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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8대 공작 야로미르 Jaromír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야로미르 (Jaromír) |
출생 | 975년경 | |
사망 | 1035년 11월 4일 (향년 60세)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004년 ~ 1012년 |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033년 ~ 1034년(복위) | ||
형제 | 볼레슬라프 3세, 바츨라프, 올드르지흐 | |
아버지 | 볼레슬라프 2세 | |
어머니 | 엠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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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8대 공작.2. 행적
975년경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와 엠마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볼레슬라프 3세가 있었고, 동생으로 요절한 바츨라프와 올드르지흐가 있었다. 999년 보헤미아 공작에 오른 볼레슬라프 3세는 형제들을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했다. 1001년, 그는 야로미르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거세했다. 이후 올드르지흐 마저 볼레슬라프 3세에게 살해될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올드르지흐 및 어머니 엠마와 함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망명했다.1002년, 보헤미아 유력 귀족인 브르쇼프 가문이 폭정을 자행하는 공작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볼레슬라프 3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노르가우 변경백인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에게 망명했다. 이후 블라디보이가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원으로 보헤미아 공작에 올랐지만, 1003년 1월에 사망했다. 이후 볼레슬라프 3세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곧 이를 뒤집고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사들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그가 폭정을 일삼아 보헤미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뒤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두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프라하를 장악한 뒤 공작을 맡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독일왕이 된 하인리히 2세에게 야로미르를 공작으로 모시고 싶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004년 가을, 하인리히 2세가 파견한 독일군이 폴란드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냈고, 야로미르는 보헤미아 공작에 등극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005년 하인리히 2세가 폴란드를 공격했을 때 이에 호응해 부디신을 공략했다. 그러나 1007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반격해 부디신을 탈환했다.
1012년, 올드르지흐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미르를 몰아내고 보헤미아 공작위에 올랐다. 그는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폴란드로 피신했고,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피신한 뒤 위트레흐트에 정착했다. 그 후 21년간 그곳에 지내던 그는 1033년 올드르지흐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에 의해 폐위된 뒤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1034년 봄, 올드르지흐가 콘라트 2세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복위시키는 대신 보헤미아를 야로미르와 함께 나눠가지고, 모라비아 일대는 올드르지흐의 아들인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올드르지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지배권을 형과 아들과 함께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야로미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감옥에 갇히게 했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아버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
1034년 11월 9일 올드르지흐가 갑자기 사망했다. 거세된 데다 눈까지 멀었던 야로미르는 공작위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공작위를 독차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강력한 권세를 누리면서 형제를 해친 브르쇼프 가문을 향상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1035년 11월 4일, 그는 브르쇼프 가문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그는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던 중 암살자가 뒤에서 찌른 날카로운 창에 의해 배가 뚫려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