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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조훈현 曺薰鉉 | Cho Hun-hyun | |
<colbgcolor=#808080> 출생 | <colbgcolor=#fffff9,#191919>1953년 3월 10일[1] ([age(1953-03-10)]세)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2]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창녕 조씨[3] |
신체 | A형 |
가족 | 아내 정미화, 아들, 딸 2명 |
학력 | 서울삼선초등학교 (졸업) 신메이중학교 (졸업) 목포대학교 (체육학 / 명예박사) |
병역 | 공군 병장 만기전역 (1973년 8월 27일 ~ 1976년 8월 31일)[4] |
입단 | 1962년(한국기원) 1966년(일본기원) |
단급 | 九단 |
우승 횟수 | 161회 (한국 바둑기사 1위) |
보유 기록 | 세계 바둑계 최초 전관왕[5][6] 세계 최초 바둑 국제기전 그랜드슬램 바둑기사 최다 연속우승 기록[7]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SNS | | [8] |
제20대 국회의원 |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20 (비례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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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정치인. 한국기원 소속 프로 기사 최초의 九단이다.[9] 1980년대 후반 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의 우승자로 세계 바둑계에 한 획을 그었다. 오늘날엔 이창호 九단의 스승이자 일종의 대부[10]로 더 유명한 감도 있으며, 한때 이창호와 라이벌 구도였던 적도 있었다.2. 생애
2.1. 바둑 입문
1953년 음력 3월 10일(양력 4월 23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서 태어나 목포시에서 성장했다. 9세 7개월에 프로에 입문하여 이 부분 최연소 기록을 아직까지도 보유하고 있다.[11] 조훈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한국의 프로 初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소년 프로기사와 석점 치수의 실력 차이가 났다고 하였다. 거기다 조훈현은 조치훈과 달리 한국서 입단을 미리 한 다음 유학을 갔는데, 일본 기원에서는 조훈현의 기력을 연구생 4급으로 확 깎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존심이 내려깔리는 상황에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것. 이창호가 입단했을 때엔 일본 기사와의 차이가 거의 없었으므로 이창호의 기록이 더 돋보일 수 있다. 물론 당시 조훈현이 바둑을 배울 때의 인프라의 차이는 이창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었으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이다.1963년 1월 6일,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을 하고 있는 조훈현 初단. 당시 입단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는 일본 국제호텔에 있던 이시다 요시오 初단. 사진 속 수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조남철 九단이다. 이 대국은 조 初단의 완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1889.05.22~1972.07.27) 九단 밑에서 수학하였다. 이 세고에 九단은 생전에 제자를 소수정예로만 키웠는데, 이 중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 일본 관서기원 창립자 하시모토 우타로 9단, '기성' 칭호를 받은 현대 일본 바둑의 개척자 우칭위엔(오청원) 九단, 조훈현 九단 3명이다.[12]
참고로 소수정예로 길러낸 이들이니, 모두 바둑계에서 업적을 크게 세웠다. 다만 조훈현이 마지막 제자인 것은 사실이다. 조훈현 외의 세고에 겐사쿠의 제자들의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세고에 겐사쿠도 원래 제자를 들일 생각이 없다가 바꾼 듯하다. 세고에 九단은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인지라 일본 바둑계의 최고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며, 그래서 애초에는 단순히 인사 차원에서 갔다고. 원래는 초청장을 보내는 등 여러 가지로 신경써 주기도 했고 여러 한국 출신 기사들이 배우고 있던 기타니 미노루 九단 문하로 가게 되어 있었다.[13] 그랬는데 세고에 九단이 조훈현을 마음에 들어하여 지도기를 두세 판이나 두더니 확 낚아채 버린 것이었다. 기타니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세고에는 일본 바둑계에 하늘 같은 대선배인지라 순순히 보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세고에 九단 문하에서 일본기원에서 데뷔하여 세고에 九단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이때 13세였는데 이는 일본 타이 기록. 신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은 같은 스승을 둔 문하생끼리는 바둑을 그렇게 격하게 두지 않는데 비해 혼자 세고에 九단 문하에서 수련하였던 조훈현은 앞서 서술한 기타니 九단 문하생들과 모두 싸워야 했던 것, 정확하게는 당시 일본 승단 대회에선 같은 도장 사람끼리는 겨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70~80년대 일본 바둑을 이끌 천재들이 다 모여 있었던 기타니 문하에 갔다면 조훈현의 일본 입단은 13살보다 더 빨랐을 것이라고.
조 국수의 회고에 따르면 유학 초기 세고에 선생님과 며느님(마마짱), 개 한 마리와 목조 주택에 살았는데 세고에 옹이 직접 지도 대국을 봐준다거나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14] 후술할 내기 바둑 사건 때 격노하여 2주간 파문한 일을 제외하곤 항상 정갈하고 규칙적이게 사람을 맞고 바둑을 연구하고 의사가 반 홉만 마시라고 한 술을 홀짝홀짝대는 모습만 기억났다고. 처음엔 이해를 못했으나 세고에 옹이 "사람이 되어야 바둑도 된다"는 말을 깨닫고 깊게 새겼다고 한다.
따라서 조 국수는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웠던 일본기원에서 후지사와 슈코[15], 아베 등과 어울리며 자유롭게 바둑 기풍을 흡수했고 친목을 다졌다.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이런 방침은 후일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뒤에도 이어져 조 국수 또한 일일이 바둑에 간섭한 적이 없다고.
데뷔 후 신예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성장세를 보이며 활동하던 중, 군 복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16] 비슷한 시기 역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조치훈은 고민 끝에 일본에 남았다. 당연히 병역법 위반이나 조치훈이 1980년대 일본 바둑계를 평정하자 정부에서 특별사면 시켜주고 불러서 국위 선양했다고 훈장까지 달아줬다.[17] 하지만 자기 문하에서 성장한 조훈현이 라이벌 스즈키의 제자인 기타니 문하의 기사들을 꺾고 일본을 평정해 주길 바랐던 세고에 九단은 애제자를 빼앗긴 충격으로 인해 자살했다고 한다. 일부 바둑 팬들은 제자의 제자인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를 평정함으로써 비원이 이루어졌다고 평한다.
그런데 다르게 본다면 일본에서 내제자가 독립하는 때는 五단이 되거나 성인이 되었을 때로 하는 게 불문율인데 이미 조훈현은 당시 五단이었고, 곧 성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군대 문제가 아니더라도 세고에 九단 문하를 떠나야 할 때였다.[18] 아마도 조훈현을 조치훈처럼 일본기원 소속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일지도. 1972년 자살 당시 83세인데도 불구하고 정정했기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참고 조훈현은 자신의 책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자신이 한국으로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가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절친한 친구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씨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고 기록했다.
귀국 후 1973년 8월 27일 공군에 사병으로 입대하며 국내에서 활동하게 된다.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터라 한국 생활에 적응도 해야 했고, 힘든 군 생활, 독립한지 얼마 안되어 일어난 스승 세고에 九단의 자살 등 여러 원인으로 명성에 비해 몇 년간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군 생활을 하면서 배속된 대대의 대대장이 바둑 애호가라 조훈현은 대대장의 도움 아래 외출 등을 통해 기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지면 위병소부터 오리걸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부대 내에서 그의 바둑 상대는 드라마 올인의 모티브로 유명한 차민수 五단. 그 둘이 왜 붙었는지는 따로 후술한다.
다만 귀국 초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9살에 부모 품을 떠나 9년을 유학했으므로, 처음엔 '물' 같은 한국 단어도 기억 나지 않아 한국어에 서툰 조훈현을 다른 기사들이 곧잘 놀리곤 했다고.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한국기원과 일본기원의 문화 차이였는데 일본 시절엔 세고에 선생에게 바둑을 물어오는 유력 정재계 인사 누구도 한참 아래인 조 국수에게 하대하는 법이 없어 '조 선생 한 수 부탁 드리겠습니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 후 한국기원에 오니 선생, 선배, 선배님 등 호칭 요구도 제각각인 데다, 빽 좀 있다는 사람 중엔 '어이 조군 한판 두세' 외치는 경우도 있어 힘이 들었다고.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민하다가 이 또한 한국 바둑만의 장점이자 역동성이겠다 마음을 고쳐먹고, 짜장면 내기 바둑 등도 곧잘 두며 기원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본 바둑은 정갈한 만큼 지나치게 모양과 미를 중시하는 것이 단점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조 국수의 이런 예감은 차후 현실이 되어 일본 바둑계를 갈라파고스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2.2. 전성기
1976년 8월 31일 공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여 다행히도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군대에서 체력 등이 보강되어 더 나아진 실력으로 괴수로 등극한다. 1974년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꺾고 첫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19] 1976년 하찬석 九단을 제압하고 평생의 경칭으로 불리는 국수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더니, 1980년 7월 2일에 이르러 서봉수의 명인 타이틀까지 빼앗으며 전관왕을 달성한다.그러나 1980년 12월에 왕위전에서 그의 착수를 똑같이 따라하는 '흉내바둑'을 구사한 서봉수에게 4:3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때부터 15년간 조-서 시대로 불리는 양강 구도가 지속된다. 이 조-서 시대가 한참이던 1982년, 한국기원 최초로 '입신'(九단의 별칭)에 오른다.
팬들조차 지리하게 느끼던 이 양강 구도를 깨고자 덤벼든 이른바 도전 5강[20]으로 불리는 신흥 기사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언제나 조훈현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도전을 격퇴했다. 박치문 기자의 말에 따르면, 도전 5강이 조-서의 양강 구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실력 차에다, 도전 5강 스스로 실력 차를 인정해버리고 조훈현, 서봉수의 기보를 연구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영향이 크다고 한다. 단, 이것은 포기했다고 도전 5강을 무작정 비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봉수는 한번 물면 놔주지 않는 끈덕지고 사나운 기풍의 소유자다. 개인 차가 있다고 하나 어느 정도 정형화된 싸움을 기반으로 하는 기사가 서봉수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기보를 연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장점을 강화해 대항하려는 것이 당시 도전 5강의 생각이라고 보는 쪽이 좀 더 타당하다. 특히 백성호 같은 경우는 행마 자체가 '반상의 신사'라 불릴 정도로 정수만 찾아가는 범생이 스타일이라 조훈현과 서봉수한테 집요하게 털리곤 했다.
결국 도전 5강은 조훈현과의 치수 고치기 이벤트전에서 정선과 두 점을 오가는 굴욕을 겪을 정도로 조훈현은 커녕 그와 비슷하게 대결할 수준은 되었던 서봉수조차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들 중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강훈의 86년 박카스배 우승이 유일하며 그것도 조훈현이 아닌 김인을 꺾고 거둔 우승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 조-서의 승률은 2대 1 정도로 조훈현이 더 앞선다. 그럼에도 조훈현-서봉수의 라이벌 구도가 공인된 건 꽤 이채로운데, 단지 워낙 많은 기전에서 그들 둘이 결승전을 치렀기 때문에 인식이 그렇게 돼 있던 점도 있었고, 서봉수를 제외하면 조훈현을 그 정도로 극복해낸 사람도 없었던 것도 그 이유라 하겠다.[21]
중국 절강성 항저우에서 개최된 결승2국 포석 전개 상황이다. 1국을 이긴 데 반해 조훈현이 그만 2국을 녜웨이핑에게 내줘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결승 최종국. 2:2 동률인 상황에서 왕위를 놓고 침묵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사진은 초반 포석 전개 상황. 이 결승국에 한중일의 수많은 기자들이 모였고, 생중계되었다. 흑은 조훈현, 백은 녜웨이핑이다.
뭐니뭐니해도 조훈현의 바둑 인생 최전성기는 1989년 대만의 재벌 잉창치가 주최한 세계 최고 규모의 대회인 응씨배 결승에서 중국의 별 녜웨이핑 九단을 꺾던 순간이라 할 것이다.[22] 이 우승으로 당시 '조훈현을 제외하면 듣보잡' 취급을 받으며 응씨배 초청장도 격렬히 항의해서 간신히 조훈현 한 명만 초청받을 정도로 변방에 머무르던 한국 바둑계의 위상을 일거에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23]
이때 한국에서 20세기 최후로 국가 주도 카 퍼레이드를 한 인물이 됐고,[24] 한국 바둑을 창시한 조남철 九단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2.3. 세대 교체
조훈현은 10년 동안 정상에 있으면서 천하에 맞설 상대가 없어보였는데,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사람은 바로 내제자로 맞아들였던 이창호였다. 1990년 2월 20년전에 처음 차지했던 최고위전에서 제자 이창호는 스승의 타이틀을 처음 빼앗았고, 이후 차례차례 조훈현의 타이틀은 이창호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조훈현의 시대에 처음 구멍을 낸 사람은 이창호가 아니라 유창혁이었다. 1988년 대왕전에서 유창혁(당시 三단)이 조훈현을 원사이드하게 잡고 타이틀을 뺏은 이후, 조훈현도 자기가 하향세를 탈 것을 인지했던 것. 응씨배 우승 후 "나는 할 만큼 했다 뒷 일은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창호가 아니었다면 유창혁이 조-서 시대 이후를 리드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유창혁은 차근차근 조훈현과 서봉수의 타이틀을 뺏어갔고, 국제기전에서도 유창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뜨면서 유창혁은 2인자로 밀렸다.1991년 8월 20일 관철동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치러진 명인전 제3국. 사진 기준 왼쪽이 조 국수, 오른쪽이 이창호 기사. 소파에 몸을 푹 뉘인 조 기사의 자세는 와기(臥棋)라고도 일컬어졌다. 조 국수 뒤의 앙상한 할아버지는 바둑계 최고 원로이자 대국수인 조남철 九단. 그러니 후일 조 국수는 이때 상황에 대해 "열여섯 소년 이창호를 상대하느라 온몸이 분해될 지경이었다. 언론에서 점잖게 와기라고 표현해줬지만 체력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하나 봐주지 않고 이창호가 조훈현의 타이틀을 다 쓸어가던 시절이니 그 부담감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동안에도 조훈현과 이창호는 같이 지내고 있었다.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는 둘을 대국장에 함께 차로 싣고 가서는 밤에는 타이틀을 빼앗긴 남편과 그 타이틀을 빼앗은 제자를 같이 맞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시기 신문 만평에 실린 조훈현의 2층 집에서 호랑이가 자고 있고, 그것을 조훈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상황을 적절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이 상황은 1991년에 조훈현이 연희동에서 세검정으로 이사를 하면서 이창호도 자연스럽게 분가하는 식[25]으로 끝이 난다.
분야를 막론하고 보통 제자가 정상에 오르면 스승은 달이 지듯 점점 그 빛을 잃어가다 스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에 비하여, 조훈현은 한때 이창호에게 그 많은 타이틀을 다 잃어버려 대부분의 바둑팬들은 은퇴를 예상할 정도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으나[26], 하루 네댓갑씩 피우던 담배까지 끊어가며[27] 연구에 연구를 거듭, 결국 바둑 스타일을 일신하며 부활에 성공한다. 특히 2002년 만 50세의 나이로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를 우승했다.[28]
다만, 조훈현이 1위 왕좌를 넘겨주었고, 순위도 1위에서 하락했지만 21세기 초까지는 그래도 20위권 안에 들면서 상위권에 속했다. 물론 전관왕을 했던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면 '조훈현 답지 못 한 성적'이었다. 조훈현이 거둔 한국기원의 연도별 순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만 이 순위를 보면 알겠지만 조훈현이 타이틀을 쓸어담던 시절에도 생각보다 의외로 순위가 높지만은 않았다. 타이틀 보유자였던 탓에 다른 기사들에 비해서 대국 수가 적었기 때문. 하지만 승률 자체가 넘사벽이었기 때문에 조훈현이 다른 기사들과 차원이 달랐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연도 | 나이 | 전적 | 승률 | 순위 |
1986년 | 만 34세 | 58국 48승 10패 | 0.828 | 3위 |
1987년 | 만 35세 | 65국 52승 13패 | 0.800 | 3위 |
1988년 | 만 36세 | 79국 59승 20패 | 0.747 | 2위 |
1989년 | 만 37세 | 70국 53승 16패 1무 | 0.768 | 2위 |
1990년 | 만 38세 | 83국 54승 29패 | 0.651 | 3위 |
1991년 | 만 39세 | 73국 50승 23패 | 0.685 | 4위 |
1992년 | 만 40세 | 93국 59승 34패 | 0.634 | 5위 |
1993년 | 만 41세 | 112국 78승 34패 | 0.696 | 2위 |
1994년 | 만 42세 | 115국 79승 36패 | 0.687 | 1위 |
1995년 | 만 43세 | 118국 75승 43패 | 0.636 | 2위 |
1996년 | 만 44세 | 99국 64승 35패 | 0.647 | 2위 |
1997년 | 만 45세 | 67국 39승 28패 | 0.582 | 13위 |
1998년 | 만 46세 | 62국 47승 15패 | 0.758 | 6위 |
1999년 | 만 47세 | 65국 38승 27패 | 0.585 | 15위 |
2000년 | 만 48세 | 68국 51승 17패 | 0.750 | 5위 |
2001년 | 만 49세 | 88국 61승 27패 | 0.693 | 2위 |
2002년 | 만 50세 | 68국 51승 17패 | 0.750 | 5위 |
예전까지의 바둑 스타일이 가벼운 행마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29] 제비라는 별명[30][31]이 불릴 정도였다면, 부활 후 스타일은 그야말로 화력 위주의 강한 싸움을 주무기로 하는 바둑. 여기에서 붙여진 별명이 전신(戰神)이다.
2009년 3월 기준으로 국제대회 결승전 승률은 64.7%. 이창호의 62.7%보다 오히려 높다. 과연 킹왕짱. 다만 국제대회 결승전 총전적 다승 랭킹으로는 이창호에게 압도적으로 밀린다. 이창호의 경우 52승 31패, 조훈현의 경우 22승 12패이다. 물론 위에 서술하였듯이 조훈현의 전성기에는 국제기전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한국 바둑이 듣보잡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출전수가 적은 원인도 있다. 또한 전세계 최초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기사이기도 하다. 1994년 후지쯔배에서 우승함으로써 당시 현존하던 세계대회인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에서 모두 한 차례 이상 우승을 차지하여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는 2002년 유창혁, 2004년 이창호가 차례로 달성하고 그 이후에는 달성한 사람이 없다.[32] 또한 세계대회 결승에서 2차례 이상 우승했으면서도 외국 기사에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유일한 기사이다.[33]
이창호나 유창혁, 이세돌 모두 세계 정상의 일각에 있으면서도 외국 기사들에게 우승컵을 내준 적이 있지만 조훈현 九단은 세계대회 준우승 2회가 있지만 이는 모두 유창혁 九단에게 졌을 뿐[34] 창하오, 왕레이, 녜웨이핑 등을 상대로 모두 이겼다. 심지어 제1회 춘란배에서는 이창호도 결승에서 꺾어서 이창호에게 세계대회 첫 준우승을 선사하기도 했다.[35]
그러나 '명실상부한 세계 1인자'에 오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창호나 이세돌과는 달리, 의견이 갈리곤 한다. '이창호의 치세', '이세돌의 치세', '구리의 치세'가 분명히 있었던 것과는 달리, 세계바둑사에 '조훈현의 치세'라고 할 만한 시기는 없었다는 것. 최초의 세계대회인 후지쯔배, 최고 규모의 세계대회인 응씨배가 생긴 것이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밀리기 시작하던 시기 직전인 데다가 4년에 한 번밖에 안 열리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즉 세계바둑에서의 순위와 패권을 논할 만한 시기가 되었을 때는 이미 이창호의 시대였다.
가장 큰 것은, 당시 바둑계는 일본이 압도적이었고 중국이 버겁게 쫓아가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조훈현의 전성기에 일본에서는 조치훈이 가장 앞서는 기사였는데, goratings에서는 이 시기 세계 1위를 조치훈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시 한국의 선수층은 너무 얕아 고레이팅의 기사가 없었고 국제기전도 없어 조훈현이 점수를 올리기 매우 힘들었음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1980년대 후반 후지쯔배와 응씨배가 열리기 전까지, 국제대회라고 하면 중일 슈퍼대항전이 유일했다. 1988년 1회 응씨배에 초청받은 한국기사가 왜 조훈현 딱 한 명이었겠는가. 그 조훈현이 응씨배에서 우승하면서 한국바둑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goratings에서 나온 랭킹도 한국 기사들은 1988년 응씨배부터 반영되기 시작한다. 이후 goratings에 데이터가 추가되며 1986-1990 1위 기사는 조훈현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초대 응씨배를 위시한 시대를 조훈현의 시대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2016년 5월 30일부터 국회의원이 됨에 따라 2016년 5월 25일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서 도전 5강의 일원인 서능욱 九단한테 이긴 것을 마지막으로 한국기원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5월 26일 바둑기사 휴직 기자회견을 가졌다. 조훈현 九단 말로는 재선 도전의 생각이 없어 2020년에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는 대로 바둑기사로 복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 휴직 기자회견과 서능욱 九단과의 대국을 '반상 위의 스승님' 후지사와 슈코 九단의 은퇴 기자회견과 은퇴 대국처럼 은퇴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자세한 건 후술하지만 조훈현 스스로가 말했듯 은퇴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고, 실제로 2020년 6월에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자마자 정계를 떠나 다시 프로기사로 복귀하였다.
2.4. 정치 활동
2016년, 조금 뜬금없다면 뜬금없게도 새누리당으로부터 입당 제의를 받아 화제를 모았다. 그러다 2016년 3월 10일 결국 새누리당에 입당해 비례대표 신청을 했고# 3월 22일, 비례대표 안정권인 14번으로 공천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새누리당 17번까지 당선권으로 확정되며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그러나 여러모로 정치하기엔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본인 나름대론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바둑계 진흥에 힘을 쓸 생각이었겠지만,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일단 20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시작한데다 몇개월 안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시작되는 역대급 정치 혼란기에 엮이는 바람에 정상적인 의정 활동 기간은 매우 짧았고, 하필 소속정당도 지지율이 바닥을 기기 시작한 보수 정당이었다.
이후엔 보수정당 내에서도 반 탄핵 및 친박 세력에서 활동하며 이미지를 더 악화시켰다. 이는 조훈현이 자유한국당 내에서도 대표 친박인[36] 원유철의 권유로 인해 국회로 들어온 경우였기 때문. 다만 조훈현 본인이 언론에 나서 극성 친박스런 행위를 하진 않았다. 나중 본인 말론 포럼이나 세미나에 부르면 웬만하면 어느 쪽이든 갔을 뿐이고, 그래서 비박이 되었다 친박이 되었다 했다고 하지만, 여하튼 이때 정치 행보만 보면 2016년 11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전 의원의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금지법 통과를 막은 13인 중 한 명이 되기도 했고, 새누리당의 친박계 집단인 새누리당/혁신과 통합 연합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모임은 탄핵 반대를 인증한 집단이다. 표창원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투표에선 감표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계가를 잘해서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위 영상의 2시간 14분 부분 참고.
조훈현이 2016년 발의한 바둑 진흥법은 2018년 들어서 여야 합의로 법이 묶여 논의가 빨라지더니 2018년 3월 30일 본회의를 통과하여 법으로 확정되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관련 법안은 한동안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잠들어 있었으나, 여야 의원이 각자 발의한 법안 2개가 묶이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무쟁점 법안으로 체계자구심사를 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통과, 전격적으로 국회를 통과한 것. 이로써 조훈현은 국회의원이 된 뒤 결국 자기의 숙원을 이뤘다. 이후 애호가들 사이에선 정계 입문의 사실상 거의 유일한 이유였던 바둑 진흥법이 제정되었으니 이제 욕 그만 보고 정치판에서 발을 뺐으면 좋겠다는 의견과 후속 조치를 위해서 조금만 더 힘 써달라는 의견이 나뉘었다.
여러 인터뷰를 보면 정작 본인은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딱히 정치에 대해선 이해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다른 의원이 모임에 참여해달라고 요청이 오면 웬만하면 다 가다보니 친박이 되었다 비박이 되었다 반홍이 되었다 한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국회의원이 된 것이 "알파고 때문에 바둑이 이슈가 돼서 부른 것 같다. 아마 월드컵 기간이었으면 허정무를 부르지 않았을까?"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허정무도 같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에 응모했고 공천까지 받았지만, 조훈현과 달리 당선권과는 거리가 너무 먼 32번으로 배정되자 스스로 후보직을 사퇴했다.
본인도 국회의원보다는 국수 소리가 더 편하다고 하며, 바둑 진흥법 통과 후 일찌감치 불출마 의사를 내비쳤다.
2018년 7월 17일 MBC PD수첩에서 특수활동비가 들어간 국회 의원들의 해외 출장을 취재한 결과 지난해 8월, 자유한국당 원유철 전 의원과 조훈현 전 의원이 코이카 사업 현장 시찰을 위해 동아프리카로 출장을 떠났다는 것을 보도했다. 문제는 그 출장에 부인들도 동행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공식 일정과 보고서, 어디에도 부인들의 행적이 보이지 않았다.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 부인들은 매장에서 보석을 보러 다녔다. 이에 조훈현은 보석이 그리 비싸지 않고 법에 걸리는지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결코 옹호할 수 없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조훈현의 정치에 관한 무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
2020년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사무총장에 내정되었고, 2020년 2월 6일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서 제명되었다. 비례대표이기 때문에 탈당하면 의원직을 잃게 되지만, 당에서 제명당하면 의원직을 유지한 채로 당적을 옮길 수 있기 때문. 자유한국당에서 제명된 직후 미래한국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초대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다만, 제21대 총선에는 일찍이 불출마를 선언하며 더 이상 정치를 하고 싶지 않다고 입장을 밝혔다. #
여러 가지 인터뷰를 보면 본인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열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평소 친분이 있던 원유철을 통해 영입 제안이 오자 숙원으로 생각했던 바둑 진흥법을 통과 시키는 일, 그리고 바둑계에서 한 명 정도 정계 쪽에 진출한 사람이 있는 게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정치에 나선 듯.[37] 막상 정치판에 들어와보니 자신의 상식과 안 맞는 일이 많고, 상대편의 주장이 일리가 있을 때도 있는데 무조건 우리쪽 생각만 밀고 나가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정치적 식견이 없는 인재를 영입했을 때 나타나는 한계를 조훈현도 결국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둑계 원로로서 굳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탄핵 정국 등 어지러운 상황 속에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도 자신의 원래 목적이었던 바둑 진흥법만큼은 기어코 성사시켰으니 조훈현 본인 입장에서나 바둑계 입장에서나 마냥 무의미한 행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2024년 5월, 윤석열 정부 들어 바둑 관련 정부 예산들이 줄줄이 삭감되자 "(정부가) 도와주진 못할망정, 되레 걸림돌만 놓고 있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대로면 바둑계는 고사될 것"이라며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를 비판했으며, "용산 대통령실 앞이든, 기획재정부 앞이든, 문화체육관광부 앞이든, 필요하면 프로바둑기사들이 모두 나가서 매일 농성이라도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뿔난 '바둑황제' 조훈현 "용산서 1인 시위 나설 것"…작심 쓴소리
2.5. 다시 바둑계로
20대 국회가 끝나고 21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바둑계로 복귀했다. 복귀전으로 2020년 6월 13일, 최정과 대국을 한번 치른다. # 바둑계에서는 당연히 전설의 복귀를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이 날 대국은 최정 흑, 조훈현 백이었으며 결과는 177수 백 불계패였다.[38]이후에는 이창호와 함께 청소년 국가대표와의 대국을 치르게 된다. 해당 명칭은 '날개를 펼쳐라'다. 첫 대국은 김은지와의 대국이다.
2021년 1월 15일 농심 신라면배 특별대국에서 과거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녜웨이핑의 제자인 창하오와의 대국에서 불계승을 거두었다. 자기보다 수십 살 더 어린, 그것도 자신의 라이벌의 수제자를 꺾었다는 점에서의 '조훈현의 제 2의 전성기가 시작됐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39] 17일에는 일본 요다 노리모토를 상대로 불계승, 22일 열린 2라운드 한일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를 상대로 백을 잡아서 1집 반승, 24일 한중전에서 라이벌 녜웨이핑을 상대로 불계승을 거두며 4전 전승으로 농심배 특별대국 우승을 이끌었다.
2022년 10월 14일에는 프로 입단 6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
2023년 6월 28일에는 2023 영자배 바둑대사대회 결승에서 다케미야 마사키에게 286수 만에 흑 3집반승을 거두며 우승하여 통산 161번째 우승을 했다.
제1회 농심백산수배 시니어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와일드카드를 받고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2024년 2월 22일에 한국의 세 번째 주자로 출전했다. 상대는 중국에서 세 번째 주자로 나온 마샤오춘과 22년 만에 맞대결을 했는데 중반에 전투를 통해 우위를 잡으며 항복을 받아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날(23일)에는 요다 노리모토와 대결했으나 아쉽게 2집반을 지면서 연승에 실패했고 유창혁에게 바통을 넘겼다.
11월 14일 슈퍼컵 결승전에서 이창호에게 지며 준우승했다.
3. 이야깃거리
- 바둑 외적인 책을 내기도 했다. <戰神 조훈현, 나는 바둑을 상상한다>, <조훈현과의 대화>,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등.
- 바둑계 통산 최다 타이틀[42] 기록 보유자이며, 참고로 2위는 통산 140회의 제자 이창호 九단. 그리고 집계 기록이 존재하는 기사들 기준 한국기원 최다승 기록 보유자이자 세계 통산 최다승(1953승)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43]
- 대부분 기사의 전성기가 한 차례에 그치는 것과 달리, 조훈현은 대략 3~4 차례 전성기가 약 30여 년에 걸쳐 차례차례 왔으며 3차 전관왕 이후 전성기는 상대가 이창호 九단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제자보다 밀리는 것일뿐 조훈현 역시 불세출의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정상급에서 활약한 시간, 전성기의 횟수 등을 따진다면 교통사고 후 극적으로 부활하여 대삼관을 한 번 더 차지한 조치훈 九단 등과 더불어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경력을 가진 기사다.
- 어린 시절 일본에서 바둑을 수학할 때 파문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후지사와 슈코의 연구소에서 바둑을 수학하던 3단 시절 연구소 선배였던 '아베 요시테루'가[44] 가벼운 내기 바둑을 제안하자 조훈현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괴짜 기질이 다분하던[45] 후지사와 측에서 등을 떠밀어 버린 것. 결국 용돈 내기 수준의 바둑이 진행되어 선배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기염을 토했고 이를 눈여겨본 후지사와가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리게 된다. 결국 소문은 세고에의 귀까지 흘러들어가 머리 끝까지 분노한 그는 조훈현을 집에서 내쫓아버렸고 조훈현은 잠시 방황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결국 후지사와 측에서 자기 잘못이라 손발이 닳도록 비는 끝에 2주가 지나서야 겨우 내제자로 복귀하게 된다.
- 전매청(현 KT&G) 사보에도 실릴 만큼 지독한 골초였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금연 후 금연초의 광고 모델을 맡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일.[46] 그리고 술이 굉장히 약하다고 한다. 심지어 1986년 박카스배 당시 우승을 놓친 걸 두고 "대국 전에 나눠준 박카스 먹고 취한 거다"란 농담도 나왔을 정도.[47] 담배는 예전에 나오던 장미 담배를 주로 피웠는데, 다른 담배보다 더 길어서 오래 피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당시 담배인삼공사(현 KT&G)가 장미 담배를 단종하자, 바둑 동호인들이 엄청난 항의를 했다고 한다. 보통 한 명의 애호가를 위한 담배가 재생산되기 쉽지 않은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프로 바둑기사는 모두 골초라는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이 조훈현 九단. 이 때문에 1980년대 중반에는 해태제과의 민트계열 사탕인 '허브Q'(사탕)와 '허브껌'의 모델이기도 했다.
- 취미는 등산. 하지만 조훈현은 동료들이 등산을 즐길 때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고 하며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훗날 이창호 九단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그 주요 원인이 체력 저하임을 깨닫고 금연과 동시에 광적인 등산광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체력을 쌓으면서 LG배, 후지쯔배, 삼성화재배, 춘란배 등 국제 바둑 기전을 휩쓸었다.
- 조훈현이 회고하는 중에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바로 1999년 국수전이라고 한다. 1998년 국수전에서 이창호를 2:0으로 꺾고 타이틀을 뺏었는데, 1999년 국수전에서 여자 바둑기사인 루이나이웨이 九단한테 2:1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조훈현은 루이나이웨이한테 패배해서 타이틀을 뺏긴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치욕적인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럴만한 것이 당시에는 여자 바둑기사들이 남자 바둑기사를 꺾고(그것도 당대 최고수 레벨인 조훈현) 타이틀을 빼앗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던 시절이고, 그 이후로도 종합기전에서 여자 기사가 남자 기사를 이기고 타이틀을 차지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 종종 자녀들의 컴퓨터로 인터넷 바둑을 즐긴다고 한다. 인터넷상이라는 점을 활용해 프로 기사임을 숨긴 채 동료 프로 기사를 발라버리는 일도 가끔 있다고…드라마 올인의 실제 모델로도 유명한 차민수 五단[48]이 기력을 속이고 인터넷에서 바둑을 두다가 어떤 수준으로 둬도 자신을 한집 반으로 이기는 기사를 만났는데, 이게 알고 보니 조훈현 九단이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다.
- 그보다 한 살 연상[49]인 차민수 六단과는 군대에서 바둑을 두면서 친해졌는데 그 이유가 뭔가 하니 당시 차 初단이 공군본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장교들을 바둑으로 때려잡고 다니자, 그에게 번번이 진 간부들이 당시 공군본부에 현역으로 복무 중이던 조훈현 九단을 데려와서 대리전을 붙인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그 둘은 군 복무 기간에만 100여 판이 넘는 대국을 두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덤으로 조훈현과 대결하며 '세상에는 넘사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차민수는 곧장 미국 이민을 택했다나 뭐라나. 한마디로 조훈현이 차민수 를 미국으로 보내버린 셈이다.
- 파란에서 연재했던 파란 웹툰의 바둑삼국지가 조 국수를 다룬 작품이다. 상당한 수작이고 조 국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면 한번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팔 부상으로 연재 속도가 극악으로 늦춰지고 결국 연재를 중단했다. 그간의 만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 인터넷 바둑게임 바투에도 선수로 참가한 적이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바둑의 국수'가 아니라 '바투의 국수'로 거듭 나겠다"는 말도 하였다.
- 고스트 바둑왕의 토우야 명인은 어느정도 조 국수를 모티브로 가져온 듯 하다는 이야기가 있다.[50] 타이틀을 3개 보유했던 조치훈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하네 바둑 부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러 인물이 종합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일단 작중에서 조훈현 九단의 위치에 있던 인물은 서장원 九단이다. 외모도 판박이다.
연재 당시 작가들이 한국에 와서 조훈현 九단과 인터뷰를 했는데 본인도 고스트 바둑왕을 보고 있었는지 "나도 사이 같은 귀신이 나와 나를 도와주면 좋을 텐데" 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51] 역시 범상치 않으신 분. 여담으로 이때 한국기원에서는 "한국 대회에 사이를 위한 시드를 한 장 줄까요?" 하고 작가들에게 농담을 건넸다고 했다. 이래저래 대단한 양반들이시다.
- 허영만 화백이 이태모라는 경마 고수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다룬 오늘은 마요일 1권에서 '조운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바둑계의 제왕이면서 역시 과천벌의 제왕으로 불리던 '대걸'이라는 말의 주인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바둑에서 무관이 되고 동시에 대걸도 무관이 됐을 때, 대걸을 믿어주던 주인공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이 대걸에게 걸지 않지만 제왕은 하루 아침에 되지도 않지만 하루 아침에 몰락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하며 대걸에게 걸었고 대걸은 오랜만에 우승한다. 그리고 바로 주인공에게 나도 선생 말을 듣고 대걸에게 걸어서 돈을 땄으니 한 잔 사고 싶다고 한 뒤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다시 제왕의 자리를 위해 다짐하는 것은 덤. 그리고 주인공은 당시 거래처 사장이 엄청난 바둑 애호가였는데 바둑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 바둑을 잘두는 경쟁 업체 직원에게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조운연을 소개시켜 줌으로서 게임이 세팅되었다. 서로에게 해피엔딩이 된다.
- 바둑기사들과 바둑팬 사이에서 도는 숨겨진 별명은 조엄살이다. 바둑이 불리해질수록 엄살을 부리지만 결국은 승리를 따내는 모습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거기다 바둑에 몰입하면 중얼거리는 트래쉬 토크를 구사했는데,[52] 심지어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 九단은 이 중얼거림이 듣기 싫다고 귀마개를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53][54] 특히 조 九단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일단 집중하면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여서 신경을 긁는 웅얼거림이 나온다고 한다. 서봉수 九단은 이에 대응해서 바둑돌을 엄청 짤그락거리면서 두기도 했다.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이세돌이 선배 국수와의 대국 썰을 풀기도 했는데,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중론.
- 바둑계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박치문 바둑전문기자의 말에 따르면, 나이가 고희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젊은 기사에게 밀린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세계대회인 BC카드배에 출전, 대만의 1인자 저우쥔신 九단을 잡더니 노장의 관록을 보여주며 4강에 진출했다. 상대는 당시 LG배에서 이세돌을 잡은 1인자 구리 九단이었는데 아깝게 반집으로 패하고 말았다. 32강, 16강, 8강에서 모두 어마어마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구리 九단에게도 위기를 딛고 좋은 국면으로 몰고 갔으나 막판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재역전되었다.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
- 2015년 들어서는 스포츠 채널 광고 중 뜬금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캔디크러쉬 소다 광고 중에 바둑 버전이 있는데 거기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조훈현이다.#
- 2015년 10월 15일에는 아침마당에도 나와 이야기를 했다.
3.1. 조치훈과의 특별 대국
2015년 7월 26일, 한국 바둑 70주년 기념으로 '전설의 귀환'이라는 부제를 달고 조치훈과의 특별 친선 대국을 펼쳤다. 무려 13년만에 이루어지는 대국. 바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초미가 집중되는 대결로, 대국 내외적으로 수많은 관심을 모았다. 수많은 후배 기사들도 관전을 왔고 바둑계의 인사들이 현장을 직접 방문했으며, 김인 9단이 심판을 보는 등 주변 사람들의 면면들도 화려하다. 한 시간을 주고 초읽기는 40초를 세 번 받는 약간은 속기. 조훈현이 백을, 조치훈이 흑을 쥐었다.쌍화점으로 시작된 대국은 조치훈의 좌하 걸침에 이은 백의 한 칸 건너 협공, 흑이 반대편 귀에서 눈목자 굳힘으로 협공 태세, 백이 질세라 양화점의 변을 3선에 가르는 등 시작부터 뜨거운 격돌이 예상되는 형국이었다. 이때 조치훈의 흑이 9수째에 협공나온 백의 바로 윗선에 붙여서 대놓고 도발을 걸며 전투가 시작됐다. 해설자들은 물론이고 관전을 왔던 기사들도 한결같이 '초반부터 너무 과격하지 않나'라며 우려를 표했다.
이후의 형국은 파란 그 자체다. 상세한 내용은 문서보다 직접 기보를 보거나 재방을 보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서로가 미생 상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고, 한 쪽이 숨을 돌릴 때마다 유리한 쪽이 계속 바뀌더니 초조한 쪽이 곧바로 싸움을 다시 걸어갔다. 대부분의 시간이 초반 포석과 싸움에서 쓰여졌고, 중반부터 초읽기에 몰린 두 기사는 순발력 대결에 가까운 난투전을 펼쳤다. 해설자들도 수읽기를 버거워한데다가 일일 해설을 맡은 김지석, 이세돌 9단도 형국의 유리가 흑백을 오락가락할 정도. 그러나 대국은 154수에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렸는데, 한창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시점에 조치훈이 초읽기를 약간 늦게 반응해서 시간패.[55] 해설자들도 관중들도 타이틀전이 아닌 친선 대국이라 실수를 묵인하고 대국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비쳤지만, 심판 김인 9단은 시간패를 선언했고 조치훈도 이것을 받아들이며 종료.
대국 외적으로 볼거리도 참 많았다. 두 기사 모두 특유의 반상 내려다보기를 시전하는 통에 카메라에 뒤통수가 심심찮게 잡혔다. 조훈현 9단은 쓴웃음과 함박웃음을 번갈아가며 자신의 기분을 그대로 노출시켰고, 초조해졌을 때는 볼에 바람을 넣은 귀여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조치훈 9단 또한 연신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뻑' 소리와 함께 머리를 때리는 것이 소리가 잡혔다.#[56] 또한 막상 대국은 시간패로 끝났지만, 그 뒤의 자전 해설에서도 수읽기를 가지고 티격태격거리기도. 결과적으로는 흑이 근소하지만 조금 더 우위에 있었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
3.2. 체스 관련 일화
사적인 자리에서 세계 최고수와 체스를 둬서 이겼다는 이야기가 KBS 스펀지 70회에서 방영된 바 있다. 체스를 두기 이전에 다른 경기를 구경했었는데 우연히 그 경기와 똑같은 모양이 재현되어 보았던 대로 따라갔다고 조훈현 자신이 밝힌 바 있다. 바둑 우위론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체스보다 바둑이 우월하다'[57]고 주장하기도…그런데 실제 그 사람이 한 말은 "바둑은 잘 못 두지만 체스는 마스터"였다고 한다. 즉 자칭 마스터다. 애초에 체스에서 마스터라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최고 실력자 단 1명이 아닌, 그만큼의 실력을 지닌 실력자 부류를 총칭한다. 즉 상대는 세계 최고수도 아니며, 심지어 진짜 마스터 등급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58] 이걸 가지고 바둑>체스라고 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일 듯. 스펀지 방영 후 조훈현 자신이 홈페이지에 올린 해명글도 있다. 원본은 현재 삭제.
안녕하세요. 조훈현입니다.
스펀지에 방송된 내용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은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당시의 상황을 설명드리려 합니다.
1979년 유럽 바둑 선수권이 독일에서 열렸고 당시 저는 한국 프로 사범으로 초청되었습니다. 초청 다면기를 끝내고 옆을 보니 체스를 두고 있었기에 구경을 하러 갔습니다.
말의 대강의 움직임은 알겠기에 흥미가 있어 관전을 하였습니다. 계속 관전을 하자 체스를 두던 대국자가 체스를 아느냐고 하였기에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저는 체스 대국은 처음이었기에 접어주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체스는 접어주는게 없다고 하였습니다.[59]
그렇게 대국을 시작하였고 첫 판에는 졸 하나 차이로 졌습니다. 한번 더 하자고 해서 두 번째 판을 시작하였습니다. 두번째 판 중반에 상대방의 제일 센 말이 제 졸을 잡다가 오히려 잡혔습니다. (장기로 예를 들면 청 차로 홍 졸을 잡으려다 홍 마에게 청 차가 잡혀버렸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그 센 말이 잡히자 그 사람이 졌다고 말해서 대국이 끝났습니다. 대국이 끝나고 그 사람에게 실력이 어느 정도시냐고 물어봤더니 그사람은 자기는 '바둑은 약하나 체스는 마스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급 정도 되겠냐고 물어봤더니 강 6급 정도 되겠다고 하며 체스를 배우면 잘하겠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가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 사람이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 확인은 못하였으나 본인 스스로 마스터라고 하여 저는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기억에 남아 전신(자서전)에 그 이야기를 썼는데 스펀지에 그 내용이 올라왔다며 취재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스펀지 방송시 상황설정을 할 때 재미를 위해 일부 내용이 편집되어 방송된듯 한데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60] 체스를 폄하하고자 함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저 역시 그 사람을 이긴 것이 실력이 아닌 운이였음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면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과연 체스상대자가 체스챔피언이었나, 그리고 그 체스 챔피언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제일 많이 올라오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일단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기 힘들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26년이나 된 오래전 이야기인데다가 비공식적인 대국이었기에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시 그 독일인과 영어로 대화를 하였기에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였고 저는 체스를 처음 접한 것이어서 체스 단을 나누는 정확한 명칭도 몰랐으므로 그 사람이 자신을 마스터라고 하였기에 그것을 그대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대국 자체가 없던 일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체스를 폄하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생각는 전혀 없으며 그러한 의도또한 전혀 없음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스펀지에 방송된 내용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은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당시의 상황을 설명드리려 합니다.
1979년 유럽 바둑 선수권이 독일에서 열렸고 당시 저는 한국 프로 사범으로 초청되었습니다. 초청 다면기를 끝내고 옆을 보니 체스를 두고 있었기에 구경을 하러 갔습니다.
말의 대강의 움직임은 알겠기에 흥미가 있어 관전을 하였습니다. 계속 관전을 하자 체스를 두던 대국자가 체스를 아느냐고 하였기에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저는 체스 대국은 처음이었기에 접어주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체스는 접어주는게 없다고 하였습니다.[59]
그렇게 대국을 시작하였고 첫 판에는 졸 하나 차이로 졌습니다. 한번 더 하자고 해서 두 번째 판을 시작하였습니다. 두번째 판 중반에 상대방의 제일 센 말이 제 졸을 잡다가 오히려 잡혔습니다. (장기로 예를 들면 청 차로 홍 졸을 잡으려다 홍 마에게 청 차가 잡혀버렸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그 센 말이 잡히자 그 사람이 졌다고 말해서 대국이 끝났습니다. 대국이 끝나고 그 사람에게 실력이 어느 정도시냐고 물어봤더니 그사람은 자기는 '바둑은 약하나 체스는 마스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급 정도 되겠냐고 물어봤더니 강 6급 정도 되겠다고 하며 체스를 배우면 잘하겠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가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 사람이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 확인은 못하였으나 본인 스스로 마스터라고 하여 저는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기억에 남아 전신(자서전)에 그 이야기를 썼는데 스펀지에 그 내용이 올라왔다며 취재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스펀지 방송시 상황설정을 할 때 재미를 위해 일부 내용이 편집되어 방송된듯 한데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60] 체스를 폄하하고자 함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저 역시 그 사람을 이긴 것이 실력이 아닌 운이였음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면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과연 체스상대자가 체스챔피언이었나, 그리고 그 체스 챔피언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제일 많이 올라오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일단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기 힘들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26년이나 된 오래전 이야기인데다가 비공식적인 대국이었기에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시 그 독일인과 영어로 대화를 하였기에 정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였고 저는 체스를 처음 접한 것이어서 체스 단을 나누는 정확한 명칭도 몰랐으므로 그 사람이 자신을 마스터라고 하였기에 그것을 그대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대국 자체가 없던 일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던데,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체스를 폄하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생각는 전혀 없으며 그러한 의도또한 전혀 없음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위 해명 글에 따르면 상대방이 스스로 마스터라고 했을 뿐 조훈현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조훈현이 이기기만 한 게 아니라 1승 1패였고, 두 번째 대국에서 조훈현이 이긴 것도 상대방이 퀸을 잃자 기권패[61]했다는 정보밖에 없어 상대방이 정말로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 기권패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체스를 처음 접했으면서 자칭 마스터를 상대로 1승을 따냈다는 것만 해도 조훈현의 천재성을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조훈현은 일본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일본식 장기인 쇼기 실력은 수준급이며, 카드게임의 일종인 콘트랙트 브리지 실력도 상당하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 1991년 MBC에서 '승부'란 제목으로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국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한적 있다. 2022년 개봉 예정인 영화 승부(영화)에서 이병헌과 유아인이 각각 조훈현과 이창호를 연기한다.
- 1994년작 MBC 3.1절 특집극 <맞수>에서는 배우 유인촌이 연기했다. [62]
- 1997년 12월 21일자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바 있는데, 조훈현 역은 배우 정성모였으며 아역은 정상곤 등이 맡았다.
5. 어록과 인터뷰
Q : (이창호 九단한테 모든 타이틀을 뺏기고 무관으로 전락했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A : 무관 신세가 돼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정상에 오를 때는 정상만 보며 올랐고, 오르기만 하다보니 진다는 걸 몰랐다. 하나둘씩 뺏길 때는 불안에 떨었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게 없으니 오히려 편해졌던 것 같다.
Q :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나.
A : 아무리 해도 못 이기는 걸 속상해하면 뭐하나. 그때부터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받아들였다. 어차피 지는데 한 번이라도 이겨보자. 열 번 지는 건 당연한 거고 한 번 이기면 득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편안해지고 엔도르핀이 도니 체력도 좋아졌다. 자연스레 경기도 잘 풀리기 시작했다.
이상 파이낸셜뉴스 창간 15주년 대한민국 명장열전 (7) 바둑계 살아있는 전설 조훈현에서 인용
A : 무관 신세가 돼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정상에 오를 때는 정상만 보며 올랐고, 오르기만 하다보니 진다는 걸 몰랐다. 하나둘씩 뺏길 때는 불안에 떨었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게 없으니 오히려 편해졌던 것 같다.
Q :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나.
A : 아무리 해도 못 이기는 걸 속상해하면 뭐하나. 그때부터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받아들였다. 어차피 지는데 한 번이라도 이겨보자. 열 번 지는 건 당연한 거고 한 번 이기면 득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편안해지고 엔도르핀이 도니 체력도 좋아졌다. 자연스레 경기도 잘 풀리기 시작했다.
이상 파이낸셜뉴스 창간 15주년 대한민국 명장열전 (7) 바둑계 살아있는 전설 조훈현에서 인용
Q : 바둑과 정치의 닮은 점이라면?
A : "예전에 농담 삼아 어느 정치인께 '정치와 바둑 중에서 뭐가 어렵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바둑도 어렵지만 정치는 몇 배 더 어렵다'고 하시더라. 그 말이 와닿는다. 바둑은 솔직히 몇 수 앞이 보이는데 정치는 한 수 앞도 안 보이는 것 같다."
Q : 60년간을 만져온 바둑돌인데 손이 근질근질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역할도 크신데.
A : "젊은이들한테 맡겨야지. 이젠 앞에 나서기도 어렵겠지만 앞에 나서기보다 밀어주는 게 내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Q : 최근 이세돌 9단의 기사회 탈퇴서 제출로 바둑계가 시끌벅적한데.
A : "우리 때는 이야기할 처지도 못 됐고, 말도 못 꺼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바둑계에 도움이 되는냐 그렇지 않느냐는 면도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위상이 높아진 바둑계 전체의 이미지를 봤을 때엔 바깥으로 잡음이 나가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내부에서 처리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어쨌든 잘 타협해서 잘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Q : 팬들에게 한 말씀?
A : "당분간 바둑판을 떠나려니 서운하기도 하고 바둑계를 위하는 일인 만큼 걱정도 앞선다. 저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가는 줄 아는데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Q : 앞으로 8년, 12년 뜻을 두고 계시는 건지.
A : "에이!"
이상 한게임 바둑 [동정] 국회로 출근하는 바둑황제 "숙제가 많습니다"에서 인용
A : "예전에 농담 삼아 어느 정치인께 '정치와 바둑 중에서 뭐가 어렵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바둑도 어렵지만 정치는 몇 배 더 어렵다'고 하시더라. 그 말이 와닿는다. 바둑은 솔직히 몇 수 앞이 보이는데 정치는 한 수 앞도 안 보이는 것 같다."
Q : 60년간을 만져온 바둑돌인데 손이 근질근질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역할도 크신데.
A : "젊은이들한테 맡겨야지. 이젠 앞에 나서기도 어렵겠지만 앞에 나서기보다 밀어주는 게 내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Q : 최근 이세돌 9단의 기사회 탈퇴서 제출로 바둑계가 시끌벅적한데.
A : "우리 때는 이야기할 처지도 못 됐고, 말도 못 꺼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바둑계에 도움이 되는냐 그렇지 않느냐는 면도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위상이 높아진 바둑계 전체의 이미지를 봤을 때엔 바깥으로 잡음이 나가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내부에서 처리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어쨌든 잘 타협해서 잘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Q : 팬들에게 한 말씀?
A : "당분간 바둑판을 떠나려니 서운하기도 하고 바둑계를 위하는 일인 만큼 걱정도 앞선다. 저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가는 줄 아는데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Q : 앞으로 8년, 12년 뜻을 두고 계시는 건지.
A : "에이!"
이상 한게임 바둑 [동정] 국회로 출근하는 바둑황제 "숙제가 많습니다"에서 인용
6. 경력사항
대회 참여 기록이 너무 많아 이 사항에는 수상 여부만 올리도록 한다. 괄호 안의 숫자는 통산 전적.- 1974년 (21세)
- 부산일보사 대통령배쟁탈최고위전 우승
- 1975년 (22세)
- 국제신보사 최강자전 우승
- 대한일보사 백남배쟁탈전 우승
- 동아일보사 국수전 우승
- 부산일보사 대통령배쟁탈최고위전 우승(2승)
- 1977년 (24세)
- 1978년 (25세)
- 1979년 (26세)
- 1980년 (27세)
- 1981년 (28세)
- 1982년 (29세)
- 1983년 (30세)
- 1984년 (31세)
- 1985년 (32세)
- 1986년 (33세)
- 1987년 (34세)
- 1988년 (35세)
- 1989년 (36세)
- 1990년 (37세)
- 2004년 (51세)
-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봉황부 우승
- 2010년 (57세)
-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전 우승
- 2011년 (58세)
-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전 준우승
- 2013년 (60세)
- 지지옥션배 연승대항전 우승
-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전 우승(2승)
- 2014년 (61세)
- 국수산맥 국제페어바둑대회 우승
- 2015년 (62세)
- 시니어국기전 우승
- 시니어기성전 우승
- 시니어바둑클래식 왕중왕전 우승
- 국수산맥 국제페어바둑대회 우승(2승)
- 2023년 (70세)
- 영자배 우승
7.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자세한 내용은 조훈현/상대전적 문서 참고하십시오.8. 저서
9.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새누리당|]] | 2016 - 2017 | 정계 입문 |
[[자유한국당|]] | 2017 - 2020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20 | 제명[64] |
[[미래한국당|]] | 2020 | 입당 |
[[미래통합당|]] | 2020 | 합당[65] |
| 2020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20 - 현재 | 정계 은퇴 |
10.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비례대표 | [[새누리당|]] | 7,960,272 (33.50%) | 당선 (14번) | 초선 |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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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호 | 하태경 | 한선교 | 함진규 | 홍문표 | |
홍일표 | 홍철호 | }}}}}}}}} |
[1] 양력 1953년 4월 23일.[2] #[3] 창녕 조씨 26세손 '鉉'자 항렬.[4] 출처: 병무청공고제2016-35호(공직자 등의 병역사항 공개)[5] 최초 달성 1980년, 총 3회[6] 2번째는 셰이민. 2016년에 셰이민이 전관왕(5관왕 이상)에 오르니 무려 36년 만이다.[7] 패왕전 16연패.[8] 둘 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쓰이지 않는다. 정황상 보좌관이 대신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9] 한국인으로 최초 九단의 자리에 오른건 조치훈으로 일본기원 소속으로서 조훈현보다 1년 먼저 받았다. 사실 경력만 보면 한국기원 선배인 조남철이나 김인 九단이 먼저 받는게 자연스러웠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다가 조훈현이 먼저 받게 된다.[10] 이창호가 결혼식에 가족이 아닌 바둑인들을 초청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뒤에도 "조훈현 국수님 부부는 바둑을 떠나 진짜 부모님과 같은 분들이라 초대해야 한다."며 조훈현 부부만 따로 초청한 건 유명한 일화. 이창호의 소년기를 보면 알지만, 진짜 친아들처럼 내제자로 키웠다.[11] 하지만 조훈현 九단은 실제로 52년생이므로 이것을 감안한다면 10세 7개월에 입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1위 기록인데 2위는 이창호의 11세 1개월이기 때문이다. 3위는 조혜연의 11세 11개월, 4위는 최철한의 12세 2개월, 5위는 이세돌의 12세 4개월. 한국과 비슷한 입단 방식을 갖고 있는 일본의 경우 조치훈 九단이 남성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는 11세 8개월 때 입단하였다.[12] 이전에 세고에 九단의 제자가 3명 밖에 없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하시모토 우타로, 우칭위엔, 조훈현 외에도 히사이 케이시(久井 敬史,1920-2000), 이요모토 모모이치(伊予本桃市,1919-1974)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이노우에 이치로(井上一郎), 마츠자와 츠루지로(松澤鶴次郎, 첫 제자), 스즈키 케이조(鈴木圭三), 요네야마 토쿠(米山德)가 있다.[13] 당시 조치훈 九단이 그의 밑에서 수학하고 있었다.[14] 이렇게 한 이유는 바둑은 답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를 원했던 것이다.[15] 이른바 반상 위의 스승님. 조 九단이 그의 생전에 스승으로 모셨다.[16] 그리고 훈병 시절 때 "좌로 가/우로 가"를 잘 못 알아들어서 본의 아니게 몸 개그를 했다고 회고했다.[17] 조치훈 본인의 자서전에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지 않아서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조치훈은 실제로 7살인 1962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18]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맞을 때도 이 불문율을 지키려 했으나 이창호의 성장이 너무 빨라 한국 나이로 17세, 四단이었을 때 내보내게 되었다.[19] 이때 조훈현 국수를 유난히 아꼈던 작고한 정창현 七단(초창기 한국 프로바둑계에서 김희중(은퇴) 九단과 더불어 속기로 유명하였으며, 기왕전 등의 타이틀 홀더이기도 하였다.)은 "드디어 조훈현의 타이틀 폭격이 시작되었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대로 이루어졌다.[20] 장수영, 서능욱, 김수장, 강훈, 백성호[21] 굳이 부등호로 매겨보자면 조훈현>서봉수>>>>넘사벽>>>>도전 5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 바둑에서 3집 반 차이는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차이라고 여겨지는데, 정선만 따져도 당시 덤 기준으로 4집 반 차이이다. 덤이 5집반으로 늘어난 것은 1988년 후지쯔배/응씨배 때. 정선 4집반의 핸디캡을 줘도 오히려 뒤졌다는 소리이니 넘사벽이라는 느낌은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22] 이 대국은 워낙 유명하여 웹툰 '바둑삼국지'와 '미생'의 배경 대국이 되었다. 미생 같은 경우, 매 웹툰이 시작될 때마다 이 기보가 1수씩 놓인다.[23] 그리고 중-일 슈퍼게임 등 한국 바둑을 제외하고 중-일끼리만 하던 국제 기전들은 이때부터 하향세를 탔으며 이창호의 등장 이후 졸지에 2류 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24] 바둑계를 통틀어서도 유일한 카 퍼레이드였다. 황당하게도 카 퍼레이드 후 귀가하자 집에 도둑이 들어 엉망이었다고 한다.[25] 당시 이창호는 강남구 반포동 한신아파트 단지로 이주했다.[26] 심지어 92년 응씨배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을 정도였다.[27] 참고로 이 때까지 즐겨피우던 담배가 다름아닌 장미였다. 그리고 담배를 끊고 1주일 남짓 금연초를 대신 피우다가 이것마저 끊은 뒤로 완전히 금연에 성공한다. 여담으로 금연을 하게 된 계기도 재밌는데 이 당시 미국으로 간 차민수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대부분이 금연구역이라 담배를 피우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올 때 쯤에는 반쯤 금연에 성공했다고 한다.[28] 이 우승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한 게, 16강에서 조훈현을 제외한 한국 선수(이창호[66], 이세돌 등) 전원이 탈락했고 본인도 8강전에서 뤄시허 상대로 20여집을 날려먹는 대악수를 두는 바람에 기자들조차 조 九단 패배, 한국 선수 전원 중도 탈락이라고 기사 제목까지 박아놨는데, 좌상귀 대마에 일부러 손을 떼서 버리는 척 하면서 뤄시허를 도발하고 좌상귀 대마를 잡으려던 뤄시허가 가일수를 계속 두는 사이 본인은 야금야금 실리를 챙겼고, 참다못한 뤄시허가 조훈현이 원했던 패를 걸자 우상귀를 팻감으로 맞바꾸기를 하면서 거대한 도발 일지를 끝냈다. 이 맞바꾸기로 뤄시허는 고작 3집을 얻었으며 조훈현은 이미 집으로는 다 따라왔던 상태. 결국 계가 끝에 반집승을 거뒀다. 다만 8강에 비하면 4강과 결승 대국은 비교적 평이했다.[29]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 중앙일보 박치문 기자의 묘사.[30] 일립이전, 이립삼전 등 안정적인 근거 확보를 위한 벌림의 한계가 있다. 조훈현은 거기서 항상 한 칸씩 더 나가고 상대방이 이걸 노리고 뛰어 들어오면 압도적인 수읽기 능력으로 철저하게 응징하면서도 손을 자주 빼서 더 큰 자리를 계속 차지하며 우위를 유지했다. 이는 스타크래프트 등 현대의 전략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논리다. 흔히 '짼다'고 말하는, 차후 이득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섞는 빌드는 과감해질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빠른 손과 종합적 판단력 등이 수반돼야 한다. 프로는 할 수 있지만 아마추어는 그런 부분에서 미진하기에 감히 시도할 수 없거나 패배를 맛보는 것이다.[31] 사실 이 별명은 등산 때문에(산 타는 모습이, 마치 제비가 땅을 스치듯이 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었지만, 그때의 바둑과 어울리다 보니 바둑 때문에 붙은 별명인 줄로 아는 사람이 많다.[32] 참고로 조훈현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던 제7회 후지쯔배의 결승 상대는 유창혁, 유창혁이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제6회 LG배 세계 기왕전의 결승 상대는 조훈현이다.[33] 박정상 九단과 서봉수 九단도 마찬가지이지만, 박정상 九단은 딱 한 번 올라가서 우승하고 그 이후에는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해 본 적이 없고, 서봉수 九단도 제2회 동양증권배와 제2회 응씨배에서 모두 우승하긴 했지만, 제2회 동양증권배는 외국 기사 대여섯명만 초청해서 치른 대회라 세계대회라고 하기도 뭐하다.[34] 제6회 후지쯔배와 제6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에서 졌다.[35] 이창호의 첫 세계대회 준우승을 제2회 동양증권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 동양증권배는 본격 세계대회라고 하기 뭐하다. 하지만 제3회 대회부터는 동양증권배도 본격 세계기전이라고 보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36] 정확하겐 비박이었다가 유승민을 뒤통수 치고 갈아탄 케이스.[37] 여담으로 2017년엔 알파고와 세기의 대결을 펼친 이세돌 九단이 더불어민주당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는데, 일종의 균형을 맞춘 셈이 되었다.[38] 다만 한국기원 대국 결과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정식으로 한국기원 전적에 포함된 것은 20년 12월 22일에 열린 2020 한중일 녜웨이핑배 바둑 마스터스 2라운드. 이 마저도 조 九단의 불계승으로 끝났다.[39] 그도 그럴 것이 바둑기사로서의 전성기는 대개 18세에서 23세, 아무리 길어도 30세 정도까지가 한계인데, 조훈현 같은 노인이 아직도 평범한 프로기사들과 맞먹는 수준이라니 놀랄만하다.[40] 국수를 비롯한 타이틀 칭호는 해당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동안에만 부르는 것이 관례이나, 조훈현의 경우 국수전 10년 연속 우승 포함 총 16회 우승이라는 엄청난 족적을 남긴 바, 아예 이 호칭이 굳어져 버렸다. 원래는 조남철 九단의 별칭이었지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조훈현 九단의 별칭이 되었다. 이후 조남철은 '대국수' 칭호를 헌정받는다.[41] 훈현의 일본식 발음.[42] 157회. 160회라는 기사도 있다. 다만 이는 참고할 부분이 있는게, 당시엔 지금과 기전 횟수도 달랐고 도전기가 많아서 한번 우승하면 다음번엔 결승전에서 도전자만 상대하니까 상대적으로 우승이 쉬운 환경이긴 했다. 지금은 우승해도 본선 16강에서 시작해 그만큼 타이틀 따기가 어렵다.[43] 중국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녜웨이핑이나 마샤오춘의 집계 기록이 없어 비교하지 못하고 있다. 두 기사 모두 자국 내 리그에서만 1000승은 족히 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집계 기록이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44] 당시에 조훈현보다 5단 높은 8단으로서 훗날 조훈현이 회상하기를 '재능은 별로지만 상당한 노력파인데다 후학을 길러내는 능력이 뛰어났다'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여담으로 만화가 아베 요시토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45]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범상치 않은 기인이었다.[46] 이 무렵에 KBS 일요 스페셜로 편성된 담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금연은 의지의 문제일 뿐 금연초 같은 것은 그냥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증언.[47] 스포츠조선에서 연재하던 이광구의 책에서 술로 점철된 한국기원 역사를 서봉수와 조훈현이 끊어버렸다라는 선배 기사들의 한탄이 있다고 한다.[48] 수정 전에는 4단이었으나 현재는 승단해서 5단이다. 원래 한국기원 4단을 보유한 채로 미국 이민을 갔으나 후지쯔배에서 미국 대표로 일본 기사들을 격파하며 5단으로 특별승단했다.[49] 단, 호적상 나이차는 2살이다. 위에도 나오듯 조훈현 9단의 호적상 출생연도는 1953년이다.[50] 토우야의 기풍이 스피드가 있는 발빠른 바둑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점도 그렇고, 작품속에서도 토우야 명인은 명인 자리를 나오고 은퇴를 하지만 바둑은 계속 둔다. 오히려 그런 걸 벗어던진 뒤에 더욱 더 성장하고 변화했다. 작중 묘사를 보면 젊은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바둑을 두는데, 황혼기에 스타일을 바꿔 전신 소리를 들었던 조九단이 떠오르는 부분이다.[51] 17권 날개에 수록, 애니는 30화에 나온다[52] 가장 심할 때는 '비 내리는 호남서언. 남행열차에엔'을 흥얼거리기도 했다.[53] 그런데 요다 노리모토 역시 조치훈과의 대국에서 볼륨 MAX의 트래쉬 토크를 시전한 적이 있다. 문제는 조치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트래쉬 토크의 달인인지라 해당 대국은 두 명인이 서로 트래쉬 토크와 자학 탄성이 오가는 정신사나운 대국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54] 지금이야 안그렇지만, 조훈현이 활약하던 초창기에는 일본 바둑에서 초읽기가 없었다. 대신 제한시간을 8시간씩 주는지라 1박 2일 대국이 기본. 이후 바둑의 세계화와 스포츠화로 인해 너무 긴 대국 시간이 대중의 인기를 끌기 힘들다는 이후로 제한시간이 대폭 줄어들고 초읽기가 도입되었으며, 이 때 적응하지 못한 일본 기사들이 대거 쓸려나간다. 과거에는 나이든 기사들이 젊은 기사를 때려잡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이유로 보통 두 가지를 드는데, 첫 번째는 기보 등을 구하기 쉬워져서 젊은 기사들의 공부량이 노기사들의 경험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는 것과, 바둑의 제한시간이 줄어들면서 짧은 시간 안에 생각해야 하는 바둑에서는 젊은 기사들의 두뇌 회전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점이 꼽힌다.[55] 계시원이 열을 셈과 동시에 착수가 떨어졌다. 아홉까지 착수가 끝나야 하고, 열을 세는 시점에서 시간 초과로 간주하는 것이 기본 규칙.[56] 유창혁 해설이 '조치훈 9단이 자기 머리를 때리는 소리입니다'라고 설명했을 때 관중들이 크게 웃었다. 링크된 영상을 보면 그림자로 조치훈 9단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 보인다.[57] 가능한 경우의 수가 체스보다 바둑이 비교도 안 되게 많기 때문에 그 부분만 따진다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소프트웨어가 인간을 이긴 년도로 살펴보면 체스는 1997년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은 딥 블루에게 정복되었지만 바둑은 20년이 지난 2016년에서야 알파고에 의해 정복되었다.[58] 세계체스연맹에서 발급하는 마스터 타이틀은 여성부를 제외하고 4단계로 나뉘며, 마스터 타이틀 보유자 안에서도 최고등급인 GM과 최하등급인 CM의 실력차는 상당히 크다. 또한 GM 중에서도 2700이상의 레이팅을 보유한 슈퍼 GM들은 하위 등급을 상대로 패배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마스터 타이틀 안에서도 실력 편차는 엄청나다.[59] 엄밀히 따지면, 체스도 접어주는 것은 있다. 그러나 체스 특성상 말을 하나만 접어도 격차가 상당해지기에 웬만큼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접지 않는다.[60] 당시 스펀지는 꽤나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이었던데다, 하필 해당 제보가 별 5개를 받아서 더더욱 화제가 된 면이 있다.[61] 체스는 타 종목에 비해 GG가 빠른 편이라, 초반에 퀸을 잃으면 기권하는 일도 흔하다. 퀸스 갬빗에도 나오는 장면.[62] 제1회 응씨배 결승과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바둑판을 추적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뒤섞은 팩션드라마이다. 공화국 시리즈로 유명한 고석만 PD가 연출했으며, 유인촌(조훈현 역), 정보석(서봉수 역), 정준(이창호 역), 이재룡(유창혁 역)이라는 호화캐스팅이다.[63] 천원전이라고 개칭한 것은 1996년의 일이다.[64] 미래한국당 차출을 위한 제명.[65] 미래통합당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