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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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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인물은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묘사한 김충선[1]

1. 개요2. 탄생 배경3. 귀순 이후4. 왜란 이후5. 목록6. 관련 문서

1. 개요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대 개념의 단어로는 순왜가 있다.[2] 여담으로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진짜 일본인 배우가 이 역할을 맡는 경우가 제법 있다. 오타니 료헤이타케다 히로미츠가 대표적인 케이스.

2. 탄생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전국시대를 종식시킨 후 대륙(중국) 정벌을 명분으로 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 임진왜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병력뿐만 아니라 그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당한 쪽의 세력도 적지 않게 참전하고 있었는데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당연히 도요토미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시마즈 세력이나 조소카베 세력은 각자 규슈 섬과 시코쿠 섬을 거의 통일했다가 막판에 도요토미의 침략 때문에 정복했던 영토를 도로 토해내고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정복당한 세력들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히데요시 자체가 혼노지의 변을 수습하고 옛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잠식하는 과정에서 많은 원한을 쌓았다. 비록 패하긴 했으나 이들이 이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상대였던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타국 땅까지 가서 전투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이런일이 가능했던건 당시의 일본고려 시절부터 650여년간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를 유지해 온 조선에 비해 120년 이상 분열된 채로 살아 왔기 때문에 히데요시처럼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암암리에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막부는 존재했고 천황제도 수백 년을 이어온 탓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인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분열된 역사가 오래된 탓에 다이묘들 부터 각자 도생하는 성격이 짙었다.

여기에 항왜중 대다수를 차지한 일반병인 아시가루의 입장에서는 전후 삶에 대한 대책도 없이 해외까지 끌려와서 전쟁에 종사해야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가 농민으로 종사해도 영주들의 칠공삼민의 세금이 기다리고 있었다.[3] 이렇다보니 최소한 기틀은 잡혀있는 농본사회 국가가 좀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유화정책에 넘어가 그나마 세금이라도 덜걷는 조선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거나 고립된 부대가 다른 항왜의 설득에 투항해 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어쨌든 전국시대에는 가신이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나, 가신이 다른 주군에게 옮겨가거나 한 번에 두 가문을 섬기는 행동[4]은 지극히 흔히 있는 일이었다. 어떤 가문에서 무공을 세우고 그 무공을 증명하는 문서인 '간죠(感狀)''를 받아서 다른 가문으로 옮겨가거나, 다른 가문으로부터 좋은 조건을 제시받거나 주군에게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다면 옮겨가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배신'이라는 의리 없는 행동으로 여겨진 것도 아니었고, 별로 흠잡을 만한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명의 주군을 말 그대로 끝까지 섬기는 '충'을 다한 사람이 지극히 드물었다.[5]

그래서 전국시대 사무라이 계급의 일반적인 의식이란 에도 시대 이후에 생각하듯이 '충'에 모든 것을 걸고 목숨을 바치는 광신적인 가신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극히 실리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편을 바꿔가면서 이득을 취하는 사무라이가 대부분이었다. '충성스러운 무사'보다는 차라리 '용병'에 가깝게 살아가는 자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용병으로서 대가를 받는 동안은 신의를 지켜야 하고 정면으로 배신을 때린다면 평가는 크게 실추되지만[6] 그런 게 아니라면 영주를 바꾸는 것은 크게 매도당할 일이 아니었고 특히나 말단 무사일수록 더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정상 다른 일할 곳을 찾겠습니다.’ 처럼 양쪽 모두 좋게좋게 떠날 경우 오히려 원래 주군이 추천서나 소개장을 써주는 일도 흔했다.[7] 오죽하면 토도 타카토라"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남기기까지 하였는데 주군을 여러번 바꾸어도 유용한 인재는 계속 쓰인다고 스스로 과시하는 말이다. 이렇듯 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사회는 의외로 현대의 직장생활과 상당히 흡사한 부분이 많다. 일본에서도 전국시대를 해설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에서 직장생활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예가 많은 편.

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태국 등의 해외 왕조에 일본인 무사가 고용되어 활동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일본 무사들은 다른 나라의 군주에 고용되는 것도 전국 시대에 한 무사가 다른 영주 휘하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미 히데요시에 불만이 있고, 조선 조정에 고용되어 대우를 받을 만한 기술이 있는 무사라면 전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도 이를 알고 있어과 일본과의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이들의 투항을 유도하는데 그 적극적이었고 탈영부터 정치적 망명에 이르기 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전쟁 초기부터 불만을 품은 일본군 병사들이 조선에 귀순하거나 투항하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8] 이 때문에 일본군 무사들이 탈영을 막기 위해 본진에 목책을 설치하기도 할 정도였다. 당시에 투항한 항왜들 중에는 일반 병사들이나 무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김충선이나 여여문 등의 장교급들까지 있었다.[9] 실록을 보면 개별 단위의 투항부터 전투마와 활로 완전무장한채 부대단위로 투항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훈련도감에서 교관으로 삼거나 일본측의 전술을 조언해줄만한 인물들도 있었다. 또 화약을 제조하거나 조총을 다룰줄 알아는 전문직종도 있어 이후 조선군이 조총을 제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행장의 아우인 소장이 왜통사(倭通事) 이언서(李彦瑞)를 불러서 말하기를 ‘들으니, 너희 나라에서 항왜(降倭)를 후대하기 때문에 앞을 다투어 서로 투항하여 들어간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현재 있는 수가 얼마인가?’ 하므로, 이언서가 답하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니, 행장의 아우가 말하기를 ‘나는 자세히 들었다. 가사 난처한 일이 있으면 우리들도 투항해 가려 하는데 너의 나라에서 또한 후대해 줄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18일 임진 2번째기사#

실록에 따르면 심유경과 짜고치는 강화협상으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던 고니시 혹은 그 가문 일원들도 일이 잘못되어 위험해지면 투항해버리는 것을 고민했던 모양이다. [10]

당시 전라도병마절도사, 경상병마사 직을 맡은 김응서가 항왜들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충선 등 다수의 항왜들이 울산왜성에서 그의 휘하로 싸우기도 했다.

3. 귀순 이후

조선 조정은 전쟁 초기엔 포로로 잡히거나 귀순해 온 일본군을 처형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이들이 전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에는[12]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후로 항왜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교차 검증이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각지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과 일본군 투항자가 급증해 조선 조정이 이들을 효율적으로 분산 배치하려고 머리를 싸맬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는데 실록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켰다고 보고된 항왜의 합계만 1000명이 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30년 가까이 지난 이괄의 난 때도 100명이 넘는 항왜를 동원한 것으로 보아 최소 수천명의 항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본군의 전술과 조직에 해박하고 총포술, 전쟁 경험이 풍부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는데에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오랜 평화로 군사력이 약화되어 당시 전투 기술이 열악했던 조선군에 총포술과 검술 등을 퍼뜨리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았다.특히 여여문은 항왜 장수들 가운데에서도 선조의 총애를 받아서 그가 작고하자 선조가 크게 상심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다만 투항하는 왜군이 늘어나자 이들의 처리에도 곤란을 겪는데 일본에서 하던대로 칼을 차고 돌아다녀서 조선백성이 되었으면 조선 법을 따르라고 경고를 준다거나 침략으로 적의를 품은 조선 백성들에게 공격받거나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발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투항한 적군이었기 때문에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리스크를 안고있었다. 이때문에 쓸모있는 자들은 투항한 부대에 남겨두거나 인구가 많은 한양인근에 배치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최대한 분산시켜 배치하였는데 이마저도 수용범위를 넘어버린다. 이때문에 문관들은 항왜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만두고 투항한 인원들은 일본에 보내주자고 하기에 이르렀는데 무관들은 이들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선조가 무관들 편을 들어주면서 항왜에 대한 유화정책은 계속 유지된다. 이렇듯 왜란으로 피해를 본 선조는 정작 항왜에게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항왜들의 전공이 보고되면 선조는 이들이 충성스럽다고 자주 강조하여 포상을 내리곤 하였다.

이들 중에는 자기 연줄을 이용해 가토 기요마사를 암살해 보겠다고 건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4. 왜란 이후

임진왜란 이후에도 항왜인들은 상당 기간 동안 조선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마을에서 일본 풍습을 유지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13] 현실적인 이유로 일본에 있던 처자식들을 데려올 수는 없었고 전쟁 당시 천애고아가 된 조선인 소녀들을 데려다 결혼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손을 두었는데, 그 자손들 역시 일본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이 가장 신뢰하던 부대도 항왜 150명으로 구성된 정예 발도대였는데, 사무라이가 아니라 아시가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많은 백병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인지라 조선에서는 일당백을 재현해냈다.[14] 조정에서는 이들의 전투력이 막강함을 알고는 동래 왜인들을 1천명 정도 고용하여 막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왜인을 왜인으로 막는다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라며[15]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 이원익은 "왜인들에게 1천명만 보내라고 하면 과연 1천명만 보내겠습니까? 그리고 더 많이 오기라도 하면 임진왜란 꼴 나지 말라는 보장 있습니까?"라고 주장하면서 반대론의 선봉에 섰고 처음엔 하도 다급해서 에라 모르겠다 청하고 보자! 라던 여론이 즉각 반대로 선회했다. 참고로 당시 동래 왜인들은 대부분 군인이나 무사도 아닌 상인들이었다.[16] 실록을 읽어보면 '너네끼리 죽어라'는 발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다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당시 조선에선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일본인 병사가 전투종족으로 보인 모양이다.[17]

이괄의 난과 이후 병자호란 당시에도 투입되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60대였다. 다만 왜인 마을이 얼마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자녀들도 항왜로 취급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항왜들 및 그 자손들 중 일부는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가 이괄의 난 진압 후 후금으로 망명하거나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현대 만주족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충선(金忠善, 일본 이름은 사야카沙也可)은 항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괄의 난 당시에도 조정을 위해 싸웠을 뿐 아니라 병자호란 최대의 참패로 꼽히는 쌍령 전투에서도 패주 대열의 후열에서 추격해오는 청의 군사들을 막아내 조선군의 전멸을 막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경상도 우록동에 자리를 잡고 여생을 보냈고 후손을 남겨 우록 김씨(友鹿 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 외에도 검술에 능해 조선군의 훈련을 맡았고 울산성 전투에도 참가했던 여여문(呂汝文, 일본 이름은 요여문要汝文)[18]과 함박 김씨(咸博 金氏)의 시조인 김성인(金誠仁, 일본 이름은 사여모沙汝某)[19]이 유명하다.#

이런 왜인 마을은 시간이 지나자 명나라 유민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압박을 받아 조선 사회에 차츰 동화되어 사라지게 된다. 아마 조선인과의 통혼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군인이었기에 남성이었을 테고 자식을 남기려면 조선인들과 결혼했어야 했을 테니.[20] 적어도 항왜의 자손 대에 이르면 정상적인 결혼이 일상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조선 정부는 외부 이민자들이 자기들끼리 풍속을 유지하는 건 모른 척하고 봐줄 생각이 있어도 세금을 내지 않거나 독신으로 사는 것은 그닥 봐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살고 싶으면 어차피 조선인이 되어야 했다.[21] 따라서 지금에 와선 당시 항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집단은 한국에 없다. 그리고 반대로 임진왜란 당시 건너간 조선인 커뮤니티도 일본이 급격히 중앙 집권화를 겪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사실상 사라졌다. 중세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경우가 상당히 흔했다. 프랑스의 예를 들면 전쟁으로 치고박으면서 영국계나 독일계 혈통도 섞인 데다 노르망디에서 왕과 거래해서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농사지을 땅을 받은 노르만족이 대표적이다.

5. 목록

  • 고효내
  • 기오질기
  • 김성인
  • 김충선
  • 난여문[22]
  • 노고여문
  • 신지로
  • 마고시로[23]
  • 사고여무
  • 사백구
  • 사쇄문
  • 산여문[24]
  • 서아지
  • 신시로
  • 야시로
  • 야여문[25]
  • 오카모토 에치고
  • 요질기
  • 여문연기
  • 여여문
  • 염지
  • 주질지(酒叱只): 가토 기요마사를 암살하자는 계책을 낸 자
  • 준사
  • 첨지
  • 평구로[26]
  • 학사이(鶴沙伊): 주질지와 더불어 가토 기요마사를 암살하자는 계책을 낸 자

6. 관련 문서


[1] 가장 유명한 항왜로,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임진왜란 부분에 짧막하게 항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대표적인 인물로 이름이 올라와 있다.[2] 순왜는 일본군에 협력한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표적으로 국경인이 있다. 다만 두 개념이 배신이라는 것만 빼고 정반대냐면 꼭 그렇진 않다. 항왜는 대다수가 자발적이었겠지만 순왜는 대다수가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때문에 조정에서도 순왜들에게 다시 투항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3]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많은 아시가루가 처자식도 없고 가족도 거의 보지 못한채로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었다고 한다.[4] 대표적 예가 아시카가 쇼군가와 오다 노부나가를 동시에 섬긴 아케치 미츠히데. 실제로 노부나가의 죽음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바로 미츠히데의 배신이었다.[5] 물론 이런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한 명의 주군을 오래 섬긴 무사는 '후다이'라고 해서 가문의 중신으로 대접받긴 했다. 다만 이 정도 대우를 받으려면 단순히 오래 섬긴 정도가 아니라 주군과 한 배를 탄 수준이어야 했다.[6] 특히 다이묘급 무사가 그랬다간 더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기 쉽다. 상술했듯 아시카가 쇼군가와 오다 노부나가를 동시에 섬기다가 종국에는 노부나가를 배신했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대표적.[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참 가신 토리이 모토타다의 경우 이에야스가 모토타다의 공적을 치하하며 간죠를 써 주겠다고 하자 모토타다가 "그런 건 다른 가문으로 옮겨갈 때나 필요한 거니 저에겐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이런 부분을 잘 보여준다.[8] 이는 다이묘급도 마찬가지라서 히데요시의 사망과 동시에 조선에서 무조건 빤스런하는 이유가 되었다.[9] 김충선은 히데요시의 측근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이묘 휘하 고위급 무사들 중 어느 정도 입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상식이 있다면 아무에게나 자기 선봉 부대를 맡길 리가 없으니.[10] 본문에도 일본과 중앙집권제인 조선의 다른 모습이 두드러지며 어떻게 어린 아이가 관직을 가질수 있는지 놀라워하는 선조의 모습도 보인다.[11] 대표적인 항왜 출신 인물 가운데 한 명인 김충선이 일본 학자들로부터 존재를 의심받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김충선이 투항했다고 전하는 시점에서는 조선 조정에서 항왜들을 첩자로 간주하고 투항하는 족족 죽이고 있었는데 아무리 '조선에서 받드는 중화의 문물을 사모해서'라는 이유가 있다고 한들 가면 일단 죽일 게 뻔한데 쉽사리 항복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 다만 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서 김충선의 이름이 실제로 언급되고 해당 기록들을 믿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묻혔다. 다만 아직 일본어 위키백과 같은 곳에서는 그 무렵에 김충선으로 개명한 항왜가 실존은 했을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이름 있는 위치는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12] 아닌 게 아니라 명나라에서 온 지원군은 조선과는 달리 초기부터 항왜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13] 물론 언급했다시피 일본인이라는 국가적 공동체 의식은 희박했으므로 그냥 자기네들이 살던 곳의 풍습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14] 아시가루가 무사계급이 아닌 병졸이라고는 하지만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이 틈만 나면 일어났던 게 일본이었고, 아무리 창이나 활, 조총을 장비한 아시가루라도 살아남아 진급하고 싶으면 반드시 카타나를 기본으로 익혀야했다. 즉 각 항왜 개개인이 아시가루 다이쇼~코가시라 급이었단 것. 훗날 검성이라 불린 미야모토 무사시 역시 아시가루 출신이다.[15] 당시 조정에서 동래 왜인들을 통해 조정의 상태가 일본에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쓰지 않았다고도 한다.[16] 다만 상인이라고 얕보다간 큰 코 다치는 경우가 흔했다. 전근대의 치안을 생각하면 자기 물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무력은 필요했다. 이 점은 조선 상인도 유럽 상인도 같긴 하지만. 게다가 오히려 약탈로 악명높은 바이킹이나 왜구들의 상당수는 상인이기도 했다.[17] 다만 이는 일본인 병사가 전투종족이라기보다는 조선이 오랜 평화로 군사력이 약화된 데다가 일본이 100년동안 전국시대로 강해진 군사력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길어지자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근접전에서 무조건 밀리지는 않았으며, 정유재란 때는 오히려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근접전에서 대등하게 싸우기까지 했다. 다만 다른 요소 때문에 조선군이 졸전을 펼친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18] 일본어로는 '요에몬'에 가까운 발음으로 추정된다.[19] 일본어로는 '사에몬'에 가까운 발음으로 추정된다.[20] 비슷하게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도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을 때 대부분이 남성이기에 유럽 여성이 이민 오지 않았을 때는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하였다. 이들의 후손이 바로 현대의 메스티소이다.[21] 이건 임진왜란 후에 남은 명나라 장병들이나 명나라 망하고 조선으로 망명한 중원 대륙 유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당시 조선에서 현재 차이나타운과 비슷한 마을을 세우고 자기네 풍습을 유지하며 살았는데, 세금이나 군역 없이 재조지은 운운하며 배째라 하다가 숙종 때 와서 모조리 정리되고 만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망명한 만주족들과 친청 성향 한족들은 이런 식으로 강제 동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선총독부가 이들에게 딱히 어떤 지원을 해준 것도 아니라서 이들은 조선 땅에서 항왜들이나 명나라 유민들보다도 더욱 어려운 삶을 살다가 결국 조선인에 동화되어 사라졌다.[22] 일본명 난에몬.[23] 난중일기에 의하면 항복하였다가 도망하던 중 붙들려 항왜들 앞에서 참수당한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은 두려운 빛이라곤 없이 죽으러 나왔다며 "참으로 독하다"라고 기록했다.[24] 일본명 산에몬.[25] 일본명 야에몬.[26] 일본명 헤이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