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소 시몽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 the Younger | |
생몰년도 | 1240년경 ~ 1271년 4월 | |
출생지 | 이탈리아 브린디시 | |
사망지 | 이탈리아 토스카나 시에나 | |
아버지 | 시몽 드 몽포르 | |
어머니 | 엘리노어 플랜태저넷 | |
형제 | 앙리, 아모리, 기, 잔, 리샤르, 엘레오노르 | |
직위 | 레스터 백작(명목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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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이다.2. 생애
1240년경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와 존 왕과 앙굴렘의 이자벨의 셋째 딸인 엘리노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엘리노어는 브린디시에서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1258년 11월 형 앙리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1260년 10월 13일 에드워드 왕자에게 형 앙리와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제2차 남작 전쟁 중인 1263년 6월, 형 앙리와 함께 켄트에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 사보이의 보니파시오의 영지를 파괴했다. 그 해 8월 평화가 일시적으로 성립되었을 때, 그는 잉글랜드 정부를 통제하던 아버지로부터 추방된 왕당파 귀족 중 한 명인 존 맨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1264년 2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형 앙리와 함께 웨일스 변경지대에서 몽포르 가문에 대적하는 영주들의 영지를 공격했다. 그 후 노샘프턴 수비를 맡았다가 그 해 4월 5일 노샘프턴 공방전에서 에드워드 왕자에게 생포되었다. 이후 포로 생활을 하다가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아버지 시몽이 왕당파 군대를 격파하고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을 생포한 후 석방되었다.
그 후 사실상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된 아버지로부터 글로스터, 노팅엄, 포트체스터를 포함한 여러 중요한 성의 관리권을 받았으며, 1264년 겨울과 1265년 봄에 사보이아의 피에르 2세가 소유한 페번시 성을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지만 공략하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의 미혼 여성 중 가장 부유한 여인으로 유명했던 이사벨라 드 포스를 납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햄프셔의 브리모어 수녀원에 은신했고, 나중에 수녀원장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했다. 시몽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계속 추적했지만, 이사벨라는 웨일스의 어느 산지에 성공적으로 숨었다. 또한, 시몽은 법원 절차를 악용해 서식스의 브람버에서 왕당파 귀족인 윌리엄 드 브로스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행패에 여론이 들끓었고, 시몽 드 몽포르 정권의 인기는 자연히 추락했다.
1265년 4월 아버지 시몽 드 몽포르가 웨일스 변경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잉글랜드 서부로 진군했을 때, 시몽은 이스트 앵글리아를 맡았다. 그해 5월 아버지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자 도버에서 런던으로 이동해서 병력응ㄹ 모집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윈체스터를 약탈한 뒤 옥스터드와 노샘프턴을 거쳐 7월 31일 케닐워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얼마 후 에드워드 왕자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배해 케닐워스 성으로 후퇴했다. 8월 3일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남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지만, 얼마 후 아버지와 형 앙리가 이브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걸 알게 되자 케닐워스 성으로 후퇴헀다.
당시 케닐워스 성에는 헨리 3세의 동생이며 에드워드 왕자의 삼촌인 콘월의 리처드가 억류되었다. 부하들이 그의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겠다며 리처드를 죽이려 하자, 시몽은 그들을 제지했다. 1265년 9월 6일, 시몽은 우스터의 월터 드 칸틸루페 주교와 코번트리 주교 로저 드 뮐랑의 설득을 받아들여 리처드를 석방했다. 이때 리처드는 시몽 드 몽포르의 미망인이자 시몽의 어머니로서 왕당파 인사들에게 희생될 수 있는 여동생 엘리노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시몽은 헨리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선처를 호소했지만,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하자 11월에 케닐워스 성을 떠나 링컨셔의 엑홀름 성으로 가서 아버지의 남은 추종자들과 합류했다. 1265년 11월, 에드워드 왕자는 시몽에게 케닐워스 성을 넘겨주고 귀순하면 연간 연금을 받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시몽은 단호히 거부했다. 1265년 크리스마스 직후, 헨리 3세는 엑홀름 성에 틀어박힌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가 항복하면 생명을 건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이를 보증하기 위해 차남 에드먼드 등을 인질로 보냈다. 시몽은 이를 믿고 항복했지만, 엑홀름에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1266년 2월 10일 윈체시에 보내져서 억류되었다가 나중에 프랑스로 탈출했다.
1267년 9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시몽의 귀환을 놓고 헨리 3세와 협상했지만 결렬되었다. 이후 시몽은 동생 기와 합류한 뒤 1270년 12월 앙주 백작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카를루 1세의 측근이 되었다. 그러던 1271년 3월 13일, 비테르보의 산 실베스트로 교회에서 콘월의 리처드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인 알메인의 헨리를 기와 함께 습격해 살해했다. 그 후 교회로부터 파문 처분을 받고 추적을 피해 달아났다가, 1271년 4월 시에나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아버지 사후 죽을 때까지 레스터 백작을 칭했지만 실제로 통치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