가리아어: Иван Шишман) |
출생 | 1350년 또는 1351년 |
사망 | 1395년 6월 3일 |
직위 |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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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23-1대 차르. 수도 타르노보와 불가리아 중부 일대에서 차르로 군림하였으나, 비딘 및 불가리아 북부를 장악한 이복형 이반 스라치미르와 도브루자 및 불가리아 남동부를 장악한 드보르티차와 반목하다가 오스만 술탄국에 무너졌다. 그 후 오스만 술탄국의 봉신으로서 연명하다가 바예지트 1세에게 처형당했다.2. 생애
1350년 또는 1351년, 이반 알렉산더르와 유대인 출신인 테오도라 황후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동생으로 이반 아센 5세가 있었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1356년 이반 시슈만을 공동 차르로 선임하였고, 1359년에 이반 아센 5세를 공동 차르로 삼았다. 그러자 알렉산더르의 첫번째 황후인 왈라키아의 테오도라의 살아남은 아들인 이반 스라치미르가 반발했다. 당시 비딘의 데스포티스였던 그는 비딘에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벌이는 등 노골적으로 반항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더르는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를 가하지 않고 방치했다. 이로 인해 불가리아 내부에 분열의 조짐이 일었다.1371년 2월 17일 부친이 사망한 뒤, 타르노보에서 새 차르로 즉위했다. 그러나 비딘의 데스포티스 이반 스라치미르는 북부 불가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차르를 칭했고, 도브루차의 데스포티스 도브로티차는 다뉴브 강 삼각주와 에미네 곶 사이의 해안지대 등지를 장악하고 타르노보 정부에 복종하지 않았다. 시슈만은 북쪽과 남쪽의 황위 경쟁자들에 둘러싸여 행동의 제약을 심하게 받았고,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오스만 베이국의 다가올 침략에 제대로 맞설 여력을 갖추지 못 했다. 1371년 9월 26일 마리차강 전투에서 세르비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무라트 1세는 중앙 마케도니아와 동부 마케도니아 일대를 확보했다. 그 후 불가리아로 군대를 보내 트라키아, 로토피 산맥, 코스테네츠, 이흐티만, 사모코프를 정복하였고, 시슈만은 불가리아 북부의 발칸 산맥 후방으로 도주했다.
시슈만은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1373년 무라트 1세의 봉신을 자처하며 여동생인 케라 타마라를 무라트 1세의 하렘에 보내야 했다. 이후 투르크군은 침략을 이어가 툰자 강을 따라 얌볼까지 이르렀고, 동로마 제국의 흑해 연안 도시를 공략했다. 1382년, 오스만 베이국은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재침했다. 그리스 출신의 라라 사힌이 이끄는 투르크군은 소피아를 수년간 포위한 끝에 1385년 함락하였다. 이로써 시슈만은 발칸 산맥 남쪽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렸다. 그는 오스만 술탄국과 감히 맞설 엄두는 내지 못하고, 1384년에서 1386년 사이에 왈라키아 공작 단 1세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단 1세가 1386년 9월 23일 독살되었다는 기록은 전해진다.
1387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연합군이 플로크니크 전투에서 투르크군을 격파하자, 시슈만은 즉시 무라트 1세에 대한 봉신 관계를 철회했다. 1388년 무라트 1세가 세르비아를 침공했을 때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무라트 1세는 별동대를 파견해 응징하게 하였고, 투르크군은 프레슬라프, 슈먼, 플리스카 등지를 장악하였다. 시슈만은 다뉴브 강변에 있는 니코폴리스 요새로 피신한 뒤 사절을 무라트 1세에게 보내 다뉴브 강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인 실리스트라를 넘길 테니 봉신으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리스트라를 자발적으로 넘기길 거부하고, 세르비아가 구원군을 오기를 기다렸다. 무라트 1세는 격노하여 군대를 재차 파견해 니코폴리스 요새를 포위했다.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그는 결국 실리스트라 외에도 다른 요새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봉신 관게를 맺었다.
1389년 6월 15일 무라트 1세가 1차 코소보 전투 승리 직후 암살당했다. 새 술탄 바예지트 1세는 수년간 잠자코 있다가 1393년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로 쳐들어왔다. 시슈만은 급히 니코폴리스 요새로 피신하였고, 수도 타르노보는 불가리아 총대주교 에우타미오스의 지휘하에 3개월간 농성전을 벌였으나 1393년 7월 17일 함락되었다. 시슈만은 다시 술탄에게 복종하였고, 니코폴리스의 총독으로서 2년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비밀리에 오스만 술탄국에 맞서는 왈라키아를 돕다가 발각당했고, 1395년 6월 3일 니코폴리스가 투르크군에게 함락된 뒤 바예지트 1세의 특명으로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