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21:04:35

멍석말이


1. 설명2. 그 외

1.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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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있었던 사형(私刑)으로 사람을 멍석으로 돌돌 만 다음 후려패는 벌이다.

형벌 외에도 무속, 민속에서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주로 사용했다고 하며 장정들이 여럿 달라붙어 매타작을 하면 귀신도 못 버틸 정도로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별 것 아닐 것 같지만 주요부위를 피하지 않고 대충 아무데나 후리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더욱이 멍석으로 돌돌 말려있어 사람을 팬다는 느낌이 나지 않으며, 당하는 사람은 패는 사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형벌의 강도는 더 심해져서 장애를 입게 되는 경우도 많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멍석으로 둘둘 말려있는 상태라 몸을 웅크린다던지 해서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냥 두들기는대로 얻어터져야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보통 멍석말이를 당하는 사람들은 돈이 별로 없는 양민이나 노비라서, 당한 다음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한채 창고에 방치해두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나이든 이들의 증언중에는 "그 큰 멍석으로 뚜루루루 말아서 패니까 별로 안 다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멍석의 크기, 즉 대상자를 몇겹이나 둘둘 말았는가에 의해서도 나올 수 있는 차이이고 또 때리는 이들이 얼마나 강하게 때리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멍석은 짚으로 짜서 만든 두꺼운 자리(깔개)이므로 이것을 여러 겹 겹치기까지 한다면 분명 상당한 충격흡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로도 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심하게 때린다거나, 여러 겹 말지 않고 한두겹만 말아놓고 때린다면 대상자가 심한 부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르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애초에 멍석말이를 한 목적이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겁을 주고 경고하려는 사례' 였다면 당연히 멍석을 두껍게 말고 심하게 다치지는 않도록 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멍석말이가 '오직 대상을 죽음, 또는 중상에 이르게 할 목적의 사적제재'(=린치-Lynch-를 원어민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로 사용되기만 하던 것은 아니었고 그보다 가벼운 '경고의 의미를 겸한 치명적이지 않은 체벌'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점에서는 유의미한 지적이지만 그렇다고 '원래 멍석말이가 그렇게 잔인한 것은 아닌데 너무 나쁘게 받이들이면 안된다' 식으로 오해하는 것도 곤란하다.

또한 보통 머리 부분이 가려지도록 말기 때문에 시야를 차단하여 당한 사람이 밖을 볼 수 없게 한다. 시야가 가려지기 때문에 공포심이 배가되는 효과는 덤이고 누가 치는지 알 수 없어서 당한 사람이 나중에 집행한 사람을 찾아 보복할 수도 없다는 특징이 있다. 가끔은 입에 재갈을 물리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경우는 알아서 대충대충 치니까 그런 것이고 실제 맘먹고 치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고 마구잡이로 치기 때문에 죄의식 없이 끔살이 가능하다. 한국전쟁 이전이나 한국전쟁 중 좌익 민병대들이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지역유지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사실상 학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경우는 죽이려고 패는 경우인데, 당시 상황을 그린 반공물 같은데 보면 전신골절 때문에 사람이 엿가락처럼 흐물거리어 죽어간다고 한다.

누군가가 범죄자로 알려지거나 또는 범죄자까진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되는 행동을 했다고 알려졌을때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긴 커녕 전후사정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채 일단 무조건 공격하고 보는 행위를 멍석말이 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옛날 멍석말이 가담자들중 대상자랑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나쁜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1]

2. 그 외

  • 연산군이복동생들을 시켜서 아버지후궁(그러니까 이복동생의 모친)들을 처리할 때 이 방식으로 했다고 한다. 기록에는 어둠에 자신의 어미인지 몰라서... 라고 하고 실제로 불을 끄는 것으로 처리하지만, 박시백의 만화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멍석말이로 묘사한다. 신봉승의 소설에서는 하얀천 멍석말이와 나체 토막살인을 같이 다룬다.
  • 생일인 경우에도 생일빵이란 명목으로 멍석말이당할 수 있고 지나치게 하다가 생일빵을 당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생일을 맞은 사례가 있으며 실제로 위 사례와 합쳐진 사례도 있다. 단순히 생일빵을 하려던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망하게 되면 폭행치사죄로 처벌받으며 미필적 고의[2] 가 인정된다면 살인죄로 처벌받는다.
  • 영화 악인전에서, 장동수(마동석)가 샌드백을 주먹으로 치는 장면이 있는데 샌드백을 까보니 안에 사람이 있었다.
  • 최명희의 소설 혼불을 보면 전근대적 신분질서가 남아있던 구한말~일제시대 초기의 시골 집성촌에서 양반들이 신분질서를 강요하는 폭력적 수단(사적제재)로 멍석말이(덕석말이)를 사용하는 모습이 상당히 비중있게 묘사된다. (향촌의 지배자인 매안 이씨 집안만 제외하면) 그래도 동네에서는 제법 행세하는 중인이 공명첩을 산 뒤 집안에서 정자관을 쓰고 양반 흉내를 내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맨머리에 버선바람으로 끄집어내어 멍석말이를 한다거나, 천민이 먼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범인을 찾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의심간다는 이유로 아무나 찍어서 잡아다가[스포일러] 세 명을 멍석말이하여 모두 중상을 입히고, 그중 한 명은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태가 된 것.
    작중 시점에서 일어난 덕석말이(멍석말이)는 후자, 즉 거멍골에 사는 천민들에 대한 멍석말이이고, 전자는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나름 동리에서 행세한다는 중인을 상대로도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굴던 것이 양반들의 위세인데, 하물며 천민들을 상대로 뭐가 거리끼겠느냐'는 비교의 목적으로 등장한 내용이지만, 멍석말이라는 행위의 특징을 알아보는 데에는 전자의 내용중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남편이 초주검이 되도록 쳐두들겨맞고 돌아온 것이 원통한 아내는 처음에는 "그깟 정자관이 뭐가 좋다고 그거 한번 써보겠다고 재산을 탕진해 벼슬을 사더니 이젠 죽도록 매까지 맞느냐"고 남편을 원망하다가 곧 그 원망의 화살을 양반(매안 이씨 문중)에 돌려 "역시 양반이라 머리들도 참 좋다. 그냥 사람을 저렇게 두들겨패면 자기네 마당이 피범벅이 될 것인데, 멍석으로 뚤뚤 말아놓고 쳤으니 멍석만 내다버리고 손만 씻으면 자기네 마당은 깨끗할 것이 아니냐?"고 독설을 퍼붓는 것. 이 독설이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은, 작품 초반 청암부인이 '양반가의 높고 서릿발같은 기상'의 상징중 하나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정갈한 마당'이기 때문이다. 잡티 하나 없이 두부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하얀 흙마당이 양반가의 품격을 보여준다는 것. 그런데 흙마당은 그 특성상 피가 스며들면 그냥 쓸어내는 정도로는 지울 수 없고, 피에 물든 부분을 파낸 후 다른 흙을 가져다 메꾸기라도 해야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즉, 어떤 면에서 보면 '양반가의 높은 기상과 품격'이 깨끗한 수단만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대사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두들겨맞은 본인인 남편은 반쯤 해탈한 듯 "그래도 멍석에 말려서 맞았으니 살았지, 맨몸에 그 매를 다 맞았으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냐?"고 대꾸하여 아내를 더욱 기막히고 열받게 만드는데, 이는 위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멍석말이의 멍석에 충격 흡수 효과가 있다는 것도 분명히 사실이기는 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멍석말이는 경고의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대상을 정말 죽일 작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 역시 뒤틀린 의미에서는 사실임을 보여주는 장치로 해석되는 측면이 있다. 중로가 정자관을 쓴 것이 건방지다고 그렇게 지독하게 두들겨 팬 양반들이 그 이후에도 돈이나 물건이 필요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쪽지를 보내어 그에게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 그러니까 양반들은 '멍석말이를 한 이후에도 상대와 자신들의 관계가 그때까지와 마찬가지로 이후로도 계속되는 것'이라 여겼고, 이는 정말로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정말 널 죽일 작정으로 한 일은 아니고, 단지 앞으로는 주의하라는 경고였을 뿐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라 짐작할만 한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본 상민과 천민들은 '두들겨 팰때는 두번 다시 안 볼것 같더니, 좀 지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돈이고 쌀이고 다 내놓으라 한다'며 양반들의 파렴치함을 내심 조롱한다.)
    물론 후자의 내용 역시 나름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이쪽은 전근대의 사회구조가 급속히 해체되던(물론 일제의 식민지배에 의한 해체이긴 했지만) 당시 특유의 위기감을 보여주고 있다. 당주 세대는 당연하다는 듯 양반가의 위세를 마구 부리지만, 그 아들 세대는 무려 사회주의에도 눈뜨기 시작한 시대라 자기 부모의 행태를 끔찍하게 여기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러 찾아가기까지 한다. 그리고 피해자인 천민 마을 주민들중에서도 비교적 구세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도련님이 직접 오셨다'는 것에 감동하고 황송하게 여기지만, 새로운 시대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이들은 나름 감동하고 고맙게 여기긴 해도 황송하지는 않게 여기거나, 가해자의 아들이 사과하러 온 것 뿐이니 딱히 크게 감동하지도 않는 것. 작중 시대가 '양반가의 권위' 자체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시기임은 작품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역시 그것을 보여주는 장치 중 하나인 셈이다. 게다가 구세대의 논리로 보더라도 저처럼 마구 위세와 행패를 마구 부리는 것이 결코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점 역시 보여준다. 당주 세대보다 오히려 윗세대인 가문의 문장(종손 가계는 아니지만 가문에서 가장 학식있는 어른)은 덕석말이의 참사를 보고 '(투장이 잘못된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잘못을 했으면 혼내고 타일러서 다시 잘못하지 않도록 가르쳐야지, 저리 흉악한 짓을 왜 벌이는가, 하물며 상중인 집에서 유혈이 낭자하니 몹시 흉한 일이다' 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1] 물론 서양의 마녀사냥이나 공개처형이나 온갖 폭동, 일본의 이지메나 엔자이 등 타 문화권에도 군중심리로 인한 폭력은 존재했다.[2] 이 판단은 담당 판사증거보고 자유심증주의에 의해서 내리기 때문에 실제로 담당 검사에 의해서 죄목이 정해져서 기소됐다면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기는 그 범죄를 저지를 고의가 없었다고 잡아떼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스포일러] 청암부인의 묘에 투장된 뼈를 발견하고 '며칠 전 밤에 산 근처에서 춘복이를 봤으니 일단 잡아다 패보자'고 했다가 신나게 패보고 나서 생각하니까 춘복이는 어릴때 부모를 잃고 마을에 흘러들어온 고아라 부모의 뼈를 간수해뒀다가 투장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무당들이 투장을 하는 버릇이 있다 하니 무당을 잡아다 패보자'며 만동이와 백단이 부부를 잡아다 두들겨패는데, 그나마 두번째는 우연히 맞아떨어져서 추가적인 피해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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