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여요전쟁에서의 흥화진 전투에 대한 내용은 흥화진 전투(101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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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三橋川戰鬪제3차 여요전쟁 시기, 고려와 거란 요나라가 강동 6주의 하나이자 요충지인 흥화진(興化鎭)[1]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을 격파한 전투.
흔히 흥화진 전투라 부르고 논문 등에서는 엄격히 구분해 삼교천 전투라 부르기도 하며, 흥화진 전투는 대체로 이 1018년의 이 전투가 유명하다.
2. 배경
1018년 12월, 거란 요나라의 명장이자 성종 야율융서의 최측근이었던 소배압이 황제 직속 중앙군 부대 최정예군이었던 우피실군을 포함한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고려 현종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대장군 강민첨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 이때 소집된 고려군의 병력은 무려 208,300명으로, 영주(寧州)[2]에 주둔했다. 이로써 1018년의 흥화진 전투가 개시되었다.
3. 전개
삼교천 전투 포진 추정도 [3] |
- 강민첨 대장군은 흥화진 동쪽에서 큰 길이 삼교천을 건너는 지점의 주변 골짜기들에 기병 12,000명을 매복시켜 두고, 상류에 굵은 줄로 소가죽을 꿰어 물을 채웠다.[4]
4. 결과
하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역전의 명장 소배압은 흥화진의 패전에 굴하지 않고 정예 기병의 우수한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곧장 진격했다.(직도 전략) 이에 고려군의 김종현이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추격했다.이에 고려군은 개경 수성 및 청야전술를 벌이기로 하고 소배압은 선발대를 보내 개경을 살펴보다가 철수하는 척 하면서 빈 틈을 노리려 한다.
5. 기타
학자에 따라 시점이 양력 1월이라 과연 기록처럼 수공이 가능했는지 의문을 품는 경우도 있으나, '쇠가죽으로 강을 막고 수공'이란 대목이 너무 인상적이라 귀주대첩과 헷갈리는 사람도 많다.귀주 대첩, 그리고 여수전쟁의 살수 대첩과 혼동되는 바람에 야사에서 귀주 대첩에서 고려가 요나라를 수공으로 물리쳤다는 대중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및 재현
- 관악강감찬축제에서 이 때의 수공을 아이들 생활체육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이 있다. 나무 모형으로 물을 옮기는 식의 놀이이다. #
- 고려 거란 전쟁 30회에서 잠깐 다뤘으나, 수공은 아예 안나왔다.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고려군의 본진을 습격하려는 거란군을 매복으로 격퇴하는 묘사만 나왔으며, 그마저도 기병 부대가 거란군을 공격하는 장면도 묘사되지 않고 대사로만 나온다.
7. 같이보기
[1] 현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2] 현 평안남도 안주시.[3] 삼교천이 저지대가 매우 넓으며, 삼교천까지 내려오는 길목 또한 매복하기에 매우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4] 흥화진 자체가 삼교천이 동/서/남쪽을 둘러싼 천혜의 요새다. 흥화진 앞에 진을 치려면 우선 삼교천을 건넌다. 거란군이 여태 고려와 수없이 싸우며 삼교천은 일단 건너서 흥화진 앞에 가서 진을 쳐 왔으므로, 삼교천에서 이런 대규모 공격을 당하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5] 수공으로 거란군을 수장시켰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다. 그건 현대의 토목공학으로도 불가능하다. 수공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용도다. 한겨울 저지대 모래밭이 갑자기 발목까지만 차오르는 급류가 몰아쳐도 병사들은 동요하며 진형이 흐트러지기 쉬우며, 도강 속도가 늦어지며 도강완료/도강중/도강직전 병력들이 분단되어 취약해진다.[6] 도하가 군을 취약하게 하므로 도하 측의 정찰/척후는 꼼꼼히 이뤄지며, 양측의 방어도 꼼꼼히 이뤄진다. 따라서 상당히 상류에, 그것도 은밀히 건설되었을 것이며, 도하할때 상류로 신속히 연락하여 터뜨리게 하고, 고려 기병이 정밀하게 기습하고 빠지는 등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