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6:46:04

우량카다이

1. 개요2. 생애
2.1. 유럽 원정 종군2.2. 대리국 원정2.3. 남송 원정
3. 평가

1. 개요

兀良合台, 1201~1272.

몽골 제국의 장수. 몽골 올량합 부족 출신으로, 수부타이의 아들이자 아술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2. 생애

2.1. 유럽 원정 종군

1233년 구유크 칸과 함께 포선만노의 동진국을 점령했다. 이후에는 1235년 왕발도와 함께 친차, 올루스, 아조르, 보렐의 여러 부대를 정벌하고, 분병한 뒤 바이탈과 함께 보렐(폴란드), 주메스(독일) 등을 공격하여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함락시키고 리그니츠 전투에서 보데 연합군을 대파한다.

1248년, 구유크 칸이 죽고 칸의 자리가 3년 동안 비어있었는데, 우량카다이는 왕발도의 주장에 동조하여 몽케를 대칸으로 추대했다.

2.2. 대리국 원정

1252년 몽케의 명을 받들어 쿠빌라이의 영군 원정을 보좌하여 남서쪽으로 돌아서 남송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듬해 가을의 군대는 세 갈래로 나뉘었고, 올량합태는 서로군을 이끌고 토번을 거쳐 금사강을 건너 차간과 함께 들어가 대리에 진입하여 쿠빌라이가 이끄는 중로군과 합류하여 대리성을 점령한다. 쿠빌라이가 북으로 돌아온 후, 운남에 남아 선천[1] 등지를 점령하여 대리국 군주 단흥지를 생포한다.

1253년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로 하여금 운남성 우만, 백만, 귀만 등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우량카다이를 그 곳의 총독으로 삼는다.

1253년 몽골군은 윈난 국경으로 들어가 부마와 여러의 두 부대로 강등되어 진사강에 이르렀고 올량합대는 군사를 나누어 백만 족의 여러 성채를 공격하고, 군대를 이끌고 용수관을 취하여 쿠빌라이와 합류하여 대리성을 함락한다. 이듬해 쿠빌라이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와 올량합태를 남겨두고 대리국 경내를 정복한다.

우량카다이는 동진하여 압적(지금의 곤명시)을 점령하고 이곳으로 도주한 대리국 국왕 단흥지를 생포한다.

그의 아들 아술은 사천의 라나사를 점령했다. 운남에 침입한 몽골군은 우량카다이의 지휘하에 2년 전쟁 끝에 대리국의 5성, 8부, 4군을 평정하고 우만, 백만 등 37개 부대를 배치한다.

우량카다이는 1256년 몽케의 명을 받아 소부를 이끌고 오몽[2]을 떠나 노강으로 향하여 수라만 3성(쓰촨 경내)을 무너뜨리고 마호강에서 남송의 장도통이 이끄는 3만 군사를 대파하고 200척의 배를 탈취했지만 곧 사준에게 패배하고 남쪽으로 돌아간다.

1257년 몽케는 우량카다이의 제안에 따라 운남에 군과 현을 설치했다. 그리고 10월에 교지를 공격하여 아들 아주와 함께 베트남의 쩐 왕조를 침공해 수도 탕롱을 점령했으나 쩐 왕조의 청야작전에 휘말려 빈레응우엔(Bình Lệ Nguyên)[3]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2.3. 남송 원정

1258년, 몽케가 남송을 원정할 때 우량카다이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남송을 공격하게 한다.

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우량카다이가 몽골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광서에 입성하여, 노창관에서 6만 명의 남송군을 대파하고, 귀주, 상주, 정강부에 진입하나 이증백에게 3차례나 가로막힌다. 그러나 우량카다이는 이증백의 군대를 우회하여 호남 지역으로 북상하였고, 진주, 원주를 연달아 함락하여 다음 해 정월에 담주[4]성 아래에 도착한다. 그러나 담주에서는 상사벽을 위시한 군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가로막힌다.

쿠빌라이가 악주[5]를 포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쿠빌라이가 파견한 지원병과[6] 합류하여 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한다.

1260년 4월 쿠빌라이가 즉위하자 우량카다이는 상도에 이르러 병권을 해제당한다.

1272년 나이 72세로 사망한다. 하남왕(河南王)에 추봉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는다.

3. 평가

의심스럽고 꺼림칙하다.
《신원사·올량합태전》[7]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5대 원로였고 아버지 수부타이 못지않게 많은 전선에서 활약하였지만, 몽케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쿠빌라이의 신뢰를 받지 못하였다. 북상 이후 쿠빌라이가 그의 병권을 해제했고,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평정했을 때, 우량카다이가 얻은 임무는 오직 경사에 남아 수도를 지킨 것이었다.


[1] 지금의 운남성 곤명시[2] 운남성 조통[3] 오늘날 베트남의 빈수옌현(Bình Xuyên)으로 과거에는 후한 13주교주의 교지군(交趾郡) 봉계현(封谿縣)에 속했다.[4] 호남성 장사시[5]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 무창구[6] 쿠빌라이는 발도아를 지원병으로 보냈다.[7] 신원사에서 쿠빌라이가 그에게 내린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