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12:57:20

안융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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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융진 전투
安戎鎭 戰鬪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993년 (성종 12년) 10월 이후 (추정)
장소

고려 북계 안융진 (現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
원인 소손녕의 고려 침공
교전국 <rowcolor=black> 고려
(수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대도수 (중랑장)
파일:고려 의장기.svg 유방 (낭장)
지휘관

[[요나라|
]] 소손녕 (동경유수)
병력 병력 규모 불명 요군: 60,000명 ↓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의 승리
영향 고려와 요나라간의 협상 체결
- 제1차 여요전쟁의 종결
- 고려의 강동 6주를 획득
1. 개요2. 배경3. 전개 및 결과
3.1. 할지론을 반대하다3.2.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치다3.3. 소손녕과의 담판이 진행되다3.4. 고려, 강동6주를 얻다
4.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여요전쟁 시기, 고려군과 거란군이 고려의 행정구역인 양계 중 서북면에 해당하는 북계(北界)에 설치한 안융진(鳳州, 현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973년에 이 곳에 성이 설치하기 시작해 974년에 완성했다.

2. 배경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는데,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은 봉산군에서 고려군을 격파해 기세를 꺾어 항복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몽전을 사신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하지만, 소손녕이 거부한다. 이 상황에서 거란에게 서경 이북의 땅을 주자는 할지론이 논의된다.

3. 전개 및 결과

3.1. 할지론을 반대하다

성종이 할지론을 따르기로 하면서 서경의 쌀을 개방해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고 남은 곡식은 대동강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서희가 넉넉한 식량으로 성을 지키자고 주장하며 반대론을 내놓았다.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적의 빈틈을 잘 살펴보자고 성종을 설득해 할지론을 중지시켰다.

이어서 서희가 거란의 의도는 여진이 살고 있는 가주, 송성 등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저들에게 영토를 한 번 주면 끝없이 욕심을 부린다며 싸운 후에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지백 역시 영토를 주는 것을 반대하면서 사신을 보내 금은과 보물을 소손녕에게 뇌물을 주어 의중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덧붙여 군량을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연등회, 팔관회, 선랑 등의 행사를 다시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3.2.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치다

소손녕은 고려 조정에서 오랫동안 답을 하지 않자 안융진을 공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안융진에서 유방과 대도수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선이 고착화된다.

이에 거란측에서는 협상을 요청하게 된다. 고려 성종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모아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협상할 사람이 있냐고 물었으며, 서희가 직접 나서겠다고 한다.

3.3. 소손녕과의 담판이 진행되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939925_STD.jpg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되었다.[1] 소손녕과 서희는 회담의 성격을 결정하기 전에 누가 더 높은 지위인가에 대해 의전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서희가 주장한 동등 의전을 관철함으로써 의전 분쟁에서 승리했다.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라고 당당히 되받아쳤다. 이 과정을 두세 번 반복해도 소손녕이 계속 이를 고집하자, 서희도 숙소로 철수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결국 소손녕이 한발 물러나서,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다.[2]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거란의 군영으로 갔는데, 소손녕과 더불어 동등한 예로 대하면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기면서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더불어 영토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고 있으니, 우리 대국(大國)이 이 때문에 토벌을 하러 온 것이다. 이제 영토를 나누어 바치고 조빙(朝聘)의 예를 취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토지의 경계를 논하자고 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3]도 모두 우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되는데, 어찌 침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역시 우리의 영역 안쪽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도적질하여 기거하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므로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함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더 심하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城)과 보(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감히 조빙의 예를 갖추지 않겠는가. 장군이 나의 말을 가지고 가서 천자께 전달한다면, 어찌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므로 소손녕도 억지로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마침내 그대로 갖추어서 아뢰니,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들을 철수시키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7일간 머무르다가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강나루로 나와 맞이하고, 곧 시중 박양유로 하여금 예폐사(禮幣使)가 되어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평정하여 옛 땅을 수복한 후에야 조정에 들어가 뵙고 통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4] 지금은 겨우 강 안쪽만을 수복하였으니, 강 바깥쪽까지 점령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의 예를 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게 될까 두렵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보내었다.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2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회담은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으며(역사적 연고권),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외교 문제)는 이야기를 주된 화두로 삼았다. 서희는 소손녕의 질문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하였으며, 여진 때문에 길이 막혀 거란과 통교할 수 없기에 (통교를 가로막는데) 원인이 되는 땅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담전략은 먹혀들어 고려측의 승리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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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고려, 강동6주를 얻다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부 일대인 '안북부로부터 압록강 동쪽까지 280리(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영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새로 얻은 영토에 흥화진(의주군), 용주(용천군), 통주(선천군), 철주(철산군), 귀주(귀성군), 곽주(곽산군) 6개 주를 설치하니 이곳이 바로 강동 6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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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매체에서

4.1. <천추태후>

제1차 여요전쟁을 다룬 드라마인 <천추태후> 1화 ~ 2화 중간, 26화 ~ 27화에서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고 하지만, 대도수, 유방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인 천추태후, 강조, 김치양이 개입해서 겁먹은 이현운 대신 거란의 군대와 싸우는 등 전개 왜곡이 있다.

몰래 기습하려던 거란의 대군이 나타나자 대도수, 유방은 거란군을 상대로 대치하고 있다가 천추태후, 김치양, 강조가 이끄는 소규모 민병들이 몰래 거란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거란이 군사를 더 보내 천추태후 등의 군사들이 퇴각하도록 하며, 화살을 쏴서 안융진의 군사들을 공격하자 고려군도 거란군에 맞서기로 하면서 난전을 벌이지만 거란군의 수에 밀리자 안융진성으로 겨우 후퇴한다.

거란군은 고려군을 추격한 후 안융진 성 앞에서 거란의 사자가 고려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겁쟁이 이현운이 항복하려 하자 천추태후가 때리며 이를 막아서고 대도수,유방도 호응해서 거란의 항복 사신을 화살로 맞춘다.분노한 소적렬이 맹화유를 이용한 투석기로 성을 공격하고 화살을 쏘며, 성문에 밧줄을 걸어 거란군이 밧줄을 타서 성을 진입하거나 사다리를 타고 성을 공격한다.

도중에 강감찬이 중군사에게 겨우 허락받아 이끄는 고려 지원군이 나타나 거란군을 공격해 물러나게 하자 강조,대도수 등도 열심히 싸우는데 거란군을 추격하는 사이 그 와중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도망치던 거란군을 깊숙히 추격하다가 숨어있던 복병 등로 인해 위기에 몰려 도망다니는 와중 거란군에게 결국 포로로 잡혀 몇차례의 시도 끝에 거란 수도까지 끌려가게 된다.

[1]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의전 분쟁이다.  의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의전이라는 것은 유럽이든 아시아든 어디에서든 간에 존재했으며, 의전 싸움으로 인해 회담 자체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2] 사실 협상은 현대 국가에서도 협상 전의 기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오해하기 쉽지만, 이것은 서희가 무턱대고 소손녕에게 강하게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소손녕의 진짜 목적인 '회담 타결'과 실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요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실 서희는 이 시점에서 '요군이 진심으로 침략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더 강하게 응수해도 되겠다!'고 내심 상황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3] 현재의 랴오양시로 고구려 시절의 요동성.[4] 이것이 서희 자신이 임금에게 보고한, 외교담판의 핵심이다. 여진족 축출에 대한 요나라의 묵인을 얻어낸 게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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