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원행(元行) |
본관 | 인천 이씨[2] |
출생 | 1890년 9월 25일 |
경상도 함안도호부 산내면 대산리 (현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3] | |
사망 | 1934년 9월 18일 (향년 43세)[4]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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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0년 9월 25일 경상도 함안도호부 산내면(현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서 아버지 이효석(李孝錫)과 어머니 재령 이씨[5]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함안면의 독립만세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 및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이수정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함안면 대산리·괴산리의 군중을 동원하는 일을 하였다.
3월 19일 정오, 함안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비봉산 고천제와 태평루의 독립 선언식에 참여한 후 진행된 시위행진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경찰서장 키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이어 그는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그곳들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곧 공소를 취하하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4년 9월 18일 사망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