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요시오 石田芳夫 / Ishida Yoshio 第二十四世本因坊 秀芳 | |
직업 | 바둑기사 |
생년월일 | 1948년 8월 15일 ([age(1948-08-15)]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소속 | 일본기원 |
출신지 | 아이치현 기요스시 |
입단 | 1963년 |
단급 | 九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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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바둑 기사. 계산과 형세 판단에 능해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2. 경력
일본기원 프로필 사진 |
기타니 미노루의 문하생으로, 3번째 도전 만에 14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했다. 1971년 혼인보전에서 린하이펑을 꺾고 당시 최연소 혼인보 타이틀 홀더가 되었으며, 이후 1975년까지 혼인보전 5연패를 달성했다.[1] 1974년에는 명인 타이틀까지 획득해, 사상 3번째로 명인 혼인보가 되었다.
계산이 매우 정확해 이창호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평까지 듣는다.[2] 물론 그때보다 지금 바둑이 더 발전한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이창호가 비록 두터움의 활용이나 부동심 등에서는 앞서나 이시다도 전성기의 계산력만큼은 이창호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이시다 요시오의 전성기 시절 별명은 컴퓨터였는데, 이 별명이 얼마나 어울리냐 하면 보통 프로 기사들이 형세 판단을 할 때는 현 상황에서 양쪽이 최선을 다했을 때(= 실수나 돌발 상황이 없을 때) 내지는 평균적인 예측치를 적용하여 "흑이 4집 정도 유리하다."와 같은 형태로 대답한다. 그런데 이시다 요시오 九단은 확률 분포의 개념을 적용하여(…) "백이 2와 2/3집 유리하다."와 같은 형태로 대답하곤 했다. 물론 정말 확률분포의 공식을 따라 계산한 것은 아니고, 발생 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가능한 한 많이 머릿속에 그려서 종합했다는 이야기지만, 여하튼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바둑 강국 일본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바둑 스타일만 보아서는 굉장히 냉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팬서비스도 좋다고 한다. 최철한과 더불어 기풍이 성격과 별 관계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바둑으로 입증하고 있는 기사.
바둑계에서 세계 대회가 생기기 훨씬 전에 전성기가 끝난 기사인지라 세계 대회에서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세계 대회 최고 성적은 1991년과 1999년 후지쯔배 8강 진출. 1991년 후지쯔배에서는 중국의 첸위핑에 져서 4강 진출에 실패했고, 1999년 후지쯔배에서는 유창혁에게 져서 4강 진출에 실패했다.
2010년 후지쯔배 본선 1회전에서 목진석을 꺾어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 후 2회전에서 쿵제에게 패배해 탈락하긴 했지만...
2013년 3월 20일 UEC 우승, 준우승 바둑 프로그램과 맞붙은 제1회 전성전(電聖戦)에서 4점 접바둑으로 젠에게 불계승, 크레이지스톤에게 3집 패했다.
여담으로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과거 初단 시절이었던 1963년 1월 6일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을 한 기사이다. 상대는 역시 같은 初단이었던 조훈현. 결과는 이시다 요시오의 완승이었다 (백으로 19집반을 이겼다).
3. 주요 대회 성적
일본 7대 기전 우승 경력- 명인(名人) : 총 1회 (1974)
- 혼인보(本因坊) : 총 5회 (1971-75)
- 왕좌(王座) : 총 2회 (1974, 78)
- 천원(天元) : 총 1회 (1984)
기타 기전 우승 경력
- 수상배 : 1968년
- 신예 토너먼트전 : 1969년
- 일본기원 선수권전 : 1970, 71년
- 프로 10걸전 : 1971, 72년
- 조기선수권전 : 1980, 83, 84년
- NHK배 : 1987, 90, 2001년
- IBM 조기오픈전 : 1988년
- NEC배 : 1988년
[1] 혼인보전 5연패 이상 혹은 10회 이상 획득한 기사는 은퇴 후 또는 60세 이상부터 명예 혼인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데, 1998년에 혼인보전 10연패를 달성한 조치훈이,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곧바로 25세 혼인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서, 혼인보전의 명예칭호 제도가 "○○세 혼인보" 칭호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이시다 요시오도 60세가 된 2008년부터 24세 혼인보 슈호(本因坊秀芳)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2] 실제로 1998년 후지쯔배 16강전에서 붙은 적이 있었고, 이창호 九단이 흑으로 4집반 승리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