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5:23:42

고바야시 고이치

고바야시 고이치
小林光一 / Kobayashi Kōichi
파일:고바야시_고이치.jpg
직업 바둑기사
생년월일 1952년 9월 10일([age(1952-09-10)]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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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일본기원
출신지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
입단 1967년
단급 九단
한큐바둑 닉네임 わせあや(P)
타이젬바둑 닉네임 3586

1. 개요2. 조치훈과의 관계3. 기풍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1. 일본 기사4.2. 한국 기사4.3. 중국 기사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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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홋카이도 출신의 바둑 기사.

12살에 기타니 미노루 문하로 들어갔다. 들어갔던 당시 2년 선배지만 4살 어린 조치훈과 함께 경쟁하며 자랐다고 한다.[1]

2. 조치훈과의 관계

조치훈의 라이벌로, 실리를 챙기고 소름 끼칠 정도의 냉정함으로 상대의 실수를 정확히 응징해 가면서 승리를 낚아채는 기풍이다. 조치훈의 바둑을 감성적이라고 한다면[2] 고바야시의 바둑은 이성적이다. 고바야시는 입을 굳게 다문 상태로 대국에 임하는데, 이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치훈 때문에 2인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통산 우승(60-74), 7대 기전 우승(35-42) 횟수가 뒤지고 7대 기전 결승에서 조치훈과 10번 만나 2승 8패로 밀렸기 때문이다.[3]
연도 기전명 결과 비고
1982 혼인보전 조치훈 4-2 고바야시
1985 명인전 고바야시 4-3 조치훈
1986 기성(棋聖)전 고바야시 4-2 조치훈 휠체어 대국
1987 천원전 조치훈 3-2 고바야시 조치훈 그랜드 슬램 달성
1990 혼인보전 조치훈 4-3 고바야시
1991 혼인보전 조치훈 4-2 고바야시
1992 혼인보전 조치훈 4-3 고바야시 리버스 스윕
1994 기성(棋聖)전 조치훈 4-2 고바야시
1997 명인전 조치훈 4-2 고바야시
1999 기성(棋聖)전 조치훈 4-2 고바야시

특히 1990~1992년 혼인보전은 3-1, 2-0, 3-0으로 앞서다가 역전패해 기성(棋聖)-명인-혼인보 대삼관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고바야시는 "3년간 대삼관의 찬스가 7번 있었는데, 그 7번 모두 조치훈에게 저지당했다."고 말했다. 다만 결정적 상황에서 자주 무너졌을 뿐 상대전적에서도 비등하며 커리어에서도 그렇게까지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서봉수가 조훈현에게 상대 전적에서 압도당하고 전관왕을 내어줬던 것과 비교하면 둘의 격차는 미세하다고 볼 수 있다. 유독 중요한 경기에서만 맥을 못췄을 뿐... 굳이 따지자면 고바야시와 조치훈은 서로 비등한 라이벌이었으나 조치훈이 중요한 경기에서 우세를 많이 점했기 때문에 고바야시가 상대적으로 콩라인 느낌이 나는 거고, 조훈현과 서봉수의 경우는 조훈현이 훨씬 강했으나 서봉수를 제외하고는 조훈현의 털끝에도 미치는 기사가 없었기 때문에 라이벌로 불린 것.

고바야시의 전성기는 1984~1994년의 약 10년으로 기성(棋聖)전 8연패, 명인전 7연패 포함 8회 우승, 천원전 2연패, 기성(碁聖)전 6연패, 십단전 3연패 등의 성적을 거두며 명예 기성(棋聖, 碁聖), 명인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최초의 명예 명인 자격은 1980~84년 5연패한 조치훈이 가져갔다. 역시 콩라인 물론 조치훈보다 4살 형이라서 호칭은 먼저 쓸 수 있게 됐지만, 고바야시가 환갑 되기도 전에 조치훈은 혼인보 10연패로 명예혼인보 호칭을 환갑 기다릴 것도 없이 쓰게 되고... 바로 국제 바둑 기전에서도 조치훈1991년 후지쓰배를 차지할 때 고바야시는 6년이나 늦은 1997년에 후지쓰배를 차지했다. 조치훈2003년 삼성화재배 우승도 있어서 고바야시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기성(棋聖)전 8연패로 만 60세 이후 명예 기성(棋聖) 칭호를 얻었다는 점 하나는 조치훈에게 앞섰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바둑기전은 철저히 상금순으로,[4] 고바야시는 이 기간 서열[5]이 있는데 일본 예체능계의 대부인 요미우리 신문사가 주최하는 기성(棋聖)전[6] 부동의 1위 자리를 유지했다. 조치훈은 4회 연속 우승으로 아쉽게도 명예 기성(棋聖) 칭호를 획득하지 못했다.

1992년 왕좌전에서 후지사와 슈코에게 도전했으나 2-3으로 패배, 후지사와가 사상 최고령 7대 타이틀 방어 기록을 67세로 경신했다.

2015년 9월, 조치훈과 명인전 40주년 기념 대국을 벌였다. 두 사람의 맞대결은 2011년 마스터즈컵 결승 이후 4년만으로, 당시 조치훈이 승리하며 고바야시와의 상대 전적에서 66승 63패를 기록했다.

3. 기풍

실리를 굉장히 좋아해 3선이고 2선이고 마다하지 않고 실리를 챙기는 치밀한 기풍이 특징이다. 그와 정반대의 기풍인 다케미야 마사키로부터 '지하철 바둑'[7], "3의 3에 두면 바둑돌이 판 바깥으로 떨어질 것 같다"[8]는 말을 들었다. 현대에도 종종 쓰이는 포석고바야시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1. 일본 기사

4.2. 한국 기사

4.3. 중국 기사

5. 기타

  • 내리막길을 걷던 일본 바둑 시기에 활약하던 탓에 최후의 순수 일본인 국제 개인 기전 우승 기록을 최장기간 유지한 특이한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가 우승하던 97년 후시쯔배 타이틀 이후로는 일본인으로서 국제 기전에서 우승한 사례가 한동안 없었고,[9] 이는 국제 무대에서 도태된 일본 바둑계와 70년대부터 활동하던 기사마저 구원 투수로 받아들여야할 만큼 지지부진한 세대 교체를 시사하기도 했다. 이런 일본 바둑의 불명예스런 기록은 이치리키 료가 2024년 응씨배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장장 27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야 종식되고 만다.[10]
  • 자녀로는 딸 고바야시 이즈미 六단, 사위는 장쉬 九단[11], 문하생은 2005~07년 천원전을 3연패한 고노 린 九단 등이 있다.


[1] 이때 당시 일화로 고바야시 고이치는 자신의 바둑이 강한 줄 알았는데 기타니 미노루 문하로 들어가자마자 4살이나 어린 조치훈에게 패배하고 큰 충격을 받아 더욱 더 노력했다고 한다.[2] 실제로 조치훈은 지면 울면서 돌아가거나,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 '나의 바둑은 끝났어'라면서 울며 탄식하기도 했다.[3] 조치훈에게 중요한 대국에서 약세이긴 했으나 획득한 명예는 결코 조치훈 못지 않다. 상대 전적이 비슷한 편인데다가 조치훈은 서열 3위 기전인 혼인보전 10년 연속 우승으로 명예 혼인보이자 서열 2위 기전인 명인전의 명예 명인이지만, 고바야시 고이치는 서열 1위 기전인 기성전의 명예 기성이 되었다. 참고로 기성전은 지금껏 수십년 동안 전 세계 모든 바둑 기전 중 가장 상금이 많은 기전이다.[4] 현재 기성전의 우승 상금은 5천만 엔이다.[5] 기성(棋聖)>명인>혼인보>왕좌>천원>기성(碁聖)>십단[6] 후지사와 슈코가 1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고 말했던 바로 그 기전이다.[7] 중앙 지향적인 다케미야의 입장에선 2, 3선을 기는 모습이 마치 지하철의 모습처럼 옹졸하다는 의미의 비아냥이다. 다만, 실제로는 두 기사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도발이다.[8] 다케미야는 주로 중앙에 돌을 두는 경향이 있는데, 고바야시는 2선이나 3선을 기어다니니까 "내(다케미야)가 삼삼에다 두면 너(고바야시)는 바둑판 밖에다 둘 것 같다." 라는 의미다.[9] 일본 기원 소속으로 범위를 넓히자면 대만 국적 장쉬의 2005년 LG배 우승이 존재했고, 단체 기전으로선 요다 노리모토의 마무리 투수 활약으로 일본 우승을 장식한 2005년 농심신라면배가 있다.[10] 이전 근접했던 기록으론 이야마 유타의 2017년 LG배 준우승이 있었다. 당시 커제까지 4강에서 꺾던 포스를 보이던 터라 간만의 일본 우승이 탄생할지 화제를 모으던 대회기도 했다,[11] 이들의 두 딸도 일본기원 소속으로 입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