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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郭州戰鬪여요전쟁 시기, 고려와 거란족의 요나라가 강동 6주의 하나이자 요충지인 곽주(郭州, 현 북한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여러차례 싸운 전투. 총 3차례 벌어졌으며, 이후 여몽전쟁에서도 곽주에서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자세한 기록없이 몽골군이 주둔한 지역이나 함락한 지역으로만 언급된다. 곽주성은 오늘날 곽산군에 있는 능한산성으로 비정되며, 먼 훗날 병자호란 때도 여기서 교전이 있었다.
2. 곽주 전투(1011년/1차)
곽주 전투 郭州戰鬪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010년(현종 원년) 12월 6일 | |
장소 | 고려 북계 곽주(現 평안북도 곽산군) | |
원인 | 요성종의 고려 침공 | |
교전국 | 고려 (수비) 패 | <rowcolor=black> 요 (공격) 승 |
주요 인물 | 지휘관 신영한 (대장군)† 승이인 (행영수제관)† 대회덕 (대장군)† 이용지 (공부낭중)† 간영언 (예부낭중)† | 지휘관 [[요나라| 遼 ]] 요 성종 |
병력 | 규모 불명 |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거란의 승리 및 곽주 함락 | |
영향 | 거란군의 남하로 서경 전투 발발 |
고려군과 거란군이 곽주에서 처음 치른 전투로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 벌어졌다.
거란의 군사가 통주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주변 성들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 때 거란군이 곽주를 공격하면서 조성유는 밤중에 도주하고 신영한, 승이인, 대회덕, 이용지, 간영언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고 성은 함락되었다.
3. 곽주 전투(1011년/2차)
곽주 전투 郭州戰鬪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010년(현종 원년) 12월 16일 | |
장소 | 고려 북계 곽주(現 평안북도 곽산군) | |
원인 | 거란군의 곽주성 점령 | |
교전국 | 고려 (공격) 승 | <rowcolor=black> 요 (수비)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양규 (서북면도순검사) | 지휘관 [[요나라| 遼 ]] 불명 (불명) |
병력 | 1700여명 | 6천여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수비군 전멸 |
결과 | 고려의 승리 및 곽주 탈환 | |
영향 | 거란군의 유일한 후방기지 소멸 |
곽주를 함락한 거란군은 군사 6천여 명을 잔류시켜 성을 수비하게 하고 이어서 영주, 숙주를 함락하고 서경을 공격했는데,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했다. 양규는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거란군을 기습해 전멸시키고 곽주를 탈환했으며, 성문과 성내 가옥을 모두 부수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한국사에서는 당연하고 전 세계사를 통틀어도 손꼽힐 특이한 경과를 가진 전투로, 포위당한 성에서 포위망을 몰래 뚫고 나온 소수 병사들이 다른 성 근처에서 패전으로 기세를 잃은 병사들과 합류해 3배 정도 많은 적이 수비하고 있는 성을 기습해 함락시키는 정말 이상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전투이다. 주요 병법에서는 안정적으로 공성하기 위해선 공성군이 수비군의 10배가 넘어야하고 긴 호흡을 가지고 공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공성군이 수비군의 1/3인데도 하룻밤만에 전멸시킨 것이다.
소수의 공성군이 다수인 수성군을 뚫고 성을 함락시키는 일이 가끔 일어나긴 하지만 대부분 100단위의 소규모일 때나 벌어지는 일로, 1,000명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아예 수십만 단위까지 넘어가지 않는 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소수의 사례조차 평지에서 적의 주력을 궤멸시키고 신경을 끊어 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곽주성으로 비정되는 능한산성은 험한 지세의 산성이라 곽주 전투와 같은 경우는 정말 한손에 꼽히는 특이한 사례이다.
한편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때(12월 16일) 큰 별똥별(유성)이 곽주에 떨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우연한 천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운석이 곽주의 성곽에 떨어져서 피해를 줬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다. 이 경우 공성측 병력이 수성측 병력의 1/3에 불과함에도 불가사의하게 공성에 성공한 점, 양규가 탈환한 곽주성을 요새화하지 않고 내부 주민들을 전부 대피시킨 점, 이후의 여요전쟁에 곽주성이 주요 전장으로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이 이해될 수 있다. 즉, 곽주성의 성벽이 허물어지며 양규가 손쉽게 탈환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여 양규가 성을 지키지 않고 떠났으며, 이후 거란군도 곽주성을 다시 사용하지 않은 점 모두가 설명된다. 거란군은 후퇴할 때까지도 제대로 된 후방기지가 없었는데 성문과 가옥을 부쉈다고 한들 텅 빈 곽주성을 안 쓸 리가 없다.
4. 곽주 전투(1016년/3차)
1016년 1월 5일에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곽주를 공격하자 고려군이 맞서다가 수만 명이 죽었고 거란군은 군수품을 탈취하고 돌아갔다. 기록된 피해 규모로만 봤을 때는 2차 여요전쟁 당시 통주 삼수채 전투 못지 않은 참패를 당한 것이다.5. 대중매체
5.1. 곽주 전투(1011년/1차)
5.1.1.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
조성유가 도주하자 신영한이 간영언을 방어사로 세우고 신영한이 간영언의 방어사 역할을 돕기로 하며, 거란군이 3일간 남서쪽을 밤낮으로 공격하자 고려군이 맞서싸웠다. 거란군이 3일간 남서쪽을 공격한 것은 마지막 야간 공격을 위해 준비한 작업으로 공격 3일째에 거란군이 잠시 공격을 멈추고 밤이 되자 남서쪽을 공격했다.소배압이 고려군의 시선을 남서쪽으로만 돌리면서 성의 북쪽에 은밀히 군사를 투입해 소류, 진소곤 등이 공격해 성을 넘었으며, 거란군이 북쪽에서 나타나 고려군 수뇌부가 맞섰지만 모두 전사했고 남서쪽에서 북쪽이 돌파된 것을 알고 구원하려 했지만 저지되었고 곽주성은 함락된다.
5.1.2. <고려 거란 전쟁>
이현운이 항복사절로 가지 않는 대신 거란에게 팔아 넘긴 정보를 이용해 원작 소설과 비슷한 방식으로 공략당한다. 북쪽이 성벽이 제일 낮고 성에 초가가 많다는 점을 이용해 반대편에서 침공해 농성하는 사이 북쪽으로 침임+화공을 동시에 가해서 함락시킨다.5.2. 곽주 전투(1011년/2차)
5.2.1. <고려 거란 전쟁>
양규가 곽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자 정성은 무모하다고 여겨 반대하며, 양규는 자신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자 흥화진을 지켜야 해서 700여 명의 군사만 이끌고 가게 한다. 양규가 통주에 도착해 곽주를 공격하기로 하자 최질이 통주의 힘든 상황을 말하지만 그래도 양규에게 통주의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가게 해준다.
김숙흥은 양규가 곽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량에게 요청해서 군사를 이끌고 양규에게 합류하며, 양규는 정공법으로 이길 수 없다고 하면서 김숙흥과 함께 곽주를 공격하고, 김숙흥이 곽주성 앞으로 가고 거란군이 나타나자 군사들과 함께 칼을 버려서 거짓 항복을 한다.
김숙흥은 포로 노역장에 갇히고 다음날 양규가 군사를 이끌고 곽주성 서문까지 접근하며, 양규가 공격 전에 전멸시켜야 한다고 지시해 화살을 날려서 공격을 시작한다. 거란 군사가 불화살로 대응하려 하지만, 고려군이 불화살을 쏘지 못하게 공격한다. 불화살이 날아들면 양규의 군대규모가 발각될 수 있으므로. 거란군은 규모를 알 수 없는 고려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수 만의 군사가 온 것이라 여겨 혼란에 빠지고, 고려군은 성문을 공격하지 않고 멀리서 화살만 쏴서 거란의 군사를 공격한다. 이에 거란 장수는 본격적인 공성이 전혀 없자 의아해하다가 모든 수비군이 성벽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알아챈다.
한편, 김숙흥은 소란이 일자 고려군이 온 것을 알고 포로 노역장에서 거란군에 반기를 들고 공격을 개시한다. 서문을 열기 위해 서문으로 가서 거란군을 공격하며, 이를 본 서문의 거란군들이 김숙흥 등이 성문을 열지 못하게 하려 공격하지만 양규의 군사가 도착해 화살을 쏴서 성벽 위에 거란군을 공격해 죽이자 김숙흥이 성문을 열어 양규의 군사가 성으로 들어오고 성 안에서 난전이 벌어진다. 고려의 군사들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포로로 잡힌 고려군 백성들도 거란군을 공격하는 것에 합세하며, 거란군의 장수가 곽주성에서 달아나려 하자 양규가 추격해서 사살하면서 곽주의 거란군이 전멸한다.
이후 거란군이 다시 거점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성문과 가옥을 모두 부수고 병력과 백성들을 모두 통주성으로 피난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