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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
본관 | 전주 이씨[1] |
자 | 입부(立夫) |
시호 | 무의공(武毅公) |
출생 | 1554년(명종 9년) 11월 27일 |
사망 | 1611년(광해군 3년) 9월 1일 (향년 56세) |
부모 | 부친 -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 ? ~ 1588) 모친 - 안동 김씨 김구수(金龜壽)의 딸 |
형제자매 | 5남 중 막내 형 - 이순인(李純仁), 이순의(李純義), 이순례(李純禮), 이순지(李純智) |
부인 | 파평 윤씨 - 윤천수(尹天壽)의 딸 |
자녀 | 2남 1녀 장남 - 완흥군(完興君) 이탁(李王+乇, 1578 ~ 1608) 차남 - 완산군(完山君) 이숙(李琡, 1579 ~ 1651) 서녀 - 남이공(南以恭)의 측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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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2], 자는 입부(立夫). 시호는 무의공(武毅公), 봉호는 완천군(完川君)이다.충무공 이순신과 한글 발음이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르고 본관도 다르다. 충무공 이순신은 덕수 이씨다.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였는데 흔하지도 않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한글 한정)이 모두 동시대[3]의 무신이며 심지어 충무공과 사적으로도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심지어 전시에도 같은 부대에서 상관과 부하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4] 그야말로 엄청난 인연이다. 그래서 둘을 구별할 때는 보통 시호인 '충무공'과 '무의공'으로, 또는 자를 앞에 붙인 '여해 이순신'과 '입부 이순신'으로 구분한다. 다만 충무공 쪽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5] 일반적으로는 충무공은 그냥 '이순신'이라 칭하고 이쪽에 시호를 넣어서 구분한다. 비슷한 예시가 초한쟁패기에도 있었는데, 바로 회음후 한신과 한왕 한신이다.[6]
2. 생애
입부 이순신은 1554년 경기도 금천현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서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인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과 안동 김씨 성균관 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 부인 김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나이는 이억기보다 7살 많지만 항렬상으론 이억기가 할아버지뻘[7]이 된다. 선조와는 14촌 형제간이다.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판관·의주판관 등을 거쳐 잠시 귀향했다가 혜산진 병마첨절제사(惠山鎭兵馬僉節制使:종3품)가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방답진 수군첨절제사(종3품)였으며, 칠천량 해전 이후에는 도망간 배설의 후임으로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정3품)로 승진하였다. 전쟁 기간 내내 충무공 휘하에서 수군 지휘관으로 일했다.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9번을 선봉으로, 1번을 중군으로 임해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이 특별히 그의 군공을 적시하여 포상을 주라고 조정에 올렸을 정도였다. 이후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전사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부대를 이끌고 개선하여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그 공으로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천거받았다.
1599년[8] 1월 수사 직에서 물러나 포도대장 겸 도총관 총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년 뒤 충청 수사 · 수원 부사 · 경상 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지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파직되었으며, 이후 다시 복직하여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1604년부터 전라 방어사·수원 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등을 역임하였고 1607년에는 완천군(完川君)에 봉직되었다. 이후 전라 병마 절도사,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11년[9] 9월 2일에 58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10]에 장사되었다. 인조 때 증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679년[11]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
보통 기록에서 이순신의 무예가 뛰어났다는 이야기는 바로 무의공 이순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무공도 보통 이상의 무예이기는 했지만 무의공은 무예도 우수하고 충무공을 보좌해 여러 가지 전공을 세운 능력있는 장수라고 볼 수 있다. 나름대로 준수한 장수였지만 이름이 같은 상관의 명성이 워낙 높은지라 초라해보이는 인물. 다만 오히려 이름이 같아서 나대용 정도를 제외한 충무공의 부관 중에는 제법 유명한 편이다.
다만 청렴한 충무공과 달리 무의공은 청렴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는데,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뇌물 수수 혐의로 탄핵받아 사임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뇌물 수수 및 부정을 저질러 여러 번 탄핵받은 기록이 있어서 본인의 명성에 흠이 많이 있는 편. 대신 능력은 출중해서인지, 복직은 계속 하며 죽을때까지 부려졌다.
충무공과는 공적으로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였으나 사적으로는 허물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그래서 2명의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날은 같이 승경도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면서 같이 놀았다. 특히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하게 되자 무의공이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적힐 정도. 아무래도 본인들이 흔치 않은 이름의 동명이인 겸 무관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만났다는 우연에 대한 의식, 그로 인한 친밀감이 상당히 깊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와 별개로 리더십이 뛰어나진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선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7일 무오 6번째기사에서 이덕형이 도독(진린)이 주장(이순신)이 전사한 뒤 입부 이순신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장수와 병사들이 복종하지 않아 사태가 매우 걱정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묘는 광명시에 있는 서독산에 위치하고 있다.[12] 고속철도 광명역 근처이다. 향토 유적 제4호이며, 산 아래에서도 잘 보인다.
3. 기타
- 2000년에 취역한 대한민국 해군의 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은 무의공 이순신 제독의 이름을 따서 이순신함(SS-068)으로 명명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이름을 딴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초도함인 충무공이순신함(DDH-975) 은 3년 뒤에 취역하였는데, 동명이인의 이름이 붙여진 함정이 이미 있다보니 구분을 위해 시호까지 넣어 충무공이순신함(DDH-975)이 되었다.[13]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이순신함(SS-068)의 함명을 무의공 이순신 제독이 아닌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의외로 흔하다.[14]
- 충무공 이순신과 무의공 이순신과의 비슷한 케이스가 4세기 뒤 대한민국에 2번이나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는 5.16 군사정변의 주동자이자 경호실장을 역임한 박종규(朴鐘圭)와 하나회 관련 인물인 박종규(朴琮圭)이고, 다른 하나는 나란히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는 김종호(金悰鎬)와 김종호(金鍾浩)이다.
4. 대중매체
- 1962년 개봉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나일이 연기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전현[16]이 연기했다. 등장 시 이름 옆에 한자 표기를 같이 하거나 위의 사진처럼 자인 '입부'를 병기하여[17] 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임을 나타냈다. (드라마 등장 장면)
실제로는 뇌물 수수 혐의를 받았던 것과 달리 굉장히 원칙적이고 깐깐한 것으로 그려지며[18] 전라 좌수영의 재정을 맡아 관리했는데 그 덕에 "예산"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세무사'라는 별명도 얻고 <불멸의 이순신 스페셜>에서 "예산"이라는 대사만 주욱 모아 편집한 장면이 있을 정도. 극 막바지(명량해전 끝난 후)에 경상 우수사로 승진했으나 신병 접수를 맡는 등 승차를 한 데 비해 어째 맡는 일은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19] - 웹툰 <포천>에서는 무예가 뛰어나나 교만하여 여러 번 탄핵된 적이 있다고 설명되었다. 주인공 이시경도 그의 점을 봐주면서 속으로 '큰 인물이 될 상이지만 오만방자한 성격 때문에 발목을 잡을 것'이라 하였다.
- 웹툰 <조선왕조실톡> 28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같이 활을 쏘는 것은 무의공이 충무공을 1:1 과외로 가르친 것으로 해석되었다.
- 2017년 6월 18일 MBC 예능 프로그램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무의공 이순신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이순신 3부작 중 한산: 용의 출현, 명량에서는 조연도 아니고 얼굴도 비추지 못했다. 관객이 등장인물들을 짧은 시간에 전부 파악해야 하는 영화 작품에서는 충무공과 동명이인인 탓에 아무래도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등장하지만, 이순신이란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자인 '입부'로 지칭된다. 배우는 이성욱. 관객의 혼란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20]
- 근육조선2부에서 주인공 유성룡이 유럽에 파견될때 함께 갔다.
[1] 양녕대군파 7세손. 양녕대군의 6대손이다.[2] 즉, 왕족의 후예이며,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7대손으로 선조와 같은 항렬이다. 참고로 조선 후기 당시에는 왕족이 워낙 귀했기 때문에 먼 친척까지 가까스로 찾아 왕위에 오른 대표적인 사례가 고종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가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7대손이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이미 종친에서 벗어날 만큼 먼 방계지만 왕위 계승 가능성과는 별개로 생각보다 그리 먼 왕족은 아니었던 셈이다.[3] 나이차이가 9살이니 또래까지는 아니지만 함께 활동했고, 절친한 선후배로 난중일기에도 두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지내던 내용이 적시되어있다.[4] 특히 노량해전이 레전드인데,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왜군의 조총탄에 맞아 쓰러진 위기의 상황에서, 근처에 있던 무의공 이순신이 바로 부대 지휘를 맡아 승리했다. 상관의 죽음 앞에 그의 유지(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를 이어 부대의 승리를 바친 엄청난 인연.[5] 무의공은 보통 '충무공의 부하였던 동명이인' 정도로 충무공과 연결지어 아는 사람들이 많다.[6] 이쪽은 서로 같은 세력 소속이기는 해도 주종관계가 아니었지만 대신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았다. 그래서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작가가 헷갈렸는지 이 2명을 합쳐서 캐릭터를 만들었고, 그외에도 회음후 한신이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착각되는 일도 많다. 대표적으로 문정후의 만화 초한지.[7] 이억기는 정종의 10남 덕천군(德泉君)의 4대손으로 심주군(沁洲君) 이연손(連孫)의 아들이다.[8] 선조 32년[9] 광해군 3년[10] 현 광명시 일직동[11] 숙종 6년[12] 실제로 그의 거처도 당시 기준으로 경기도 금천현 서면 일직리였다. 이 지역 일대가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시흥시 서면을 거쳐 지금의 광명시 일직동으로 들어간 셈.[13] 외국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함명으로 쓰면서 본명 뿐만 아니라 작위나 계급, 직책 등 다른 호칭까지 넣는 경우를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지만, 지명만을 써 오다가 한국형 구축함 시리즈에서 처음 인명을 함명에 쓰기 시작한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14] 상술한 대한민국 해군 함정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일반인은 거의 대부분 이를 착각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DDH-II)이 취역하기 전까지는...[15] 양녕대군의 2번째 서자 장평도정까지는 조상이 같고 그 아들 대에서 갈린다. 이승만의 9대조는 이경조(李慶祚)이다.[16]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아들 금강 역,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을 맡았다. 무인시대 차기작이 불멸의 이순신이니 사실상 조상과 후손을 연이어 연기한 셈.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조준 역.[17] '무의공'이란 시호는 사후 1679년에 받았기에 '무의공'이라고 병기하기에는 작중에 어색한 느낌이 있다.[18] 뇌물 문제는 되려 김완이 가져갔다. 하지만 그 역시도 충무공이 전라 좌수영에 부임한 초기에 순시를 돌았을 때 양반 자제들의 대립(代立: 다른 사람을 대신해 군역을 서는 행위)을 눈 감아줬기 때문에 문책을 받은 바 있다. 이외에도 선조 31년. 33년 등의 탄핵문에서는 "본디 탐욕스럽다."라고 명시한 점과 더불어 부임하는 곳마다 물건을 빼앗는다는 것을 명시한 것을 볼 때 잘못된 고증. 오히려 후술할 예산 타령과 더불어 당사자가 횡령하고 있어서 예산이 부족한게 아니냐는 평도 있다.[19] 애초 <불멸의 이순신> 후반부(정유재란-칠천량 해전)에 가면 충무공을 포함하여 나오는 조선 수군의 장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충무공을 제외하면 권준, 무의공, 김완, 우치적, 이영남, 송희립, 나대용, 황세득이 전부.[20] 비슷한 사례로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가토 요시아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해 ‘가토’로만 불린 탓에 오히려 더 네임드인 가토 기요마사를 ‘가토’가 아닌 ‘기요마사’로만 지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