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1:58:42

잉글랜드 내전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잉글랜드의 내전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cf091f><colcolor=#ddd>전쟁교전세력
무정부시대 1135 ~ 1153파일:800px-Blason_comté_Champagne_ancien.svg.png스티븐 왕 VS 파일:800px-Arms_of_William_the_Conqueror_(1066-1087).svg.png마틸다
제1차 남작 전쟁 1215 ~ 1217파일:잉글랜드 국장.svg잉글랜드 왕실 VS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신성교회군
제2차 남작 전쟁 1263 ~ 1267파일:잉글랜드 국장.svg잉글랜드 왕실 VS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의회파 귀족군
장미 전쟁 1455 ~ 1487파일:요크 왕조 휘장.svg요크 가문 VS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랭커스터 가문
청교도 혁명 1642 ~ 1651파일:Arms of Stewart.png왕당파 VS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71px-Arms_of_the_Protectorate_%281653%E2%80%931659%29.svg.png의회파
명예혁명 1688파일:Arms of Stewart.png제임스 2세 VS 파일:200px-Royal_Arms_of_England_(1694-1702).png윌리엄 3세&메리 2세
}}}}}}}}}||
파일:영국내전.jpg

1. 개요2. 배경3. 과정
3.1. 1차 내전3.2. 2차 내전3.3. 3차 내전
4. 결과5.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English Civil War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잉글랜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3차례에 걸쳐 벌인 대규모 내전이다. 공화정이 수립되었을 때 청교도식 법규를 기반으로 하여 통치했기에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린다. 한때는 '청교도 혁명'으로 자주 불렸지만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에 들어간 20세기 후반부터 콘래드 러설(Conrad Russell) 등 수정주의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혁명성이 부정되고, 일반적으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라고 한다. 단적으로 영문 위키백과의 표제어가 English Civil War이다.

영국 내전(British Civil War)이라고도 하지만 영국 내전과 잉글랜드 내전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영국 내전은 찰스 1세스코틀랜드 왕국 귀족들과 종교 분쟁이 터지면서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군사적 대응을 시작한 1639년부터 올리버 크롬웰이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1651년까지의 사건을 의미하며 삼왕국 전쟁(Wars of the Three Kingdoms)이라고도 한다. 즉 영국 내전 안에 잉글랜드 내전이 포함되어 있는 것.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 1세는 처형당했고, 찰스 2세는 추방당했다. 그리고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1]으로 삼아 잉글랜드 연방을 세웠다.

2. 배경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1628년 강력한 상비군만들려고 했다.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의회가 찰스 1세의 실정을 비판하며 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에 대한 구속을 골자로 하는 권리청원을 통해
의회의 동의없이 국왕이 세금을 거둘 수 없다.
는 조항의 승인을 받아냈다. 찰스 1세는 재정 마련을 위해 의회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준수하지는 않았고, 더욱이 의회는 이듬해 1629년에 강제로 해산당했다. 이후 16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찰스 1세가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1638년 스코틀랜드 국왕이기도 했던 찰스 1세는 측근인 대주교 윌리엄 로드를 시켜 스코틀랜드 왕국잉글랜드 국교회를 신봉하게끔 새로운 기도서를 강요했지만, 대다수 백성이 장로교를 믿던 스코틀랜드가 이에 대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찰스 1세는 강경 진압을 명했다. 그리고 1640년, 이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다시 소집하게 되었다. 의회는 11년간 국왕이 저지른 폭정을 나열하며 반발하였다. 왕은 3주 만에 의회를 다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화의 후 전쟁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재소집한다. 의회는 배상금을 갚기 위해서 세금이 절실한 찰스 1세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오히려 국교회를 강제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을 제정하였으며, 삼년법안을 통과시켜 의회가 3년에 한 번씩은 꼭 열리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1641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의 통치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수천명의 잉글랜드 주민을 살해했다. 국왕과 의회는 아일랜드 처벌에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군사 지휘권을 둘러싸고 논쟁하다가, 간신히 타협한다. 그리고 의회는 왕의 실정 목록 200개 조항 및 의회 개혁안을 담은 대간언을 통과시킨다. 1642년 1월, 격분한 찰스 1세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군대를 이끌고 반대파 의원 체포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의회도 그에 대비해 군대를 모았고, 국왕은 실패 후 북쪽으로 대피하였다. 의회는 도망자 왕을 비판하는 19개 제안을 공표하였다. 찰스 1세는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끝내 거부하였다(6월). 급기야 의회파와 왕당파가 각각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1642년 여름,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3. 과정

3.1. 1차 내전

1642년 여름, 찰스 1세는 외국인 용병들을 바탕으로 조카들[2]이 이끄는 강한 군대를 앞세우며 내전을 개시했다. 반면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왕당파 역시 그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양측은 엣지힐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1643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가 <엄숙동맹>을 체결하였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국교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올리버 크롬웰이 이듬해 '신모범군'[3]을 조직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결국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대세가 기울자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투항했으나, 찰스 1세를 싫어하던 스코틀랜드는 400,000 파운드를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인계해버린 후 잉글랜드에서 철수해버렸다.

3.2. 2차 내전

의회 측에 의하여 감금된 찰스 1세는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외부와 끈질기게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내 의회파의 구금에서 탈출한 후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재조직하였다. 한편 의회 내부에서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왕당파가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크롬웰의 신형군이 프레스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면서 왕당파는 1년 만에 또다시 패배 진압당했고, 찰스 1세는 재차 포로로 구금되었다. 크롬웰은 더 이상 국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회에 찰스 1세를 처형하라고 건의했으나, 의회 내 온건파는 처형에 주저하며 크롬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분노한 크롬웰은 164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온건파 의원들을 축출하여 가두어 버리고, 50여 명 남짓의 크롬웰 지지자들로만 의회를 편성했다. 이를 잔부 의회라고 한다. 마침내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1649년, 찰스 1세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 후 처형되었다. 이어 1649년 1월 30일, 군주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4]

3.3. 3차 내전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찰스 2세프랑스 왕국루이 14세에게 망명했다. 그 사이 잉글랜드의 왕당파들은 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나, 의회파에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때 이른바 335년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왕당파 세력의 함대가 콘월의 실리 제도에 자리잡자, 잉글랜드와 협력 관계였던 네덜란드는 이 왕당파 해군에게 1651년 3월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하지만 교전 자체는 일어나지 않았고, 약 2개월 후 왕당파 함대가 스스로 항복해서 전투는 그대로 끝나.....긴 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서로 남은 종전 선언이나 항복 의식을 하지 않아서 형식상으론 계속 전쟁이 지속된 것이다.

결국 335년 뒤인 1986년(!)이 되어서야 실리 제도의 자치 의회 의장과 네덜란드 측이 정식으로 종전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런 식으로 조약을 잘못해서 형식상 전쟁이 지속된 사례가 제법 있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에 반기를 들었던 언약파 정부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질시했으며, 결국 찰스 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잉글랜드 의회의 뒷통수를 치려고 했다. 이에 따라 크롬웰이 지도하는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언약파 사이에서 전쟁이 치러졌는데 크롬웰은 던바 전투우스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대파했고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에 정복당했으며, 찰스 2세는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4. 결과

의회파의 승리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 즉 잉글랜드 연방이 들어서게 되었다.

1653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하였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 <항해법>을 만들었다. 이는 잉글랜드의 배나 물건을 생산한 나라의 배로만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든 법으로, 상공업자들의 큰 지지를 이끌어내고 잉글랜드의 해운업과 조선업을 크게 발전시켜 같은 분야의 경쟁 상대이던 네덜란드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영국 민중은 크롬웰이 지나치게 청교도 정신을 강요하는 것을 싫어했다. 예를 들면, 연극 같은 문화생활이나 축구 같은 스포츠 경기도 금지했고, 12월 25일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도 금지했다. 현재까지도 '영국 음식맛이 없다.'는 평을 받는 원인 중 하나로, 이 당시 청교도식 금욕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해 음식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까지 금기시한 역사를 들기도 한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왕당파는 찰스 2세를 옹립하여 왕정복고를 달성한다. 영국 국교회의 지위도 덩달아서 회복한다. 그러나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의회와 싸운 결과 명예혁명이 일어나 영국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다.

5. 참고 자료


[1]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은 영국에서 왕권이 약할 때 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던 귀족에게 붙였던 칭호이다.[2] 누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아들들인 라인 공자 루프레히트와 모리츠. 정작 엘리자베스의 큰아들인 카를 루트비히는 의회파에 가담했다.[3] New Model Army. 간혹 '신형군'이라고 한다. 이 신모범군 중 기병대는 Ironside로 불렸는데, 국내에서 흔히 '철기대'로 알려져 있다.[4] 찰스 1세가 처형된 1649년부터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660년까지를 가리켜 공위 시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