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03:56

이규석(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백삼(李伯三)
문범(文範)
본관 인천 이씨[1]
출생 1897년 12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 산내면 대산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2]
사망 1950년 10월 5일[3]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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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희석은 그의 친형이다.

2. 생애

이규석은 1897년 12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 산내면(현 함안면) 대산리에서 아버지 이재훈(李載壎)[4]과 어머니 영산 신씨 신덕진(辛德津)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가야읍 검암리로 이주하였으며#, 3.1 운동 당시에는 함안면 봉성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 등은 3월 19일 함안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들은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함안 각지에 이 계획을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함안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경찰서장 키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과 함께 폐쇄해 놓은 함안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이어 그는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그곳들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그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6월부터 동아일보사 함안지국 기자로 근무하였고 1929년에는 함안협동조합을 발기하고 조합장을 지내는 등 일제의 수탈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1950년 10월 5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공도공파 30세 석(錫) 항렬.[2] 인천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수정·이태길·이희석·조강제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인천이씨대동보 6권 공도공파 함안·창원 205쪽에는 8월 21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족보명 이재훈(李載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