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3 23:27:58

아인 잘루트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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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영향

1. 개요

영어: Ain Jalut, 아랍어: عين جالوت, 히브리어: חרוד

1260년 9월 3일,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뒤 중동의 서남쪽 끝까지 도달한 몽골 제국군이 마침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남동부 제즈리엘 계곡에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군이 훌라구의 부하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을 패퇴시킨 역사적인 전투이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꽤 중요한 동네로 '잘루트'는 골리앗의 아랍어로 이곳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전해지고, 이 근처에 기드온의 샘물이 있다고도 전해져서 이스라엘에서도 나름 기념시되는 장소다.

역사적으로 이 전투는 몽골 제국군의 세계정복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것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여겨진다.[1] 이전에도 몽골군이 패했던 전투는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설욕전을 벌여 정복을 완수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 전투 이후 몽골 제국은 분열되어 더 이상 대규모 원정군을 꾸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몽골은 끝까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지 못했다. 이 전투 이후 훌라구가 페르시아에 세운 일 칸국의 후손들이 여러 번 원정을 오기도 했지만#1#2, 서기 1300년, 수개월간 일시적으로 시리아와 갈릴리 일부를 재정복한 것 이외에는#3 맘루크군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파일:external/weaponsandwarfare.files.wordpress.com/abd355d70e44ae2d6b4edf6793ed679f.jpg
몽골 중기병과 싸우는 맘루크 중기병

2. 배경

몽케 칸은 1251년 몽골 제국의 4대 대칸으로 즉위한 이후 세계정복 사업을 재개했다. 동부의 남송 전선 사령관에 자신의 동생 쿠빌라이를 임명하는 동시에, 중동 방면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할 서아시아 원정군의 지휘관으로는 또 다른 동생인 훌라구를 임명했다.

서아시아 원정군을 구성하는데[2] 5년을 쓴 훌라구는 1256년 페르시아에 마련된 본진을 떠나 원정을 떠났다. 훌라구는 아사신파의 요새 알라무트를 함락시켜 그들을 몰살한 뒤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아바스 왕조까지 집어 삼켰다. 그럼에도 훌라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캅카스 지역을 거쳐 시리아계 아이유브 왕조까지 멸망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몽골군의 진로에 있던 다른 나라들은 몽골에게 국권을 넘기고 그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훌라구는 이제 남쪽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지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상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변고가 발생했으니, 바로 1259년 몽케 칸이 남송 원정 중에 사천 조어성 전투를 치르다가 병에 걸려 급사했던 것. 이 소식을 듣자마자 훌라구는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회군했다. 이 때 훌라구는 튀르크계 기독교 장군인 키트부카 노얀에게 1~2 투멘(1만~2만명)의 병력을 주어 시리아에 남도록 했다. 훌라구가 떠난 뒤 키트부카는 시리아의 저항군을 무찌르고 팔레스타인을 지나 남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편, 당시 이슬람 세계의 정세는 아이유브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 레바논-시리아, 이라크 등지로 분열되어 있었다. 살라딘의 치세 동안 아이유브 왕조는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에 걸친 강대한 이슬람 국가를 이룩했지만, 1193년 살라딘이 죽을 무렵 아이유브 왕조는 분권화되었고, 반봉건적 성격의 가문 연합체로 변모했다. 이집트에서는 1250년 맘루크가 권력을 승계하여 술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맘루크(노예병)는 아이유브 왕조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1240년 당시 군주였던 쌀리흐 아이유브가 흔들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맘루크의 권한을 강화시켜 사병으로 삼았다. 게다가 1249년 루이 9세의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면서 맘루크의 정치적 권한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0년 5월 2일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 '투란 샤'가 암살당하고 맘루크들이 이집트에서 정권을 잡게 된다.

몽골군이 서아시아에 쳐들어오자, 카이로의 맘루크계 술탄 쿠투즈는 몽골에 대한 저항을 천명하며 세력을 모았다. 아인 잘루트 전투에 참여한 맘루크들은 튀르크, 체르케스계 출신으로 뛰어난 기병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몽골의 스텝 전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1260년 훌라구는 카이로의 쿠투즈에게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과 서의 왕중의 왕인 대칸으로부터, 우리의 칼을 도망쳐 떠나간 맘루크의 쿠투즈에게.[3] 너는 다른 나라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야 하며 우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는 우리가 어떻게 광대한 제국들을 정복하고, 더렵혀지고 무질서한 세상을 정화하였는지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너는 우리 군대의 위용을 피해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대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어떤 길을 사용해 너는 우리를 피할 것인가? 우리의 말들은 빠르고, 우리의 화살은 날카로우며, 우리의 검은 낙뢰와도 같고, 우리의 심장은 산과도 같이 단단하며, 우리의 병사는 모래알보다도 무수하다. 요새는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어떠한 무기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너희의 사제는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눈물이나 비탄에 의해 감동받아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우리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것만이 안전할 것이다. 전장의 불꽃이 치켜오르기 전에 답장을 서둘러라. 저항할 경우, 너는 가장 끔찍한 대참사에 고통받으리라. 우리는 너의 모스크를 산산이 박살내고, 너의 하나님의 나약함을 드러내며, 너의 아이들과 노인들을 한꺼번에 죽일 것이다. 지금 너는 우리의 진군을 막아서고 있는 유일한 적이다.

그러나 쿠투즈는 사자를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효시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예전에는 몽골군에게 이러면 사망 플래그였는데. 훌라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쿠투즈는 카이로에서 대규모 군대를 모아 팔레스타인으로 북진하였다. 몽골군과 조우하기 전에 쿠투즈는 이 지역의 맘루크 장군인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었다.[4]

이 때 몽골군은 이집트 맘루크를 상대하기 위해, 아크레에 거점을 두고 있던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의 잔당들과 함께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5]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이 동맹을 막았다. 또한 시돈의 율리안이 몽골군을 공격해서 키트부카의 손자 중 하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키트부카가 시돈을 약탈했다. 아크레의 영주들은 맘루크와 몽골 사이에서 중립을 선택했지만, 사실 오랜 적인 맘루크보다 몽골을 더욱 큰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인잘루트 전투 이전 십자군은 이집트 맘루크들이 자신의 영토를 통해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아크레의 근처에서 재보급하여 야영하도록 해주었다. 맘루크군은 수적으로도 몽골군보다 많았을 뿐 아니라[6] 보급과 지리 면에서도 유리하였다. 양군은 갈릴리 지방의 아인잘루트에서 격돌했다.

3. 전개

맘루크와 몽골군은 1260년 9월 3일 아인잘루트에서 조우하였다. 양쪽 군대는 모두 대략 2만명 정도였는데 맘루크쪽이 수적으로 더 우세하였다. 맘루크군은 이 지역의 지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유인 작전을 사용해 몽골군을 상대했다. 술탄 쿠투즈는 고지대의 나무 뒤에 주력 부대를 숨겨 놓았고, 바이바르스는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여러 시간동안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며 몽골군을 유인했다. 키트부카가 바이바르스를 따라잡아 총돌격을 감행했을 때 몽골군은 이미 다수의 맘루크군이 매복해있던 장소에 들어와 있었다. 몽골군이 고지대에 다다르자 숨어있던 맘루크군이 나타나 몽골군을 포위하였고, 화살을 날리는 동시에 맘루크 기병이 포위된 몽골군을 공격했다.

몽골군은 용맹하게 싸우며 포위를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몽골군은 맘루크군의 좌익을 거의 무너뜨렸고, 퇴로가 열린 듯 보였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쿠투즈는 투구를 벗어 병사들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하면서 "야! 나의 이슬람"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였다. 탈출하려던 몽골군은 쿠투즈의 돌격에 의해 저지되어 달아났으나 곧 재집결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전세는 이미 맘루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맘루크군은 지리적, 심리적 이점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났을 무렵 일부의 몽골군만 후퇴할 수 있었고 키트부카는 포로 신세가 되어 처형되었다. 몽골이 세계 정복을 시작한 이후 몽골군이 근접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맘루크 중기병은 사상 최초로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폭발성 핸드 캐논(아랍어로 미드파 مدفع)이 사용된 최초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 맘루크군은 몽골군의 말과 기병을 놀라게 하고 몽골군의 전열을 흩어놓기 위해 미드파를 사용하였다.

4. 영향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의 총독이 되어 자립하려고 하였으나 술탄 쿠투즈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바이바르스는 아미르들을 부추겨 카이로로 복귀하는 길에 쿠투즈를 암살하고는 자신이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 바이바르스의 후계자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남은 땅을 점령하고 1291년 십자군을 쫓아냈다. 맘루크군은 아인잘루트 이후 1년도 지나기 전에 제 1차 홈스 전투에서 또 몽골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시리아 밖으로 완전히 몰아냈다.

훌라구는 아인잘루트의 패전을 설욕하고 싶었지만, 병력 손실이 상당했고,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킵차크 칸국과 내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보낼 수 없었다. 이정도 숫자가 박살난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보병 2만명이 날아간 토이토부르크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다. 참고로 기병은 보병에 비해 상당히 훈련이 어렵고 귀하다. 훌라구가 이슬람교의 정신적 지주인 아바스 칼리파를 공격하고 죽인 덕분에 이슬람교를 믿던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 칸[7]이 훌라구에게 빡쳐 있었다.[8] 몽골 제국의 대칸 계승 내전이 끝나가고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자 훌라구는 1262년 영지로 돌아와서 맘루크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하지만 그 때 베르케가 북쪽에서 내려와 약탈을 해대자 훌라구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북쪽으로 군대를 몰아갈 수 밖에 없었다. 훌라구는 베르케를 박살내기 위해 캅카스를 통해 킵차크 칸국에 진입했지만 오히려 여러 번 털렸다.[9] 훌라구는 맘루크 쪽으로는 2개 투멘(약 2만명) 정도의 병력 이상을 보낼 수 없었고 결국 격퇴되었다. 훌라구는 1265년 죽고 그의 아들인 아바카 칸이 일 칸국을 계승했다.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크부카와 내전을 벌여 결국 대칸에 올랐지만 이후 제국의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잃었으며, 중세 국가치고는 지나치게 넓어진 몽골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의 힘을 결집해 서방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없어졌다. 일 칸국의 역대 군주들 중에도 가잔 칸(제위 기간 1295 ~ 1304)만이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에 여러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으나, 군대의 규모도 많아야 3만명 전후에 불과해 시리아 알레포 이남 지역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무슬림이 몽골 제국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처음으로 이들을 꺾은 전투로써 매우 명성이 높다[10]. 한편 집사(集史) 등 몽골제국 측의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수치스러운 패배여서 그런지 겨우 국지전 취급을 했다. 몽골측 입장에선 훌라구의 회군으로 인해 시리아에 남아있던 일부의 병력만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고려 원정에 동원된 군대가 도합 3만인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병력으로 치러진 전투는 절대 국지전이 아니다.

예전엔 아인잘루트 전투의 패배로 인해 몽골군이 더이상 서방 정복을 할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2015년 3월 한국어 위키피디아에도 이런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진정한 이유는 동쪽에서 일어난 몽케 칸의 죽음과 제국의 분열임이 학계의 정설이다. 다만 아인잘루트에서의 손실은 상당한 치명타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에 출판된 책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전투 이후 몽골군은 시리아레바논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렸고, 맘루크 왕조가 이 지역들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몽골군의 서방 원정은 이 전투 이후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11]

[1] 다만 실제로는 베트남에게 3번 털린 이후부터 확장이 전면 중단된다.[2] 훌라구의 원정군은 몽골계 뿐만 아니라 튀르크계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프랑크족 병사도 합류했다.[3] 쿠투즈는 원래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 호라즘 제국 출신으로 몽골군한테 포로로 사로잡혔다가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가서 맘루크 병사가 된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쿠투즈한테 아인잘루트 전투는 복수전이었던 셈.[4] 사족으로 바이바르스는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쿠투즈를 통수 쳐 살해한 후 자신이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5] 평등한 동맹이 아니라 몽골에게 종속되는 수준의 동맹이었다.[6]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7] 훌라구의 사촌이다.[8] 참고로 훌라구는 특정 종교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관대했다.[9] 이 때 훌라구의 일 칸국과 베르케의 킵차크 칸국 사이의 내전은 몽골 제국이 분열되는 신호탄이 되었다.[10] 그러나 맘루크가 몽골 제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례는 이미 1221년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이 몽골군 3만 기병을 격파한 파르완 전투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11] 물론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이란에 정착한 몽골계 일칸국에서 집요하게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으나 대부분 패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