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21:05:10

재상지종

1. 개요2. 재상지종 15가문3. 가문별 형성배경 및 주요인물
3.1. 기존 문벌귀족 가문3.2.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3.3. 관인 가문3.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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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시대 간섭기인 1308년(충선왕 복위년) 충선왕이 동성금혼령을 선포하고 복위 교서에서 종친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정했는데, 이들 가문을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고 한다.#

2. 재상지종 15가문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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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가문
경주김씨
신성태후
정안임씨
공예태후
경원이씨
인예태후
안산김씨
원성태후
당성홍씨
명덕태후
재상 가문
파평윤씨
윤관
해주최씨
최충
청주이씨
이자림
언양김씨
김취려
황려민씨
민영모
동주최씨
최유청
평양조씨
조인규家
횡천조씨
조영인
평강채씨
채송년
공암허씨
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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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집안은 조선시대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해당 가문들을 성씨 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언양 김씨: 아름답고 긴 수염으로 유명한 '고려판 관운장'인 위열공 김취려의 후손들로 시조인 김선은 신라 경순왕의 7남인 동시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인 관계로 정계 진출이 원활했고, 김취려 이후 크게 번창했으며, 고려 말의 충신인 도은 이숭인의 외가이기도 하다.
  • 인천 이씨: 고려시대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필수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자겸이 이 가문 출신이다. 이자겸의 난 이후에도 영향력은 조선시대[1]까지 이어졌고, 조선 세조의 처외조부(파평 윤씨 윤번의 장인)인 공도공 이문화가 이 집안으로 조선 왕조에서 예종 이후의 왕들에는 이 집안의 피가 조금씩 있다.
  • 청주 이씨: 고려 개국공신인 이능희를 시조로 고려 현종과 덕종의 왕비[2]를 배출했다. 이들 왕비의 아버지인 이자림김훈·최질의 난을 진압하고 이후 개경 외곽의 내성을 축조하는 등의 공으로 고려의 국성(國性)인 '왕(王)씨'를 하사받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3]배향공신이다. 이 집안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도 태조와 태종의 사돈이 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 평양 조씨: 몽골어에 능숙하여 출세한 조인규의 가문으로 그의 딸이 충선왕의 제4비 조비이나 원의 모략으로 부녀가 고초를 겪었다. 후에 조선 개국공신이 되면서 태종과 사돈을 맺은 조준이 조인규의 증손자이다.
  • 횡천(횡성) 조씨: 무신정권 때의 인물인 조영인-조충의 가문으로 두 사람 모두 배향공신이다. 조충은 김취려 장군과 함께 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유민들을 몽골과 함께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문무겸비의 인물이나 사후 그의 아들인 조숙창이 후에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항복했고, 이후 반란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 그래도 조숙창의 형인 조계순(조충의 장남)은 연루되지 않은 채 이후 추밀원 부사 등 여러 요직을 지냈다.
  • 평강 채씨: 무신정권 때 무인 채송년이 시조로 전해지며, 채홍철, 채하중, 그리고 조선 정조 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이 집안 출신이다.

3. 가문별 형성배경 및 주요인물

이들 재상지종 15가문은 형성 배경에 따라 기존 문벌귀족 가문,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 관인 가문,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3.1. 기존 문벌귀족 가문

3.2. 무신으로 등장한 가문

3.3. 관인 가문

3.4. 대원관계에서 성장한 가문


[1] 여담으로 조선의 국성(國性)인 전주 이씨 가문에서 뒤에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시 최대 명문가인 '인천 이씨'의 가계를 일부 도용했는데, 원래 시조인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의 3대를 추가햇는데, 이는 후대에 조선 건국 이후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학자들은 고려 당대 최대의 명문가였던 인천 이씨의 2세 이한, 3세 이자연, 이자상 부자의 이름을 도용하면서 이자상의 이름만 비슷한 이천상으로 바꾸고 같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조작, 등재한 것으로 보인다.출처 필요 이는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심도 있게 연구한 가문이기도 하다.출처 필요[2] 현종의 후궁인 원질귀비와 덕종의 제2비인 경목현비이다.[3] 강감찬, 최사위, 최항과 함께 배향되었다.[4] 원래 임연의 사위였으나 1270년 거사 이후 재혼한 듯하다.[5] 총 329명(당홍계 206명, 토홍계 123명)을 배출했는데, 이는 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이다.[6] 인천 이씨와 더불어 고려시대에 많이 왕비를 배출 한 집안이다.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가 안산 김씨 가문이다.[7] 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사위. 훗날 그의 아내의 조카인 인천 이씨의 이자연이 김은부의 정략결혼을 그대로 벤치마킹한다.[8]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 한 가문. 모두 윤관의 직계후손들이다. 고려시대 당시 타 가문들과 달리 자주적 정신을 지향했다고 한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pp. 391-392[9] 위 가문인 인천 이씨이자겸의 처가이며, 최온의 후손인 최사추의 딸이 인천 이씨로 가서, 문경태후를 낳기도 하였다. 문경태후는 후에 인종을 낳게 된다. 인천 이씨와 더불어 역사 교과서에 항상 실리는 문헌공 최충의 가문이다[10]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그 최영 맞다. 하지만 실은 이 말은 최영 장군이 말한 것이 아니라 최영 장군의 아버지의 유언이다.[11] 김취려 장군과 함께 거란 유종을 강동성 일원에서 무찌른 장군이다.[12] 조영인의 손자이자 조충의 아들이다.[13] 조인규의 딸로, 고려의 제26대 왕 충선왕의 제4비[14] 조인규의 증손자, 권문세족 출신이나 급진적 성향을 많이 띠는 정도전, 남은 등의 신진 사대부와 교류하였고 조선의 1등 개국공신 겸 태조, 정종, 태종의 재상으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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