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06 17:00:20

노비종부법

1. 개요2. 내용3. 역사
3.1. 조선 이전3.2. 조선 태종의 종부법 시행3.3. 조선 세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 시행3.4. 조선 세조의 종부법 시행3.5. 조선 성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 시행3.6. 조선 영조의 종모법과 개혁
4. 바깥고리5. 관련 영상

1. 개요

奴婢從父法. 조선 시대 태종, 세조, 에 의해 각각 실시되었던 노비제도.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이다.[1] 세종대와 성종대에 실시되었던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과 대립된다.

2. 내용

줄여서 종부법(從父法)이라고도 부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양인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계를 따라 전부 양인이 되게 하는 법을 말한다. 즉, 어머니쪽의 노비 신분을 가진 자가 있어도 그 자식들은 노비로 신분이 세습되지 않고 양인인 아버지의 혈통에 따라 똑같이 양인 신분으로서 살아가게 해주는 법이다. 즉, 종부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가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노비 숫자가 크게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종부법을 시행하면 단순히 노비의 숫자가 차차 줄어든다고 보기에는 힘든게 천비 즉, 노비 신분인 여성이 자기 자식들을 양인으로 만들려는 마음에 자주 그 남편을 바꾸었는데 문제는 그 때문에 어느 남편의 자식인지 분명히 가려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 조선시대 유교관념으로는 명분상 분명 반대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럴경우 아비의 신분을 따른다면, 아비가 노비라고 할 경우 그 자식이 반드시 노비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천비(노비) 신분인 여성이 낳은 자식의 아버지가 노비인지 양인인지 애매할 때, 그 아비가 노비라고 우겨 그 아이 또한 자신의 노비라 우겨서 그대로 빼앗고자 하는 세가(勢家)들이 당대에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처첩제 사회고, 여성은 1년에 한번만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사내는 첩이 여러 명이면 일년에 그 숫자만큼 자식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와 조선 전기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성리학적 가치관이 피지배계층까지 공유되고, 피지배층에게까지 어느 정도는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느냐라는 차이점에 기인하는데 우선 조선 후기라면 양반이 자기 노비가 결혼도 안 하고 양민 여자를 임신시켰으니 그렇게 낳은 아이도 내 노비다! 라고 떠들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해 양반들 사이에서 별 희한한 걸로 유교적 원칙과 예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경쟁하는 와중인데 양민 여자의 자식도 자신의 노비다! 라고 주장하면 자기가 유교적으로 교화해야 할 자기와 가장 가까운 자기 노비 하나 못 다스린 꼴이라고 자인해야 하는 거니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아무리 양반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주장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그 이전에 여자의 정절과 신분제를 그토록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양민 여자가 남자 노비의 자식을 가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주인 집안에서 그 자식이 노비인지를 따지기 전에 여자 쪽 집안에서 임신한 딸을 때려죽이고도 남을 환경이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성리학적 도덕을 안 지키는게 왜 내 책임이냐며 왕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낳은 아이도 자신의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곤 했다.

이런 사실들에 기초해봤을때 단순히 노비종부법이 노비의 숫자를 차차 줄여준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많은 반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역사

3.1. 조선 이전

고려시대는 원칙적으로 양천교혼(良賤交婚)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논의할 일 자체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이라 알게모르게 양인과 천인이 서로 사고치는 경우가 있었고 이에 대해 초창기에는 그 자식이 천인이 되는 종모법을 따랐다.

법으로 확실히 규정된 것은 10대왕 정종 때로,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정종 5년(1039), 천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했다. ‘천것은 어머니를 따른다’란 문장의 한문 표현인 ‘천자수모(賤者隨母)’를 따서, 학계에서는 이 법을 천자수모법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과 조선시대의 종모법은 뉘앙스의 차이가 약간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왕조는 점차 종모법을 폐지하고 종부법을 따랐다. 이에 따라 고려 후기에는 일반적으로 자식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다 원 간섭기 충렬왕 재위시기에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를 제창하면서 다시 종모법으로 환원하였고 이후 노비 인구가 급증하였다.

3.2. 조선 태종의 종부법 시행

고려 말 원 간섭기 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 또한 개국 이래로 종모법을 실시했다.

그러다 태종 14년(1414년) 6월 예조판서 황희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했다. 태종 또한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찬동했다. 태종이 ‘재상의 골육’을 언급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도 혜택을 입는 법이니 양반들에게 나쁘기만 한 법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후 태종은 직접 윤음을 내려 종모법을 종부법으로 바꿨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년(1414년) 6월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태종실록> 14년 6월27일 : 처음으로 관청 및 개인의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하다)

종부법 개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서 이후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여종을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종부법에 큰 불만을 가졌으나 태종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3.3. 조선 세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 시행

세종이 즉위한 후 맹사성, 허조 등의 대신들은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라면서 종모법으로의 환원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마침내 1432년(세종 14)에 종부법을 폐지하고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였다.

3.4. 조선 세조의 종부법 시행

이후 7대왕인 세조는 태종의 뜻을 이어 아버지가 폐지했던 종부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이때 예외규정으로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문무과 출신·생원·성중관(成衆官)·유음자손(有蔭子孫)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천첩소생에게 시행하였고, 당시 만들고 있던 경국대전에는 특수한 신분층의 천첩소생에게 예외로 속신(贖身)을 규정하였으며, 양녀(良女)로서 노처(奴妻)가 되었을 경우, 그 소생은 종부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3.5. 조선 성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 시행

이후 성종이 즉위한 후 다시 세조가 시행했던 종부법을 폐지하고 세종대왕의 아름다운 뜻에 따른다는 이유로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원리를 다시금 천명하였다.

특히 세조가 처음 경국대전(병술대전)에 수록했던 종부법 제도를 없애고, 경국대전(을사대전)을 개정할 때 종모법의 규칙을 적용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다.

이로서 태종, 세조대의 종부법 찬성론자들이 완전히 패배하였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된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원리는 약 250년간 조선을 지배하였다.

이후 조선은 노비인구가 1가문당 100명, 인구비율로는 10%를 넘지 못하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엄청난 노비 인구의 증가를 향유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던 이맹현이 성종 25년(1494년) 자식들에게 상속한 노비 숫자는 757명이었고, 선조 39년(1606년)에 단성(丹城·경남 산청) 지역에서는 64%가 노비였고, 광해군 1년(1609년) 울산 지역에선 47%가 노비였다.

3.6. 조선 영조의 종모법과 개혁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나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는 노비제 폐지를 추진했는데 종모법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이때 시행한 개혁은 노비들의 숫자는 크게 줄였지만 태종, 세조 때와는 달리 양인의 숫자를 늘리지 못했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영조가 종모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행한 개혁은 이후 양반이 18.7%로 10% 정도 급증했다. 양인은 54.6%로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대신 노비는 26.6%로 10%나 크게 줄었다. 즉, 노비 숫자가 줄어든 만큼 양인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부를 축적한 백성들이 공명첩(空名帖·이름을 비워놓은 관직 임명장)을 산다든지, 양반들에게 직첩(職牒·벼슬 임명장)을 산다든지, 향리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바꾼다든지 하는 방법들을 통해 양반 신분을 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조의 종모법을 유지한 노비제 개혁과 시행은 군역, 요역 및 세금의 의무를 지지 않는 지배계급인 양반들의 밥그릇 숫자만 크게 늘림으로써 양인신분의 수를 늘려 나라를 부강하게 했던 태종, 세조 때와는 달리 훗날 국가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4. 바깥고리

5. 관련 영상


[1] 엄밀히 말해 남자 천인과 여자 양인 간의 자녀도 해당되는 법이다. 다만 이 사례는 드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