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9 21:43:40

이브샴 전투


제2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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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샴 전투
영어: Battle of Evesham
파일:이브샴 전투.jpg
시기 1265년 8월 4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이브샴
원인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을 둘러싼 에드워드 왕자시몽 드 몽포르의 대결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의회파 귀족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왕자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파일:300px-Arms_of_John_de_Warenne,_6th_Earl_of_Surrey_(d.1304).svg.png 존 드 워렌
파일:Blason_Guillaume_de_Valence.svg.png 윌리엄 드 발랑스
파일:330px-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로저 모티머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시몽 드 몽포르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앙리 드 몽포르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기 드 몽포르
파일:135px-Arms_of_Mountford_(of_Beaudesert,_Warwickshire).png 피에르 드 몽포르
파일:300px-Arms_of_John_Segrave,_2nd_Baron_Segrave_(d.1325).svg.png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주니어
파일:330px-Blason_Thomas_Le_Despencer.svg.png 휴 르 디스펜서
병력 10,000명 귀족 25명, 기사 200명, 보병 6천 명.
피해 기사 2명, 보병 2,000명 사상. 기사 160명, 시종 220명, 보병 수천 명 사상
결과 잉글랜드 왕실의 승리.
영향 몽포르 가문의 몰락과 에드워드 왕자의 권력 장악.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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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65년 8월 4일,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파 귀족군이 우스터셔 이브샴에서 맞붙은 전투. 제2차 남작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한 결정적인 전투이다.

2. 배경

1264년 5월 14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파 귀족군은 루이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이끄는 왕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 백작 리처드 등 왕실의 주요 인사들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협의한 끝에 루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으며, 왕으로서 군림하는 걸 보장받는 대가로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의 인질이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유대인들에게 지니고 있던 많은 빚과 이자를 모조리 취소했다.

루이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시몽 드 몽포르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주에 평화 유지군을 보냈고, 1264년 6월 23일에 런던에서 새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귀족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각 주의 기사 4명과 전국의 모든 공동체 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는 왕과 국민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향후 의회에서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고, 9명으로 구성된 감독 기관을 구축하여 왕을 대신해 법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오직 의회 만이 이들 위원회 인사를 변경할 수 있었다. 위원회에는 시몽 드 몽포르 본인 외에도 체스터 주교 스티븐 버스티드 주교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의 승리를 공고히 하지 못했다. 당초 그와 함께 왕실에 대항했던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이 권력을 온전히 독점한 것에 반감을 품었으며,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세웠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캔터베리 근처에 군대를 모집했고, 불로뉴에서 프랑스 사절단과 접견해 새 정부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교황청은 1264년 10월 20일 시몽 드 몽포르와 길버트 드 클레어, 그리고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를 파문했다. 1264년 겨울, 웨일스 변경 지대에 배치된 일부 기사가 월링포드 감옥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시도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에드워드를 케닐워스로 이송해 자기 아내의 감독을 받게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압력을 받고 1265년 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새 의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다. 의원들은 주로 교회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요크와 링컨의 각 주와 도시에서 각각 백작 5명과 기사 2명, 그리고 다른 모든 '자치지역'에서 각각 시민 2명이 선임되었고,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에서 각각 4명이 선임되었다. 잉글랜드 의회에서 귀족과 성직자 외에 하급 기사 및 평민들이 활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역사가들은 이를 '하원'의 창립으로 간주한다. 이 의회는 포로 상태에 놓인 에드워드 왕자의 석방 문제를 다뤘다. 3월 31일, 에드워드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과 런던 시민들을 사면하고 향후에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주교 10명 등은 더 이상 외국인 남자를 고문으로 두지 않으며, 교황이 잉글랜드 문제에 개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265년 4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잉글랜드-웨일스 국경지대로 간 뒤 시몽 드 몽포르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고, 워렌 백작 존 드 워렌과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드 발랑스가 즉각 가담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에게 동맹을 제의했고, 허웰린은 웨일스 대공이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고, 군사적으로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는 대가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그해 5월 28일, 케닐워스에서 인질로 지내던 에드워드 왕자는 말을 훈련시겠다는 핑계를 대고 헤리퍼드로 갔다가 도중에 말을 급히 몰아서 호위병의 추격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위그모어 성으로 가서 그곳의 성주인 로저 모티머의 영접을 받았다.

그 후 에드워드 왕자는 글로스터 백작이 이끄는 군대와 합류했고, 체셔와 헤리퍼드셔 귀족들은 에드워드 왕자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세번 강의 모든 교차로를 재빨리 확보해, 시몽 드 몽포르가 헤리퍼드셔로 쳐들어오는 길목을 틀어막았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이끌고 뉴포트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브리스톨에서 파견한 함대를 타고 세번 강 어귀를 건너서 에드워드 왕자와 대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배들은 글로스터에서 파견된 왕실 함대에 의해 침몰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헤리퍼드로 진군해 1265년 7월 말에 도착했다.

이 무렵,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도 잉글랜드 남부와 중부 전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뒤 워릭 인근의 케닐워스 성으로 진군헀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 소식을 접하자 우스터에 군대를 집결한 뒤 1265년 8월 1일 이름 아침 케닐워스로 진군했다. 시몽의 군대는 곧 에드워드 왕자를 따르는 부하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유력 귀족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왕실군은 주요 반군 지도자들의 군기를 확보했고, 이제 막 케닐워스에 도착했던 반군의 물자 운송용 수레들을 탈취했다. 시몽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케닐워스 성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가 케닐워스에서 성공을 거둔 후 우스터로 돌아올 때, 시몽 드 몽포르는 세번 강 건널목을 지키는 적 경비병이 더 이상 없다는 걸 눈치채고 우스터에서 남쪽으로 4마일 떨어진 켐프시 교두목에 건넌 뒤 케닐워스에서 아들이 모은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1265년 8월 3일 이브샴으로 진군했다. 같은 날 저녁, 에드워드 왕자는 우스터에 도착했다가 시몽 드 몽포르가 이브샴으로 향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출진해 반새도록 행군한 끝에 이브샴에서 케닐워스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는 이브샴을 향해 에이번 강을 따라 곧장 진군했고, 길버트 드 클레어는 분견대를 이끌고 에이번 강을 건넌 뒤 에드워드 왕자와 평행하게 진군했다. 그리고 로저 모티머는 에이번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내려가서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 후방으로 은밀히 진군했다. 왕실군은 반란군을 전방과 측면, 그리고 후방에서 포위 공격해 섬멸해 버릴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이브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265년 8월 4일 아침, 시몽 드 몽포르는 대규모 군대가 듀닝턴-노튼 도로를 통해 북쪽에서 이브샴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다가오는 군대를 관찰하려 했지만, 안개가 껴 있어서 정확하게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두 대열에서 몽포르 가문의 '백사자 문양', 베르 가문의 '은별 문양', 몽상시 가문의 '3개 열쇠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보고, 아들 시몽이 케닐워스에서 자신과 합류하기 위해 남하하고 있다고 여기고 기뻐했다. 그러나 한참 후 좀더 뒤쪽의 부대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깃발이 휘날리는 걸 목격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아들을 물리친 뒤 자신마저 쳐부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시몽 드 몽포르가 북쪽에서 몰려오는 군대의 정체를 오인해 대응이 늦어지는 사이, 길버트 드 클레어가 이끄는 2번째 분견대가 에이번 강을 도하한 뒤 반란군의 좌측면으로 진군했다. 여기에 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세번째 분견대가 남똥쪽에서 이브샴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몽 드 몽포르에게 전해졌다. 그제야 자신의 군대가 압도적으로 강한 왕실군에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몰렸다는 걸 깨달은 시몽 드 몽포르는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외쳤다.
"하느님, 우리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의 몸이 적의 권세에 놓였습니다!"

장남 앙리 드 몽포르는 아버지에게 전장에서 도망치라고 종용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는 여기서 싸우다가 죽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휴 르 디스펜서,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등 다른 귀족들에게 스스로 살아남으라고 권고했지만, 그들 역시 그와 함께 싸우다가 죽겠다고 답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그린 힐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그는 세 방향에서 몰려오는 적을 상대로 각개격파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에드워드 왕자의 부대에 맹공을 퍼붓기로 했다.

귀족 반란군이 결사적으로 달려들자, 에드워드 왕자의 부대는 기세에 밀려 후퇴했지만 존 드 워렌의 독려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적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 사이 길버트 드 클레어의 군대가 몰려와서 귀족 반란군의 측면을 물리쳤고, 로저 모티머도 후방에 접근했다. 그러자 공포에 질린 웨일스 장병들이 주변 주택과 정원으로 숨었다가, 다시 에이번 강을 헤엄쳐 탈출하다가 적 기병대의 추격으로 대거 사살되었다.

웨일스군의 도주에 전의를 상실한 귀족 반란군에서도 이탈자가 연이어 발생했다. 그 후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일전에 루이스 전투에서 생포당한 굴욕이 생생했던 에드워드 왕자와 왕당파 귀족들은 반란군의 항복 요청을 뿌리치고 모조리 쳐죽였다.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처절한 격전 끝에 앙리 드 몽포르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고, 시몽 드 몽포르도 말이 죽어서 낙마한 뒤 많은 기사들에게 공격받아 머리, 손, 발, 고환이 잘려나가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피에르 드 몽포르, 휴 드 디스펜서 등도 전사했고, 시몽 드 몽포르의 셋째 아들 기 드 몽포르와 험프리 드 보훈 주니어 등은 생포되었으며, 기사 160명, 시종 220명, 보병 수천 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왕 실군에서는 기사 2명이 죽고 보병 2,000명이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한편,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진영에 끌려왔다가 전투가 끝난 뒤 진영을 약탈하는 에드워드 측 병사들과 마주쳤다. 그는 빌린 갑옷을 입고 있다가 하마터면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에드워드의 장병들에게 사살될 뻔했지만, 그를 감시하던 반군 측 기사 로저 드 레이본이 그의 정체를 밝힌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에드워드 왕자 앞으로 모셔졌다.

4. 이후

왕실과 왕당파 귀족들은 반군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를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그해 9월 윈체스터 의회를 소집한 뒤 반란에 가담한 모든 귀족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반군 귀족의 영지를 압류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의 영지를 대상으로 약탈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1266년 5월 15일, 헨리 3세의 조카 알레만의 헨리와 존 드 발랑스가 이끄는 왕실군은 체스터필드 전투에서 더비 백작 로버트 페러스가 이끄는 반란군을 섬멸했다. 이후 반란 잔당군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정평난 케닐워스 성으로 들어가서 농성했다.

1266년 6월, 토벌대는 케닐워스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요새의 강력한 방어력으로 인해 많은 피해만 양산할 뿐 공략할 기미가 없자, 헨리 3세는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란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준다는 내용의 케닐워스 칙령을 반포했다. 케닐워스 성에 숨은 반군은 처음에는 제안을 거부했지만, 12월에 식량이 고갈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후 엘리 섬에 숨었던 마지막 반군 잔당이 협상을 통해 항복하면서, 제2차 남작 전쟁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