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이란 조선 시대 태종, 세조에 의해 각각 실시되었던 노비제도로서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부계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신분법이다.[1] 즉, 자녀의 신분이 부계 혈통을 따른다는 점에서 노비종모법과는 반대되는 제도였다.2. 내용
줄여서 종부법(從父法)이라고도 부른다.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양인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계를 따라 전부 양인이 되게 하는 법을 말한다. 즉, 어머니쪽의 노비 신분을 가진 자가 있어도 그 자식들은 노비로 신분이 세습되지 않고 양인인 아버지의 혈통에 따라 똑같이 양인 신분으로서 살아가게 해주는 법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의 신분이 노비이고 어머니의 신분이 양인일 경우에는 그 자식들이 무조건 전부 다 노비 신분이 되는 법이기도 했다.
3. 역사
3.1. 조선 태종의 종부법 시행
고려 말 원 간섭기 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 또한 개국 이래로 종모법을 실시했다.그러다 태종 14년(1414년) 6월 예조판서 황희[2]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했다. 태종 또한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찬동했다. 태종이 ‘재상의 골육’을 언급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도 혜택을 입는 법이니 양반들에게 나쁘기만 한 법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후 태종은 직접 윤음을 내려 종모법을 종부법으로 바꿨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년(1414년) 6월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
- <태종실록> 14년 6월27일 : 처음으로 관청 및 개인의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하다
- <태종실록> 14년 6월27일 : 처음으로 관청 및 개인의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하다
종부법 개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서 이후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여종을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종부법에 큰 불만을 가졌으나 태종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3.2. 조선 세종의 종부법 폐지와 종모법의 시행
노비 종부법은 세종 초기의 시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몇 가지 폐단이 확인된 이후 맹사성과 허조의 건의를 받아들인 세종에 의하여 폐지되고, 노비종모법이 시행된다.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점은 세종은 노비종모법을 시행했을지언정, 일천즉천의 원리까지 주창하지는 않았다. 또한 양천교혼을 금지함으로써 노비의 폭발적인 증가를 예방하였으며, 세조실록에 따르면 공노비의 수는 노비종모법 시행 이후 줄어들었다고 한다.[3]
또한 제한적 종부법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문무과 출신·생원·성중관(成衆官)·유음자손(有蔭子孫)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자녀는 어미가 천인이라도 양인으로 취급하게 나온다. 이 때 만 40 이상은 구분하기 어려우니 폐지하자는 말에도 세종이 불허하여 계속 유지하게 된다.
세조 5년에는 아예 세종 대부터 지금까지 40세 이전에 아이를 낳은 이들도 40세가 된다면 아이들을 속량시킨다고 나온다. 즉 세종 대에서는 어머니가 노비여도 아버지가 양인이면 아버지의 나이가 만 40을 넘으면 자식들은 노비에서 양인으로 신분이 전환됐다. 즉 사실상 부모 한 명이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라는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잘못된 관행이라고 하면서 양인이 된 이들을 죄다 노비로 돌리는 것을 세조가 허락하는 것이 세조 5년의 기사다. 세조실록 18권, 세조 5년 10월 5일 계축 2번째기사
3.3. 조선 세조의 제한적 종부법 시행과 일천즉천제로의 전환
이후 7대왕인 세조는 태종의 뜻을 이어 아버지가 폐지했던 종부법을 제한적으로나마 다시 시행하였다.하지만 이때 예외규정으로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문무과 출신·생원·성중관(成衆官)·유음자손(有蔭子孫)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천첩소생에게만 시행하는 것은 유지했고, 당시 만들고 있던 경국대전에는 특수한 신분층의 천첩소생에게 예외로 속신(贖身)을 규정하였으며, 양녀(良女)로서 노처(奴妻)가 되었을 경우, 그 소생은 종부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노인(奴人)이고 어머니가 양인(良人)일 경우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된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여러 제한규정들 탓에 세조시대의 종부법은 그 의미와 효과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조 때부터 이를 금지하고 종전과 같이 부모 중 한 쪽 신분이 천인이면 그 소생은 신분뿐만 아니라 역처 · 상전까지도 천인계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 내용을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비종모법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비종모법
하지만 이후 세조는 이 종부법마저도 다시 금지하고 고려시대와 같이 부모 중 한 쪽 신분이 천인이면 그 소생은 신분뿐만 아니라 역처·상전까지도 무조건 천인계를 따르도록하는 '일천즉천법'으로 노비제를 더욱 퇴보시킨다. 그 뒤 이 내용을 『경국대전』에서 법제화하였다. 결국 세조 시대의 노비제는 제한적 종부법 → 종모법 → 일천즉천으로 결과적으로 크게 퇴보하게 되었다. 세조 노비제에 관해 feat 일천즉천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역설 (노비종모법)
이런 제도적인 퇴보 탓인지 그 동안 불법이었던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도 세조시기에 재활성화되게 된다.[4] 무엇보다 세종 시절 시행된 노비종모법은 최소한 아버지가 노비라고 할지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라면 자식이 양인이 될 수 있었지만, 세조가 확립시킨 일천즉천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참고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경국대전의 형전 반포는 세조 7년때인 1461년이며, 신찬 《경국대전》 형전을 반포하기를 명하다 그때 이미 경국대전속에 일천즉천의 원칙이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세조 노비제에 관해 feat 일천즉천 간혹 경국대전의 최종 수정본인 《을사대전(乙巳大典)》의 반포가 성종 시절인 1485년이라 성종 시절에 일천즉천이 확립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비제도에 있어서 일천즉천의 원칙이 확립된 《형전(刑典)》의 완성과 공포, 시행은 세조 시절인 1461년 7월이었으므로 일천즉천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시기는 성종 시절이 아닌 세조 시절인 1461년 부터였다.
4. 문제점
조선 초기에는 노비 남성과 양인 여성의 혼인이 극히 드물었으며, 양반 남성이 노비 여성을 덮치는 것이 양반 여성을 노비 남성이 덮치는 것보다 많았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노비의 숫자가 감소하고, 양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효과를 가져온 매우 좋은 제도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반들도 자기 자식은 소중히 여겼기에 남성이 노비 여성과 낳은 자식은 서얼이라 하여 양인(정확히는 중인)계급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반례 외에도 문제점이나 폐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일차적으로 노비 신분인 여성이 자기 자식들을 양인으로 만들려는 마음에 자주 그 남편을 바꾸었는데 문제는 그 때문에 어느 남편의 자식인지 분명히 가려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 조선시대 유교관념으로는 명분상 분명 반대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럴경우 아비의 신분을 따른다면, 아비가 노비라고 할 경우 그 자식이 반드시 노비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천비(노비) 신분인 여성이 낳은 자식의 아버지가 노비인지 양인인지 애매할 때, 그 아비가 노비라고 우겨 그 아이 또한 자신의 노비라 우겨서 그대로 빼앗고자 하는 세가(勢家)들이 당대에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법적인 권리가 매우 부족했던 노비 여성들이 양반들을 상대로 송사를 벌여서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아버지가 양인이라고 입증하고 인정받을 확률은 매우 낮았다. 결국 종부법은 그러한 측면에서 힘있는 양반들에 의해 노비들의 숫자를 더욱 늘리는 용도로 악용될 소지가 매우 큰 법이었던 것이다. 가령 어느 양반이 자신이 소유한 노비 여성이 낳은 자식의 아비가 양인이 아닌 노비 남성이라고 우긴다면 노비 여성이 이를 쉽게 반박하고 법적으로 입증까지 모두 할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법적인 권리가 거의 없었던 노비 여성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행동하기에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처첩제 사회였고, 여성은 1년에 한번만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사내는 첩이 여러 명이면 일년에 그 숫자만큼 자식을 볼 수 있었다. 즉, 노비종부법의 가장 큰 단점을 요약하자면 그냥 아비가 천민이라고 우기기만 해도 천민을 쉽게 양산 할 수 있다는 것이 노비종부법의 가장 큰 폐해였다.
이는 조선 후기와 조선 전기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성리학적 가치관이 피지배계층까지 공유되고, 피지배층에게까지 어느 정도는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느냐라는 차이점에 기인하는데 우선 조선 후기라면 양반이 자기 노비가 결혼도 안 하고 양민 여자를 임신시켰으니 그렇게 낳은 아이도 내 노비다! 라고 떠들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해 양반들 사이에서 별 희한한 걸로 유교적 원칙과 예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경쟁하는 와중인데 양민 여자의 자식도 자신의 노비다! 라고 주장하면 자기가 유교적으로 교화해야 할 자기와 가장 가까운 자기 노비 하나 못 다스린 꼴이라고 자인해야 하는 거니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아무리 양반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주장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아니, 애초에 그 이전에 여자의 정절과 신분제를 그토록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양민 여자가 남자 노비의 자식을 가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주인 집안에서 그 자식이 노비인지를 따지기 전에 여자 쪽 집안에서 임신한 딸을 때려죽이고도 남을 환경이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성리학적 도덕을 안 지키는게 왜 내 책임이냐며 왕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낳은 아이도 자신의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곤 했다.
또한 성리학적 가치관이 정립되면서 여인들의 재가가 터부시되면서 남편이 요절하여 생계가 막막해진 양인 출신 과부들이 어쩔 수 없이 노비 남성과 재혼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것도 있다.
5. 외부 링크
[1] 엄밀히 말해 남자 천인과 여자 양인 간의 자녀도 해당되는 법으로서 부친이 천인이면 자식 역시 천인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이 사례는 조선 초기에는 드물었고 중-후기에 가서야 노취양녀(奴娶良女)가 대세가 됨에따라 그 사례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2] 참고로 황희는 얼자로 추정되고 있다.[3] 다만 이는 사실상 세종 대에 관행으로 일양즉양이나 다름없이 시행됐기 때문이다.[4] 이는 팔레 교수가 정리한 조선의 노비증가의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