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사와 히데유키 藤沢秀行 | Hideyuki Fujisawa | |
직업 | 바둑기사 |
출생 | 1925년 6월 14일 |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
사망 | 2009년 5월 8일 (향년 83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손녀 후지사와 리나 |
소속 | 일본기원 |
입단 | 1940년 |
단급 | 九단 |
일본기원 후지사와 히데유키 소개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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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
일본의 바둑 기사.
본명은 후지사와 타모츠(藤沢保). 후에 '秀行'로 개명했는데 본래는 '히데유키'라고 읽지만 '슈코', '슈코 선생'으로도 불렸다.[1] 참고로 '슈(秀)'는 일본의 전설적인 바둑 가문인 혼인보의 후계자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원래는 슈코 선생이라고 부르면 안되지만, 제자들이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2. 생애
1977년 제1회 기성(棋聖)전에서 하시모토 우타로를 꺾고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가토 마사오, 이시다 요시오, 린하이펑, 오타케 히데오 등을 물리치고 6연패에 성공해 60세 이상 혹은 은퇴 후에 명예 기성 칭호를 쓸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후지사와는 당시 알코올 의존증 상태였는데 매년 기성전을 앞두고는 죽을 각오로 술을 끊어 금단 증상[2]에 시달리면서 타이틀을 방어했다고 한다.[3]기성전은 현재 일본 서열 1위 기전으로, 일본의 바둑계는 기전 서열이 상금순에 따라 엄격하게 정리되어 있다. 현재 3대 기전은 1위 기성전(우승 상금 4500만엔), 2위 명인전(3000만엔), 3위 혼인보전(2800만엔)인데, 재미있게도 기전 역사는 기성전이 가장 짧고 혼인보전이 가장 길다. 일본에서 신문기전이 본격화될 당시 기전 랭킹1위는 명인전이었다. 명인전 개최권을 두고 신문사들이 분쟁이 벌어졌는데, 요미우리 신문이 개최 경쟁에서 패하자 새롭게 최고의 기전으로 만들겠다고 쇼 미 더 머니를 시전하며 런칭한 것이 바로 기성전.
당대 기성전은 타 기전과는 달리 도전자결정전 등을 도입해 참신한 반응을 얻었고, 무엇보다 상금의 규모가 넘사벽으로 큰지라 단숨에 1위 기전의 위상을 획득했다. 한편 후지사와 슈코는 별명 중에 '새 것을 따먹는 슈코'가 있을 정도로 신규 기전에 유난히 강했는데[4] 기성전 런칭 당시 슈코는 마작, 도박, 경마, 경륜 등 때문에 파산 직전이었지만 기적적인 기성전 우승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재밌는 것은 일본 바둑 기사간의 서열 역시 무슨 기전을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슈코가 기성전을 6연패 하는 동안 일본 바둑계의 1인자는 누가 얼마나 타이틀을 보유했든 후지사와 슈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슈코의 기성전 6연패 과정에서 한 번은 최종국에서 반집으로 승리한 적이 있었고 오다케 9단은 이를 "1억 엔짜리 반집"이라고 표현했다. '단순히 반집을 이김으로 우승 상금만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기의 대국이 확보되고, 일본 바둑계의 1인자라는 지위까지 유지'하는 가치가 1억 엔 정도는 된다고 표현한 것이다.[5]
1983년 조치훈에게 3연승 후 4연패하며 기성 타이틀을 잃었다. 후지사와 九단은 "나는 1년에 4번만 이기면 된다."[6]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기성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였는데, 조치훈이 20대의 젊은 나이에 일본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자 "조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내가 한 번 찾아가 봐야겠군."[7]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조치훈은 "대선배님을 어떻게 찾아오시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8]라고 대답했다.
후지사와는 조치훈 기성전 전야제에서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9]라고 했고, 조치훈은 이 말에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10]라고 대꾸하고는 진짜로 리버스 스윕에 성공했다. 심지어 조치훈은 "선배님의 기성위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라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성 타이틀을 다시 따지 못했고, 심지어 타이틀 도전기에조차 올라오지 못했다. 물론 고령의 나이임을 감안하면 기성 타이틀을 가졌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긴 하다. 훗날 조치훈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명인 타이틀 보유자라는 명예가 있는데 4:0으로 지면 꼴사나우니 나중에 지더라도 1승 이상은 따보자."는 생각으로 제4국에 초집중하며 임했는데 이게 잘 먹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후지사와는 위암이 발견돼 절제 수술을 받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성 림프종, 전립선암 등 암을 3번 극복했다.
1988년 제1회 응씨배에 출전해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준결승 3번기 상대는 바로 철의 수문장이라 불리던 녜웨이핑. 치열한 접전 끝에 2판 모두 1점(반집) 차이로 패했다. 녜웨이핑은 대국이 끝나고 "슈코 선생이 10년만 젊었어도 내가 졌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나이가 63세로 나이 제한 없는 세계 대회 4강 이상 진출자 중에서는 최고령이었고,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91년 하네 야스마사를 상대로 3-1로 승리하면서 왕좌 타이틀을 획득했고, 이듬해 고바야시 고이치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사상 최고령(67세) 타이틀 방어 기록을 세웠다.
1999년 창하오, 조훈현, 다카오 신지와 은퇴 3번기를 뒀는데 은퇴 대국은 1938년 혼인보 슈사이 - 기타니 미노루 이후 처음이었다.
2009년 5월 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3. 여담
두터운 바둑을 가장 잘 안다고 평가받았다. 두터움을 이용하여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이는 당시 일본 바둑의 주류 기풍하고 반대였으며 이러한 호쾌한 바둑으로 골수팬들이 많았다. 세부적인 그림보단 큰 그림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는데, 이처럼 무모하고 공격적인 기풍을 보며 후지사와의 스승은 "이놈의 바둑은 통나무를 휘두르는 것 같은데!"라고 평했다.어이없는 실수로 대국을 놓칠 때도 많았으나 때로는 날카로운 착상을 선보여 '화려한 히데유키'라고도 불렸다. '초반 50수까지는 일본 제일' 이라고 부를 정도로 포석에 매우 강했으며, 한때 일본기원에서는 초·중반 대국을 검토하여 결론이 나지 않는 부분은 "히데유키 선생님께 여쭤보자." 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조훈현의 스승 중의 한 명으로 알려졌다. 조훈현이 세고에 겐사쿠 밑에서 바둑을 수학하던 중 후지사와의 사무실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는데, 조훈현과의 대국에서 그의 천재성을 알아챈 것이 계기. 세고에 겐사쿠 휘하에서 바둑을 수학하면서도 틈틈이 후지사와의 연구회에 참가하는 등 가르침을 받았으며 세고에 겐사쿠를 정신적인 스승, 후지사와를 바둑판 위의 스승이라 표현했다.
이때 일어난 일화가 하나 있다. 연구소의 선배였던 아베 요시테루(安倍吉輝)가 내기 바둑을 제안하자 조훈현은 이를 거절했으나, 후지사와 본인이 이를 부추긴 것. 제법 차이 나는 단수임에도 바둑은 압승하긴 했지만, 후지사와가 이를 자랑스레 여겨 동네방네 퍼뜨린 바람에 세고에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가 조훈현은 잠시 파문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결국 후지사와가 손발이 닳도록 빌고 빌어서야 파문은 2주 만에 철회되었긴 했다. 자세한 내용은 조훈현 문서 참조.
후지사와는 빚을 많이 졌는데, 제2회 기성전에서 가토 마사오에게 1승 3패로 몰리자 제5국을 앞두고 졌을 때 목을 매달기 위해 좋은 나무를 찾은 다음 대국장으로 향했다. 이 대국에서 후지사와는 2시간 57분을 장고한 끝에 둔 수로 상대의 대마를 잡으며 이겨 역전 우승의 발판을 마련한다.
기성전을 6연패 하는 동안 빚 때문에 집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최고의 한 수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어서 빚도 여자도 무섭지 않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또한 조훈현의 회고로는 빚 때문에 '후지사와 연구회'의 사무실이 하도 자주 바뀌어 자기를 비롯한 제자들이 그때마다 사무실 집기를 들어다 나르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으로 "훈현이가 보고 싶다"며 위스키 한 병만 들고 불쑥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밤새 술을 마시다가 무작정 첫 새벽 비행기를 잡아타고 김포공항에 내려 연락한 것. 청계천 서린호텔에서 3일 내내 나가지 않고 내내 조훈현의 그간 기보들을 검토/연구하고 속기 바둑을 두었다고. 물론 그 3일 내내 술을 못하는 조훈현은 물을, 후지사와 선생은 술을 달달하게 드셨다고 한다(...). 그러고서 "네 바둑이 썩었나 보러 왔는데 안 썩어서 다행이다. 돌아간다."라고 하고 갔다고 한다.[11] 그의 방에 있는 바둑판은 평범한 접이식이라서 관계자들이 놀랐다는 일화도 있다. 일반적인 바둑기사들은 비싸고 좋은 바둑판 하나 정도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고에 겐사쿠가 고고하고 엄격한 성격이었다면, 후지사와는 상당히 호쾌하고 괴짜스러운 스타일. 엄청나게 술과 여자와 도박을 좋아하는 성격으로[12] 그의 대국료와 우승 상금은 대부분 유흥비에 사용되었다. 그의 말버릇 중 하나는 '나는 1년에 네 번만 이기면 된다' 였는데, 기성전 타이틀 방어전이 7전 4승제였기 때문이다. 타이틀 방어전이 치러지기 2개월 전부터 술과 여자를 딱 끊고 바둑에 집중한 뒤 기성전 우승 상금을 받으면 10개월 동안 노는 식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 기성전은 국제 대회와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상금(4500만 엔 정액[13])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6연속 기성을 차지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은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 기성전 우승 상금으로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술에 취해서 "이 놈의 비행기!! 추락해버려라!!" 라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 슈코가 정말로 막대한 빚에 시달렸고, 기성전 대국 상황은 빚쟁이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이 됐으며, 빚쟁이들은 당연히 슈코가 우승하면 딴 데(노름) 돈 쓰기 전에 빚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우승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즉시 어마어마한 빚독촉을 하였기 때문이다.
4. 사생활
술에 취하면 음부(pubic region)의 속어를 연호하는 술버릇이 있었는데, 한번은 면도날 사카타 에이오가 대중 앞에서 생방송으로 바둑 해설을 하는 가운데 거나하게 술에 취해 단상에 뛰어들었다. 그러고서 해설봉을 빼앗아 "우리가 사나이라면 이런 구멍은 응당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xx가 아니라 00라면 마땅히 막아야지요!" 라고 했다고.(...) 한참 연상이던 중국의 통치자 덩샤오핑을 만났을 때도 술에 취해서 "보지를 중국어로 뭐라고 하느냐?" 라고 끈질기게 물어보다가 회견이 중지되었다고 한다(...)[14]전술한 바와 같이 슈코는 기성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필사적으로 술을 끊었지만, 도전기가 끝나면 그 즉시 술독에 빠져 지냈다. 일본의 7대 기전은 도전기가 끝나면 관계자, 팬, 대국자 등이 모여서 기념 연회를 하게 되고 기성전쯤 되다 보면 뒷풀이 연회가 TV로 중계가 되기도 하는데, 술에 취한 슈코가 무대에 난입해서 여성 진행자를 보고 "어이, 아가씨 이제 보니... (이하 생략)" 등의 사고를 친 적도 있었다. 재밌는 점은 대중들은 이러한 슈코의 주정을 비난하기보단 재밌어 했고 기성전은 대히트를 치게 된다. 요미우리 신문의 기성전이 일본 랭킹 1위 기전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는 데는 슈코의 저 음담패설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5. 기타
- 응씨배 4강에 조훈현 등과 함께 올랐을 때는 "조훈현이 최강이다. 우승은 그의 몫이다. 아마도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며 위트 있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15] 이창호 九단이 제자의 제자 그러니까 손제자라는 이유로 1994년 후지쓰배에서 자신을 이긴 이후 친히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기기 위한 바둑에 앞서 자기 표현에 충실한 바둑을 둬야 한다."하고 덕담을 써준 이 편지가 이창호에게도 고맙고 인상 깊었는지 자서전 <부득탐승>에 전문을 실어 놓기도 했다.[16]
- 1999년 11월에 일본기원을 탈퇴하고 독자적인 면장을 발급하다가 같은 해 12월에 일본기원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았다. 그 후 2003년에 독자적인 면장 발급을 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하고 일본기원에 복귀했다.##
- 다섯째 아들 후지사와 카즈나리도 프로 바둑 기사다. 바둑 기사로 활동하는 한편 신주쿠 어린이 바둑 교실과 프로 기사 지망생들을 위한 천풍도장(天豊道場)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 손녀 후지사와 리나는 2010년 4월 일본기원 사상 최연소(11세 6개월)로 프로 입단에 성공했고,[17] 2010년대 후반에는 일본 여류 바둑계를 대표하는 최정상급 여류 기사로 성장했다.[18][19]
- 후지사와 전성기 시절 바둑기자가 한 인터뷰에서 "만일 바둑신과 접바둑을 둔다면 몇 점을 놓아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석점은 놓아야 이길 수 있겠다고 응답을 했다. 그런데 그 기자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니 잠깐만 하더니 "목숨을 걸라면 아무래도 넉점은 놓아야 할 것 같다."고 수정하였다고 한다. 후지사와의 20년 후배 세대인 린하이펑 도 같은 취지로 3점 접으면면 이길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조훈현도 역시 3점은 놓아야 한다고 대답했고 서봉수는 4점이면 할만하다고 하고 3점이면 목숨을 걸진 못하겠다고 했다. 이세돌은 2점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목숨을 걸라면 3점은 놓아야 한다고 했다.
[1] 이는 유식자 읽기(有職読み)일 수도 있다.[2]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사지를 덜덜 떨면서 바둑판을 들여다 보았고 피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환각을 보았기에 팔과 가슴을 벅벅 긁었다고 한다.[3] 심지어 50대라는 나이에 저런 결과를 낸 것이다. 흔히 아는 것처럼 30대부터 서서히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좋아도 40대까지가 전성기인 바둑 기사로서 고령의 나이임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박한 상황에 목숨이라도 걸고 기성전 상금을 노렸다지만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데 괜히 괴물이라 불린 것이 아니다.[4] 후지사와가 따낸 타이틀 15개 중에서 제1기에 우승한 것이 5개나 되었다고 한다.[5] 이창호 이후로 반집까지 계산하는 정밀한 형세 판단은 정상급 기사들의 필수 덕목이였지만, 그 이전에는 반집으로 이기는 것은 운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슈쿄의 반집승은 더욱 값진 것이다.[6] 기성전은 7전 4선승제다. 7번기라고도 한다. 즉, '나는 1년 동안 기성전 하나만 따내면 된다.'는 의미.[7] 조치훈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전에서 도전자에 올라가야겠군.[8] 대선배님이 갖고 계신 기성전의 도전자가 되겠습니다.[9] 4:0으로 이겨 주겠다.[10] 세 판만 져 주고 4판을 이기겠다.[11] 이광구의 바둑 이야기에 보면, 당시 후지사와가 머물던 호텔방에서 조훈현 사범이 안마를 하는 모습 때문에 조 사범이 사대주의적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이광구는 '세상 어느 스승이 제자 보고 싶다면서 그렇게 찾아오냐.' 하면서 둘 사이의 각별한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의 입방아라고 얘기했다.[12] 조훈현 九단이 방송에서 밝히기로는, 슈코를 만나러 갔을 때 집에서 양 옆에 여자를 하나씩 끼고 앉아 맞이한 적도 있다고 한다.[13] 기성전 상금은 처음 3200만 엔으로 결정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상돼 현재는 4500만 엔이다. 현재 기준으로도 3200만 엔은 큰 돈이지만, 후지사와가 기성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2023년 기준으로 현재에도 개인 기전에서 일본 남자 기성전보다 큰 돈이 걸린 기전은 단 한 군데도 없다.[14] 참고로 보지는 중국어로 屄(bī)라 한다.[15] 안타깝게도 이후 녜웨이핑을 만나서 2번 연속 반집패를 했다.[16] 편지 내용은 당시 이창호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념하는 월간바둑 6월호에도 실렸다.[17] 조치훈 九단이 보유하고 있었던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11세 9개월)을 경신했다. 그 후 2019년에 나카무라 스미레가 10세 0개월에 입단하며 후지사와 리나의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을 경신했다.#[18] 참고로 후지사와 리나의 기풍은 두터움을 중시하는 호쾌하고 화려한 기풍의 할아버지와 달리 실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다.#[19] 여담으로 일본기원 공식 유튜브에서 후지사와 리나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할아버지와 대국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할아버지의 소개로 조훈현과 4점 접바둑을 둔 적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