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내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ddd>전쟁 | 교전세력 |
무정부시대 1135 ~ 1153 | 스티븐 왕 VS 마틸다 | |
제1차 남작 전쟁 1215 ~ 1217 | 잉글랜드 왕실 VS 신성교회군 | |
제2차 남작 전쟁 1263 ~ 1267 | 잉글랜드 왕실 VS 의회파 귀족군 | |
장미 전쟁 1455 ~ 1487 | 요크 가문 VS 랭커스터 가문 | |
청교도 혁명 1642 ~ 1651 | 왕당파 VS 의회파 | |
명예혁명 1688 | 제임스 2세 VS 윌리엄 3세&메리 2세 |
제2차 남작 전쟁 영어: Second Barons' War | |||
기간 | |||
서기 1263년 ~ 1267년 | |||
장소 | |||
잉글랜드 | |||
원인 | |||
헨리 3세의 옥스포드 조례 무효화.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잉글랜드 왕국 | 의회파 귀족군 | ||
지휘관 | |||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 에드먼드[1] 리처드[2] 헨리[3] 길버트 드 클레어[4] 험프리 드 보훈 존 드 워렌 윌리엄 드 발랑스 로저 모티머 | 시몽 드 몽포르† 길버트 드 클레어[5] 앙리 드 몽포르†[6]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7] 기 드 몽포르[8] 피에르 드 몽포르†[9] 험프리 드 보훈 주니어[10]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위그 르 데스펜서† | ||
결과 | |||
잉글랜드 왕실의 승리 의회민주주의의 초석 에드워드 1세의 왕권강화. |
[clearfix]
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1263-1267)은 처음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자신이 이끌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인 미래의 왕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왕실 세력과 그에 대항하여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파 귀족군 간의 내전이다. 귀족들은 왕이 측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귀족 평의회를 통해서 통치하도록 강요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귀족 정권의 초기 성공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의회의 사회적 기반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년 남짓한 통치 끝에 시몽 드 몽포르는 왕당파 군대에 의해 패사되었다.2. 배경
헨리 3세는 대공위시대로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차지하려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실패했다. 자세하게는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삼게 하려는 공작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했고[11] 동생 콘월 공[12] 리처드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에도 올리려 했으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의 대립을 이기지 못하고 독일왕으로만 머물렀다.한편 헨리 3세는 귀족들의 마그나 카르타의 강요와 섭정기간[13]동안 강해진 귀족들의 권세를 꺾으려고 로마 교황에게 신종하고 교회를 이용해 귀족들을 견제하여 아버지 존 왕 때 잃은 권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내부의 불만이 커지는 건 막지 못했다.
특히 헨리 3세의 매제였던 시몽 드 몽포르[14]가 앞장서서 귀족들의 요구서인 옥스포드 조례를 왕에게 전달하였으나 왕은 지킨다고 말만 할 뿐 실제론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강력한 통치를 이어나갔다. 이에 귀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264년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 결집한 귀족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터졌다.
3. 전개
반란에 놀란 헨리 3세는 동생 콘월 공, 장남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친정에 나서며 몽포르의 반란군에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루이스 전투에서 국왕군이 크게 패하여 셋 다 포로로 잡히고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의회를 여는 데 동의하였으며 이로써 잉글랜드 왕가는 의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그러나 이듬해 맏아들 왕세자 에드워드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왕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15]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시몽 드 몽포르를 이브샴 전투에서 패사시킴으로써 권력을 회복하였다. 그렇지만 헨리 3세는 이미 고령인 데다가 위신이 많이 깎였고 건강도 좋지못해 장남인 왕세자 에드워드 1세에 국사를 맡겼다.
4. 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왕을 포로로 잡고 짧게나마 의회를 최초로 연 것을 영국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발전으로 보기도 한다.몽포르의 개혁에는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비자유민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몽포르 반란군은 그들의 관리들이 "자유민이나 농노"에게서 부당하게 아무것도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마찬가지로 개혁으로 임명된 사법관은 "부자와 가난한 자, 농노와 자유민" 모두에게 정의를 실현할 것을 맹세했다. 1215년과는 대조적으로, 1258년의 주요 개혁은 프랑스어와 라틴어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선포되었다.
몽포르 정권 몰락 이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반란군에는 농민 의용병들이 있었다. 1265년에 이브셤 전투 직후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으로, 당시 왕령지에 속한 레스터셔의 피틀링 마그나(Peatling Magna)의 농민들이 왕당파가 "왕국의 공동체의 복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방해했다. 분명히 농민들은 자신이 왕국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꼈고, 남작 반란군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때는 이미 사회의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 마그나 카르타를 자의적인 통치에 대한 보호 장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 결과 1260년대부터 잉글랜드에 의회 제도가 정착되며 이론적으로 국왕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법에 종속되는 입장이 된다. 그러나 그 대가로 국왕은 의회의 동의를 받아 이전보다 더 많은 액수의 '합법적인' 세금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징수할 수 있었고, 이는 에드워드 1세나 에드워드 3세와 같이 의원들을 설득하고 달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과 인내심을 가진 왕들에게는 성공적인 대외 정복 활동과 왕권 강화의 기반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원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였지만 이후로는 국왕끼리의 주종 관계만 유지할 뿐 완전히 별개의 역사를 걷게 된다.
[1] 헨리 3세의 차남[2]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공작, 독일왕[3] 리처드의 아들[4] 1265~1267[5] 1263~1265[6] 시몽 드 몽포르의 장남[7]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8] 시몽 드 몽포르의 사남[9] 시몽 드 몽포르의 가문과는 별개의 가문이다. 레스터를 영지로 둔 몽포르 가문과 달리 이 몽포르 가문은 워릭셔 근처의 보데저트 성을 영지로 두었다.[10] 험프리 드 보훈의 장남[11] 시칠리아 섭정 만프레디가 왕위를 찬탈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헨리 3세와 프랑스왕 루이 9세에 접근해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는데 헨리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와 루이 9세의 동생 앙주-프로방스 백작 샤를이 경쟁하여 최종적으로 샤를이 시칠리아 왕위를 가질 명분을 받게 되었다.[12] 당시 잉글랜드에는 Duke라는 작위가 없었고 대신 그 역할을 현재의 백작을 지칭하는 Earl이 수행했다.[13] 아버지 존 왕이 급서하자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20세에 친정하기까지 윌리엄 마셜 등이 섭정을 맡았다.[14] 헨리 3세의 여동생인 앨리너 공주가 몽포르의 아내이다.[15] 몽포르가 권력을 독점하며 독선적인 일처리를 하는 바람에 귀족들의 반발을 크게 산다. 특히 몽포르의 정적인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