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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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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대진표4. 결승 5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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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년에 시작해 1989년에 끝난 응씨배. 이때는 대회 이름이 '응창기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였다.

2. 상세

1회 대회 때는 한국 바둑이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대회 주최 측에서는 중국 4명, 일본 6명, 대만 3명, 한국, 미국, 호주 각각 1명씩 초청했다. 당시 출전권을 1장밖에 못 받은 한국이 강력 반발하자 서봉수를 예비 1번에 올려주기는 했다. 당대 최고 상금이 걸린 대회인데 기권할 기사는 있을 리가 없었기에, 당연히 서봉수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속 기원이 아닌 국적 기준으로 초청한 것이라 조치훈 九단도 한국 대표라고 주최 측에서 해명(이라기보단 변명)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1]

또한 결승 5번기는 처음에는 모두 중국에서 치르기로 정했는데,[2] 막상 조훈현 九단이 결승에 진출하자 한국 측의 강력한 항의로 중국에서 3판, 제3국에서 2판을 마저 두는 것으로 변경됐다. 추가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녜웨이핑의 지병으로 인해서 결승 장소에 제약이 가해지기도 했다. 여튼, 한국 입장에서는 당시 공산권 국가에다 미수교 상태인 중국에서 대국을 치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중국에 가기 위해 홍콩으로 가서 비자를 받고 이후 대국 장소인 항저우까지 몇 번을 갈아 타야 했다고 한다. 대신 4강전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했다. 원래는 대만에서 하려고 했지만, 대만 사정이 안 좋아서[3] 한국으로 장소를 바꿨다고 한다.

세계대회 결승 장소는 주최 측에서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관례긴 하지만, 한국 기업이 후원하는 동양증권배, LG배, 삼성화재배도 결승이 5번기였던 때는 장소와 날짜를 나눠 치르곤 했다. 결승전에 오른 사람의 국적이나 소속 기원에 따라 안배하기도 했다[4]. 주최측이 중국계를 밀어준다는 의심과 한국 대표를 둘(사실상 하나)만 초대하는 푸대접에 당시 언론이나 일부 기사들이 결승 장소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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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응씨배 준결승 3번기(11월 20일 제1국[5], 22일 제2국).

왼쪽은 린하이펑. 오른쪽이 조훈현. 180알씩 넣을 수 있게 만든 바둑통도 보인다. 돌을 꺼낸 모습은 여기 참고.

물론 결과는 알다시피 그 조훈현이 당시 중국의 자랑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에게 백승-흑패-백패-흑승-흑승으로 대역전 우승.[6][7]

덕분에 조훈현은 바둑계 최초(이자 최후)로 카 퍼레이드를 하고[8]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九단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대회 이후 전국적으로 엄청난 바둑 열풍이 일어나고 특히 어린이 바둑 교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응씨배뿐 아니라 모든 국제기전에서 한국 기사들의 문호를 대폭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국 기사들을 제외하고 벌어졌던 기전들[9]은 모두 2부 리그 격으로 위상이 추락하고 말았다.

대회 토너먼트 대진표를 보면 80년대 바둑을 주름잡던 역사적인 기사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는데, 눈에 띄는 이가 후지사와 히데유키.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가토 마사오 등의 기사를 꺾으며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터뷰 중 "조훈현이 최강이다. 우승은 그의 몫이다. 아마도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라는 발언을 남기고는 4강에 안착했으나, 아쉽게도 녜웨이핑에게 덜미를 잡힘으로서 제자와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3. 대진표

파일:중국 국기.svg 녜웨이핑 파일:중국 국기.svg 녜웨이핑 파일:중국 국기.svg 녜웨이핑 파일:중국 국기.svg 녜웨이핑
2-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훈현
3-2
파일:미국 국기.svg 마이클 레드먼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치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치훈
파일:호주 국기.svg 우쑹성
파일:일본 국기.svg 후지사와 히데유키 파일:일본 국기.svg 후지사와 히데유키 파일:일본 국기.svg 후지사와 히데유키
파일:중국 국기.svg 마샤오춘
파일:일본 국기.svg 가토 마사오 파일:일본 국기.svg 가토 마사오
파일:중국 국기.svg 류샤오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훈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훈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훈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훈현
2-0
파일:중화 타이베이 올림픽기.svg 왕밍완
파일:일본 국기.svg 고바야시 고이치 파일:일본 국기.svg 고바야시 고이치
파일:중화 타이베이 올림픽기.svg 왕리청
파일:중화 타이베이 올림픽기.svg 린하이펑 파일:중화 타이베이 올림픽기.svg 린하이펑 파일:중화 타이베이 올림픽기.svg 린하이펑
파일:일본 국기.svg 하시모토 쇼지
파일:중국 국기.svg 장주주 파일:중국 국기.svg 장주주
파일:일본 국기.svg 다케미야 마사키

4. 결승 5번기

대국 구분 일정 승자 패자 장소 결과
1국 4월 25일 화요일 조훈현 녜웨이핑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백 3점승
2국 4월 28일 금요일 녜웨이핑 조훈현 백 9점승
3국 5월 2일 화요일 녜웨이핑 조훈현 중국 저장성 닝보시 흑 3점승
4국 9월 2일 토요일 조훈현 녜웨이핑 싱가포르 흑 1점승
5국 9월 5일 화요일 조훈현 녜웨이핑 흑 불계승


[1] 정확하게는 한국 대표도 아니고 서울 대표다. 양안관계 때문에 대회에서 나라 이름을 아예 쓸 수가 없어서 (기원이 있는)도시 이름을 써야 했다.[2] 이는 당시 잉창치가 결승 상대로 기대/예상했던 인물이 녜웨이핑 九단과 린하이펑 九단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조훈현 九단이 준결승전에서 맞붙은 상대가 린하이펑이었으니 만약 조훈현 九단이 대회에 참여를 못했거나 준결승전에서 패배했다면 잉창치의 예상대로 흘러갔을 것이다.[3] 이것도 양안관계 때문이다. 대회 주최자가 중국 공산당과 관계 있다는 소문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녜웨이핑이 공산당원이라 타이완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4] 한 곳에서 결승 다섯 판을 한꺼번에 둔 세계대회는 BC카드배 월드 바둑 챔피언십이 처음이다. 이 대회는 생각시간이 1시간(제1회)이나 2시간(그 뒤)이었기에 가능했고, 앞서 쓴 세 대회는 그때 생각시간이 3시간이었다 보니 기사들 체력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BC카드배처럼 본선 64강에 결승 5번기인 중국의 세계대회들은 생각시간이 BC카드배보다 긴데도 결승 일정을 한 곳에서 한꺼번에 진행한다.[5] 빈삼각이 묘수인 바둑으로 유명하다.[6] 조 九단이 바둑 인생에서 일어났던 기적을 4등까지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대회 8강전을 2등,(참고로 8강에서 맞이한 상대가 고바야시 고이치) 1:2로 뒤진 채 맞이한 결승 제4국을 3등으로 꼽았다. 1등은 조훈현 항목을 참고할 것.[7] 여담으로 2019년 11월 2일에 조훈현은 응씨배 초대 재패 30주년 기념으로 녜웨이핑특별 대국을 했다. 여기서는 녜웨이핑이 백을 잡고 13점을 이겼다.[8] 카 퍼레이드 문구로 '장하다! 曺薰鉉' 양 옆에 '환' '영'을 써놨는데, 이게 절묘하게 이어져서 환장하다!라는 희대의 문장을 완성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중국, 일본 입장에서는 진짜로 환장할만한 상황이긴 하다[9] 대표적으로 중일 슈퍼 대항전 같은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