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7 20:15:10

볼레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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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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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5대 공작
볼레슬라프 1세
Boleslav I
파일:볼레슬라프 1세.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볼레슬라프 1세
(Boleslav I)
별명 잔혹한 자
(Ukrutný)
출생 미상
사망 967년 또는 972년 7월 15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935년 ~ 967년 또는 972년
자녀 볼레슬라프 2세, 두브라우카, 믈라다, 스트라치크바스
아내 비아고타?
형제 바츨라프 1세, 스피티흐네프, 프리비슬라바 체스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 3명
아버지 브라티슬라프 1세
어머니 스토도르의 드라호미라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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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5대 공작.

2. 행적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1세와 스토도르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바츨라프 1세, 스피티흐네프, 프리비슬라바 체스카 등이 있었다. 출생 년도는 분명하지 않다. 체코와 주부 유럽의 역사 연구가인 마리 블라호바(Marie Bláhová, 1944 ~ )는 1999년에 발간한 <체코 왕실 땅의 위대한 역사>에서 그가 912년에서 914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브라티슬라프 바니체크(Vratislav Vaníček, 1947 ~ )는 908년 또는 912년에 출생했다고 여겼으며, 페트르 차르바트(Petr Charvát, 1949 ~ 2023)는 910년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전설>(이하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놘 형 바츨라프와 함께 할머니 루드밀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921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형 바츨라프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다. 19세기 체코 역사가 바츨라프 노보트니(Václav Novotný, 1869 ~ 1932)는 볼레스와프 1세가 이 시기에 프쇼바니의 공작으로 임명되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그는 이때 스타라 볼레슬라프 요새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만, 다수의 역사가들은 그 요새는 스피티흐네프 1세 치세 때 이미 건설되었으며, 볼레슬라프 1세는 단지 성의 방어력을 보강하는 조치만 내렸을 거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볼레슬라프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축일인 9월 27일에 형 바츨라프를 볼레슬라프 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다음날 아침, 바츨라프 1세가 아침 예배를 하러 교회에 갔다가 귀가하던 중 볼레슬라프와 마주치자 덕담을 건넸다.
"네가 어제 우리를 잘 섬겼으니, 신께서 너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볼레슬라프가 외쳤다.
"오늘 나는 당신을 이렇게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검을 빼들어 형의 머리를 가격했다. 바츨라프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형제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볼레슬라프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것을 빼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이 뒤이어 바츨라프를 살해했다. 10세기 중반에 고대 슬라브어로 작성된 <성 바츨라프의 생애>에서는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바츨라프와 볼레스와프 형제가 아침에 미사를 드리러 가던 중 길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볼레슬라프가 검을 빼들어 바츨라프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츨라프가 이를 막고 볼레슬라프를 쓰러뜨렸다. 이때 볼레슬라프의 측근인 투자(Tuža)가 달려들어 바츨라프의 팔을 때렸다. 바츨라프는 교회에 숨기 위해 달려갔지만, 교회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뒤따라 달려온 볼레슬라프의 부하들이 그를 검으로 난자해 살해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귀족 므스티니(Mstiny)를 포함해 바츨라프와 함께 있던 인사들 역시 이날 피살당했으며,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은 곧장 프라하로 달려간 뒤 바츨라프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산 채로 블타바 강 깊은 곳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이때가 벌어진 해는 문헌 기록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60년대까지는 929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 역사 기록들과의 대조를 통해 935년에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살인 동기 역시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볼레슬라프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형제를 살해했다고 기술되었고, 몇몇 학자들은 바츨라프 1세가 막대한 공물을 독일 왕에게 바치는 굴욕을 감수한 것에 대해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볼레슬라프를 충동질했으리라 추정한다.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를 기독교화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인 것에 대한 이교도들의 반발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그가 형을 살해하고 보헤미아 공작위에 올랐을 무렵, 독일 왕국의 국왕 하인리히 1세뇌졸중에 시달리고 있었다. 936년 7월 2일, 하인리히 1세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아들 오토 1세가 뒤를 이었다. 이에 지난날 하인리히 1세의 원정으로 복속되었던 엘베 강 유역 슬라브 부족인 루티키인과 오보르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역시 이에 호응해 지난날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끊고 하인리히 1세에게 귀부했던 이웃 공국을 치기로 했다. 이 이웃 공국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체로 믈라다 볼레슬라프 인근의 자브루샤니 언덕 요새 또는 흘로우메크 언덕 요새일 거라고 추정한다.

오토 1세는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 반란 진압에 직접 착수하는 한편, 부하들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메르제부르크에서 아식(Asic)이 이끄는 군대가 출발했고, 튀링겐에서 또다른 군대가 출격했다. 메르제부르크에서 출발한 군대에 소속된 장병들은 범죄를 저지른 뒤 처벌 대신 군복무를 택한 자들이었다고 한다. 볼레슬라프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나눠 각 군대와 상대하기로 했다. 중세 작센 연대기 작가 코버리의 비투간트에 따르면, 튀링겐군은 보헤미아군이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오자 전투를 회피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식이 이끄는 메르제부르크군은 보헤미아군과의 첫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약탈에 전념하다가 볼레스와프 1세가 군대를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하자 크게 패했고, 아식은 전사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독일군을 격파한 뒤 이웃 공작의 성채를 완전히 허물고 새 성채를 세운 뒤 측근을 그곳의 영주로 삼았다.

938년, 볼레슬라프 1세는 볼레스와프 마을에 묻혀 있던 형의 유해를 프라하로 옮겨서 성 비투스 성당에 안장했다. 10~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아말피 대주교였던 로렌티우스가 라틴어로 집필한 연대기 <성 바츨라프의 수난>에 따르면, 볼레슬라프 1세는 바츨라프 1세의 유해가 담긴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종일 회개했다고 한다. 반면 코스마스는 바츨라프의 무덤에서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시신을 성 비투스 성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가 형의 유해를 옮긴 것에 대해 형을 죽인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설과 바츨라프 1세를 추앙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를 상대로 14년간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지지만, 국경 지대에서 사소한 전투가 벌어졌을 뿐 이렇다할 큰 충돌이 벌어지진 않은 듯하다. 그러다 모든 반란을 제압한 오토 1세가 950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볼레슬라프 1세의 아들이 있던 성을 포위했지만, 병사들이 약탈하려 들자 이를 막느라 공성전을 미뤄야 했다. 볼레슬라프 1세는 아들을 구하려 했지만 적군의 숫자가 대단히 많은 걸 확인하고 오토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보헤미아 감독을 맡겼다.

그후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와 동맹을 맺었고, 955년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 1,000명의 보헤미아 정예병을 파견해 오토를 도왔다. 960년대에 중부 유럽을 여행한 무슬림 유대인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Ibrahim Ibn yaqub)는 자신이 볼레슬라프 제국의 국경에서 프라하까지 이르는 데 3주가 걸렸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 고고학자 미할 루토프스키(Michal Lutovský, 1961 ~)는 이를 근거로 볼레슬라프 1세가 키예프 루스와 접하는 부크강에서 스티르강 및 산 강까지의 영토를 통제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모라비아 남부 지역도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거나 간접 지배를 받았으며, 크라쿠프도 950년 이전에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거라고 추정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설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지만, 볼레슬라프 1세 치세 때 보헤미아 공국이 영역을 상당히 확장했다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한편, 볼레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최초로 주조했다. 이 시대에 주조된 데나리온의 지름은 21mm로 순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약 1g이었다. 데나리온에는 새, 칼, 십자가 또는 그리스도의 초상 등 기독교의 고전적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이 동전은 발트해 연안, 포메른, 심지어 스웨덴의 고틀란드까지 출토될 정도로, 중부와 동부 유럽에 널리 쓰였다.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데나르'라고 지칭하면서, 실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쿠브는 무역은 대부분은 물물교환으로 이뤄졌고, 오직 가장 높은 사회 계층만이 데나리온으로 거래했다고 덧붙였다.

965년, 볼레슬라프 1세는 자신의 딸 두브라우카를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결혼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967년, 그는 2개의 기병 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군대를 미에슈코 1세에게 지원해, 미에슈코 1세가 슬라브족의 지도자 비흐만 2세를 패사시키고 오데른 강 어귀를 장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966년에 딸 믈라다를 로마로 파견해 교황 요한 13세로부터 프라하 주교구를 바이에른 대주교구로부터 독립시키고 보헤미아에 최초의 수녀원을 설립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최초의 수녀원은 프라하의 성 조지 대성당에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녀원이었고, 첫 수녀원장은 믈라다였다.

볼레슬라프 1세는 7월 15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사망년도는 불확실하다. 코스마스는 그가 967년에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코버리의 비투간트가 967년에 미에슈코 1세에 대해 기술한 대목에서 "볼레슬라프 1세와 같은 세대"라고 밝힌 것을 볼 때 967년에 사망하지 않았고, 972년에 사망했다는 일부 연대기들의 기술이 좀더 그럴듯 하다고 본다. 그가 묻힌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3. 가족

볼레슬라프 1세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의 시대에 주조된 여러 동전에서 언급된 비아고타(Biagota)가 그의 아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할 루토프스키는 비아고타가 게르만족 또는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인이었을 거라 추정했다. 그는 생애 동안 여러 아들과 딸을 낳았다.
  • 볼레슬라프 2세(942 ~ 999): 보헤미아 공작
  • 두브라우카(953 ~ 977):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의 아내.
  • 믈라다(? ~ 994): 프라하 성 조지 대성당 수녀원장.
  • 스트라치크바스(? ~ 996 이후): 성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