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데 전쟁 Guerre de Vendée War in the Vendée | |
기간 | |
1793년 3월 3일 ~ 1796년 7월 16일 | |
장소 | |
프랑스 방데, 루아르앵페리외르, 되세브르, 멘에루아르 | |
원인 | |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에 반대하는 서부 지역의 가톨릭 신자 및 왕당파의 연합 봉기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프랑스 제1공화국 | 방데 왕립군 |
지휘관 | |
루이 라자르 오슈 장바티스트 카리에 장바티스트 클레베르 에마뉘엘 그루시 토마알렉상드르 뒤마 | 자크 카텔리노 루이 드 엘베 |
전력 | |
150,000명 | 80,000명 |
결과 | |
봉기 진압 | |
영향 | |
방데 지방의 정치적 소외 | |
피해규모 | |
30,000명 사망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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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노사이드를 국가의 통합적 계획에 의한 집단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학살이라고 정의할 경우,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이렇게 확대하면 사실상 모든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속하게 되어 제노사이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종족의 전면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학살’로 한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인의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다. 방데 학살이 제노사이드인가를 판별하는 논쟁은, 레날 세셰르와 장 클레망 마르탱의 논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데 전쟁에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프랑스 혁명은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 구체제의 폭력보다 더 가혹하고 야만적인 폭력이 ‘자유-평등-형제애’를 외친 혁명가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은, 한나 아렌트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교하며 평가했듯이, 실패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응종 「방데전쟁의 폭력성-학살인가 제노사이드인가?」 군사(軍史) 제97호(2015.12), 421~422쪽
1793년 3월 3일부터 1796년 7월 16일까지 프랑스 제1공화국에 저항해 일어난 봉기.김응종 「방데전쟁의 폭력성-학살인가 제노사이드인가?」 군사(軍史) 제97호(2015.12), 421~422쪽
빨간색 지역이 방데.
봉기의 시발점이자 중심지가 방데였기 때문에 방데 전쟁, 방데 반란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사실 방데 주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은 참여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루아르앵페리외르(Loire-Inférieure)[1], 멘에루아르(Maine-et-Loire), 되세브르(Deux-Sévres), 방데(Vendée) 등 프랑스 서부에 존재하는 4개 주에 걸쳐 일어났다.
과거에는 방데 반란이라 불리며 반혁명, 반동적 반란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방데 전쟁이라는 중립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2. 전개
봉기군의 상징 성심(聖心, Sacred Heart)[2] |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정부는 서부 지역에 진압군 45,000여 명을 파견했다.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내 복수를 해 달라.
앙리 라로슈자클랭[3]이 방데 봉기 당시 "총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아달라"는 현지 농민들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했던 말로 알려져 있다. 라로슈자클랭은 이후 공화정부군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4]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요는 순식간에 서부 전역으로 퍼졌다. 행상인 출신 자크 카텔리노(Jacques Cathelineau)가 이끄는 15,000여 명의 봉기군이 방데의 주요 도시인 숄레를 장악했으며 이에 방데의 귀족 출신 왕당파 장교들이 가세했다. 스스로를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라고 칭한 이들은 정부군을 몰아내면서 서부 지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세력을 합치기 시작했다. 앙리 라로슈자클랭[3]이 방데 봉기 당시 "총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아달라"는 현지 농민들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했던 말로 알려져 있다. 라로슈자클랭은 이후 공화정부군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4]
농민군은 국왕의 색깔인 흰색 휘장을 둘렀기 때문에 백군(白軍)이라고 불렸고, 혁명군은 국민방위대의 복색인 청색을 따서 청군(靑軍)으로 불렸다. 백군은 앞에서 소개된 사진의 붉은색 심장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표식을 착용하기도 했다. 혁명정부와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휘장을 착용한 이들과 손에 무기를 든 모든 반란자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하고 진압에 나섰으나 3월 19일 샹토네, 22일 샬롱쉬르루아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심지어 이들 백군은 보카쥬(빽빽한 잡목림)라는 지역 특성 때문에 농민들이 전투 끝나면 다시 밭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또 전투 시작되면 나가 싸우는 등 불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다.
정부는 3월 23일부터 봉기에 대해 방데 및 인근 주의 전쟁(La guerre de vendée et des département circonvoisins)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며 방데, 루아르앵페리외르, 멘에루아르, 되세브르의 4개 주를 방데 군사지역(Vendée militaire)으로 지정하였다. 청군은 4월에 숄레 탈환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백군의 기세는 5월에 들어서면서 더욱 거세져 6월까지 지역 거점인 투아르, 퐁트네르콩테, 앙제, 소뮈르를 점령하는 등 승전을 거듭했고 방데를 넘어서 루아르 강 이남의 인근 주까지 세력을 크게 넓혔다. 이 시점에서 정부가 통제하고 있던 루아르 지방의 도시는 낭트와 레자블돌론 2개뿐이었다. 6월 29일 봉기군은 루아르 지방의 최대 도시이자 항구인 낭트 공략에 나섰으나 봉기군을 피해 낭트로 피난 온 공화파 시민들의 결사항전으로 전투에서 패하고 자크 카텔리노가 전사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7월 백군은 샤티옹, 비에 전투에서 또 다시 청군을 격파했다.
8월 1일 정부는 반격을 시작하며 장바티스트 카리에(Jean-Baptiste Carrier)에게 방데 일대의 초토화 작전을 통한 "평정"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방데인들에 대한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이었던 마인츠에서 병력을 대거 빼내 진압에 투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군의 세력은 여전히 왕성하였다. 루송에서는 1개월에 걸친 3회의 전투 끝에 청군이 승리하였으나 티포주, 몽테쥐 전투에서 패배해 백군에 붙잡힌 청군 포로들이 백군에 의해 참수당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을 경험한 새 진압군은 기존의 진압군과 차원을 달리했다. 백군은 10월 15일 트렝블레, 17일 숄레 전투에서 대패했고 살아남은 백군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지역의 봉기군과 합류해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백군 25,000여 명과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 10만 명은 루아르 강을 건너 목적지인 노르망디의 항구 도시 그랑빌로 이동했다. 이들은 11월 14일 그랑빌을 포위 공격했으나 그랑빌의 청군에 패하면서 '갈레른 회군'이 시작되었다. 회군 도중 수천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다시 남하하던 백군은 12월 12일 르망 전투에서 대패했다.
여기(르망)에서 방데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불가피했다. 우리가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을 데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역으로 피신하기 위해, 어느 길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채, 게다가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루아르 강의 좌안을 떠났을 때부터 우리가 이러한 끔찍한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내다볼 수 있었다. (방데군의) 장군들과 병사들이 받을 가장 아름다운 영광은 그것을 오랫동안 늦추었다는 것이다.
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의 회고록에서
잔존 세력은 루아르 강 남쪽으로 철수했으나 12월 23일 루아르 강 북쪽의 사브네에서 미처 도강하지 못한 백군이 따라잡혀 전멸당했으며 포로와 민간인 수천 명이 루아르 강에 산 채로 던져져 죽었다.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의 회고록에서
이로써 대규모 전투 세력으로서의 백군은 와해되었고, 이후 전투는 게릴라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794년 2월부터 혁명 정부는 방데 보복(Vendée-Vengé)이라는 "평정" 명령의 최종 단계를 집행해 '지옥종대(colonnes infernales)'를 파견하여 파괴와 학살을 가했고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집행했다. 1794년 1월부터 4월까지 방데에서는 50,000여 명이 지옥종대에게 살해당했고, 앙주에서는 15,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그 중 절반 이상이 처형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전투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정부군의 승리는 명확했고 마지막 백군 지도자 샤레트 드 라 콩트리(Charette de La Contrie)도 1796년 3월 26일 총살되었다. 이후 정부는 신앙의 자유 보장과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재산 피해를 일부 배상하는 등 유화책을 제시하였다.
1795년 7월 20일 펭티에브르 요새와 퀴베롱에 상륙했던 백군이 패배했고 1796년 7월 16일 방데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전되었다. 7월 30일에는 반란 지역들에 대한 봉쇄 조치가 해제되었다.[5]
3. 원인
3.1. 전통적 역사관: 반혁명
Anti-Révolution (Anti-Revolution)당대 혁명 정부는 서부 농민들의 봉기를 "조국과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으며 왕당파와 보수적 가톨릭 세력이 주도한 반혁명으로 간주했다.[6]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이 혁명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1848년 혁명으로 수립된 프랑스 제2공화국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3세가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에 충격을 받은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학자들도 농민들의 정치 성향에 대해 연구를 해 보며 농민들을 혁명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놓은 적은 있다. 그럼에도 상당기간 동안 방데 전쟁은 부각되지 않았는데 이는 부르봉파가 정치적으로 몰락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프랑스 혁명 이후로도 부르봉파가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1830년 혁명으로 실각한 이후 줄곧 야당 신세였고, 부르봉파에 대한 주 지지계층인 농민 계층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도 시류에 맞추어서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는 등의 흐름을 보였다. 또한 이 당시의 3대 왕당파 가운데 오를레앙파와 보나파르트파는 루이필리프 2세와 루이필리프 1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방데 전쟁이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또한 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방데에서 나폴레옹 3세가 79.4%를 득표하여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희석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7]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나폴레옹 3세가 쫓겨난 뒤에 치러진 1871년 총선에서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던 보수파들의 지지를 흡수해서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를 비롯한 왕당파가 과반을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제3공화정이 1공화정과 2공화정처럼 단명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지만, 왕당파들이 내부싸움을 하다가 지리멸렬하게 군소정파로 전락해 버렸고, 프랑스 제3공화국의 주류를 차지한 공화파들 입장에서는 방데 전쟁을 부각시켜 봐야 득이 될 것이 없으니 방데 전쟁에 대한 재조명 또한 늦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쥘 미슐레(Jules Michelet)를 비롯한 당대 학자들은 "순진한 서부의 농민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만과 음모에 놀아나 구체제 타파를 추구한 혁명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해석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 공화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의 규모를 1793년 3월 발생해 그 해 12월에 끝난 작은 내전으로 축소했는데 이는 초기 방데의 봉기만을 강조함으로써 1794년 이후 공화국 군대에 의해 벌어진 초토화 작전과 학살 등을 은폐한 것이었다.
"혁명에 거역한 방데"라는 국가적 기억의 형성은 방데 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방해했다. 국가기억 속의 방데 전쟁에서 방데 지역의 봉기는 농민들의 무지와 광신, 그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라고 치부되었다. 19세기 국가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공화주의자들은 체계화된 공교육 제도를 이용해 방데를 반혁명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했고 봉건적 질서와 절대 왕정을 혁파한 혁명에 대한 저항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방데인들의 외모와 풍습을 특정화해서 "공화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낙인찍었다.
'방데'란 용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공화국의 적, 망명귀족, 왕당파, 반란' 등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방데라는 단어가 반혁명과 반란의 이미지를 담게 되면서 자연히 방데는 반혁명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방데 주민들은 반혁명주의자들의 후손으로 낙인 찍혔다. 이런 낙인 속에서도 조르주 클레망소 같은 정치인처럼 주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오랜 낙인 속에서 방데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과 파괴는 무시당했다.
방데 전쟁의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 주민들은 국가적 무관심 속에서도 "방데 전쟁의 발발은 반혁명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방데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에 따른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 동안 이러한 민간기억들은 이미 권력을 독점한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3.2. 새로운 합의: 대항혁명
그들은 우리의 왕을 죽였다. 그들은 우리의 신부들을 몰아냈고,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팔았다. 돈은 어디 갔나? 그들이 모두 먹어치웠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몸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것을 갖지 못할 것이다!
방데 전쟁에 가담했던 한 농민의 절규[8]
1960년대 연구들은 방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연구를 비판하면서 방데 농민들을 "음모에 놀아난 무지한 반란군"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 및 그들과 동일시되었던 혁명정부에 자발적으로 저항한 능동적 행위자"로 간주했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방데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귀족,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사회구조적, 지리적, 경제적 요인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구조적 원인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통합이 전통적 농촌 세계에 가져온 충격과 이에 대항한 농민들의 자발적 대응 양상을 추적했고 이로써 한세기 넘게 방데 주민들을 억눌러온 번혁명주의자들이란 낙인이 점차 옅어질 수 있었다. 방데 전쟁에 가담했던 한 농민의 절규[8]
이후 1970~1980년대 연구가 계속되면서 혁명 당시 방데의 특수성이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방데를 비롯한 서부 지방은 봉건적 의무의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구체제의 압제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웠다. 지역 귀족들은 부재지주의 비중이 타지역보다 낮았고 이에 따라 지역 주민들과 좀 더 친밀할 수 있었다.[9] 또 가톨릭 교회가 단순히 종교적 단위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농촌 공동체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사제와 농민 신자들 간에도 결속력이 높았으며, 교회의 재산이 공동체의 부로 간주되었다.
상대적으로 영세한 지역이다 보니 먹고 살기 위해 귀족과 사제, 평민의 관계가 협력적이고 원만했다. 앞에서 언급한 마리의 첫 남편인 레스퀴르 후작은 방데 지역에서 '푸아투의 성인'이라고 칭송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마리 역시 생전 자신의 재산을 털어 방데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농민들을 돕는 일에 전념했고, 마리가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대부분은 빈민이었다.[10]
그렇다 보니 구체제의 압제와 수탈은 남의 동네 이야기였고, 혁명 정부에서는 방데의 사정도 모르고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면서 반발을 샀다.[11] 이러한 방데 지역의 특수성은 사제들을 반혁명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 수도원의 폐쇄 등에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곧 그러한 법을 제정한 혁명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국민의회는 1790년 9월에 이른바 성직자민사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e)을 통과시켰다. '성직자 공민 헌장'으로도 번역되는 이 법은 요약하면 프랑스 국내의 교구를 감축하고(150개→83개) 모든 사제는 교황으로부터의 임명이 아니라 선거위원회의 설치 규정에 따라 선출되며 일반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도록 하는 내용의 법령이었다.
사제서품은 교구장 주교의 권한이고, 교구 설정과 교구장 주교의 임명은 교황의 권한이다. 따라서 당시 프랑스의 대부분의 사제들이 이 헌장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거부했고, 선서한 주교는 7명밖에 되지 않았다.[12] 그러자 국민의회는 1790년 11월 27일, 그리고 12월 25일령으로, 선서를 거부한 사제들이 미사(성체성사)를 포함한 일곱 성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해 버렸다. 심지어 교황 비오 6세까지 나서서 1791년 3월 10일 회칙으로 성직자민사기본법을 비난하니,[13] 반혁명 세력으로서는 종교를 내세워 혁명을 뒤엎을 호재를 얻은, 그리고 국민의회로서는 자신들에게 불리할 명분 하나를 반동 세력에게 던져준 셈이었다.
또한 당시 선서를 거부한 거부사제 가운데에도 프랑스 대혁명 세력이 내건 교회 개혁 자체는[14] 찬성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인들 사이에는 혁명정부가 내건 법령에 거부를 표명한 사제들을 일종의 종교적 박해에도 꿋꿋이 버티며 본인의 소신과 양심을 지키려는 '순교자'로 인식하는 여론이 좀 있었다. 1791년 4월 21일과 5월 7일에 국민정부가 국내의 반발에 밀려 거부사제에 대한 관용 조처를 포고한 뒤에는 졸지에 선서사제들이 도리어 배교자로 몰려 각지에서 "우린 저딴 비겁한 놈들하고 미사 못 본다!"며 선서사제의 미사 집전을 거부하거나, 선서사제들에 대한 모욕과 구타 심지어는 살해 사건까지 벌어졌다.
여기에 혁명정부가 신설한 조세가 농민들에게 새로운 부담이 되었다. 앞서 혁명정부가 성직자민사기본법을 무리하게 내세워 밀어붙인 것도 뒤집어 보면 예산 문제가 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혁명의 와중에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자 만만한 교회를 털 생각을 한 것. 성직자민사기본법 제정 1년 전인 1789년 11월에 혁명정부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하면서 이에 대한 담보로 아씨냐(Assignat)라는 일종의 정부 발행 어음을 발행했는데, 교회가 진 빚이나 저당에 대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아무도 교회 소유의 토지를 선뜻 사려고 하지 않았던데다 원칙적으로 아씨냐는 국유화한 교회 재산의 구입에 쓰는 정부 발행 어음인지라 아씨냐를 국유재산 매입 대금과 납세금으로 회수하면 전부 태워 버려야 했는데도 일부만 소각하고 대부분 그대로 둔 채 계속 발행하니 가치는 나날이 떨어져서 1792년 봄에 화폐의 가치가 프랑스 국내에서는 평균 25%~35% 떨어지고 해외에서는 50~60% 가량이 떨어졌다.
혁명정부가 1790년 3월 17일과 4월 17일에 법령을 내 성직자의 부채와 교회의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기로 하고 국유화 재산에 대한 저당권을 무효화하여 아시냐의 신용을 얻는 동시에, 국유재산의 매각은 반드시 코뮌을 경유하도록 규정하여 재산 취득자의 소유권을 정부가 확인해 주고서야 여기서 비로소 아시냐는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하락하기 시작한 아씨냐를 상인도 노동자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대신 대상인들이 발행한 ‘신용 화폐’나 은행들이 자기 신용으로 발행한 ‘신용 지폐’가 수도 파리에서만 63종이나 유통되었다. 위조 아시냐가 대량으로 범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혁명정부가 기껏 국유화한 교회 재산을 매각하는 절차도 형편없어서, 그걸 매각할 자본력을 가진 부르주아지들이나 일부 운 좋은 자영농이 다투어 한몫 챙겼다. 누구 말마따나 "있는 자는 더 가져서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나마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는" 상황이 조성된 셈이었다.[15]
따라서 혁명에 대한 박탈감까지 생겼으며, 이런 상황에서 귀족과 교회의 몰수된 재산이 혁명정부를 통해 외지의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가자, 이를 본 농민들은 공동체의 부가 탐욕스러운 개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느꼈다. 결국 1793년 2월 혁명정부가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30만 징집령을 선포한 것에 더해 징집대상에서 부르주아인 지방 하급 관리들이 제외된 것이, 봉기의 불을 당겼다.
실제로 방데의 봉기는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를 자처한 점을 제외하면 딱히 특정할 만한 정치적 계획 없이 진행되었는데 학자들은 이에 대해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문제보다 공동체의 관습들과 일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혁명정부의 조직적 시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에 힘입어 반혁명 대신 대항혁명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혁명(반동)이 구체제의 특권층에 의해 주도되어 구체제의 복귀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면 대항혁명은 혁명정부의 급진적 행정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의미한다. 이는 혁명에 대한 전면적 거부가 아닌 정치, 사회적 변화의 특정 측면에 대한 선택적 거부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학술적 연구와 성과는 19세기 이래 고착화된 서술에서 탈피하는 데 기여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혁명정부가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한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정부군이 잔혹하게 진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4. 학살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입니까?" "아, 아니요. 아직은요." |
방데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지 않음을 풍자하는 그림[16] |
정부군의 학살을 묘사한 기록화[17] |
우리는 국내가 평화롭게 되고, 반도들이 진압되고, 비적[18]들이 전멸된 다음에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외국 열강의 정복과 배신은 방데 도(道)가 그 파렴치한 이름과 반역적인 죄인들을 잃어버리는 날 끝날 것이다. 방데가 없으면 국왕주의도 없다. 방데가 없으면 특권계급도 없다. 방데가 없으면, 공화국의 적들은 사라질 것이다.
1793년 8월 1일, 베르트랑 바래르 공안위원회 위원. 바래르는 1793년 10월 1일에 국민공회에서 ‘방데 파괴’입법을 제안했던 인물이다.
1793년 8월 1일, 베르트랑 바래르 공안위원회 위원. 바래르는 1793년 10월 1일에 국민공회에서 ‘방데 파괴’입법을 제안했던 인물이다.
이제 방데는 없습니다. 여자들과 그 자녀들이 우리 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브네의 소택지와 숲에 묻었습니다. 내게 내려진 지시에 따라 나는 말발굽으로 어린이들을 짓이겼으며 부녀자들을 살해했는데, 적어도 이런 조치로 도적의 자식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난할 포로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프랑수아조제프 베스테르만(François-Joseph Westermann), 프랑스군 장군, 정부 공안위원회 보고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편지 내용이 진짜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말투를 보면 은근히 정부에 불만을 드러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베스테르만의 이름이 얼핏 독일어처럼 보이는데 알자스-로렌 출신이라 그렇다. 이후 줄을 잘못 선 탓인지 1794년 조르주 당통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베스테르만보다 더 확실하고 규모가 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은 루이 마리 튀로(Louis Marie Turreau, 1756~1816)다. 튀로는 줄을 잘 섰는지 주지사까지 하고 감옥에 1년 가량 갇혀 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출소했다. 이것도 원래는 정부에서 그냥 사면하려고 한 것인데, 본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부한 것이다. 이후 주미 프랑스 대사까지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하며 나폴레옹 정권이 끝난 이후에도 살아서 천수를 누렸다. 그는 왕정복고 이후에도 루이 18세에게 훈장을 받았고, 에투알 개선문에 튀로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연히 이에 대해 항의의 목소리도 있지만 먹혀들지 않고 있다. 본인은 학살을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가능하면 빠지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명령을 받고는 정말 충실히 이행했다.프랑수아조제프 베스테르만(François-Joseph Westermann), 프랑스군 장군, 정부 공안위원회 보고서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 마을, 요새 등을 약탈한 다음 불을 질렀습니다. 낭트에서부터 방데 지방의 루아르 강 건너편까지, 모든 것은 재로 변했습니다. 이 저주받은 지역에는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습니다.
1793년 말 방데 전쟁에 청군으로 참전했던 스트라스부르 출신 병사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19]
방데 전쟁의 구체적인 희생자 수가 주요 역사 문제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로, 이미 방데 전쟁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오랜기간 관심을 못 받은 탓에, 학살의 규모에 대한 추정치는 지금도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있다. 추정치는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60만 명까지 존재하며, 학살인지 제노사이드인지에 대해서도 일부 의견이 갈리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민간 기록에 따르면 그냥 죽이지 않고 '공화파 결혼식'이라며 남녀를 묶어 강물에 던져 죽이거나 아이는 말로 짓밟고 아기는 총검으로 살해했다. 심지어 임산부조차 포도 압착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1793년 말 방데 전쟁에 청군으로 참전했던 스트라스부르 출신 병사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19]
1794년 12월 1일 방데 전쟁의 주 무대였던 3개 도 대표 9명의 국민공회 의원은 파리에 제출한 집단 선언서에서 "40만 명이 죽었다"며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는 정말로 피해자를 생각해서라기보다 이미 실각하고 죽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죄와 책임을 다 떠넘기는 의도가 강하다. 막상 방데의 반란에 대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어땠는지는 미묘한데 직접적으로 강경진압을 찬성하고 학살에 대한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고, 오히려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는 방데 반란을 둘러싼 격론에 참여하지 않았고, 방데에 대한 명령체계가 약탈과 강간 등을 억제했다고 주장한다. 즉 민간인 학살은 진압하러 출병한 군대가 우발적으로, 임의로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는 지방에서 벌어지는 학살 사건에 염증을 느껴 관련 책임자들을 소환해서 처벌하려던 상황이었으나 반동을 당해 죽음을 당하고 앞에서 얘기한대로 비난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군대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로베스피에르가 속한 중앙정부가 그것을 제대로 통제하고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책임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또 정부군 사령관이었던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e)가 1796년 2월 1일 내무장관에게 쓴 편지에서 방데 주민 60만 명[20]을 절멸시켰다고 쓴 부분이 있다.[21] 다만 희생된 사람들의 비율은 지옥종대가 활동했던 지역이나 정부군과 방데군의 충돌이 잦았던 지역에서 특히 컸고 다른 지방은 그보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연구결과들은 대략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가 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 40~60만 명은 루이 사령관이 부풀려 쓴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그래도 당시 방데 인구가 80만 명이 안 된 것을 생각하면 15~20만 명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숄레 등 방데군의 중심지였던 곳은 인구 손실이 40%에 달했다.
방데 지방 가톨릭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려진 학살 그림 |
전쟁 중에 무장한 병사가 사망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무장 양민학살은 다르다. 방데 전쟁의 경우에는, 국민공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양민학살이 자행되었으며, 특히 그 방법은 혁명가를 경악시킬 정도로 비열하고 야만적이었다. 방데군이 포로로 잡은 한 공화파 장교의 주머니 속에는 농민에게 사면을 약속한 후, 그들이 투항하면 학살하라는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22] 반도는 물론이고 애국파도 학살의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방데라는 특정 지역의 모든 주민이 학살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장 클레망 마르탱은 방데의 피난민은 학살을 면했다는 사실을 들어 방데 학살이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와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강력한 증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23] 방데인들은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존재’ 때문에 학살을 당한 것이다.
김응종 「방데전쟁의 폭력성-학살인가 제노사이드인가?」 군사(軍史) 제97호(2015.12), 413쪽
프랑스 공화정의 어두운 역사라 프랑스 좌파를 비롯한 대다수 시민들에게 방데 이야기가 나오면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좋게 봐야 혁명이라는 대업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잘못은 분명히 아니고 사과할 일까지는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심한 경우는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시각이었던 "무지한 농민들이 귀족과 사제, 영국에 선동되고 지원받고 협조해서 반란을 일으켜서 정당하게 진압하고 죽을 짓을 한 놈만 처형했을 뿐이다. 무고한 양민에 대한 학살은 거의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란군이 그랬다. 또한 이 주장은 프랑스 공화국과 혁명을 음해하려는 자들이 퍼트린 거짓말이다."의 수준이다(…).김응종 「방데전쟁의 폭력성-학살인가 제노사이드인가?」 군사(軍史) 제97호(2015.12), 413쪽
이런 예를 들어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 같은 역사학자는 프랑스 혁명, 특히 이 시기 프랑스의 권력을 차지했던 자코뱅을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 예로 조제프 바라(Joseph Bara)라는 14살 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바라는 혁명의 열의에 도취되어 방데의 반란을 진압하는 혁명군에 지원했다가[24] 전사했다. 그리고 혁명정부와 진압군은 이 일을 적절히 왜곡해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는데 그것은 바라가 어린애임을 깨달은 반군들은 "국왕 만세!"라고 외치면 살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바라는 "공화국 만세!"라고 외쳤고 그 즉시 목이 잘려 살해당했다는 것이다.[25] 그렇게 혁명군은 그를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본받을 것을 권장했으며, 동시에 그를 잔혹하게 죽인 방데인들을 야만인으로 몰아붙여 반란 진압을 핑계로 비무장 민간인까지 학살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은 수난을 많이 당했으며[26] 자코뱅 에베르파[27]에 의해서는 교회와 기념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심지어 잔 다르크 동상과 기념물까지도[28] 왕정과 가톨릭의 끄나풀의 상징이라며 파괴되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또 일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혁명 공화국 정부에 충성을 거부하다가[29] 단두대로 처형당하였고, 이들 중 일부가 혁명이 일어난지 100년이 넘은 이후,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이 화해하고 사이가 개선되면서 교황청에 의해 순교자로 인정되어 복자로 시복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언급되었듯이 방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이 외에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서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파리의 성모, 성심수녀회 등 참조. 다만 해당 항목은 다소 가톨릭 입장에서의 편향된 서술이 있으니 주의.
학살당한 방데 백성의 유골이 발굴된 모습. 총칼과 몽둥이로 강한 타격을 줬는지 두개골들이 깨져 있다. |
지금도 프랑스 정부가 방데의 민간인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후손들에게 사과하는 일은 복잡한 문제다. 프랑스 제5공화국이 제1공화국 자체를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민주공화정이라는 입장에서 혁명 정부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정통성과 국가관에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부정적인 영향과 인식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러한 과오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프랑스 혁명으로 성립된 프랑스 헌정질서의 근간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중도보수와 우파는 민주공화정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심지어 친공화정 좌파 성향일수록 '단지 폭도를 진압한 것뿐인데 왜 이러냐며' 반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30] 악시옹 프랑세즈 같은 극우 왕당파 수준이면 모를까 자연스럽게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가톨릭, 국민연합이 이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공식 사과할 것과 진상규명에 대한 법안 제출을 요구하고 있으나 계속 묵살만 당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방데 지역 정치인들과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 일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상술한 이유와 제노사이드라는 용어 자체가 그 기준이 복잡하고 엄격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제노사이드 자체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대량학살 사태에 붙여도 되는 소리가 아니다. 방데 학살의 다른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방데 반란군이나 혁명 공화국 진압군 측이나 홀로코스트, 아르메니아 대학살, 스레브레니차, 르완다, 아니면 좀 더 비슷한 전근대 시대라면 청나라의 준가르 대학살처럼 '이념이 다른 동포'가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서, 아예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비교를 하려면 차라리 훗날의 러시아 내전, 20세기 전간기 핀란드,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이데올로기적 내전, 6.25 전쟁 같은 같은 민족집단 내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의 절멸을 추구한 폴리티사이드(politicide), 데모사이드(democide) 등에 가깝다.
제노사이드 명칭이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당시 중앙이 군대에 대한 통제가 가능할 정도의 중앙 통제 체제가 아니었다는 점이 크다.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학살지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장 로베스피에르의 입장도 매우 미묘하다.
프랑스 정부군을 해골로 묘사한 그림[31] |
1993년 프랑스를 방문한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방데에서 학살을 저지른 프랑스 혁명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집권당인 사회당 정부는 불쾌해하며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으나 소련에 살던 시절에는 소련을 까고 추방되어 미국에 살던 시절에는 미국을 까던 사람답게 별로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자크 시라크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낸 철학자 뤽 페리는 2015년 "프랑스 혁명 당시 방데에서 학살이 있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5. 다른 시각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 방데 전쟁에 대해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근대 유럽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살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사과 요구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방데 전쟁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 혁명의 평가와 가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세력들이 이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은 자칫 프랑스 혁명으로 기반이 만들어진 프랑스 공화국과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공화국 헌법의 정체성 근간까지 부정하는 처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정부를 옹호하면서 방데 전쟁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들도 많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측은 일단 200년 넘게 지난 일이라 피해자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에선 현재의 프랑스 제5공화국 체제는 프랑스 혁명 정부와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지지 않기에 사과를 언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농민군이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를 자처하며 공화정부에 선제공격을 가했"으므로 공화정부를 일방적인 가해자로 모는 시각은 무조건 모더니즘을 까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지나친 언더도그마, 혹은 문화상대주의의 과잉 적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방데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쟁으로 규정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교전권을 가진 대등한 두 집단이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이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살육은 농민군 쪽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면, 혁명은 기존 수백년동안 유지되어 온 프랑스 왕국을 전복한 불법적인 폭동이고 방데 봉기는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방어권 행사라는 논리를 전개할 수도 있다.
농민군은 단순히 국내 세력이 아니라 단지 파리에서만 물러났을 뿐 여전히 강대한 왕당파와 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부 입장에서는 과민반응을 보일만한 여지도 있다고 옹호한다. 또한 비전투원까지 사살한 것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비윤리적인 학살이지만, 18세기에 일어난 사건을 오롯이 현대적인 윤리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 프랑스 왕국의 여러 실책 역시 오늘날의 윤리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소위 프랑스 혁명은 당위성이 없고, 그저 과격한 폭동일 뿐이었다는 반론에 걸려들게 된다. 그리고 비전투원의 학살과 잔혹행위는 어느 시대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죄악시되어 왔던 것이며, 아울러 천부인권, 자연권, 저항권을 천명하고 이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존립 근거로 여겼던 공화정부가 같은 국민을 무자비하게 대한 것은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6. 한국에서의 인식
한국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온 긍정적인 사건이라고만 대부분 인식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저연령층이 보는 세계사 학습만화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상황만을 거의 언급하며 중고등학생들이 보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인한 처형들이 나올 뿐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러한 시각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33]그러나 외국 서적들이 한국에 들어오고 인터넷이 발달되며 외국 자료들이 한국에 유입되어 방데 학살이 한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외국 서적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좋게 말하고 방데에서의 일을 가볍고 정당한 필요악 정도의 진압으로 여기거나 혁명의 혼란 중에 일어난 충돌 사건들 중 하나 정도로 보면서 사실상 흑역사는 생략하는 좌파 성향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34]
대표적인 예로 1980년대에 나온 La Vie Privée des Hommes라는 역사 그림책 시리즈[35]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직접 따로 말하지 않고 마지막권인 '프랑스의 역사' 부분에서만 언급하는데, 방데에서의 농민 반란을 프랑스 혁명 부분에 제일 큰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귀족과 사제들에게 선동당한 농민들이 반혁명 반란을 일으켰다"고 언급했다. 물론 "정부군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원정을 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언급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싶지만 방데의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먼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서술해놨다(그림도 그냥 지나가는 정부군을 족칠 준비를 하고 매복하는 방데 반란군만 묘사했다).
참고로 이 책은 대항해시대 편에서는 흑인 노예 사냥을 "저주스러운 거래"라고 언급하고 미국의 서부개척 편에서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야만인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고 있었는데 백인들이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고 진보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정작 프랑스의 역사편에서는 프랑스 식민지 개척 부분을 꽤 자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를 처음 제기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프랑스 혁명 관련 저작 중 <앙시엥 레짐과 프랑스 혁명>은 2006년에 박영률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뒤 2013년에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출간되었다. 또한 토크빌의 연구결과를 이어받아 집대성한 프랑수아 퓌레의 저작은 1990년대에 절판되어 매물이 극히 적어 중고책으로도 못 구하고 대형 시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이 아니면 구해 볼 방법 자체가 없었으나, 2023년에 와서야 <프랑스혁명사>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대학에서도 언급하는 교수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며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온 교수들이나 근대사 관련 강의 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는 정도에 그친다.
7. 기타
이 사례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사례가 아니라 19세기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국민 만들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공동체로 부각되면 이와 상충하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은 망각되도록 강제되는데 방데 전쟁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터져나온 예인 것이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사례로, 전근대 고려나 조선에서는 농민봉기가 벌어져 그들을 진압하고 나면 이른바 '장두(狀頭)'라고 불리는 주동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봐주는 게 관례였다.[36][37] 그런데 근대화가 진행된 후에는 '감히 조국에 반기를 들어?' 하면서 대규모 학살을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93년>이 방데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혁명과 전쟁의 물결 속에 묻혀버린 기본적인 인간성과 인권이 진정한 혁명의 본질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한편 방데 지방은 이 사건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이를 무너뜨리고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38]까지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부르봉 왕실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프랑스의 권력을 잠시 장악했을 때도 이 지역은 나폴레옹을 거부하여 나폴레옹은 방데에 진압군을 파견해야 했고[39] 왕정복고 후인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이 지역은 샤를 10세를 지지하면서 1832년 5월 샤를 10세의 며느리인 베리 공작부인이 주도해 부르봉 왕조를 다시 복구하려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다.[40] 다만 1848년 혁명 당시 루이 필리프가 축출된 뒤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3세를 80% 가까운 표로 밀어주었고, 이후로 프랑스의 정국이 변화하며 프랑스 우파의 대세가 공화파로 변하자 그에 맞추어서 뽑는 모습을 보였다. 1958년 5공화국 출범 이후로도 우파 성향이 강한 편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방데에 살던 공화파들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방데의 농민군한테 죽었고 그 다음에는 공화군한테 죽었다. 양쪽 모두한테 수난을 당한 셈.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카리브해 출신 흑백혼혈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가 이 전쟁에서 공화군 장군으로 활동했다.[41]
방데 전쟁에서 희생당한 양민들을 기리기 위해 시네세니라는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여는 오페라를 포함한 지역 행사가 있다. 이 행사는 프랑스 대통령도 관람하였다고 한다. # 처음엔 규모가 작았으나 이후 방데 전쟁을 포함한 지역 역사를 재연하고 공연하는 테마파크 퓌 뒤 퓌로 발전해서 전 세계의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월드 리포트] 숨 막히는 지상 최대 공연 ‘역사 속으로’
[1] 1957년 루아르아틀랑티크(Loire-Atlantique)로 변경[2] 성심(聖心)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을 지칭한다. '예수 성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성체성사,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이바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일컫는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톨릭대사전 참조) 라틴어로는 Cor Sanctissimum, 영어로는 Sacred Heart라고 한다. 간혹 이 깃발 위에다 Dieu et le Roi(하느님과 왕을 위해)라는 문구를 적기도 했다. 이 상징은 오늘날 방데 주의 깃발과 문장에도 반영되었다.[3] 후작이라고 잘못 알려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후작인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4] 앙리의 동생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은 형의 친구인 루이 마리 드 레스퀴르 후작의 전 부인 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Marie Louise Victoire de Donnissan)과 결혼했는데(레스퀴르 후작은 방데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전사했다) 마리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 속에서 자신이 보고 겪었던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방데 전쟁에 대한 회고를 남겼고, 이 회고록은 방데 전쟁에 관한 중요한 1차 사료로 꼽힌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 마리는 방데 전쟁 이후 1794년 10월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공포정치가 끝나자 사면되었으며,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1857년 2월 15일에 85세로 사망했다.[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방데 부흥 정책을 제시하고 교황청과 화해한 1801년을 방데 전쟁이 끝난 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1815년, 1831~1832년까지 한동안 종종 소규모 봉기들이 일어났다.[6] 방데 전쟁에서의 학살의 영향으로 인해 21세기에도 방데를 비롯한 프랑스 서부 일대는 보수성과 가톨릭 신앙이 강한 지역이다. 다만 2015년 지방선거 때는 이민자, 난민 문제와 파리 테러의 영향으로 우경화가 드러나는 결과가 예상되었으면서도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극우인 국민전선이 이 지역에선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7] 물론 해당 시점의 부르봉가 입장에서 나폴레옹과 공화주의자들보다는 오를레앙가가 더 직접적인 적이기는 했다. 다만 그럼에도 1848년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공화파들이 시위를 강경진압하는 등 지리멸렬하자 잔류 오를레앙파와 보나파르트파와 연합해서 질서당이라는 빅텐트 연합을 구축했고, 루아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로는 총리를 배출하고 정부를 운영하는 등 한동안 여당의 지위를 누렸다. 물론 그 질서당은 어디까지나 빅텐트 정당이었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과 아웅다웅거렸고, 그 와중에 빈민층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자폭을 했다가 루이 나폴레옹에게 밀려버렸다(…).[8] Reynald Secher, La Vendée-Vengé.Le génocide franco-français, p.111.[9] 프랑스의 지방행정이 개판이 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 때 대대로 지방을 관리해오던 귀족들, 특히 뼈대 역할을 하던 대귀족들이 중앙으로 가버리면서이다. 오랜 세월동안 적절한 통치방식을 정립해온 이들이 없어진만큼 당연히 선을 넘는 이들이 생겼다.[10] 심지어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한 푸아티에의 주교는 그녀가 자선사업에 헌신했음을 찬양하면서 “방데 전쟁의 지도자들은 신(神)이었다”(!)는 혁명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혁명정부 치세였다면 당장 단두대에서 목 잘렸을 정치적인 발언도 숨기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기득권을 잃은 가톨릭 사제 계급의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실언으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11] 또한 앞에서 언급된 마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방데 지역 주민들은 프랑스 대혁명 초기에는 오히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고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12] 교구 신부는 그 절반도 안 되었다.[13] 교황은 프랑스 대혁명의 가장 큰 성과이자 업적이라고 할 인권 선언마저도 '하느님에 대한 배반'이라며 불쾌해했다.[14] 예를 들어 봉건적인 십일조나 가톨릭 사제에 대한 면세 특권 폐지 등.[15] 여담으로 교회 재산 국유화 및 성직자에게 국민의회에 대한 충성서약 의무화를 법안으로 제안한 인물이, 외교관으로도 알려진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이다.[16] 책상 옆에 제노사이드로 인정받은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 킬링필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적어놓아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에 그려진 희생자들이 결혼식 복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진압군이 강물에 젊은 남녀를 빠트려 죽이고 이를 수중 결혼식이라 조롱했기 때문이다.[17] "평정" 명령에 따라 마을에 불을 지르고 방데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는 정부군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기를 산 채로 우물에 집어던지려고 하고 있다. 아기 어머니는 죽어서도 프랑스 혁명군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18] 국민의회는 방데 주민들을 '비적'이라고 불렀다. 딱 1980년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사람들을 '폭도'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다.[19] Jean-Clément Martin, La guerre de Vendee 1793~1800, Points, 2014, p.145[20] 당시 프랑스 인구 3,000만 명의 약 2%다.[21] 원래 전쟁범죄를 자각하고 저지를수록 자신들이 죽인 희생자 수를 가능하면 최대한 줄여 기록하고 피해자 측은 희생자 수가 적어도 가해자 측보다는 많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가해자 측이 숨기지 않은 경우로, 만약 이 희생자 수가 사실이라면 이는 사령관이 기록을 중시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를 전장에서 성취한 전과(戰果)로 여겼다는 경악스러운 의미일 수도 있다.[22] Madame la marquise de La Rochejacquelein, Mémoires, p.464[23] Jean-Clément Martin, La guerre de Vendee 1793~1800, p.300.[24] 나이는 어렸기에 북 치는 역할 수준이었지만, 이것 역시 난전 중에 적군의 표적이 될 수 있기에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25] 다만 이것 외에도 방데 주민이 말을 훔치는 것을 막다가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26] 물론 기득권 성직자들이 왕권과 귀족과 결탁해서 세금을 내지도 않고 대지주를 겸하여 백성을 착취하기도 했으나, 민중의 편에 서서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혁명에 협조한 성직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곧 탄압받았다.[27]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딱히 찬성을 하지 않고 막기는 했다.[28] 이 때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인정받아 시성된 건 아니었지만 잔 다르크가 구해낸 곳인 오를레앙 지역과 잔 다르크의 고향인 로렌 지역의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수호성인 개념으로 인정받아 왔다.[29] 이것은 당시 교황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자국의 세속 권력보다 교황의 명을 우선시했던 것.[30] 미국 극우 세력은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 문제 등을 교과서에 실은 걸 두고 '미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린다면서 시위를 한 적이 있다. 1994년 미국 표준 역사 교과서 파동 사건도 이런 측면과 관련 있었다. 당시 정당 막론하고 상하원이 반대 결의안을 의결했다.[31]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이 잊혀지기는 했지만 이런 그림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일부 방데 주민에게도 혁명 당시의 공화국군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 있다.[32] 진짜로 1989년에 쓰여진 시인지는 객관적으로 알기 힘들다.[33] 사실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까지 한국 정부는 한국에 들어오는 외신들도 전부 먹칠을 해서 검열을 할 만큼 언론통제가 심했던 데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에서 출판되는 인문 역사 서적들 상당수가 일본 서적들을 그대로 베낀 것들이었을 만큼 인문학계의 수준도 엉망이어서 당연히 방데 학살 같은 잔인하고 비주류적인 내용은 대중들한테 알려질 수 없었다.[34] 사실 한국에 소개된 대부분의 역사서가 그렇다.[35] 한국에서는 동아출판사에서 세계생활사라는 이름으로 들여옴.[36] "어쨌든 다 주상의 백성이 아닌가? 몇몇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간 것뿐이지 저들 모두가 진심은 아니다" 라는 관념도 있었고 국왕 스스로가 민란 앞에서는 "백성들이 저런 몇몇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간 것도 따지고 보면 국왕인 내가 정치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은 국왕인 나에게 있다."며 어느 정도 백성들을 향해 겉으로라도 숙이는 게 미덕으로 여겨졌다. 민란이 일어난 고을의 격을 강등시키고 그 지역 주민들의 혜택을 빼앗는 '뒤끝'은 부렸지만. 물론 관군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정주성 주민을 모조리 처형한 홍경래의 난 같은 예외 사례도 있었다.[37] 동학농민혁명의 주동자들조차도 마치 프랑스 대혁명 초기 방데 주민들이 혁명의 대의인 '자유 평등 박애'에 공감하고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것처럼 조선 왕조라는 체제 자체를, 그리고 고종이라는 군주의 통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 포고문에서부터 "우리는 주상 전하께 충성하는 백성인데, 탐학한 관리들이 우리 훌륭하신 주상 전하의 눈을 흐리며 주상을 팔아 백성을 괴롭히므로 참다 못해 저 탐관오리를 조지고 우리 전하의 통치가 바로서는 것을 돕기 위해 무장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나섰기에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열어 둔 셈이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을 직접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동학농민혁명의 주동자들을 "너무도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며 "반란군이 아니라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를 정도다.[38] 참고로 나폴레옹은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39] 이때 마리의 두 번째 남편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이 봉기를 주도했고 이때 전투에서 사망했다.[40] 앞에서 나폴레옹에 반대해 봉기했던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과 마리의 둘째 아들인 루이 앙리가 이 봉기에 가담했다. 이 정도면 부자가, 나아가 하나의 가정(부부와 그 아들)이 방데와 연을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이 앙리는 1833년에 리스본 전투에서 사망했다.[41] 당시 프랑스에서는 노예에서 해방된 신분인 자유 흑인에 대한 공적인 차별대우를 하지는 않았고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유색인종들도 군인으로 써먹었는데 그 사례 중 하나이다. 당시 프랑스가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는 아니어서 사적으로는 흑인이라고 멸시하고 드러나지 않게 차별하는 일이 꽤 있었다. 특히 유색인종을 백인처럼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나폴레옹은 유색인종을 차별했고 아이티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흑인들끼리도 자유민과 노예가 복잡하게 서로 이해 관계가 얽혀 심지어 각자의 편을 드는 백인군들과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서로 싸우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에서의 반란을 진압을 명령하는 과정에서 흑인이면 전부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진짜로 학살을 벌이자 결국 흑인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뭉쳐서 프랑스에 저항해서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