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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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趙思溫(890~939)오대십국 시대의 연나라, 이후 요나라에서 활동한 인물. 자는 문미(文美).
2. 생애
노룡(盧龍)[1]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결단력이 있고 민첩했다고 한다. 체력이 뛰어났고 연나라 장수인 유인공(劉仁恭)의 휘하에 있었다.훗날 후당을 건국하는 이존욱이 연나라에 죄를 물으면서 투항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했으며, 화살로 인해 눈을 다쳐 옷자락에 피가 묻을 정도였지만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다가 주덕위(周德威)에게 붙잡혔다. 이존욱에게 부장으로 기용되어 후량과의 싸움에서 신현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평주자사 겸 평주, 영주, 계주 등 삼주도지휘사가 되었다.
917년에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대장을 보내 연 지역을 공략하자 요나라에 투항했다. 야율아보기는 거란족보다 수가 많은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한족 출신 인사들을 포섭했는데, 조사온을 기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사온은 발해를 정벌하면서 한군도단련사(漢軍都團練使)[2]에 임명되어 부여성을 함락했다. 이때 전투에서 여러 번 부상을 입자 야율아보기가 친히 약을 내려주었다.
927년에 태종이 즉위하자 검교태보, 보정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936년에 후당이 후진이 차지한 태원을 공격하자 후진 황제 석경당이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조사온은 남주, 헌주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했다. 군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남경유수, 노룡군절도사, 관내관찰처지등사, 개부의동삼사, 시중을 겸임했으며, 협모정란익성공신(協謀靜亂翊聖功臣)의 호를 받았고 고쳐서 임해군절도사가 되었다.
938년에는 황후를 책립하기 위한 의식의 부사가 되었고 돌아와서는 검교태사(檢校太師)[3]가 되었다.
야율아보기의 황후인 순흠황후 술률씨와의 일화가 있다. 야율아보기가 사망하자 술률씨는 '지하에서 선제를 뵙게 해 주겠다'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처형해 순장했다. 그런데 조사온이 무슨 일인지 술률씨의 화를 사서 여기에 걸려들 위기에 처했다. 술률씨가 '그대는 선제의 친신(親信)인데, 어찌 그를 뵈러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자 조사온은 '친하기로는 황후만한 사람이 없는데 황후께서는 어찌하여 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받아쳤다. 그러자 술률씨가 '나는 본래 선제를 따라 지하에 가려 했으나 자식들이 어리고 나라 안에 변고가 많아 아직 그렇게 할 수가 없었소. 그러나 나의 한 쪽 팔을 잘라 그 곳에 보낼 수는 있소.'라면서, 자기 손목 한 쪽을 잘라냈다. 그렇게 조사온은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 #
3. 운석에 의한 사망?
二年有星隕于庭卒上遣使賻祭贈太師魏國公子延照延靖官至使相
회동 2년(939년), 별이 뜰에 떨어졌고 죽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냈으며, 태사와 위국공에 추증하였다. 아들인 연조(延照)와 연정(延靖)은 관직이 사상(使相)에 이르렀다.
《요사(遼史)》 권76 조사온 열전 #
회동 2년(939년), 별이 뜰에 떨어졌고 죽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냈으며, 태사와 위국공에 추증하였다. 아들인 연조(延照)와 연정(延靖)은 관직이 사상(使相)에 이르렀다.
《요사(遼史)》 권76 조사온 열전 #
二年春有星隕於庭俄薄疾以三月廿日薨享年五十有入上聞震悼奠祭賻賵有加贈太師衛國公葬昌平縣五華山之陽敕集賢大學士張礪銘其神道
회동 2년 봄, 별이 뜰에 떨어졌다. 갑자기 박질(薄疾)[4]을 얻어 3월 20일에 죽었다. 향년 50이었다. 황제가 소식을 듣고 애도하면서 재물과 수레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관직을 태사와 위국공으로 높여 주었다. 창평현[5] 오화산의 땅에 장사지냈다. 칙을 내려 집현대학사 장려로 하여금 신도비에 글을 새기게 하였다.
《추간집(秋澗集)》 권48 노룡조씨가전(盧龍趙氏家傳) #
939년, 5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사후 태사, 위국공에 추증되었다. 사인은 심혈관계 질환이었다. 맥이 몹시 빨리 뛰는 것을 뜻하는 박질(薄疾)은 부정맥으로 볼 수 있는데, 심장병이 있는 환자에서 발생한 심실성 부정맥의 경우 돌연사할 수 있다.# 요나라의 정사인 《요사》와 원나라 때 사람인 왕운(王惲)의 문집인 《추간집》을 종합한 내용이다. 《추간집》에는 조사온을 시조로 하는 노룡 조씨 가문에 대한 글인 노룡조씨가전(盧龍趙氏家傳)이 실려 있다. 가전(家傳)이란 어떤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내용이라는 뜻이다. 《요사》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노룡조씨가전의 내용이 더욱 상세함을 알 수 있다.회동 2년 봄, 별이 뜰에 떨어졌다. 갑자기 박질(薄疾)[4]을 얻어 3월 20일에 죽었다. 향년 50이었다. 황제가 소식을 듣고 애도하면서 재물과 수레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관직을 태사와 위국공으로 높여 주었다. 창평현[5] 오화산의 땅에 장사지냈다. 칙을 내려 집현대학사 장려로 하여금 신도비에 글을 새기게 하였다.
《추간집(秋澗集)》 권48 노룡조씨가전(盧龍趙氏家傳) #
遼史趙思溫傳曰太宗會同二年檢校太師趙思溫家有星隕於庭未幾卒
《요사》 조사온전에 이르기를, 태종 회동 2년 검교태사 조사온의 집 정원에 별이 떨어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흠정속문헌통고(欽定續文獻通考)》 권214 #
《요사》의 기록을 근거로, 조사온이 운석을 맞아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 # ## 그러나 이는 흥미를 끌기 위한 다분히 작위적인 해석이다. '운석' 운운은 불길한 일, 특히 죽음의 징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요사》 조사온전에 이르기를, 태종 회동 2년 검교태사 조사온의 집 정원에 별이 떨어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흠정속문헌통고(欽定續文獻通考)》 권214 #
역사적으로 별이 떨어지는 것은 불길한 일이며 하늘의 경고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시황이 죽기 1년 전에는 운석에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던 사건이 있었다.[6] 《춘추좌씨전》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 운석이 떨어진 일을 기록하면서 '돌이 떨어졌다(石隕)'라고 하지 않고 '돌을 떨어지게 하였다(隕石)'라고 썼는데, 하늘이 재난을 내려 사람을 꾸짖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7] 북송 때 쓰인 설화집인 《태평광기》에는 별이 뜰 가운데 떨어진 것(有一星隕于庭中)을 불길하게 여겨 집을 비우고자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당대 사람들이 나쁜 징조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사온과 비슷하게,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이 죽기 전에 별이 떨어졌다는 식의 서술이 역사서에 많다. 그러나 아래 인물들이 운석에 맞아 죽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운석 이야기는 고관대작이 사망하기 전에 징조가 있었다더라 하는 식의 서술일 뿐이다.
- 한기(韓琦, 1008~1075): 북송의 재상을 지낸 인물. 죽기 전날 밤 관아에 큰 별이 떨어졌다.[8] 지병으로 사망했다.
- 왕신(王信, 1137~1194): 남송 때 예부상서를 지냈다. 왕신의 집에 별이 떨어졌는데 밝기가 횃불과 같았고, 땅에 수 척 못 미쳐 흩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왕신이 죽었다.[9] 사망 기사 앞의 문장을 살펴보면 왕신은 이미 부친상을 치른 후 병이 든 상태였다. 여기에 효종이 죽었다는 소식이 겹쳐 병이 도져 사망했다.
- 왕옥여(王玉汝. ?~1255): 원나라 때 용호위상장군(龍虎衛上將軍), 태정군절도사(泰定軍節度使)를 지냈다. 별이 뜰 가운데 떨어졌고, 뒤이어 죽었다.[10] 죽기 3년 전부터 이미 병으로 두문불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 오야이(吾也而, 1163~1258): 몽골의 무장 우에르. 밤중에 별이 장막 앞에 떨어졌는데, 오야이가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죽었다.[11]
- 염희헌(廉希憲, 1231~1280): 원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거처에 큰 별이 떨어진 날 밤에 죽었다.[12] 죽기 전부터 병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 백안(伯顔, 1236~1294): 남송 원정 때 활약한 원나라의 명장 바얀. 죽기 4일 전에 큰 별이 떨어졌다.[13]
- 양증(梁曾, 1242~1322): 원나라의 대신. 죽기 열흘 전 거처에 큰 별이 떨어졌다.[14]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손님도 받지 않고 있던 와중이었다.
- 한의가(韓宜可, ?~?): 명나라 때 인물로 홍무제와 건문제 시기 관직에 있었다. 죽은 날 밤 큰 별이 떨어졌다.[15]
- 주재기(朱載基, 1533~1533): 명나라 가정제의 아들.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16]
- 이계정(李繼貞, ?~1642): 명나라 만력제 때의 관리. 병을 얻어 죽었는데, 그날 밤 별이 뜰에 떨어졌다.[17]
사료는 역사적인 맥락, 서술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운석 다음에 죽음이 언급된다고 해서 '운석에 맞아 죽었다'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 웹에도 조사온을 운석에 맞아 죽은 인물로 서술한 자료가 없다. 바이두 백과, 위키백과도 《요사》의 '有星隕于庭卒(별이 뜰에 떨어졌고 죽었다)'를 현대 중국어로 풀어 놓았을 뿐 운석에 맞아 죽었다고 쓰지 않았다. 2008년 한 일본 블로그에서 '별님 직격에 의한 쇼크사?(お星さま直撃によるショック死?)' 정도로 서술했을 뿐이다.
[1] 오늘날의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루룽현[2] 한족으로 구성된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3] 검교는 명예직, 태사는 황제의 스승을 뜻한다. 검교태사란 원로 대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중에도 가장 높은 관직.[4] 맥이 몹시 빨리 뛰는 것.[5] 오늘날의 베이징시 창핑구[6] 《사기(史記)》 권6, 有墜星下東郡至地為石黔首或刻其石曰始皇帝死而地分[7] 《춘추좌씨전》 노희공 16년, 隕石于宋五[8] 《송사(宋史)》 권312, 薨年六十八前一夕大星隕於治所[9] 《송사》 권400, 有星隕於其居光如炬不及地數尺而散數日信卒[10] 《원사》 권153, 有星隕庭中已而玉汝卒[11] 《원사(元史)》 권120, 夜中星隕帳前光數丈有聲吾也而曰吾死矣明日卒[12] 《원사》 권126, 有大星隕于正寢之旁流光照地久之方滅是夕希憲卒[13] 《원사》 권127, 冬十二月丙申有大星隕于東北己亥雨木冰庚子伯顏薨年五十九[14] 《원사》 권178, 至治二年卒年八十一卒之前十日有大星隕于所居[15] 《명사(明史)》 권139, 卒於官是夜大星隕[16] 《명사》 권200, 星隕如雨未幾哀沖太子薨[17] 《명사》 권248, 得疾卒於途是夕星隕中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