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5:24:17

소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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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소배압(고려 거란 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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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 서하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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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행정 공무원과 전투를 했던 소배압?4. 대중매체

1. 개요

소배압(蕭排押)/소파아이(蕭巴雅爾)/소배아(蕭排亚)[1]
?[2] ~ 1023년(성종 40)

요나라장수. 는 한은(韓隠)[3]이었으며, 이름인 배압은 거란어로는 바야르(Bayar)로 읽는데, 바야르는 몽골어족 계통의 언어에서 기쁨이라는 뜻이다.

한국사에서는 1018년 제3차 여요전쟁 때,[4] 고려를 침공했다가 거란군과 고려군 도합 300,000여 명이 격돌한 귀주 대첩에서 참패한 역사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단순히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침공했다가 전쟁에서 패배하여 퇴각한 적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 전후 활약을 고려하면 용병술은 물론 정치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던 문무겸비베테랑이었다. 북송과의 전투에서도 송군을 상당히 고전시킨 공포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고려 정복전에서 비록 강감찬과의 전투에서 참패했지만 그 이전의 전투인 제2차 여요전쟁 당시엔 강조와의 통주 전투에서 고려의 대군을 완파하며 기세를 올린 바도 있었다.

거란의 제1차 고려 침공 때는 본인이 참전하진 않았지만, 당시 거란군의 군사령관이자 서희에게 변설에서 논파당하여 강동 6주의 영유권을 인정한 역사로 유명한 소손녕이 바로 소배압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쌍으로 고려악연이 있는 셈.

2. 생애

2.1. 요나라명장

요사》에 따르면 소배압은 소부방 가문의 후손[5][6]으로, 기사술(기마궁술)에 뛰어났으며 야율문수노(야율융서)가 거란의 제6대 황제(성종)로 즉위했을 때(983년) 황제의 친위군인 피실군의 장군인 좌피실 상온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복(몽골 초원케레이트부로 추정) 원정에서 큰 전공을 세워 성종의 신임을 얻었고, 986년에는 조빈 휘하의 북송군과 망과에서 맞붙어 치열한 전투 끝에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군공으로 또 승진하여 많은 부대를 이끌고 원정을 다니게 되었으며 야율사진과 함께 북송이 점령했던 산서 지역의 영토들까지 탈환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해 겨울에는 대송 공격의 선봉장으로 남경통군사까지 되었다.

이렇게 북송과의 전쟁에서 많은 실전 경력을 쌓고, 위국공주[7] 야율가를 아내로 들여 부마가 되었으며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 군사적인 전공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수완도 출중했는데 995년에는 요성종에게 정치의 이해나 부역법과 관련된 의견을 상서하면서 피력하는 등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감각이 꽤나 천재적이어서 이에 성종이 소배압의 정치적인 의견을 수렴했다는 기록도 있다.

1004년 북송을 재침공했을 때는 일군을 통솔하여 북송 위부(魏府)의 관리들을 생포한 후 전쟁 포로로 삼았다. 이 남정에서 남경통군사[8] 소달름이 전사하자 남면의 행정을 전담했고, 송진종과의 전연의 맹이 체결된 후에는 북부 재상(北府宰相)으로 등극했다. 《요사》 <소배압전>에 의하면 당시
소배압의 통치는 온후하고, 관대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010년 요성종이 무려 4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을 때(거란의 제2차 침공) 소배압은 통군이 되어 고려군을 연전연파하는 등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현종 역시 남쪽의 나주로 피신하여 고려 국왕도 생포하지 못했던 데다가 계속해서 소모전을 일으켰던 양규김숙흥 등의 맹활약으로 거란의 원정군도 점점 피로가 극에 달하던 탓에 별 소득없이 철군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았는지 귀국 후에 난릉군왕(蘭陵郡王)에 봉해졌고, 1013년에는 재상직을 겸직하면서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1016년에는 다시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졌다.

2.2. 귀주대첩의 패장

1018년 대고려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호왈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재침공했는데(거란의 제3차 침공)[9] 흥화진 전투에서 강감찬수공을 받아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거란군의 기동성으로 급속히 남하해(직도) 고려의 수도 개경을 완전히 점령해서 고려를 굴복시키고자 했다. 이 정도 피해면 당연히 물러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고려군 역시 이러한 소배압의 맹렬한 진격에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추격군을 따로 급파했으나 이미 소배압의 거란군은 개경 앞 40리 금교역까지 진군한 상황이었다.[10][11]

하지만 나주까지 피했던 제2차 전쟁과 달리 젊은 군주 현종은 개경에 남아 성 밖에 청야전술까지 쓰면서 군인들을 집결시켜 거세게 수성전을 준비했고[12] 소배압 휘하의 거란군 역시 개경까지 급속하게 진격하는 도중 뒤쫓아오는 고려군의 맹추격으로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던지라 결국 개경을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한채 철군해야 했다. 그러나 퇴각하는 도중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과의 대회전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아는 귀주 대첩이었다. 이 대전투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은 치열한 혈전 끝에 참패하여 궤멸당했고, 소배압은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자국으로 도망쳤다.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13]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침공하면서 병력 100,000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14]에 주둔하게 했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 무오 9년(1018년)

《요사》에서는 이때 소배압의 대고려 출정에 대해 거란군이 다하, 타하(茶, 陀河)를 도하할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군이 쫓아왔는데, 여러 장군들이 모두 고려군으로 하여금 두 거대한 강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소배압 군대의 도감으로 참전한 야율팔가
"적군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고려군이 배수진을 친 형국이라 결사적으로 싸울 테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므로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합니다."
라는 진언을 했다고 한다.[15]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는데 고려군이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대자 거란군은 패배하고, 소배압은 무기를 버리며 퇴각했다고 적고 있다. '다하, 타하의 전투'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귀주 대첩이다.
“다, 타 두 강을 건널 때(渡茶, 陀二河)에 적(고려군)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요사》 권88 <열전> 18 <소배압고>

거란의 성종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던 용장 소배압의 충격적인 고려 정복 실패 소식을 듣고 목숨만 겨우 건진 채 돌아온 소배압에게 크게 격노하며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낯짝으로 짐을 보겠느냐,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
고 욕설을 퍼붓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선제 부왕부마이자 자신에게는 매제이고 장인이 되는 등 관계가 복잡한 사실상 가족이었기 때문에 차마 죽이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16] 그러나 워낙에 큰 참패로 많은 본국 병사들이 희생당한 만큼 죽이지는 못했어도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모든 관직을 추탈했다.[17]

사실 요성종이 매우 분노할만한데, 사실 요성종은 초기의 송나라 공략, 그리고 고려와의 전쟁을 빼고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둔,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종의 반박할 수 없는 가장 큰 실책 중 하나가 3번이나 고려를 침공하고도 이렇다 할 성과를 도통 못 낸 것이었다.

이후 소배압은 1023년 빈왕(豳王)에 봉해져 다시 재기하나 싶었지만, 뭔가 해보기도 전에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3. 행정 공무원과 전투를 했던 소배압?

소배압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한 엘리트 장군이었지만 말년에 고생만 실컷 하다가 소수의 병력으로 전투에 처음 입문한 20대의 청년 군주전쟁에 처음 출병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장군[18]에게 당한 단 1번의 치명적인 전쟁 패배 때문에 몰락했다. 흥미롭게도 귀주 대첩을 이끈 주역들 고려군 상원수 강감찬, 대장군 강민첨과 기병대 10,000명으로 거란군의 후방을 강타하여 치명타를 입힌 김종현까지 주요 장군 세 명이 모두 문신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중세 봉건제에 가까운 호족 연합 정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에 정부에 문관으로 출사한 인물들은 거의 모두 각자 사병들과 지방 영지를 갖고 있었던 영주들이었고, 특히 휘하에 강력한 사병들까지 두고 있었다. 즉 자신이 직접 휘하 사병들을 통솔하면서 전쟁들을 해왔기 때문에, 아예 사병도 없었던 조선시대의 문관을 떠올리고 접근하면 안 된다. 이들은 고려의 최상위 계층이었으므로 전시에도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

무관들은 관직 외에도 신분상으로 봤을 때 대개 문관들의 밑이었으므로 당시 시대상 총사령관 같은 지위를 맡기는 힘들었고, 대부분 선봉장, 보좌장의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문관 출신들은 군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경우라도 대개 전문적인 무관보다는 못했으며 실전에서도 이들의 보좌를 받아야 했다. 즉 문관들이 대국적인 면에서 큰 방향을 지시하거나 전쟁을 지휘하면 밑의 무관들이 선봉장에 서서 직접 실전을 담당했던 것이다. 강감찬 같은 문신들의 역할은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써 중앙 조정에서는 국정을 총괄하다가 출정하여, 전장에서는 총사령관으로 전쟁터를 진두지휘하거나 목표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었고,[19] 무관들은 명을 받들어 전투 병력을 지휘해 전략상의 최종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뒷받침을 해줘도 그마저도 못해내는 문관들도 많긴 했다. 오죽하면 조방장 무관이 지휘관인 문관에게 칼을 들이밀며 퇴각하지 말라고 위협했을까. 애시당초 실전은 그들 문관의 전문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강감찬과 달리 척준경의 행보는 전형적인 무관 아니 그 이상의 전쟁기계급 행보였다. 당장 추밀원만 하더라도 고려 때 군기(軍機),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등을 수행하던 주요 관청이었으며 별가(別駕)도 향리(鄕吏)의 후계자들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름뿐인 직위였다. 또한 고려에서 문관과 무관은 둘 다 문산계에 속해 있었으며, 무산계는 군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 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국왕족, 귀화나 속국 여진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인 루트였다. 나중에야 문관의 관직을 맡았지만 무관의 관직은 정3품이 끝이었기에 더 출세하려면 당연히 전직을 거쳐야 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관들이 군사 지휘도 다했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건 당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강민첨 역시 제2차 여요전쟁 때부터 활약한 경력이 있었다. 강민첨의 기록인
"본래 서생이었기에 무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라는 문구에서 나오듯이 무술이 개인 소양인 무관과는 거리가 있는 문관이었으나 거란의 제2차 침공 때 서경을 방어하면서 위업을 날렸고, 제3차 침공 전에는 여진족의 침략도 막아냈다. 후대의 권율과 같은 케이스이다.

그러나 무관처럼 말타는 실력이 뛰어나고, 검을 능수능란하게 쓰며 활을 자유자재로 쏘고 평생을 전투와 지휘, 통솔같은 군무만 하는 군인들에 비하면 전문도와 숙련도가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 문관들은 태어날 때부터 정도는 달라도, 중세 유럽의 영주들과 마찬가지인 지방 호족들이 출사하여 문관으로 등용되는 것이었고, 무관들은 일종의 전문직 직업군인 계층이었다. 따라서 소배압은 행정공무원과 전투를 벌인 것은 맞지만 그 행정공무원이 그냥 문관이 아니라 전쟁과 전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군무원의 업무에도 익숙했을 유능한 총리급 행정공무원이었고, 그가 결정을 내리면 알아서 일처리를 해주는 뛰어난 직업군인들이 보좌하는 총리급 행정공무원과 전투를 펼쳐 패배했던 것이었다. 굳이 중국사나 소설에서 비슷한 예를 찾자면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제갈량이나 사마의같이 전문적인 무장이라기보다는 직업적으로 문관에 가까운 캐릭터들도 높은 계급과 통솔력을 바탕으로 휘하 무장과 대군을 부려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해내는 것을 상기해 보자.

4. 대중매체

  •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결사대를 이끌고 강조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 Why? 한국사 전쟁》에서 귀주대첩이 나오기에 소배압도 나온다. 작중 등장하는 다른 악역들처럼 누가 봐도 악역같은 생김새로 나온다.
  • 맹꽁이 서당에선 귀주대첩으로 박살나자 거란 황제에게 극딜이 쓰여진 편지를 받게 되고, 좌절한다. 완전 거지꼴이 된 모습으로 가서 죽을 일만 남았다고 징징대고 뒤에서 따라오던 군졸도 저런 바보를 따라왔다고 욕하기까지 하는 등, 대우가 너무나도 박하다.

[1] 《辽史 第十二卷 本纪第十二》(统和七年)夏四月甲寅,还京。乙卯,国舅太师萧闼览为子排亚请尚皇女延寿公主,”许之。~“延寿公主”当为卫国公主长寿女。[2] 딸 소귀비가 986년 17살에 요 성종후궁으로 들어갔는데, 그러면 최소한 950년대생은 된다는 이야기다. 즉, 3차 여요전쟁 당시 최소 60대 이상의 노장이었다.[3] 당시 요나라의 제6대 황제였던 성종의 가신이자 장군이었던 야율사진의 자와 동일하며, 한자도 똑같다.[4] 후술되어있듯 제2차 여요전쟁 당시에도 참전했었다.[5] 요사 원문에 國舅少父房之後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소부방 부분은 인명이 아니라 가문 명칭이다. 요사 권67 외척표를 보면 거란의 황후족인 소씨 가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내력이 나오는데 기존에 거란족의 외척 가문에 발리(拔里)씨와, 을실이(乙室已)씨 두 가문이 있었고, 요 태조가 술률(述律)씨와 혼인하면서 외척 가문이 총 세 가문이 되었다. 이후 대동 원년(947년) 요 태종이 세 가문을 모두 합하여 소씨를 사성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 발리씨의 두 방(房)을 설명하며 대부(大父), 소부(小父)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로 '少父房之後'는 곧 소배압의 조상은 발리씨에서 나왔다는 의미도 된다. 때문에 소배압-소손녕 형제의 아버지는 확실치 않다.[6] 她的曾祖父迷古宁详稳演乌卢,曾祖母耶律涅岑姑,祖父燕京留守衙内都指挥使、驸马都尉萧割烈,祖母永徽公主耶律仙河,父亲枢密使、北府宰相、驸马都尉萧排押(萧曷宁),母亲是辽景宗和萧绰的幼女魏国公主耶律长寿女。- 《辽史补注·卷107 列传第三十七 列女》에서 딸인 秦晋国妃萧氏<遼聖宗의 동생인 秦晉王 야율 융경(耶律 隆慶)의 아내>에서.[7] 위국공주 야율씨는 거란의 제5대 황제인 경종승천황태후 소작 사이의 황녀다. 동생인 소손녕 역시 위국공주의 자매인 월국공주와 혼인한다.[8] 통군은 총사령관 정도의 직위였다.[9] 이 당시 소배압은 이미 역전의 노장으로써 고려를 재침공한 셈.[10] 수많은 정복전쟁을 성공시키는 등 전쟁기계였던 소배압의 전적으로 봤을 때, 고려군의 주력이 모두 강감찬이 있는 북쪽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며 틈을 찔러서 수도 개경으로 쏜살같이 진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가 과거 제2차 침공 때처럼 국왕이 피신하게 될 경우, 마침 개경 근처에 다다른 상황이었므로 곧바로 쫓아가서 생포하면 되었기에 강감찬과 고려군이 아무리 기를 쓰고 추격해온다 한들 소배압 입장에서는 현종만 생포하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었다.[11] 근세시대에 북방에서 흥기한 청나라 만주족이 직도 전략으로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몰아붙인 후 포위하여 항복시켜서 승전한 전쟁이 병자호란이었다.[12] 개경은 수도였지만 엄연히 평야에 세워진 평지성이라 전시에 수성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고구려국내성이 평소에는 수도였지만 전쟁 때는 산성인 환도성을 수도로 이용하는 전술을 자주 썼다.[13]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어쩐 일인지 이 1018년의 공격도 아우 소손녕이 이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소배압의 동생 소손녕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으로 인해 이미 처형된 후였고, 거란 측 사료인 《요사》와 《거란국지》에는 분명히 소배압이 사령관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아무래도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집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듯하다.[14] 현재 평안남도 안주시.[15] 사실상 거란군이 다하, 타하(茶, 陀 二河)의 전투, 즉 귀주 대첩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야율팔가가 잘못된 전술을 제의했기 때문이었으니 어찌보면 야율팔가가 전쟁 패배의 원흉이었다.[16] 소배압은 요경종의 딸이자 요성종의 여동생 위국공주의 남편이었고, 또한 딸 소귀비를 성종의 후궁으로 보냈다.[17] 이때 소배압의 도감이었던 야율팔가 역시 소배압과 함께 출병했을 때는 재상직에 있었으나 패전의 판단 실수의 책임을 지고 강등당해 서북로도감으로 있다가 사망했다.[18] 강감찬이 살아 생전 직접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치른 기간은 귀주 대첩 때의 단 3개월뿐이었다고 한다. 군복을 착용한 기간만으로 따지면 실상 이등병 정도의 경력에 불과한 수준이다.[19] 당장 진군로상의 지방 유력자같이 중앙군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선 전문직 계층보다는 중앙의 높은 귀족의 한마디가 더 위력적이다.[20] 대한민국에서는 국방장관 하려면 퇴역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