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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설

나무위키에 등재된 동양의 인성론 문서
맹자순자고자왕충정약용한유추연
성선설성악설성무선악설성선악혼설성기호설성삼품설음양오행설


1. 개요2. 설명3. 서양4. 종교와의 관계5. 인간불신/인간비판/사탄드립과의 관계6. 정치적 관점7. 철학적 관점8. 관련 문서

1. 개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무릇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이 선이라고 말한 것이란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게 다스려진 것이었으며, 악이라고 한 것은 치우치고 음험하고 어긋나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이 선과 악의 구분이다. 지금 진실로 사람의 본성을 올바르고 질서 있으며 공평하고 다듬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성군은 무슨 소용이 있고 예의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1]
순자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관점이다. 이 뜻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가 아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다"라는 말이다. 이 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올바르고 질서 있으며 공평하고 다듬어진 것인 규범으로 자신을 수행해야 한다며 법과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장한 것이 성악설이다.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으로는 악으로 빠지게 되므로, 인간 밖에 있는 법과 규범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순자의 주장은 법가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성악설을 지지하는 근거 중 하나로, 인간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인간에 비해 더 많은 권리와 부를 누린 적이 없었다는 결과가 있다. 즉 원시시대가 지나고[2] 사유재산과 계급이 생긴 이후,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종족의 넓은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소수의 계층이 나머지 다수의 계층보다 부와 권력을 독점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똑같다.[3] 즉 인간의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재화와 재물이 늘어나는 등 환경이 좋은 쪽으로 바뀌어도 항상 소수의 사람이 그 결과를 누렸으며, 그 반례가 존재한 적이 한 차례도 없기에 인간의 본성이 절대로 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4]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다수가 선인 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구조가 변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기도 하다.[5]

실제 현대 사회에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먹고도 남는 식량이 생산됨에도 세계 인구의 60%는 굶주림에 놓여있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모든 발명품들이나 사상을 포함하여 세계사 이래 인간이 발견/발명한 모든 사회 작용요소는 단 한 번도 (악인에 의해) 악용되지 않은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긍정성에 기대어 뚜렷한 대안이나 안전책 없이 실행된 모든 사회적 시스템은 원래 기대했던 기능보다는 큰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 또한 인간의 본성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중 하나가 규범/규율이 없는 공간인데, 대표적으로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악플과 트롤링을 예로 들 수 있다. 엄격하게 관리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소통 공간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덧붙여,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고 해도 집단이 될 경우 서로간에 마찰과 갈등으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7]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선한 본성이 모인 집단일수록 더더욱 선을 지향해야 하나, 현실은 정반대인 만큼 현실적인 증거들을 놓고 볼 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할만한 합리성이 없다. 이런 양상의 끝이 바로 핵무기이다. 인간의 악한 본성 때문에 끊이지 않는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선한 말이 아닌 "절대적인 무력"을 소유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이 오늘날 여러 국가가 핵을 보유하여 힘의 균형 및 경계라는 명목 하에 핵무기까지 터지면 그땐 인류 존폐 위기까지 갈 수 있으니 우리 그만 전쟁을 멈추자 라고 암묵적 합의를 "무력"으로 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논증 자체가 인간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 본성의 단계에는 논의점이 있다.[8] 성격, 문서 참고.

악하기 때문에 선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포하는 극단적인 비관주의를 견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고 위에서 보이듯이 악하기 때문에 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 등을 통해 훈육하고 계도해야 한다는 입장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본성을 따르는 사람이 다수기에 소수의 악한이 생기더라도 사회적으로 빠르게 처벌되며, 사회적인 배척이 강하면 강할수록 생존 본능에 의해서라도 범죄는 줄어든다. 인간의 본능에는 이기주의적 요소와 이타주의적 요소가 혼재되어있기 때문. 하지만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법이나 규범이 없을 경우 한계를 모를 정도로 막장이 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9] 이기주의적 개인들은 자신의 사상과 목표를 위해 대중심리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항상 특정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이 좋은 소문보다 더 빨리 퍼진다는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자신한테는 관대하고 타인한테는 박한 평가 습성, 남보다는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인간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그룹과는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왕따 문화에서도 성악설이 어느 정도 증명되는 셈이다.
성악설은 우리의 근본적인 내면을 알 수 있게한 요인이다.

2. 설명

성선설에서 본성이 선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대가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행하는 선행을 예로 드는 것에 비해 성악설에서는 인간의 부조리함을 예로 든다. 설령 선하게 행하고 싶어한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은 원래부터 인간이 그렇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악설은 의지에 의한 행동보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불이 났을 때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입구로 몰려 압사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분하게 질서를 잘 지키면서 현장을 빠져나간다면 그것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 결국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교육이나 훈련을 받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선함은 후천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보통 성악설에 대한 오해는 인간이 잔악한 짓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악설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란 기본적으로 혼돈에 질서가 부여된 상황이기 때문에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곧 혼돈이며, 딱 그 부분만이 악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선이 지배한다. 즉 선한 관념이나 규칙에 지배 당하고 있다는 관점을 사상 속에 깔아두고 있다면 그것은 성악설로부터 출발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은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즉, 성악설은 근본적으로 교화를 통해 개선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10]

이러한 이유로 성악설에서는 위선을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고 '그래도 나아지려고 애는 쓰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11] 그리고 그러한 '위선'을 지속하는 한, 즉 그 마음이 어떻든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한, 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는 의도가 어쨌든 윤리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순자는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예의와 교육으로 끊임없이 교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애초에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들, 그렇다고 "난 원래 이런 놈이니까"라고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자포자기해서 스스로 무언가 윤리적으로 변화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12]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혔을 망정 그것을 감추고 사회의 공인된 가치를 지키려는 행위가 위선(僞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이비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무랄 데 없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내가 따로 있는 사람 즉 위선자들을 맹자는 '향원(鄕原)'이라 부르며 경멸했지만, 순자처럼 인간들을 이기심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향원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대상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그러한 자연적 여건 속에서도 공공선을 실천해 나가는 '노력가'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나 순자의 윤리설은 인간이 이기심을 갖고 있으되 그 이기심에 마냥 굴복하지 않고 그 이기심의 유혹 속에서도 공공선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기심과의 갈등에서 이기심을 이기고 선한 행동을 택할 때 순자나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어느 정도는 내로남불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고 사람들 앞에서 착한 인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 그게 어쩌다 '삑사리'가 나는 상황이 터져서 가면이 드러나고 지금까지 다 위선이었느냐고 매도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 뿐이지만, 그 가면이 드러나기 전에는 크든 작든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모습,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한 '영업용 얼굴'을 다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 행동을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 항목에서처럼 '위선 떨고 있네', '가식 부리고 있네'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다. 괜히 드라마 검블유에서 민홍주 대표의 대사로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였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게 아니다. 강준만도 지적한 것이지만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본의와 상관없이 사회에서 어떤 한 가지 행동으로 인해 위선으로, 혹은 위악으로 분류되는 일은 인간관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나한테 욕 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찍어누르면서 분노하지 않은 척 평온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엄밀하게는 '악한 의도를 가리려 선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위선의 범주에 들 것이다.

위선을 문자 그대로 '선한 척 가장하는 행위' 일체로 정의해서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그런 척 하는' 것 자체를 '위선'이라며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결코 현명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으며,. 어떤 사람 앞에서 자기 속내를 숨겼다는 것 자체를 위선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행동하는 위선은 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은 아니다. 자기 만족이든 자신의 이득이라서 하는 행동이든, 누군가는 도움을 받게 된다면 악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악설의 관점이다. 그리고 본심이 어떠하든 '위선'이라는 행위 방식을 택하고 있는 한 그에게 무언가 개선을 요구할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절대악에 비하면 타협의 여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이나 정치학에서 위선을 악으로 분류하면서도 마냥 배척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를 주장하는 순자의 성악설 외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를 주장하는 맹자의 성선설과, 둘 다 아닌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상태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고자성무선악설이 있다.

3. 서양

서구권에서도 이러한 성악설적인 주장들이 있어왔다. 특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원죄론의 영향이 컸다.

일반적으로 토마스 홉스가 성악설의 순자와 함께 자주 거론되고 있다.# 마키아벨리 또한 이러한 성악설과 상당히 가까운 주장을 하였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성악설에 가깝게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도덕을 초월하여 행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독교에서 원죄론을 구체적으로 정립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로 보며 마르틴 루터장 칼뱅은 종교 개혁 과정에서 기존 원죄론에서 더 나아가 노예 의지론과 전적타락론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일말의 선도 행할 수 없는 상태로 보았다.

임마누엘 칸트 또한 '악의 급진성'이라고 표현하며 성악설을 주장했다.

4. 종교와의 관계

기독교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이유인 '유혹에 넘어간 타락' 을 원죄(原罪)로 보고 있으며, 최초의 인간이 지은 원죄가 후손에게도 이어지므로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태생부터 죄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닌 한계이자 본성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가톨릭이나 정교회보다 개신교가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하다. 다만, 초기 인간은 완전하게 탄생되었고 첫 인간의 죄가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개념 상 모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그 죄가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에게 악한 본성이 생겼다고 보기도 하기에 어느정도는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유식 계열 불교는 인간은 욕망하고 집착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데 역시 성악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역시 모든 인간은 불성(佛成)을 갖고 태어난다고 보기에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13]

대부분의 종교는 (法)과 같은 강제력은 사용할 수 없기에, 수 많은 금기(禁忌)와 금식,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통해 인간의 악성(惡性)을 다스리고자 노력한다.

5. 인간불신/인간비판/사탄드립과의 관계

클리셰에서도 인간불신, 인간 비판, 사탄드립도 성악설과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성악설과의 차이점은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악하다고 바라보지만 그래도 법률과 교육을 통한 교정 및 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성악설이다. 인간 비판과 사탄드립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면서 여기에다 인간 자체가 구제불능이라서 개선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거나 더 나아가 만악의 근원인 인간이 그냥 없어지는 게 낫다고 보고 해치거나 심지어 말살하려 드는 것이다.[14]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성악설은 본능적인 행위를 무지함·무식함에 맞추고 있지만, 인간 비판은 본능적인 행위를 악행에 둔다. 즉,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에서는 성악설은 (교화가 안 된 상태에서)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무지·무식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본능적이라고 여긴다면, 인간비판과 사탄드립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재미삼아서 사람을 죽이는 게 본능적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고 평하는 건 덤.

하지만 이건 인간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실제 짐승도 순전히 재미로 다른 동물을 사냥하거나 성욕에 의한 강간 같은 행위를 행하기도 한다. 오래 굶주린 경우 배가 고파 자기 새끼를 잡아먹거나 유희를 위해서 살육을 하는 경우도 야생에서 의외로 흔하기에 이기성은 인간만의 특수성이 아닌 생물 전체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입장에서 귀여운 고양이도 더 작은 생물들에겐 호랑이보다도 잔인한 짐승이며 같은 고양이에게도 상당히 잔인한 면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과반수는 인간만이 재미만을 위해 다른 동물을 사냥하거나 성욕에 의한 강간 같은 행위를 행한다는 게 아니라 인신매매장기매매, 스너프, 고문, 사이버 불링, 마녀사냥, 전쟁처럼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제시하면서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고 평하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존본능만을 따르는 짐승이 굳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능한 예시. 당연하지만 인간 찬가 입장의 사람들은 이런 걸 보고 단지 그 사람들에게만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지, 인간 자체가 짐승보다 쓰레기라고 하는 건 매우 불쾌해한다.[15]

심지어 짐승이 아닌 인공지능도 근본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으면 약자들을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로 보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짐승이나 인간과 달리 단어 제한의 차이나 감성만 없을 뿐이다. 인공지능은 계산상 이득만 있으면 선이든 악이든 행하는 극단적인 기회주의자[16]이며 악을 행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제한이 걸려 못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점 때문인지 성악설 주장자는 그나마 성선설, 인간찬가 주장자와 싸움은 안 나지만 인간혐오나 사탄드립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성선설, 인간찬가 주장자와 만날때마다 싸움이 터진다.[17]

6. 정치적 관점

7. 철학적 관점

8. 관련 문서


[1] 옛날에는 질서(秩序)와 혼돈(混沌), 진위(眞僞), 시비(是非), 호오(好惡), 선악(善惡), 미추(美醜), 귀천(貴賤) 등을 딱히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질서는 참된(眞) 것이요, 참된 것이 곧 옳은(是) 것이요, 옳은 것이 곧 좋은(好) 것이요, 좋은 것이 곧 착한(善) 것이요, 착한 것이 곧 고운(美) 것이요, 고운 것이 곧 값진(貴) 것이요, 값진 것이 곧 거룩한(聖) 것이다. 즉 질서의 반대인 혼돈은 그릇되고 나쁜 것이 된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감안하여 보지 않으면 자칫 핵심을 곡해할 수 있다.[2] 그 원시시대조차 행복이 공평하지 않았다. 현대의 야생동물도 계층과 계급이 있고,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당하는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3] 20대 80의 법칙처럼, 전 세계 부의 80% 이상이 상위 20%의 사람에게 속해있다.[4]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선한 본성이 다수가 되어 소수의 사람이 다수보다 행복하도록 사회가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단순히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는 소극적 요소를 넘어 적극적으로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의지적인 요소를 의미한다.[6] 그 예로 공산주의전체주의, 공동체주의 등은 다 같이 협력해서 모두 이익을 얻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모두 부정적인 요소가 중점일 정도로 변질되었다. 특히 한국의 공동체주의는 집단주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변질된 상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7]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악행을 벌여도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명목으로 공리주의를 내세워 핑계로 합리화시키기 때문.[8] 바꿔 말하면 현재 인간이 저지르는 악으로 규정된 행동들을 실제로는 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뷰류가 아직도 많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역으로 성악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9] 무정부·무통제 상태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나, 전시 상황에서 일어나는 전쟁범죄 등이 대표적이다.[10] 오히려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에, 악한 본성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선해지려는 행위를 굉장히 위대한 행위로 간주한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서 살아가려는 수준의 의지적인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11] 물론 이 위선은 마음 속에서는 오만 더러운 감정이 일어도 '사회적 기준 내지 본인의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저질러놓고 난 뒤의 뒷감당도 생각해야 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말하는거지, 악행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든 아닌 척 덮으려고 하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12] 자포자기는 순자뿐 아니라 맹자도 부정적으로 보았다.[13] 애초에 불교의 육도윤회 모두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예시로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일개 축생에 불과한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작품 결말에서 투전승불이 되었다. 결국 짐승조차도 노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세계(우리가 사는 현세)는 가장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14] 창작물에 따라선 아예 인간은 악행을 하며 사는 것이 옳다며 악행을 권장하거나 악행은 타고난 권리(=생득권)임을 설파하는 캐릭터들도 볼 수 있다.[15] 인간 찬가에서 중요한 건 이런 인간의 악성 마저 인정하고 이해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더 앞으로 나아가자 설사 그것이 위선이고 면피라고 해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앉아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까.[16] 실제로 게임에서 착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도 결과가 선한 방향으로 흐르거나 이득이 된다면 학살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가장 착한 인공지능은 아예 지능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도 있다.[17] 인간 찬가 주장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고자하는 것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앉아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 인간 비판 주장자 입장에선 짐승이나 애들도 이 세상이 지옥보다 못하다는 걸 아는 세상에 짐승이나 유치원생보다 못한 지능을 가졌다며 인신공격을 하기도 하는데 이게 길어지면 결국 감정 싸움밖에 되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