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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요리/악명/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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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자연적 원인
2.1. 지리적 한계2.2. 문화적 요리치(料理癡)설
3. 문화적 원인
3.1. 종교적인 제약3.2. 식문화에 대한 경멸3.3. 금욕적이고 강압적인 교육 방식3.4. 요리 문화의 샐러드3.5. 발전 당위성 부재
4. 역사적 원인
4.1. 산업 혁명4.2. 제2차 세계 대전
5. 결론

1. 개요

오늘날 영국 요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발생한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꼽힌다.

2. 자연적 원인

2.1. 지리적 한계

전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냉동/냉장을 통한 식재료의 저장 및 유통, 장기간 보존 가능한 가공 방식 등의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신선한 식재료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전까지 음식이란 현지에서 확보 가능한 것으로, 그 식재료를 얻을 수 있는 시기에 빠르게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였다.

영국이 있는 브리튼 섬은 흔히 영국하면 자욱한 안개가 가득 낀 도시와 우산을 든 신사를 떠올릴 만큼 채소를 기르기 위한 기후가 좋지 못 하며, 일조량도 높지 않다. 빈약한 일조량은 그대로 신선한 야채와 과일, 향신료의 결핍으로 이어졌다. 브리튼 섬의 토지 자체는 평야의 비중[1]이 높고, 토질이 비옥하기 때문에 곡물과 육류는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으나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북해는 파도와 풍랑이 거칠기로 유명한 바다이다. 어업 또한 근대 이전까지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으며, 거친 바다에 대한 공포는 오징어나 낙지 같은 두족류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인들은 육류와 곡물 등의 식자재는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해산물과 향신료의 부재는 요리 가짓수의 단조로움으로 직결되었다. 그냥 신선한 고기를 구해다 굽기만 하고 적당히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 버터 정도만 뿌려서 먹는 문화가 정착된 것이다. 괜히 영국을 상징하는 요리 중에 '로스트 비프'와 '스테이크'가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영국인의 별명도 '비프 이터(Beef eater)'라고 한다. 해산물보다 쇠고기를 더 애용해서. 사시사철 빵과 스테이크는 먹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지만 그것 말고는 마땅한 식재료가 없는 곳이 바로 브리튼 섬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럽의 다른 국가, 예를 들어 프랑스스페인, 이탈리아, 튀르키예와 같은 나라들 경우 풍요로운 토양에 넉넉한 일조량으로 이전부터 온갖 향신료와 채소, 과일을 이용한 식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으며, 지중해는 북해와 대서양에 비하면 훨씬 안전하고 따뜻한 바다였기 때문에 어업도 일찌감치 발달했다. 기본적으로 요리라는 것이 식재료에 따라 그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많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좋은 식문화가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지금에야 냉동, 냉장 기술이 워낙 좋기 때문에 전세계의 질이 좋은 식재료를 일반 서민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편이지만, 산업 혁명 이전까지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냉장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그 나라 토질에 맞지 않는다면 주력 '국민 식재료'로 써먹기에는 꽤 힘들다. 재료 자체를 구할 수는 있으니 별미로 인기를 끌 수는 있겠지만 모든 국민들이 매일같이 먹기에는 비용이나 공급량 등의 문제[2]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적 한계'로 인한 '부족한 식재료 풀'이 영국 요리의 다양성을 저해시킨다고 볼 수 있다.

2.2. 문화적 요리치(料理癡)설

영국 요리의 악명을 단지 영국인들의 요리 솜씨나 지식, 또는 요리에 대한 관심이나 열의의 부족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자국 요리가 세계적으로 악평을 듣는다는 건 영국인 자신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요리를 잘 하려는 의욕이나 관심은 적지 않다. 그래서 영국 요리는 악평을 듣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TV 요리 프로그램이나 요리책[3]이 잘 팔리고 있고, 고든 램지제이미 올리버같이 세계적인 스타 요리사들이 영국에서 배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국 음식에 대한 악평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4]

같은 영국 요리라도 다른 나라 사람이 조리를 하면 꽤 먹을 만하다고 한다. 그러니 영국의 재료나 레시피가 문제라기보다는 음식을 지나치게 삶고 찌고 튀기고 짜게 만들고도 그게 지나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영국인의 요리에 대한 센스의 문제가 더 크다고 하겠다. 증언
파일:mushypeas.png파일:pisamvitellianam.png
머시 피스 비텔리우스 완두
아래는 유명한 영국 음식인 머시 피스를 고대 로마 음식인 비텔리우스 완두[5]와 비교한 것이다.

비텔리우스 완두(Pisam Vitellianam)
  • 후추 반 스푼, 말린 생강 반 스푼, 말린 미나리 한 스푼, 세 스푼을 삶은 계란 노른자 3개와 같이 절구에 넣고 빻는다.
  • 와인 반 컵, 식초 두 스푼, 올리브 오일 한 스푼, 가룸 반 컵을 팬에 넣고 중불로 잘 저어준다. 섞이기 시작하면 향신료와 노른자를 넣는다.
  • 중불에 완두를 물이 위에 딱 찰 만큼 넣고 끓인다. 완두가 연해지면 한 시간 반 동안 팬에서 식힌다.
  • 완두가 다 식으면 소스와 같이 팬에 넣고 섞는다. 연하게 잘 섞은 후에 그릇에 넣고 서빙한다.

머시 피스(Mushy Peas)
  • 완두를 팬에 물과 같이 넣고 익을 때까지 30분 가량 끓인다.
  • 어느 정도 익으면 소금식초로 적당히 간을 한다. 식힌 후 그릇에 넣고 서빙한다.
  • 끝.

전적으로 레시피에 아무런 진전이 없고 이를 개량하려는 노력 또한 완전히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다. 심지어 전통적인 레시피라고 기고하는 곳들은 불 세기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 조미료는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다. 사람 입맛에 따라 적당히 조절하라고 좋게 적혀 있기는 하지만 일체된 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데, 쉽게 말해 20세기에 나온 레시피가 2000년 전에 나온 레시피보다 훨씬 못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향락적이기보다, 투쟁적이고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영향이 짙은 영국인의 인생관이 문제가 된 것이다. 사실, 영국인들의 인생관과 문화는 인생을 즐기면서 누리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참고 견디면서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이런 전투적, 자학적 인생관은 다양한 향락적 문화에 기반해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는 가톨릭, 남유럽 문화권에 정면도전하며 인간의 무지함과 비참함을 강조하며 따라서 유일한 희망은 교회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주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기는 북유럽 개신교권 전반이 공유하는 배경이다.

괜히 더글러스 애덤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질 나쁜 영국 샌드위치를 들어 (그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고 나오지만) '속죄 의식'에 빗대는 게 아니다. 물론 국교회 자체가 가톨릭과 복음주의 개신교 사이 왔다갔다하는 종파인 만큼 이런 칼뱅주의적 급진적 인생, 신학관에 반발하여 여전히 '가톨릭적' 고급 문화를 추구했던 귀족, 성직자 계급도 항상 존재해 왔지만, 적어도 청교도 혁명 이후부터 전반적인 국정 운영과 주류 문화 형성 과정에서 이들은 확실히 소수였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은 스포츠나 전쟁에 관련된 무기 개발같이 경쟁을 하는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그에 비해서 전통적으로 음악, 미술, 춤이나 성문화나 요리 등 즐길거리는 대륙에 비해서 매우 부진했다. 한편 그 영국에서조차 백안시되던 급진적인 청교도들이 건너간 곳이 미국이지만 이들은 신대륙에서 남아돌아가는 식재료에 스페인인, 프랑스인과 같은 친구들을 사귀며 케이준 요리 등의 향락적인 식도락에 빠져드는 타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좋은 요리를 먹어도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형편없는 요리를 먹더라도 그다지 불평도 하지 않고 그냥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요리나 음식이란 생활의 활력이나 인생의 즐길거리가 아니라, 단지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듯이 그저 생존을 위해 영양을 보충하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6] 이런 식으로 좋은 요리와 나쁜 요리를 구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음식 솜씨가 전혀 나아질 수가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영국인은 섬세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톡톡 쏘지 않아 밍밍한 자신들의 요리를 차라리 자랑스러워 하는 부분도 있다. 영국인들 입장에선 인생의 다른 즐거움도 충분히 많고 적당한 식단을 두고 소박하고 마음 편하게 먹는 즐거움도 있는 것인데, 먹는 일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걸 '맛이 있네, 없네' 해가면서 좀스럽고 신경질적으로 온갖 정성을 쏟아붓고 자기네 마음에 안들면 하류층이 먹는 하급요리라면서 타국의 멀쩡한 요리들을 경멸하며, 자기네 요리가 세계 제일이라면서 호들갑을 떨며 자랑하는 프랑스인들을 오히려 내심 욕한다는 것이다.[7]

3. 문화적 원인

3.1. 종교적인 제약

영국 특유의 청교도 금욕주의는 근대 영국 식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데에 일조했다. 프랑스 요리를 비롯한 세계 여러 요리들의 발전 과정을 보면, 사치스러운 풍조와 화려한 식문화에 대한 특정 계층의 열의[8]가 전반적인 식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프랑스 요리가 아주 좋은 예시인데,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 서민들의 식문화는 현대의 프랑스 요리처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혁명 전엔 귀족들의 고급 식문화와 사치스러운 풍조가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식문화를 보다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이게 혁명으로 붕괴되자 귀족 문화를 본받아 자신들을 돋보이게 만들고 싶어했던 상공 계층 및 부르주아들에게 전파되었으며 차차 근대 이후에는 전국민에게까지 확산되어 온 결과물이다. 한국에서도 궁핍했던 시절을 거쳐 1970~1980년대가 되자 늘어난 중산층들이 경양식 요리를 찾음으로써 외식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역사가 있고 비슷하게 2000년대 초반 패밀리 레스토랑 붐이 있어서 이러한 식문화가 정착하고 발전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영국은 상류층과 서민 사이를 잇는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할 젠트리, 요먼 계층들이 대부분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청교도 특유의 금욕주의에 따라 식문화를 사치스럽게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산업 혁명 시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기술의 발달로 식재료의 전국적인 유통과 국가간 수출입이 서서히 가능해지는 시기가 되어도 영국에서는 사치스러운 식문화 풍조 자체가 생성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돈 없는 서민들에게까지 기술 발전의 혜택이 돌아갈 시기는 아니었기에 전 세계의 풍부한 식재료를 끌어다모을 재력을 갖춘 계급들이 나서서 해줘야 하는데, 금욕주의 풍조는 이때까지 이어져 식문화를 천대하는 경향은 여전했기 때문. 이로 인해 영국의 인도 음식 침투도 영국 현지인들이 나서서 진행한 것이 아니고, 영국으로 이민을 온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청교도 금욕 문화가 널리 퍼졌기에 영국 기독교인들은 금요일에는 금육,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기 전까지 단식하는 교리가 있었는데, 이런 교리는 선데이 로스트와 피시 앤드 칩스가 성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9]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영국 가정의 음식은 일요일에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워서 그날 저녁에 먹고 남은 고기와 밀가루 기반의 요리들로 그 주의 메뉴를 편성하는 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의 여파가 다름아닌 셰퍼드 파이와 파이 앤 매시, 샌드위치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 음식이 영국의 가정식의 필수요소로 자리매김됐다고 피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재료가 밀가루, 한번 구운 고기, 감자, 버터 및 제철 채소 등으로 제한되니 나올 수 있는 결과들도 한정적이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영국 요리에서 유별나게 스튜 계열 요리가 적은 이유도 염장고기 조리의 산물이며[10], 가정이든 군이든 재료의 다양성이나 조리방식이나 생계 패턴이나 종교적 문화로 인해 상당히 경직적이고 요리 전반의 고착화를 불러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영국의 식문화는 왕족을 비롯한 소위 상류층 계급과 이를 제외한 하류층의 식문화가 그 중간 단계가 사실상 전혀 없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 영국 상류층들의 식문화는 어느 유럽 귀족 못지 않게 화려했으며 지금도 소위 '파인 다이닝'이라고 불리는 고급 레스토랑 식문화는 크게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다. 괜히 런던에 세계적인 셰프가 즐비하고 고급 레스토랑이 넘쳐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문화는 일반적인 영국 서민들에겐 특별한 날에 한 번 먹어 볼까한 수준의 음식이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향유하는 '영국 요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2. 식문화에 대한 경멸

잉글랜드의 문화 인류학자 케이트 폭스가 쓴 <영국인 발견>을 보면 영국인들은 타 유럽인들에 비해 요리에 관한 열정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청교도 특유의 금욕주의도 국민 생각 전반에 잔존해 있어, 요리 자체에 관한 열정을 비웃는 분위기와 문화 역시 영국 요리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고 말한다. 마치 북미에서 패션에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남성이 동성애자로 몰리는 것처럼 잉글랜드에서는 요리하는 남자들을 동성애자로 여기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이는 편견에 불과하다. 실제로 요식업은 고화력의 불과 날붙이를 사용해서 위험한 것은 물론이고, 매우 바쁘고 힘쓸 곳도 많은 중노동을 하는 직종이라 아무래도 남성이 많이 종사한다. 요리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아는 유명한 주방장들도 대부분 남자다. 농담조로, "소림사에서 가장 힘이 센 고수는 주방장이다" 같은 이야기가 그냥 있는게 아니다. 후술되는 사람들도 그렇고, 백종원 같은 사람도 한 덩치에 성깔도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직접 조리해서 밥 차려 먹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귀찮기에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 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 최고의 스타 요리사제이미 올리버는 언제나 거친 노동자 계급을 연상시키는 동부 런던 특유의 코크니 억양을 사용하고 스쿠터, 음악, 섹시부인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강조한다.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고든 램지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온갖 욕설과 소리도 꽥꽥 지르면서 남자다운 거친 사나이 이미지를 어필한다.

거기에 음식 맛을 즐기는 것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요리를 즐긴다기보다는 소비한다는 개념이 강하고, 좋은 요리에 대한 수요도 떨어진다. 이 때문인지 영국인들은 맛없고 투박한 영국 요리에 마초이즘을 느끼며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물론 영국인 특유의 자학성 농담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을 뿐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영국 요리에 대한 농담을 즐겨한다. 당연히 모든 영국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국 요리가 맛없다는 말에 분노하면서 직접 만들어 보인 소녀에 대한 기사를 보면 진의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3.3. 금욕적이고 강압적인 교육 방식[11]

사실 중세 시대부터 영국은 유독 그리스도교, 특히 청교도의 영향으로 금욕주의가 매우 성행했다. 이 때문에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매우 좋지 않게 여겼는데 특히나 요리 쪽에서는 이게 매우 심했다. 실제로 1336년부터 사치금지법을 제정해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수를 2가지로 제한하거나 하는 등의 시도가 이미 있었다.[12]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국인들이 이러한 인식을 넘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행위 자체부터 '망신스러운 수치'나 '용서할 수 없는 반역'으로 국가적 차원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인식이 공식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있었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시행한 '부랑자법'에서 파생된 정책이 있었다. 허가받지 않은 부랑자를 사형 선고하는 정책인데, 문제는 허가받지 않은 부랑자에 요리사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국가적인 차원으로 작정하고 영국의 '요리'라는 문화 그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실제로 그 시대의 영국에서는 이런 이유로 많은 요리사들이 가톨릭 신자들과 더불어 처형되거나 해외로 도피하는 일이 매우 성행했다고 한다. 이런 풍조가 얼마나 심했는지 제이미 올리버가 영국 정부에게 찍혀가지고 미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이는 전술한 '식문화에 대한 경멸'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이게 농담 같아 보인다면 7대 죄악 중 폭식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먹을거리에 탐닉함이 지나친 욕심이라는 시각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오래된 전통이며, 그래서 종종 중세 시절에 거룩한 인물로 추앙받은 사람은, 적어도 전해오는 바에 따른다면, 이러고도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극단적으로 음식을 적게 먹었다. 그런데 왜 영국이 특히 문제가 되느냐면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는 중세 중후기만 되어도 덕목은 덕목이고,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게 살겠지만 보통 사람은 좀 적당히 하자는 식으로 넘어갔는데, 정작 헨리 8세성공회를 만들면서 뛰쳐나온 영국이 이게 더 심해진 것이다. 다만 진짜 문제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성공회가 아니라 바로 한국에서도 주류 개신교 교단으로 널리 퍼진 칼뱅주의(장로회)가 문제라 할 수 있다는 건 틀렸다. 애당초 이 당시 잉글랜드에서 국교회(성공회)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칼뱅주의자들은 다수가 아니었고, 대신 성공회 자체가 칼뱅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이다. 따라서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내에서도 금욕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결코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당장 성공회 신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만 해도 청교도들을 그닥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에 대해서는 그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본 문서에서 언급된 존 웨슬리 역시 성공회 사제였다.[13]

한마디로 말해 유형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차이가 있을지언정 당시 청교도들과 성공회 모두 사상적으로 칼뱅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공통적이기에 청교도들과 성공회를 이분법적으로 칼같이 나눠서 일방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서술이다. 오히려 칼뱅주의자들이 다수, 주류를 차지하고 국교화(장로회)한 곳은 스코틀랜드였지 잉글랜드가 아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영국 이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친 스위스네덜란드도 음식 문화가 매우 단순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자국 요리가 변변치 않아 로테르담 시내에서도 자국 요리(?)는 끽해야 자판기에서 파는 크로켓 정도다. 오히려 제대로 된 레스토랑들은 인도네시아 요리를 만들어서 먹는 경우가 많다. 스위스의 경우 종교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사회문화적으로 끊임없이 프랑스, 이탈리아권과 영향을 주고 받은 덕분에 딱히 악명이 높지 않은 것이고, 사실 해당 분야에선 스위스 식료품이 인기가 높아도 치즈, 육류, 초콜릿 등의 전형적인 산지 낙농업이나 스위스인들이 잘 하는 장인적 가공이 필요한 분야 말곤 스위스 음식이 딱히 유명하던가? 물론, 아무리 그래도 스위스 요리가 영국 요리만큼 악평을 얻지 않는 이유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식문화 영향을 많이 받은 스위스의 식문화 자체가 도저히 못 먹을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아서 그렇다.

사실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나마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반도처럼 유럽 대륙권의 개신교 국가들은 그래도 일단 농산물 국제 유통 자체가 더 활발하고, 여전히 미식과 음주를 하나님의 선물쯤으로 인식하고 웬만한 선 안에서는 죄악시하지 않았던 가톨릭, 정교회 국가들과 교류가 끊기지 않은 반면에,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 전원 16세기 후반쯤 들어서는 적그리스도 교황과 부패한 가짜 기독교에 맞선 참된 개신교의 첨병이라는 종교적 민족주의, 국가 정체성이 강하게 자리잡으면서 미식같은 가톨릭 문화권의 사회 일상 문화에도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배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장 오히려 자국 밖에서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교양인으로 인식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정작 자국에서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속적 기독교 문화를 몰고 온 마녀로 낙인찍힌 것만 하더라도, 근세 유럽의 종교와 맞물린 사회적 변화가 영국 일상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방증한다.

영국의 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나락에 떨어지게 되는 계기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아동 학대로 보이기까지 하는 "변태스러울 정도로 금욕주의적인 교육 방식"에서도 큰 원인이 있다. 금욕주의적이었던 당시의 교육 풍토에서는 "사리를 올바르게 판별할 수 없는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일찍 주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했다. 일례로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지하고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즐거움을 안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처음부터 먹지 못하게 해서 식탁에서의 기대감을 아예 꺾어놓는 방법이 특히 바람직하다."라고 여겼다.

이런 그의 경향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기인하는데[14] 그의 어머니 수잔나가 그에게 참고하라고 보낸 그 자신의 양육 방침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편지글[15]을 보면,
"아이 스스로 골라 먹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른들이 골라준 것으로, 그것도 반드시 어른들 앞에서 하루 세 끼만 먹어야 하고 언제나 유동식만, 오로지 1가지 음식만으로만 배를 채우는 것을 허용한다."
"그 외 간식이나 기타 추가적인 음식을 입에 대는 것은 그런 일을 시도했을 시 그에 동조한 식모까지 덩달아 매를 맞을 만큼 철저히 금지한다."
"이런 식으로 애들을 기르면 애들이 무엇이라도 다 먹게 되고 맛없는 도 잘 먹게 될 것이다."
"아이가 무지하고 악한 존재라서[16] 그 고집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17] 어른이 강력한 처벌로 꺾어놓아 회초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어 집 안이 아이가 사는 것 같지도 않게 아주 조촐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당시,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영국의 성인들이 티타임을 빙자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간식먹어대는 것에 집착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실상 아이들의 영양 불균형을 방조하는 아동 학대와 다를 것이 없는 교육 방식이었다.

또한, 웨슬리는 존 로크타불라 라사 인식론[18]의 인식에 기인해 '어린 시절에 매우 강도 높은 교육을 실시해야 성인이 되었을 때 이상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 여겼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와 다를 바 없었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교수형이 집행되고 법질서 체제가 무색할 정도로 강력 범죄와 폭동, 대규모 소요 사태가 빈번히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연히 종교도덕관은 이러한 상황에 반비례해서 더욱 보수주의화되고 금욕주의적이며 엄격해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금욕주의적인 방침으로 키워지고, 로크의 사상을 수용한 웨슬리가 감리회를 창시하고 위인이 되면서 그 어머니가 행했던 금욕적인 양육 방침이 이상적인 본보기로 내세워지고 사상적으로 정당화됨에 따라 그 이전에도 종교적 기준 하에 금욕주의적인 가치를 강요하던 사회에 쐐기를 박듯이 자리매김하게 되어버렸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소위 소박하다고 칭해지는 시궁창 음식이 아닌 다른 맛있는 식재료들은 정신에 나쁘고 더 나아가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조히즘과도 같은 미신까지 퍼졌던 것이다.

파이 헨리 채버스(Pye Henry Chavasse)[19]가 1839년에 펴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한 조언(Advice to mothers on the management of their offspring)>을 보면[20]
"일단 애들이 젖을 떼면 반드시 1년 이상 묵은 감자뭉그러져 형태가 없어질 때까지 삶아서 소금 간 없이 먹여야 한다."
"치아가 나면 아침식사로는 1주일 이상 묵혀 말라빠진 식빵을 데운 우유에 넣어서 먹여야 한다."
"설탕채소는 아이들에게 독이므로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며, 양파마늘은 성인에게도 독이므로 가급적이면 평생동안 먹지 말 것을 추천한다."

10살이 넘으면 이제 고기를 먹여도 되지만, 8년 이상 사육된 양고기를 먹여야 한다.[21] 돼지고기나 쇠고기는 먹게 되면 성질이 더러워진다고 여겨, 여전히 금지된다. 이마저도 역시 고기보다는
"1주일 이상 묵은 딱딱한 가루로 빻아 하루 이상 묵은 우유와 그 2배 분량의 물을 타고 3시간 동안 뭉근히 삶은 것을 3끼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맛이 없어서 안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런 상황에 미리 대비해서 책에서는 "다른 음식은 주지 않고 그것만 준다면 분명히 먹을 것이다." 라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경한 대처법을 기술하고 있다. 더 가관인 진실이라면 이것이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이다.[22]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음식들만을 먹고 자란 영국인들이 도대체 무슨 입맛을 알겠으며,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먹이겠는가? 게다가 성장기에 필요한 필수 단백질 및 미량원소와 무기염류의 섭취가 불가능하므로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이는 산업 혁명 시기의 아동 노동과 더불어서 영국 청년들의 신체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카를 마르크스는, 이 시기 영국군에 입대한 청년들이 전 시대보다 체격조건이나 질병 저항력이 매우 좋지 못함을 기술한 바 있다.

동시기 작가였던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학대에 가까웠던 영국 아동들의 양육 실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23] 비슷한 사례로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에서도, 말 그대로 아동 학대 수준의 추악한 실태가 구구절절하게 나온다. 실제로 샬럿 브론테를 비롯한 집안 남매들은 어린 시절 이런 학대 수준의 양육 때문에 모두 건강을 해쳐서 샬럿 위의 언니 둘은 10살 남짓한 나이에 죽었고, 나머지도 40세를 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요절했다.

그런데 찰스 디킨스, 카를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영국 노동자들의 삶이 가장 열악하던 시절이라지만 당시 영국인들의 평균 수명은 40세였다. 이것은 당시 중국인의 평균 수명 24세보다 훨씬 길어진 것으로 전반적인 식량 공급이 양호해진 결과였다.[24]

카를 마르크스 사상이 예견하는 자본주의의 미래와 웰즈의 <타임머신>이 묘사한 미래 영국, 아예 몰록과 엘로이로 분화한 두 계급의 미래는 저런 현실에서 나왔다고 보면 그렇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독일의 청년들의 평균적인 건강과 신체능력이 영국의 청년들보다 훨씬 나았다고 한다.

비록 독일나치 독일 당시 독재를 위해서 한 짓이긴 했지만, 그나마 학교에서 아동/청소년들의 식사와 운동을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하는 젊은 인재들의 영양 불균형을 절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독일의 중ㆍ고등학교를 뜻하는 단어인 '김나지움(Gymnasium)' 은 고대 그리스어체육관을 뜻하는 '귐나시온(γυμνάσιον)' 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독일의 학교에서도 체육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청년들의 체육 활동을 장려하려면 건강한 신체가 중요하므로, 당연히 올바른 영양 섭취에 크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25] 하지만 영국은 노동환경은 나아졌을망정,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4. 요리 문화의 샐러드

대영제국의 형성과 국가 간 인적, 물적 자원 이동의 활성화에 힘입어 영국에도 다른 나라의 요리들이 여럿 전파되었지만, 원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요리'가 부실하다 보니, 영국에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여러 나라의 요리들이 한데 섞이고 그중 일부가 그 나라 요리의 일부로 흡수되는 '인종의 용광로\'가 아닌, 각 국가의 요리들이 따로 난립하는 '인종의 샐러드\' 현상이 벌어진 것. 다시 말해 영국의 식문화는 많은 국가의 요리들이 난립한 '요리의 샐러드'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 가면 가장 맛있는 '인도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런던에는 약 1만 개 이상의 인도 요리점이 성업 중이며, 미쉐린 가이드를 받은 런던의 요리점들도 프랑스, 이탈리아, 인도 요리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많은 영국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국적의 요리들을 먹고 자라며, 외식과 관련된 추억들에도 인도 요리 등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문화의 경우 영국이 세계로 퍼뜨린 것이 많다. 운동이야 영연방 국가에 널리 퍼져 있는 크리켓 문화나, 두말하면 입 아픈 전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가 있고, 차 문화도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등 영국이 거쳐간 지역에는 밀크티나 이를 응용한 음료가 남아있다. 예술 쪽에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모든 게 설명된다. 하지만 식문화만큼은 오히려 본 주인이 일정 부분을 빼앗겨 있는 형국인 셈이다.

자국의 요리 문화가 어느 정도 발전되어 있어야 다른 나라의 요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점은, 한국 요리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부대찌개6.25 전쟁 이후 스팸이 한국에 전래되었고 이를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요리인데, 여기에는 국물이 들어간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요리가 이전부터 다양한 국물 요리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식재료에도 한국식 요리법을 적용시켰을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나아가 '새로운 요리'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양념치킨도 기본 치킨 요리법에 고추장, 간장, 마늘, 파 등의 한국식 향신료가 첨가된 새로운 형태의 요리라고 볼 수 있다. 해당 요리에 대해 한식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부 있긴 하지만, 논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동화주의의 훌륭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누가 봐도 한국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냥 '서양 요리'로 분류했지, "한식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는 발상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영국의 경우, 어떤 영국인들도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먹고 자란 인도 카레를 영국 요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인도 카레에는 '영국화'된 부분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에서 먹을 수 있는 인도 카레는 인도 현지인들도 인정할 정도로 인도 고유의 카레 요리를 잘 보존시켜 왔으며 정통 인도 요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26] 이처럼 기본 베이스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새로운 식재료나 새로운 나라의 요리가 들어와도 그게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것은 영국 식문화의 특이한 점이라 볼 수 있다.

3.5. 발전 당위성 부재

종합해보면 '영국 요리'와 '영국인의 식문화'는 전혀 별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 요리가 별로라고 해서, 영국인들이 항상 맛없는 영국 요리나 먹고 사는 것은 아니란 소리. 미디어에서는 으레 '자조적으로 놀리는 밈'이 있기 때문에 영국인들도 여기에 동조해서 '우린 쓰레기 같은 영국 음식이나 먹는다'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모든 영국인들은 어렸을 때 카레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에는 전세계의 식문화가 널리 퍼져 있으며 그것들이 지금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다양한 식문화를 별로 거부감 없이 즐기고 있다. 물론 이것들이 자국의 식문화는 아니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충분히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도 없는 영국 가정식을 굳이 되살려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4. 역사적 원인

4.1. 산업 혁명

의외로 산업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영국인들이 풍족한 식생활을 했다는 증언도 많다. 대표적으로 인구압과 소빙하기가 닥쳐 빈곤에 시달리던 건륭제 시기 중국 농촌과 영국 농촌을 비교하면 영국 농민들은 중국 농민들보다 풍족한 식사를 했다.[27] 사실 대분기로 대표되는 16세기 이후 서구의 약진 중에서도 영국의 발전은 눈부신 것으로써 1650년대부터 20세기 초 무렵까지, 영국의 1인당 GDP는 줄곧 우상향해 전세계 1위였으며 덕분에 과연 대영제국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국가에 비하면 국민들이 그나마 풍요로운 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다. 즉 지금의 악명과는 달리 어떻게 보면 영국,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 서민들이 서민 식단으로는 전세계 대부분의 서민들보다 더 잘 먹는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매번 우리의 먹다남은 밥이나 요리를 받을 때마다 여러번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가 쓰고 버린 찻잎도 그들은 서로 싸워가며 가져갔고, 다시 물을 부어서 마셨다."

사절단의 구성원인 존 버로우가 쓴 <<내가 본 건륭성세>>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산(舟山)에서건 백하(白河)를 거설러 경성으로 가는 3일간이든, 어떤 백성들도 배부르게 먹고 입었거나, 농촌이 부유하고 번영한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을 주위를 빼면, 나무도 거의 없었고, 모양도 형편없었다. 집은 보통 진흙벽으로 된 단층건물이며, 띠나 풀로 지붕을 덮었다. 가끔 독립된 작은 건물을 볼 수는 있지만, 신사의 주택이라거나 최소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농가주택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주택이건 강물이건, 모두 레드리프나 와핑(영국 템즈강 가의 두 마을)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사실상 눈에 띄는 것은 빈곤하고 낙후한 모습뿐이었다"

영국의 햄프셔 농장의 한 보통 노동자의 1일 세끼 식사는 다음과 같다: 아침은 우유, 빵과 전날 남겨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점심은 빵, 치즈, 소량의 맥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감자, 배추와 ; 저녁은 빵과 치즈. 일요일에는 신선한 돼지고기를 먹는다. 산업혁명 후에 영국인의 생활은 더욱 풍요롭게 된다. 1808년 영국 보통 농민가정의 소비목록을 보면 2.3갤런의 탈지우유, 1파운드의 치즈, 17 파인트의 에일맥주, 반파운드의 버터와 설탕, 그리고 1 온스의 차(茶)가 있다.

이 기록을 보면 1700년대 후반~180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했을때 영국 농민가정의 식단은 생각보다 꽤나 풍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상술했듯이 이 시대에 활동한 성직자인 존 웨슬리가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며 아이들의 식단을 제한할 것을 제안했다지만, 역으로 따지면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전세계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들은 고기와 빵을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일 수 있는데도 버릇 나빠진다면서 잘 안먹인 것일 뿐 식량이 풍족하지 않아서 그런것은 또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심화되면서 영국은 세계 최초의 산업 혁명으로 인해서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상실하고 도시로 이주했다. 이로 인해 농촌 사회에서의 전통적인 식단은 자연스럽게 단절되었고 중세시대의 농노만도 못한 삶을 강요당했던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환경[28]은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신경을 쓸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아예 빼앗아가 버렸다. 기사. 살인적인 노동 끝에 요리할 시간도 여력도 없어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하는데, 하다못해 비스킷 살 돈도 없다보니 질량 대비 높은 칼로리를 보장하는 설탕을 퍼먹고[29], 그 단맛을 좀 중화시키고자 차에 설탕을 타서 마시는 게 아니라 설탕에 차를 부어 먹고, 힘든 삶을 잊고자 싸구려 진을 들이키는 행동들이 일상이 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 역시 산업화로 접어들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에서는 3첩 반상과 같은 기본 상차림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국밥처럼 아예 밥이 말아서 나오는 경우도 태반이었고, 간장 대신 소금, 이후에는 간을 할 필요조차 없는 고추장 양념 일색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에 들어서야 밑반찬의 가짓수가 너무 늘어나서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재밌는 건 일본 또한 비슷한 시기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규동초밥이 만들어졌다. 물론, 초밥은 에도 시대 이전부터 기원해왔지만 패스트푸드화한 것이 현대의 초밥이다.

또한, 국제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설명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전이었던 그 당시의 도시에서는 천연재료의 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신선한 음식을 싼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하여 운송을 하는 수단이나 오랜기간 동안 식료품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같은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런던은 100만 이상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운하를 통해서 마차가 끄는 운반선으로 실어온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런던의 도시 사람들은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품에 주로 의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절인 채소류와 고기, 그리고 냉장할 필요가 없는 근채류가 그것이다. 이런 식재료만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식문화를 향상, 유지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문제가 조리법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고기건 야채건 선도가 떨어지는 탓에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바싹 굽는 습관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 보존기간이 길지 않은 신선한 채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계층에서는 거꾸로 이것을 활용한 요리가 부와 계급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어 오이 아이스크림이나 오이 크림케이크같은 괴악한 디저트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맛이 아닌 희소성을 훌륭한 음식의 기준으로 잡다보니 생겨난 비극이다. 그나마 현대인의 눈에는 비교적 정상적인 요리로 보이는 오이 샌드위치도 이와 같은 이유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런던 사람들이 남 부럽지 않게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냉동, 운송 기술이 나올 무렵에도, 그들은 이미 빅토리아 시대의 형편없는 식습관에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식재료에 들어갈 돈으로 영국의 희석식 소주라고 부를 수 있는 싸구려 술인 (Gin)을 사서 마셨다. 칵테일 중에 진을 베이스하는 종류가 많은 것은 맛없던 진을 맛있게 먹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라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er-street-and-Gin-lane.jpg

맛없는 식사를 먹을 돈으로 기분 좋게 마실 술을 사 마시는 격으로 이 당시의 정신나간 사회상은 "진의 거리"[30]라는 삽화로 묘사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을 40세로 만든 원인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전근대 사회에서 평균 수명이 24~25세에 불과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증가한 수치이다.[31]

1820~1830년대 맨체스터, 리버풀 등 공업도시에 살았던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겨우 15~19세였다고 한다. 다만, 이때 평균수명이 매우 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엔 약간의 통계적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처참한 위생 환경 및 식습관, 과도한 아동 노동[32]으로 인해 아동 사망률이 극도로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화 과정은 굳이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어지간한 나라들은 다 거친 것이다.[33]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제대로 국가 간의 비교가 요구된다.

4.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 공급되던 식품들 중 특징적인 6가지 식품들[34]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당시 영국의 배급제를 설명하는 미국 방송 프로그램.

Oh, the Glories of Pre-War Days![35]

1939년 후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의 유보트 공격으로 인해서 해상 봉쇄를 당하자 영국배급제를 시작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시하는 공짜 배급제가 아니라 1인당 1주일에 살 수 있는 생필품의 갯수를 제한하는 것이다.[36] 얼마 뒤 1940년대 부터는 고기, 시리얼, 비스킷, 설탕, 버터, 홍차, 베이컨, , 유제품 등 거의 모든 필수 식료품으로 확대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전시에 식량 증산 운동을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봤지만, 결국 도시에서는 제대로 된 식자재가 항상 부족했으며 당시 농부들이 배급제 하에서 몰래 작물을 빼돌린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외곽에서 작물을 생산하는 농부들을 제외하고는 정상적인 요리를 만들 재료조차 모자랐다. 덤으로 수많은 식당카페들이 식료품의 부족으로 인해 폐업을 하게 되면서 영국 요리가 더욱 창궐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배급제에서 빠진 품목이라면 피시 앤드 칩스 정도인데, 예외없이 영국 요리의 새로운 전설을 창조하고 현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당시에 미국에서 질리도록 보급해준 스팸으로 전쟁을 버티고 연명했다.

파일:Three_young_children_enjoying_a_portable,_healthy_snack_a_carrot_on_a_stick.jpg

영국 역사 속의 배급제(영문).
우리는, 전후에도 욕조에 완전히 앉지 않으면 무릎까지 차오르지 않는 물에서 목욕을 했어요. 당근을 씹으면서 달다고 생각하며[37][38] 우리는 부모님에게 전쟁 이전에 대해 말해달라고 조르죠. 그리고 그들이 말해주었던 담배 모양의 초콜릿통조림이 아닌 진짜 파인애플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죠.[39][40]
영국작가 수잔 쿠퍼(Susan Cooper)

(전후) 인생이란 살아남는 것,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1948년에는 배급량이 전시 때보다도 떨어졌다. 분필을 씹는 것 같은 맛이었다.[41] 그리고 으깬 감자에 돼지기름, 약간의 설탕, 말린 과일밀가루를 넣고 후식(dessert)이라 부르는 것이 평범한 레시피였다.
세라 라이얼(Sarah Lyall) The Anglo Files: A Field Guide to the British, 2008, P. 212)

기존의 식당들이 없어진 대신에 폭격으로 집을 잃었거나 배급권이 부족하거나 기타 등등의 사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들어선 시설이 1940년에 윈스턴 처칠이 입안한 '브리티시 레스토랑(원 이름은 '지역사회 급식 센터)'이었다. 여기에서 영국 정부는 배만 채울 수 있는 정도 수준의 소박한 음식[42]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영국인들의 외식 횟수는 전쟁 시기에 도리어 2배 가량 증가했고, 수백만명의 군인들의 단체 급식 경험 등이 더해져서 밖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문제는 칼로리는 어떻게 채웠을지 몰라도 음식의 질이 형편없었다[43]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이 끝나자 전시 원조를 끊어버리면서 영국 경제는 급격하게 추락했고, 이로 인한 식량 공급 문제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영국에서는 배급제가 1954년 7월 4일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식문화 풍경 또한 계속 이어졌다. 미국이 승전 이후 1가정 1자동차가 가능해질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패전국인 서독동독, 일본, 이탈리아가 전후 복구를 끝내고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을 순간에도 영국 정부는, 아직도 버터의 양이나 고기의 무게 같은 것이나 따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정부는 약속했던대로 성인 한명 당 베이컨 및 햄 4온스, 버터 4온스, 설탕 12온스 등을 배급하겠다는 약속을 계속 지키긴 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의 생활은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처절했다. 당시 나이 어린 학생들이 겨우 식빵 2조각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이며, 이 당시 일부 영국인들은 15년 전(대공황 당시)의 서민 경제가 훨씬 더 나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시 동안 영국 정부는 여행을 사회적인 해악 정도로 치부하는 캠페인을 실시했고, 1950년대에도 해외여행은 꿈도 못꾸고 국내여행도 주저하던 런던 시민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오락거리 중 하나가 차타고 히스로 공항에 가서 의자에 앉아서 비행기가 뜨는걸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이 자동차도 상태가 극히 안좋아서 여름에만 운전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풍족함에서 나오는 요리와 맛에 대한 상상력 확대는 애시당초 꿈꾸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이런 식의 검박한 식문화에 적응해버리고 말았다. 전후에 레스토랑을 다시 연 주인들은 '전쟁 전과 같은 식욕이 사라졌다', '영국인의 위장이 크게 줄어들어버렸'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소량으로 먹기 좋게 차려낸 요리였다'고 한탄했다. 게다가 1942년 5월에 시행된 가격제한법이 1950년까지 유효해서,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에 청구할 수 있는 금액이 5실링으로 제한되고 내놓을 수 있는 요리가 세가지로 제한돼서 외식의 수준이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44] 당시 런던 시내의 유명 레스토랑의 별미로 꼽힌 음식이 '크림을 넣은 스팸 캐서롤'이나 '정어리감자밭의 젊은 부녀자들[45]'였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알 수 있다.

문제는, 배급제가 끝난 1950년대 이후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호전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서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광산업계의 파업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의 이른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영국병 참고) 때에는 사회 전체가 파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일 정도로 나라 전체가 스톱했다. 아니 후진한 건가? 그 당시에는 묘지를 파는 인부들까지 파업해 내각은 쌓이는 시신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고. 오죽하면 1976년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금융구제를 받았을까?
(...) 최근에 경작이 끝난 땅에 콜리플라워를 심습니다. 이런 유리 온실은 신선한 야채가 모자라는 겨울에 채소를 제공해주는 귀중한 자산이었죠.
-The Wartime Kitchen & Garden, BBC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1px-Kriegsplakate_4a_db.jpg
직접 채소를 길러먹으라고 권하는 당시 포스터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고기류의 배급이 모자랐던 탓에 없는 땅까지 파내서 곡물과 채소류를 자체적으로 경작해서 먹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의 영국인들은 영양학적으로 가장 균형 잡힌 식사를 했다는 점이다.[46] 이런 상황에 맞는 요리법도 개발되었다. 가정학자 마거릿 패튼[47]배급제에 시달리던 워킹맘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레시피 개발에 앞장섰다. 가짜 크림, 분말 달걀, 다람쥐 고기 같은 걸 썼다고.

2차대전 종전 후 영국미국의 푸들 혹은 세컨드 보스 정도 취급이지만, 그 이전까지는 윈스턴 처칠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얄타 회담에 초대되는 등 세계구급으로 놀았던 거대한 대영제국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악독하고 영양가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배는 차니까)은 음식들은 1930~1940년대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그 때는 우리가 어마어마했었지?" 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은 이 세대의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영광스러웠던(?) 전쟁 시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라 라이얼에 의하면 이들은 해가 완전히 져서 자연채광이 없어질 때까지 집안의 전등을 켜지 않고, 욕조으로 선을 그어 그 위까지 이 넘치지 않게 하고 또 목욕한 물을 쓰지 못할 때까지 재활용을 한단다. 오죽하면 엘리자베스 2세[48]도 지금까지 버킹엄 궁내의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작아진 비누들을 모으고 전등·전구들을 일부러 희미한 걸로 바꾸고 다닐까? 이게 단순히 일시적으로 그친 일화가 아니라, 2013년에도 궁전 복도에 비치된 캐슈넛이나 아몬드 등의 견과류를 경비병들이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접시에 줄을 그었다는 일화가 기사로 전세계에 게재되었을 정도니 말이다.[49]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의 부족한 식량 상황으로 인해 영국인들은 맛을 포기하고 끼니를 잇는 수준의 배급으로 연명해야 했고, 식문화가 발달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요소들(여행이나 외식) 또한 전후에도 한동안 심하게 억제되었기 그게 식문화로 자리잡아버렸고, 요리의 수준도 기대치도 상상력도 전부 박살난 채로 한동안 유지된 것이 영국 요리에 대한 악평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5. 결론


영국 요리악명을 얻게 된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영국은 지리적 한계로 식재료 풀이 부실했고 향신료 사용이 미비했으며, 요리 문화 자체가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식문화로 만들어졌다. 이는 청교도 교리와 결부되면서 더욱더 강해졌고 금욕적인 식문화를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요리에 정성을 들이는 것 자체를 악마의 유혹이라며 터부시하게 되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영국의 국민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이 탄생한 것은, 영국 요리가 변화할 수 있었던 찬스인 근대화 시기에도 이를 저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 이주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하여 그나마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약했던 전통 농촌 사회에서의 식문화마저 상실하고 이를 회복, 유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시대까지 이어진 금욕주의를 무조건적으로 강조하는 교육제도는 열악한 식문화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권장하고 합리화하게 되었다.

여기에 추가로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영국의 경제는 극도로 침체되어, 근현대 시기마저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후 영국의 식문화는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보급에 의지하는 식생활을 꾸려 나가며 열악한 수준의 악독한 음식들을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영국은 별로 좋아지지 않는 경제 속에서 싸고 질이 나쁜 음식만이 나돌았고 영국인들에게 이러한 식생활은 점차 당연시되어 갔다. 전후 보급은 1954년 끝났지만 어디까지나 제도의 종결이며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까지 포함하면 상당히 긴 세대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영국의 식문화'를 안 좋은 쪽으로 바꾸고 고착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50]

심지어 제이미 올리버의 학교급식 개조 프로그램 중에 등장한 급식사는 너겟을 튀기는 것 이상의 요리가 지나치게 손이 많이 간다면서 눈물을 보이는 장면마저 등장한다. 즉, 그 이상의 조리에 대해서는 경멸을 넘어서서 불필요함을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렇게 요리를 하는 과정마저도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하는 수준이니, 노력과 정성도 없이 요리가 맛있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 도저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한국의 학교에서는 모든 급식소에 영양사를 필수로 배치하면서 최소한 3개 정도의 영양학적으로 설계된 반찬을 급식에 내놓고 있으며,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부실한 학교는 급식이 사진으로 박제되어 인터넷에서 전국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환경에서 자란 한국인들이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인 상황이다.

다만, 위의 문단을 읽다 보면 의아한 느낌도 들 것이다. 유럽사를 공부했다면 자연적, 문화적, 역사적 요인을 따지고 보면 이는 영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악명의 원인으로 드는 모든 예시는 전부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영국보다 식재료의 선택폭이 좁은 북유럽 국가들은 다른 나라의 요리들과 비교했을 때 볼품없어 보이지만, 자신들의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재료를 활용하여 비린 고기신맛의 열매를 써서 중화시키거나, 숲에서 버섯을 구해 쓰고 생선을 부위별로 다르게 염장해 먹는 등 최대한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흔히 말하는 최악의 음식 수르스트뢰밍의 경우도 일단 과정만 놓고 보면 일반적인 타 발효 식품이나 한국의 젓갈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단지 염장수로 쓰인 발트 해의 염도가 생리식염수보다도 낮을 정도로 염도가 낮은 바람에 정상적인 살균이 되지 못하고 고균에 의해 발효되며 '먹을 순 있지만 최악의 냄새를 지닌' 음식이 되었을 뿐이다.

영국과 비슷하게 종교적인 이유로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했던 미국 청교도들, 스위스, 독일, 저지대 국가들에도 널리 퍼진 신교도들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 금욕주의 사상을 음식에도 적용하려 했지만, 후에는 결국 그 영향이 다른 문화와 섞이면서 중화되었다.

산업혁명과 중산층의 몰락으로 일반인들의 식생활이 완전히 붕괴된 경우도, 앙시앵 레짐 붕괴와 프랑스 혁명을 겪고 누벨 퀴진이 자리잡기 전 오트 퀴진만 존재하던 프랑스, 정체된 계급 사회로 중산층이라는 것 자체가 잘 존재하지 않던 동유럽 국가들의 예시가 있고,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 이걸 겪지 않은 나라를 찾는 게 더 빠르다.

그런데도 왜 영국 음식만 이렇게 악명이 자자할까? 다른 나라들은 전부 이런 요인을 한두 가지밖에 겪지 않았거나, 복합적으로 겪어도 오랜 세월 이어진 전통이 남아 있거나 새로운 전통을 만들 기회로 삼아 근시일 내에 어떻게든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만 해도 쌀이 모자라 1970년대에 강제로 시행된 바 있는 혼분식 권장 문화가 품종 개량과 연이은 풍년 끝에 20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마냥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길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 시기가 지나고 나자마자 쌀밥 문화는 다시금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라면과 빵 등 밀가루 음식도 주류 음식이 되었다.[51]

영국은 이를 수 세기의 역사를 걸쳐 모두 겪었고, 전부 빠져나오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총체적 난국의 완벽한 집합체가 됐고, 이렇게 오랫동안 악순환의 반복을 겪은 식문화와 사람들의 입맛은 현대에도 바꾸기 힘들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여러 요소로 인해 영국 요리나 식문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세계화가 진행 중인 21세기에는 식문화에 대한 인식이 나름 개선되고 있는 추세다.
[1] 아일랜드를 제외한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하다. 하지만 평야의 비율은 브리튼 섬이 훨씬 높다. 잉글랜드의 평야는 매우 광활하다. 특히 잉글랜드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요크셔험버,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이스트 미들랜즈와 일부 웨스트 미들랜즈, 스코틀랜드의 로우랜즈는 밀, 보리 농사에 안성 맞춤이고, 밀 농사, 보리 농사를 짓기 어려운 잉글랜드노스이스트 잉글랜드,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웨일스는 낙농, 목축업을 하기 좋은 지역이다. 영국식량자급률이 괜히 110~150을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2] 과일이 대표적인데, 하우스 농법 등의 발달로 제철에 관계 없이 모든 과일들을 구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제철에 나오는 싼 과일들을 주로 먹는 경우가 많다.[3] 현재 영국의 TV에서는 요리 프로그램들이 수도 많고 인기도 높다. 또한, 적지 않은 요리 서적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다.[4] 2012 런던 올림픽은 영국 음식에 대한 세계인의 악평을 바꿀 좋은 기회였으니 선수촌 식당의 요리사는 영국에서도 나름 잘한다는 요리사들이 투입되었을 텐데도 선수촌 음식은 여전히 많은 악평을 들었다. 실제로 대다수의 국가들이 선수들 컨디션이 나빠져서 성적이 안 나올까봐 헐레벌떡 자국음식을 공수했었고, 영국 음식 수준을 잘 아는 유럽권 타 국가들은 처음부터 그냥 여러 자국 식재료를 가져갔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5] 고대-중세 시대 요리책인 아피키우스 요리책에 기고됨.[6] 그런데 애초에 그 베어 그릴스조차 맛있는 음식은 사기 충전에 도움이 된다면서, 늘상 하는 벌레 먹방 대신 랍스터나 사슴고기 등의 실제로 먹을 만한 음식을 먹으면서 해당 주장을 한다.[7] 이런 사례의 대표격으로 프랑스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의 영국 요리 및 타국요리 비난 사례가 있다. "영국은 핀란드 다음으로 형편없는 음식의 나라이다."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영국 총리실 대변인은 "때로는 언급을 안 해야 더 좋을 일도 있는 법이다"라고 점잖게 논쟁을 피해 갔다. 기사를 쓴 프랑스 기자는 영국 총리 대변인의 말을 두고 "영국은 솔직히 자신들의 문제를 인정하는 민족이어서 존경스럽다"고 빈정댔으며 이후 시라크의 말은 영국 요리에 대한 악평에 자주 인용되는 대표적인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 일화는 프랑스인들의 요리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자국의 잣대를 멋대로 적용해 타국을 비난하는 지나친 오만함을 비판할 수도 있는 일화이다. 실제로 이 발언은 유럽 타국의 엄청난 반감을 사 결국 프랑스는 2012년 올림픽 개최권을 영국에게 빼았겼고 자크 시라크는 생전에 자신의 조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8] 주로 신흥 부르주아 계층 등, 소위 말해 신흥 기득권, 평민계 상류층 계층.[9] 현대에도 영국인들은 매주 금요일 점심에 피시 앤드 칩스를 먹지 않으면 뭔가 찝찝하다고 할 정도이다.[10] 이웃나라 아일랜드 요리는 반대로 스튜나 삶는 요리가 많은데, 이는 영국의 식재료 수탈으로 잡부속 고기와 감자만 가지고 양을 불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11] 악마의 정원에서 - 스튜어트 리 앨런 저 中 인용.[12] lbid.,P152; 이지은, 감각의 미술관' 2012, p167 참조.[13] 애초에 현대의 성공회가 헨리 8세 시절의 성공회처럼 가톨릭에 가까워진 이유는 옥스퍼드 운동 때문이고, 그 전에는 그냥 전형적인 칼뱅파 개신교에서 주교제만 첨가한 수준이었다.[14] 그리고 그 어머니는 당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15] 퍼시 파커, '존 웨슬리의 일기',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1984.[16] 예수는 천국은 아이같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 했는데 이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갈 수 없음과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인정하고 아이처럼 온전히 예수의 공로에 의지해야만 하는 의존성을 가리킨 것이지, 아이가 선하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성경의 주장은 성악설이며 따라서 이는 아이러니가 아니다.[17]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18] 새로 태어난 아이의 지성은 마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다름없다. 비모순의 법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선험적이 아니라 후천적이다.[19] 직업은 외과 의사. 귀족 혈통이며 1810년에 출생하여 1879년에 사망했다. 총 12권의 육아 관련 서적을 저술했으며 그 중 몇 권은 부인 Frances lzon과 공동저술이다. 그 중 2권은 사후에 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후손들은 2020년대에도 영국에 있다. 다만 파이 헨리 채버스의 외아들 Reverend William Izon Chavasse는 아버지처럼 의학이 아니라 예술 분야에 종사했고 두 아들 중 막내 John Evelyn Chavasse가 2살의 나이로 죽자 그 충격으로 신부가 됐다. 그가 부모의 육아법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20] 구글 도서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21] 당연하지만 양이 이렇게까지씩이나 늙으면 악취가 상당하다.[22] 물론 이런 변태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에도 없는 건 아니었는지 그 유명한 장 자크 루소 역시 에밀에서 육식이 영양분도 불충분하고 면역력을 떨어트리는 등 악영향만 끼친다고 써 놓은 바 있다. 하지만 루소는 18세기의 인물이다. 위로 올라가서 저 책이 나온 연도와 비교해 보라. 결정적으로 루소는 채식까지 깎아내리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유모와 아이 양쪽에 채식을 권장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영국인의 식재료에 대한 관점이 전 세기의 인물만도 못한 상황이었다는 진실을 알 수 있다. 루소의 프랑스 수준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편은 아니라서, 당장 조선에서도 소설 흥부전에 아이들이 음식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흥부가 가슴 아파하는 대목이 나오고 18세기의 학자인 연암 박지원도 직접 자식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보내고 제자들에게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23] 여기서 올리버 트위스트고아원에서 배고파서 음식 한 그릇 더 달라고 말한 것 때문에 고아원 원장으로부터 악마에게 사로잡힌 미치광이 취급을 당했을 정도이다. 심지어 그 음식이 무슨 비싸고 맛있는 고기 요리도 아니고, 희멀건한 죽 한 그릇에 불과했는데도.[24] 물론 마르크스 시절에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개선되고 있던 시대로 후술하겠지만 1820~1830년대에 주요 도시에서의 평균 수명이 극악할 수준으로 낮은 것에 비해서는 개선된 것은 시간이 지나가며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마르크스 같은 인물들이 출현함으로서 자본가들도 이전만큼 노동자를 착취하기는 힘들어졌다.[25] 사실, 교육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고대 그리스 때부터 젊은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한 시설은 신체를 단련할 수 있는 체육관이었다. 체육관에서는 우수한 군인들을 양성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으며 체조, 격투, 레슬링, 검술, 마장술 등을 익히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뜀틀은 말에 올라타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실내 운동이었다. 그렇게 체육관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레 땀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 같은 시설과 책상이나 의자 같은 교육에 필요한 도구와 시설들도 같이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숙련된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교사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몸싸움만 아니라 머리 싸움도 잘 하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 군사학, 철학, 예법, 언어, 문자, 과학 등등도 같이 가르치게 되어, 오직 신체 단련만 담당했었던 체육관은 어느 샌가 아이들의 기초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시설인 학교로 기능이 확장하게 된다.[26] 심지어 어떻게 현지화 되었다는 영국식 카레는 일본을 거쳐 우리가 아는 형태의 카레가 되는 동안 영국에서는 집 구조의 변화로 인해 가정식에서 전문점용 음식으로 바뀌고 말았다(...).[27] 산업 혁명 이전의 영국 요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미국 요리 문서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영국 정착민들이 가져온 식문화가 신대륙의 풍족한 물산 덕분에 유지된 미국과 다르게 영국 본토에서는 산업혁명, 전쟁 이후의 배급제로 인해 가정식이 그냥 증발해버리고 말았다.[28] 농사는 노동 시간을 여섯시간에서 열두시간으로 늘린다고 생산이 두 배가 되는건 아니지만 공장 노동은 두 배에 가까운 유의미한 생산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공장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두 배로 굴리려고 애를 썼고, 식사 시간마저 박탈해 가면서, 아동 노동을 시키면서까지 생산 증가를 위해 온갖 수단을 썼다. 거기에 이윤을 위해 임금을 '안 주느니만 못한' 수준으로 주고, 반발하면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라며 해고 및 해고 협박으로 일관.[29] 이전까지 매우 비쌌던 설탕은 플랜테이션 등으로 인해 산업 혁명 당시에는 하층민들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상당히 내려간 상태였다.[30] ('맥주 거리 / 진 거리', 윌리엄 호가스, 1751. 2차 출처 위키피디아)[31] 물론 저 24~25세라는 짧은 수명은 높은 영아사망률과 전쟁으로 인한 청년층 사망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제로는 저것보다는 높았다.[32]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이 하루 10시간도 넘게 일하는 경우가 흔해 빠졌다.[33] 저장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19세기 한정.[34] 군용으로 대량생산되는 빵, 스코틀랜드에서 쏟아져나오는 감자들, 파이, 파우더 형태의 건조 달걀, 우유, 그리고 전 세계에 주둔 중인 영국 군인들에게 줄 특별식으로 대량생산되는 크리스마스 푸딩[35] 제목은 "오, 전쟁 이전 (기간)의 영광이여!" 라는 뜻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자부하던 대영제국을 그리워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36]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같은 형식의 배급제를 실시하였다.[37] 설탕과 유제품 비축량이 계속 부족해지면서 아이스크림 생산이 엄격하게 통제되자, 정부에서는 '아이스크림보다 당근이 건강에 좋다'고 선전하면서 나무 막대기에 아이스바 대신 생당근을 꽂아 팔도록 했다. 2차대전 당시 설탕 부족 현상은 다른 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나치 독일의 경우 감자에서 추출한 당을 정제해 설탕을 생산했고, 물자에 여유가 있는 미국조차 설탕 유통을 통제해야 했다.[38]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를 배경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첫번째 시리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에드먼드 페벤시로쿰에 넘어가 하얀마녀의 앞잡이가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도 작용했다.#[39]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후 작품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자주 언급된다.[40] 사실 당근 케이크는 영국 요리가 아닌 스위스 요리였지만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뭔가 이상한 물건(?)으로 둔갑했고 그게 유명해진 것이다.[41] 실제로 대영제국 시대 때 의 표백을 위하여 분필이나 백반을 섞었다고 한다.[42] 제공되는 음식은 수프, 구운 고기, 채소, 푸딩, 커피 한잔 정도였다고 한다[43] 프랜시스 패트리지라는 작가가 전시에 방문한 카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반죽처럼 걸쭉한 희멀건 수프'로 시작하여 '뭉텅뭉텅 갈아놓은 희멀건 고기에 희멀건 과 희멀건 감자 몇 덩어리'와 '묽은 사과 스튜'와 '묽은 죽'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나라의 미래까지도 그저 허여멀겋게 보였다고.[44] 다만 부유층은 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직접 기른 재료를 고급 레스토랑에 가져가고 코스를 추가하는게 아니라 코스에 나오는 디쉬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전시에도 여전히 전쟁 전의 호화로운 요리를 즐겼다고 한다.[45] 으깬 감자에 건조한 달걀 가루를 뿌려서 만드는 요리이다.[46] 일례로 영국 정부는 밀가루 소비를 줄이기 위해 소위 "국가빵(National Loaf)"이라는, 정제하지 않은 통밀로 만든 을 1942년부터 장려했는데, 흰 빵에 비해 더럽게 맛이 없었지만 흰 빵에 비해 영양가가 더 풍부하고 밀가루 수입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47] 2015년 6월, 99세로 별세.[48] 그녀도 전쟁 당시 전차정비공으로 활약한 전쟁세대이다.[49] 물론 견과류 얘기는 살짝 와전된 것이다. 이 견과류는 여왕의 간식으로 왕실 직원이 궁전 복도에 차려놓은 것인데 오며가며 집어먹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줄로 그어 표시한 뒤 "내 땅콩에 그 끈적거리는 손 치우라"고 메모를 적어놓은 것이었다.[50] 당장 현대 한국에서 당연시되는 '겸상 문화' 또한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없던 문화였다. 조선시대만해도 '독상'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6.25 전쟁과 전후 극빈국의 세월을 보내면서 여유가 없다 보니 겸상 문화가 생긴 것이다.[51] 반면 이렇게 복원되지 못하고 영국 요리처럼 망가져 버린 것이 바로 한국의 전통주 문화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방마다 다르고 가문마다 다르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찬란하게 번창했던 술 문화가 일제강점기-한국전쟁-군사독재 시기를 겪으면서 완전히 실전되고 만 것. 현재 한국의 주요 주류 소비 문화는 전통주가 아닌 보급형 희석식 소주가 대부분이며 2020년대에서야 브랜드 맥주와 전통주 문화가 일부나마 원상복구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