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別技軍. 1881년 설립된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오군영에서 지원자를 받았으며 무위영(武衛營)[1] 소속이었다. 첫 인원은 80명이며 훈련은 일본 육군 공병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2] 가 맡았다. 별기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부국강병을 위한 엘리트들로 육성하려 하였고 친위세력에 가까웠다.
당연히 별기군은 기존의 조선군에 비해 급료나 피복은 물론 특별 보너스 등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았고 이런 차별 대우는 이듬해 일어난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 구성 및 역사
계급은 정령관(正領官), 좌부령관(左副領官), 우부령관(右副領官), 참령관(參領官)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오늘날의 영관에 해당한다. 정령관은 대령, 좌부령관과 우부령관은 중령, 참령관은 소령에 상당한다. 교련소의 당상(오늘날의 훈련소장)은 민영익이었다. 당시 겨우 스물 한살이었다. 생도들은 참위(參尉)로 임관하는데 이는 소위에 해당하는 계급이다.훈련은 1881년 5월 9일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3]에서 이뤄졌으며 곧 하도감(下都監)[4]으로 옮겨 훈련했다. 그 해 8월에는 고종의 참관 아래 사열을 하기도 했다. 호리모토 소위는 자신들의 육군을 따라 육군사관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
임오군란 때 훈련 교관인 호리모토 소위는 하도감 훈련장에서 군민들에게 살해당하고 별기군은 폐지되어 조선의 중앙군 체계는 친군영체제로 개편된다. 임오군란 이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將禦營)은 해체되었으나 새로이 친군영[6]이 설치되면서 별기군이 받던 서양식 군사훈련이 중앙군 전체로 확대되었다.
군사 중 장건한 자들에게 일본의 무예를 배우게 해 왜별기(倭別技)라 부르니 그 이름부터가 해괴합니다. 무가(武家) 자제와 유생 소년들이 윗도리를 벗어젖힌 채 열을 지어 서서 오랑캐 상놈들에게 머리 숙여 경례하게 해 수치심을 품게 하니, 이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 좌의정 송근수의 상소 중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고 비꼬았다. 당시 일본 공사는 일본 육군 사관의 힘으로 별기군을 만든 것을 수년 간의 권유에 의한 성과라 자평했다. 열강들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조선으로서는 조선책략으로 고조된 러시아에 대한 위협감을 해소해 줄 외세와의 연줄이 필요했고 이때 일본이 도와주겠다고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또한 침략의 야욕을 내비치는 외세에 지나지 않았기에 조선 왕실은 물론 조선인들은 별기군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일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양반 사관생도들이 사회에서의 지위를 믿고 군대 내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특히 참령관을 맡은 우범선[7]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도들이 너라고 부르는 하극상을 당했다. 이를 제지할 힘이 없었던 우범선은 교관을 그만두고 만다. 신분에 관계 없이 누구라도 높은 계급에 오를 수 있고 그 계급에 맞춰 상명하복하는 근대적인 군 체제를 양반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건 신식 군대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공직을 무시하고 나이나 집안 배경을 내세워 상급자를 함부로 대하면 엄히 다스렸다. 단적으로 별기군과 대비되는 구식군인 집단의 대표격이었던 훈련도감만 하더라도 최초로 편성될 당시 천민 출신들이 자신들의 상전이었던 이들을 후임으로 배치되도록 청탁한 뒤에 괴롭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즉, 이러한 하극상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국가기강이 많이 해이해졌다는 뜻이 된다. 흔히 알려진대로 생도가 집안 노비 등에 업혀 훈련받았다느니 훈련장에 노비들이 요강 들고 따라왔다느니 하는 소문은 아마 여기에 기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오군란 이후 한성의 치안을 맡게 된 청군에 의해 청 별기군이 세워지기도 했다. 기존의 별기군 시절에 교관을 관둔 우범선이 다시 교관으로 초빙되었고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육군 장교를 파견해 훈련을 시행하기도 했다. 규모는 약 500명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검열 행사를 하던 중에 국왕 대신에 사열을 나온 문관이 거들먹거리며 담배를 피워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상술했듯 임오군란 이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將禦營)이 해체된 이후 친군영(親軍營)이 새로 설치되었는데, 다섯 개의 군영 중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이 청군에 의해 청군식 교리로 훈련받았다. 일본군이 일본식 군사 교리로 훈련시킨 무위영 소속 별기군이나 친군 전영(前營)과 후영(後營)이 왜(倭)별기로 불려 이들은 청(淸)별기라고 불렸다. 왜별기와는 달리 청별기는 깃과 소매에 붉은 가장자리 장식이 있는 군청색 덧옷 상의와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바지를 입었으며, 신발은 면 신발이나 짚신이었다. 여름에는 하얀 바지를 착용하기도 했다.친군영 청별기의 사진[8]
임오군란 직전에는 사관 140명, 병졸 300여 명으로 약 440명의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식소총은 일본에서 도입한 스나이더 엔필드를 사용했다. 이들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군사제도가 옛 군영체제로 회귀하면서 모두 오군문의 본대로 되돌아갔다. 13년 뒤 을미개혁에서 이들 중 일부는 조선군 훈련대와 시위대에 포함되었다.
3. 여담
흑백 사진만 남아 있는지라 사진만으로는 군복의 색을 알 수 없지만, 초록색이었다고 한다.4. 관련 문서
[1]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이 통폐합된 군영으로 임오군란 이후 해체되었다.[2] (1848년 2월 7일~1882년 7월 23일) 당시 주조선 일본 공사관의 무관이었다. 토사 번 (현:고치 현) 출신으로 1875년 강화도 조약 이후에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 일본공사관의 호위로 한성에서 근무하였고 조선 정부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지도했으나 1882년 7월 23일 발생한 임오군란 당시 일본군을 이끌고 진압작전에 나섰으나 살해되었다. 1885년 중위로 1계급 추서로 특진했으며 1907년에는 정 5위로 추증받았다.[3] 오늘날의 서대문구 천연동에 해당한다.[4] 오늘날의 서울 사대부고 자리[5] 놀랍겠지만 이 시기의 일본제국의 육군은 2차세계대전에서 보인 근성론이나 정신력을 운운하지 않고 독일식으로 배운 장교들이며 판단력이 지극히 정상적인 군대였다.[6] 일본군에게 훈련을 받은 친군 전후영, 청군에게 훈련을 받은 친군 좌우영, 조선의 전통교리로 훈련받은 별영 총 다섯 개의 친군영이 중앙군으로 기능하였다.[7] 우장춘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사람. 을미사변 당시 조선군 훈련대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일본과 협력하여 명성황후 살해에 일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하다.[8] 퍼시벌 로웰이 찍은 사진이다.