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6:26:15

김숙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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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여요전쟁 공신
김숙흥
金叔興
출생 10세기 후반
사망 1011년 3월 11일[1]
(음력 1월 28일)
공훈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2]
1. 개요2. 생애3. 사후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고려시대 제2차 여요전쟁때 활약한 장군.

2. 생애

기록상 김숙흥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요나라)의 성종이 개경에서 퇴각할 때, 귀주 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과 함께 습격하여 거란군 1만명을 죽였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이전 김숙흥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없다. 출신지도 부친의 성함도 알 수 없고, 다만 모친의 성이 이씨였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양규는 그나마 고려사에 개인의 열전이 남아 있지만, 김숙흥은 개인의 열전이 없고 전쟁 당시의 행적이나 사후 보상을 받는 것도 고려사 세가와 자신의 상관이었던 양규 열전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름자에 숙(叔)자가 들어가는 것에서 한자 문화권 이름의 백중숙계와 연관지어 보면 셋째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0,000여 급(級)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 양규가 퇴각하던 거란 침략군을 무로대 등지에서 공격하여 승리하다.
귀주에서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참살한 이후 양규와 합류하여 양규와 행동을 함께 하다가 1011년 음력 1월 28일,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애전(艾田)[3]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다. 거란 황제의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얼마 뒤에 거란(契丹) 임금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하여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퇴각하였다. 정성(鄭成)이 그들을 추격하여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미에서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심히 많았다. 항복했던 여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孤軍]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 양규와 김숙흥이 전사하다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거란군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김숙흥과 양규는 휘하의 고려군 병사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양규와 김숙흥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전투는 양규와 김숙흥의 엄청난 전공인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에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훗날 제3차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병사로 지원하고, 전시에 꼭 필요한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 덕분에 외교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더불어 성종 야율융서에게 정신적으로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와 김숙흥의 게릴라 전술에 계속 털리면서 품위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모욕을 당한 것이다.

명색이 황제인 성종의 군대는 양규와 김숙흥의 격렬한 저항으로 돌아가는 길이 말이 아니었다. 무기가 녹슬거나 말이나 낙타들도 죽는 등 귀국길이 영 좋지 않았으며, 거기다가 압록강을 건너려던 순간에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정성이 뛰쳐나와 그들의 배후를 찔렀다. 정성의 게릴라 전술도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던 것인데, 그간 거란군의 위세에 밀려 숨죽이고 있었던 고려군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지금이 기회다!"라면서 복수전을 단행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규와 김숙흥은 백성들의 구출 뿐만 아니라 고려의 병사들에게 거란에 대한 저항 의식까지 심어주었다.

3. 사후

김숙흥(金叔興)에게는 장군을 추증했으며, 또 그의 모친 이씨(李氏)에게 곡식을 지급하게 하고 교서를 내렸다. 교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추증한 장군 김숙흥은 변방의 성을 지킬 때부터 적과 용감히 싸워 파죽지세의 승리로 전공을 세웠으나, 복병이 쏜 화살에 맞아 끝내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과거의 노고를 기념하여 마땅히 후한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그의 모친에게 매년 곡식 50석을 종신토록 주노라.”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및 그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다

사후 김숙흥은 그의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김숙흥을 장군직으로 추증[4]했고, 그의 어머니인 이씨에게는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김숙흥의 전사 이후 현종의 교서를 받는 사람이 어머니 이씨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인이나 자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거나, 자식이 있었더라도 매우 어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사 당시 꽤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별장중에서도 10대 별장도 있었으니 19세~21살 사이에 나잇대로 추정된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였으니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었다. 뒷날 제11대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도록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평안도 선천에 삼충사(三忠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양규, 김숙흥, 유백부를 기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구 안동 김씨 측에서 김숙흥이 안동 김씨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사 등 관찬 사료에 그의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현재로써는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씨는 신라계 성씨[5][6]여서 경상도 지역 어딘가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있다.

4. 대중매체

4.1. 만화

파일:박시백_고려사_거란전쟁영웅.jpg
* 박시백의 고려사 2권의 초판 1쇄에 그려진 특전그림에서 대거란전쟁의 영웅들이라는 제목 아래에 강감찬, 양규와 같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책에서는 귀주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기습해 물리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양규와 함께 애전에서 거란군과 싸우다다가 결국 전사한다.

4.2. 드라마

4.2.1. 천추태후

KBS <천추태후>가 이 시기를 다뤘던 만큼 등장했다. 배우는 홍성호.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흉기이며 용장의 면모를 보여줬다. 세계관 최강자인 양규, 강조에 한끝 모자라는 정도일 뿐 맹장은 맹장이다.[7] 거란군의 에이스 장군인 야율적렬을 베는 모습도 보여줬다. 제2차 여요전쟁때 양규와 함께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최후의 순간에도 도망가는 거란군을 노려본다.

4.2.2. 고려 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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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와 흥화진 전투가 지나가면서 등장하며 배우는 주연우이다. 1화에선 국경을 넘어왔다가 고려군에게 발각당해 추격을 당한 거란의 척후병이 국경을 넘어가자, 철수하란 명령에도 불구하고 척후병을 죽이겠다며 홀로 국경을 넘어갔다가 포로로 잡힌다. 이후 포로 교환으로 넘어온 김숙흥은 군령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숙을 겸해 감옥에 가뒀으나, 거란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며 감옥에서도 깽판을 부리는 모습을 보였다. 자숙기간이 끝난 뒤 양규는 김숙흥을 귀주로 발령보내는데, 김숙흥 본인은 더이상 거란하고 싸우지 못하도록 벌을 내리는 것이라 생각해 격분한다. 화를 참지 못하고 주위를 밀쳐낸 뒤 망루 위에 있는 양규에게 죽자 살자 뛰쳐올라가나, 거란의 군대와 귀주 쪽에서도 싸울 일이 있을거라는 설명에 납득하여 명령에 따르게 된다. 그 와중에 양규가 활을 겨누던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귀주로 가는 길에 활을 겨누는 모습을 따라하기도 했다. 위에서는 대충 통제하기 힘든 와일드 카드 정도의 취급인 듯.

보통의 한국 사극에서 표현하는 장수들과 다르게 원거리 무기로 활이 아닌 쇠뇌를 사용한다.
[1] 율리우스력 3월 5일.[2] 고려 현종때 처음 제정된 공훈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삼한공신)급에게 내려주는 만큼 고려 역사상 단 3명만이 이 공훈을 받았다. 한명은 김숙흥과 더불어 활약한 양규고, 나머지 한명은 두경승으로 무신정권 당시 고려 명종이 실권자 이의민을 견제하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무인이던 두경승에게 공훈을 수여했다.[3] 쑥 애()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실향민 출신인 전원곤 씨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이후 마을이 페허가 되어 인적이 끊긴 이후로 쑥만 무성한 쑥밭이 되어서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4] 전사 당시 김숙흥의 직급이 정7품 별장이었기 때문이다. 고려군 직급체계에서 장군은 정4품. 즉 공적을 크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비록 추증이지만 상당한 특진을 한 것이다. 현대 한국군으로 비유하면 소령급 인물이 큰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는데 사후 준장 내지는 소장으로 특진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공을 높이 평가받은 것인지 알 수 있다.[5]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에서는 김숙흥이 경순왕의 손자라는 설정을 넣었다.[6] 다만 김행파(金行波), 김치양처럼 패서 출신 김씨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7] 사실 양규와 무예 대회 결승에서 졌을 때도 수십합을 주고 받은 다음에 진거여서 일방적으로 졌다고 보기에도 뭣하다. 이 정도면 거란군에서 양규와 강조는 말할 것도 없고, 김숙흥을 이길 자도 없을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